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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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총이야기
1권-주은총이야기-서막
2권-아달랴
3권-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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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있는순복음 교회/ 주은총 목사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
요한복음 3:1~13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왜 예수를 믿었을까요? /과연, 무엇 때문에 믿었을까요?
정답은 요한복음 2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표적은, /기적과 같은 말입니다. /이적이라고도 하죠. 예수님이 기적을 보이고, /이적을 보이는 것을 보고서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않았다”는 말은, “믿고 맡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커먼 속을 훤히 아십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의 속을 아십니다. 얼마나 시커멓게 보였으면, 믿고 맡기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시커멓고, 변덕스러운지, 예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변덕스럽습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이란, 자신들의 /계산과 /욕심에 기인한 /‘일시적 동의’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토대 위에서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그런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죠.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명색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들이, 예수님이 죽고나서, 다시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믿었다고 그럽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의 /기적, /표적을 목격할 때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려도 자신만은 주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호언장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표적과 기적을 보니,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그때, /그 결정적이 순간에, /그들은, 주님을 배신하지요. 자기들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예수님이 아니거든요. 지금까지, 기적을 일으키고, 표적을 보여주셨던, 그런 예수님이 아니거든요.
이제, 예수는, 자신들의 이익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무익한 존재로, /계산되고, /파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부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자기들의 생각과 욕구를 숭상하는, ‘자기숭배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거든요.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믿음이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속을 아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
/믿음은 자기 강화가 아니라, /부단한 자기 부정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부인하고, /자기를 없애는 것입니다.
/믿음은 여건에 따라 가변적이지 않고, /어떤 여건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적입니다. /이럴 때는 믿고, /저럴 때는 배신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주장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이죠.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생각, 내 뜻대로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장정만 해도, /60만명이 넘었습니다. 그 60만명의 장정들 속에,
리더로 세울만한 제목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한사코, 하나님은 저 멀리, 미디안 광야에 있는 모세를 리더자로 세우셨습니다. 나이가 80이나 된, /기력도 없고, /실력도 없는, /노인네 모세를 리더자로 세웠습니다.
왜요?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격변하는 상황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가변적이 않고, /불변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믿고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왕]을 버리시고, 왜, 하필, 저 베들레헴 촌동네, 양치기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셨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상황에 순종하는, 불변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믿고 맡기셨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노라 고백하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하고 돌아섰던 제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도들이 될 수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순종하고, /어떤 격변하는 악한 상황 속에서도, /순종하는 믿음을 보였을 때, 드디어, 주님께서 송두리째 제자들을 믿고, 의탁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이시간, 과연, 우리는, 주님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인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문 좁은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오늘, (요3장)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누구이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왜, 이 시점에, 등장하게 되는지, 우리가 알아야,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 “사람”이라는 단어를 한사코 붙입니까? 바로 앞 절에, ‘사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앞 절에서, ‘사람’이란 어떤 존재였습니까? 예수님이 믿지 못해서, 의탁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속이 어찌나 시커멓고, 변덕스러운지, 아무것도 믿고 맡길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의 실체입니다.
바로, 이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이죠.
그가 왜 예수님께 왔을까요?
니고데모 & 예수님의 대화 - 요한복음 3장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기적들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 하매 <요한 복음 3:2>
기적을 보고 온 것 입니다. 2장 말미에 있었던 이야기 역시 기적을 보고 쫓아온 인간들을 예수님이 믿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이에 이어져 기적을 보고 쫓아온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죠. 그런데, 본문이 얘기하는 ‘니고데모’에 대한 묘사를 잘 보면 ‘니고데모’는 세상이 얘기한 모든 힘이라고 하는 것을 갖추고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엄친아’였죠.
최고의 조건을 갖춘 니고데모는 먼저,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전심을 다해 율법을 연구하고 목숨을 걸고 도덕적인 깨끗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이죠. 바울의 간증이 생각나시나요? 사도바울은 역시, 자기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라고 소개하며 율법에 의로 흠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니고데모 역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를 보고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못 간다고 말씀 하시죠.
