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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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7/ 나다나엘의 고백 (by 주은총목사와 함께 하는 영성산책)
나다나엘의 고백 요한복음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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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총이야기
1권-주은총이야기-서막
2권-아달랴
3권-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출간예정)
서점에서 전자책으로 절찬리 판매중입니다
꿈이있는 순복음교회/ 주은총목사
나다나엘의 고백
요한복음 1:43~51
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루 월러스라는 사람이 쓴 [벤허]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는 비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냉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친구 한 사람이 "성서에 보면 나사렛 목수인 예수가 33살까지 혼자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예수에 대한 인간적인 로맨스가 있음직하지 않겠는가?
예수에 관한 인간적인 러브스토리를 쓰면 당장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당신은 큰 부자가 될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루 월러스도 무릎을 치면서 동의했죠. 그는 예수의 로맨스를 쓰기 위해서 성경을 읽을수록 예수의 로맨스보다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신 구세주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벤허]의 마지막 장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의 핏방울로 주인공의 누나와 어머니가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는 기적을 씀으로써 예수가 메시야임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발견했고, 또 예수님은 내 책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이 되었다."는 그의 신앙고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친구를 전도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기록되어 있는데 안드레는 자기 형제 베드로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베드로는 빌립을, 빌립은 나다나엘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나다나엘은 12제자중에 한 사람이지만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요한복음에만 찾아볼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기록도 요한복음 1장과 21장에서만 나타나고 있죠. 요한복음외에 다른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는 그의 성인 바돌로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자의 기본 요건 몇 가지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누군가로부터 증거를 받는 일입니다. 제자가 제자 되는 동기는 처음부터 하늘로서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이 먼저이죠. 둘째로 제자의 기본 요건은, 듣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전도를 하고, 그렇게 전해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으로부