‘니고데모’는 부자이자 명문가 사람이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나 요아킴-예레미아스의 책을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100년 전부터 성전이 파괴되는 AD 70년까지 ‘니고데모’의 가문이 얼마나 유명한 가문인지 자세히 나옵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때, 몰약과 침향 100근을 ‘니고데모’가 갖고 오는데 몰약과 침향은 당시에 엄청나게 비싼 물품이었습니다. 그의 경제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백성들을 정복한 자” /“백성들의 지도자” 이런 뜻입니다.
이름 자체가, 백성을 대표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당시 사람들이 흔히 쓰던, ‘아람어’ 이름이 아닙니다. 이 이름은 ‘헬라어 이름’입니다.
당시 살던 사람들 중 유대 문화와 헬라 문화를 함께 접할 수 있었던 소수의 상류층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당시 학문의 최고로 인정 받았던 헬라 교육을 철저히 시키며 히브리 이름과 헬라 이름을 함께 지어주었습니다. 마치 요즘 한글 이름과 영어 이름을 갖고 있듯이요.
오늘날로 말하면, 해외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온 사람입니다. 그냥 장로가 아니라, 석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그런 대단히 많이 배운, 그런 학식있는 신앙인을 대표하는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관원이었죠. 3장 1절에 치리자, 관원이라고 번역된 아르콘 (ἄρχων)이라는 단어는 원래 통치자, 왕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사람들은 이 단어를 산헤드린 공회원을 지칭할 때 썼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 지도자 71명이 모여서 입법, 사법, 행정에 권세를 휘두르던 지금으로 치면 국회의원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일부러 ‘니고데모’라는 이 모든 것을 가진 자를 발탁하고 등장시킨 것입니다.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대표하는 [니고데모]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죠. 실로, 종교적으로나, 학식적으로나, 세상적으로나, 실로 대단하고, 완벽한 사람입니다.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그런 사람이, 한밤중에 예수께 찾아왔습니다. 뭣이 부끄럽고, 뭐가 떳떳하지 못해서, 밤중에 찾아옵니까.
예수는, 당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알기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무학자 였고, /촌놈이었습니다.
그런 예수께, 이 대단한 사람이, 찾아온 겁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교육과 /정치와 /문화와 /종교에서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몰래,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경은, [니고데모]가 예수께 나아온 시간을, “밤”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니고데모]와 “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왜 성경은, [니고데모]와 밤을 연결하고 있습니까?
요한 복음에서는 밤 혹은 어두움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는 그런 상태,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나 악의 영향아래 있는 것을 밤 혹은 어두움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떠났을 때, 일부러 그가 나간 때가 밤이라고 기록 하는 것이죠.
요한 복음은 ‘니고데모’가 밤에 왔다고 밝히는 것은 세상이 빛으로 여기는 소망으로 여기는 세상적인 힘이 결코 빛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표적을 봤고, 세상의 힘을 모두 소유한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가 밤이라는 것을 밝힘으로 그런 것이 구원과 상관관계가 없고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죠.
‘믿음의 사건’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만남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세계가, 서로 맞닥뜨려지는 신비하고 놀라운 ‘믿음과 구원의 사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내 자신을, 예수님 앞으로 가져가는 것, 그리고, 그분 앞에서, 완전히 알몸을 드러내어, 내 참혹한 참상을 다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2) “그가 밤에 예수께 왔다”고 했을 때, “예수께” 라는 말에도, 이 모든 역사가 녹아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는, 예수를 향한 ‘방향’과, 예수가 있는 ‘장소’를 아주 강하게 드러내는, 전치사가 사용되었죠.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예수님의 삶의 현장으로,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으로, [니고데모]가 장소를 옮겼다는 뜻입니다.
어둠의 장소에서, 빛의 세계로 [니고데모]는, 장소 이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은, /부정과 /실패와 /낙망과 /좌절과/어둠이,
/소망과 /생명의 빛을 찾아왔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가 머물러 있는 그 자리에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자리에서, 어서 속히 일어나서, 주의 영광의 빛이 가득한, /빛 가운데로, /그리스도 안으로, /예수의 삶의 현장으로, 자리를 이동해야 하죠. 참된 빛이신 예수앞으로 [에르코마이]하시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그 지식을 통해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신기한 표적들도 목격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너 거듭 났니?”라고 여쭤보십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구원의 조건은 성령으로 거듭났느냐의 여부입니다. 예수님은 조건이나 행동, 환경, 미덕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아니냐만을 보십니다.
‘니고데모’는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이며 할례를 받았고, 종교 행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목숨 걸고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얘기하죠.
이 험한 세상 나 살아갈 동안
이 험한 세상 나 살아갈 동안 내 주님가신 길 걸으며
내 주님을 찬양해
십자가 보혈 날 구한 그사랑 나 매일 찬송을 드려도
늘 부족한 것 뿐이니
나 호흡있는 동안에 나 생명있는 동안에
나 주를 찬양하리라 내게 생명 주신 주님을
내 작은 손 불 밝혀들고서
이 세상 다시 오시는 내 주님을 맞으리
내 무거운짐 다 벗겨주시고
그 아름다운 그 면류관 날 위해 예비하시니
나 호흡있는 동안에 나 생명있는 동안에
나 주를 사랑하리라 내게 생명주신 주님을
나 호흡있는 동안에 나 생명있는 동안에
나 주를 사랑하리라 내게 생명주신 주님을
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가 <거듭남>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단정짓지만 사실 당시에는 거듭남에 대한 개념이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이 유대교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이 되는 의식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기도, 희생 제사 그리고 세례를 통해서 개종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때 유대인들은 개종한 이방인을 가리켜 거듭난 자, 새로 출생한 자라고 불렀고 그에게 새로 태어났다고 해서 갓난 아이들이 먹는 우유를 먹이기도 하였습니다.
즉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거듭남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왜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나냐고 물어봤을까요?
‘니고데모’는 그런 가짜 거듭남을 무수히 많이 보아왔던 사람 입니다. 새로 태어났다는 사람들의 삶이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기에 ‘니고데모’는 이것은 거듭남이 아닌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거듭났다는 개념과 실제로 거듭났다고 한 사람들의 모습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죠. “이건 아니야! 어떻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이게 거듭난거지?” 랍비요, 율법학자인 그에게는 많은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거듭나라는 말씀에... 진짜 어이없는 질문을 하죠. 그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갑니까?"라고 물어봅니다.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
예수님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라고???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간다고” 예수님도 꾸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네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너로 알게 한 것이다라고 영의 역사를 알려 주셨습니다.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거듭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여기에 아노뗀 (ἄνωθεν)은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번째는 “다시”라는 의미 입니다. 두번째는 “위로 부터”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이 아노뗀 이라는 단어 안에 구원의 기원(하늘로 부터)과 본질(다시 태어나는 것)이 다 들어 있는 것 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창조되는 것이죠. 즉 거듭남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게 된 동일한 형식과 원천과 방법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으신 그대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생겼나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하나님이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인간이 탄생했습니다. 여기에 생기 혹은 생명의 숨은 성령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흙이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해서 사람이 된게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흙을 사람으로 만드신 것 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면, 그 흙에 생기 즉 성령을 불어 넣어 사람으로 만드셨으며 거듭 날 때도 동일하게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이란 단어는 히브리 문학의 반복 기법입니다. 히브리 문학은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반복해서 그 의미를 강조하는 기법이 있는데, 카이(καὶ)라는 접속사는 <그리고> 라는 1차적인 의미가 있지만 <동격>의 접속사로써도 쓰입니다. 그래서 카이(καὶ)를 가운데 두고 물과 성령이 서로를 강조하고 있는 것 입니다.
물 즉 성령 이라고 번역하는게 더 가까운 번역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의 방법으로 제시하신 물 즉 성령에 에 관하여 요한복음 7장 37-39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더라 <요한복음 7:37~39>
요한은 이곳에서 친절하게 물이 성령임을 설명해 줍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곧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이죠.
거듭남은 하나님의 재창조입니다
밤, 흑암, 물, 수면, 성령, 하나님의 신…
생각나는 것이 없나요? 바로,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입니다. 즉 거듭남의 이야기는 바로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에서 힌트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성령의 비가 내리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성령의 비가 내리네 'Let It Rain' - 다윗의 장막
성령의 비가 내리네 하늘의 문을 여소서
너희는 시온에서 온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교회를 거룩히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와 젖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여호와께 수중드는 제사장들은
양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하지 마옵소서 주의 긍휼을
주의 긍휼을
성령의 비가 내리네 하늘의 문을 여소서
주의 성령을 내게 부어주시옵소서 주님이여...
그때의 여호와께서..
그 후에 내가 내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보며
그 때 내가 또 내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리니..
성령의 비가 내리네 하늘의 문을 여소서
성경은 죄인은 하나님의 선물인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선한 행위를 열심히 하고 아무리 열심을 부려서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도,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덕망있고, 존경받는 니고데모는 낮에 찾아 가는 것이 부끄러워서,
아무도 안보는, “밤”에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또, [니고데모]가, ‘밤’시간에 주님을 찾아간 이유를, 우리가 한 가지 더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있죠.
(12: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관원’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자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믿는다고 대놓고, 말 못합니다.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출회를 당한다”는 말은,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유대사회에서 매장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예수를 찾아가는 것을, 사람들이 봤다가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당장, 회당에서 쫒겨나고, 유대사회에서 매장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한순간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목숨까지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니고데모는 변하였습니다. 그후 그가 어떻게 변하였는지 성경의 기록을 살펴볼까요?
우리는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할 때 그가 산헤드린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아마도 예수님을 잡을 권한이 있는) 어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성전 경비병들을 보내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경비병들이 그대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요 7:32-52).
권위 있는 바리새인들이 경비병들을 책망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그분을 면직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요 7:51). 하지만 다른 공회 의원들은 니고데모의 제안을 무례하게 일축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마음을 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니고데모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의 일을 기록한 요한복음 19장에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도와 예수님의 장례를 치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마태복음에는 부자로, 마가복음 15:43에는 공회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50-51에는 그가 의로운 사람이며 예수님에 대한 공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때 니고데모는 장사할 준비를 하는 데 사용할 향품인 몰약과 침향을 갖고 나옵니다. 성경에 기록된 니고데모의 마지막 행동은 그의 신앙 선언이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아니였으면 예수님은 당시의 관습에 의해서 쓰레기장에 버려졌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시체를 가족들이 찾아가지 않으면 그냥 쓰레기장에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당당하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고,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몰약과 침향을 넣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알까봐 전전긍긍 했지만 이제는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 무섭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자고 했을때,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그가 막아섰죠.
거듭난 자들에게는 세상의 핍박과 조롱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나에겐 확고하게 변하지 않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니고데모’ 역시 그에게 있던 가문, 재산, 평판, 권세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 역시 거듭났기 때문이죠.
빌 게이츠 처럼 부자로 살아보고 싶으세요? 명예와 권력을 갖고 싶으세요? ‘니고데모’처럼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고 싶으세요? 지금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시며 무엇을 자랑하고 있나요? 당신의 아파트와 땅, 재산, 건강, 명예, 지식을 자랑하고 계시나요? 아니면 사람들의 비판, 조롱, 손가락질이 두려우신가요? 부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셨다면 이것들과 이별하는 것 입니다.
구원이 최고의 선물이니까요!
주님, 당신이 베풀어 주시는 기적과 이적만을 바라고 쫓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가운데서도 변함없는 신실함을 지켜 낼 수 있는 당신의 부름받은 종이 되게 하옵소서. 주신 소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 내게 하시고 세상에서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나에게 가장 귀한 보배를 모시고 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너 시온아 주를 찬양하여라 너의 입술로 하나님 찬양해
찬양하라 주의 깃발 흔들며 영원히 주를 찬양해
우리는 주님의 택한 백성 하나님의 제사장
만왕의 왕께 찬양하라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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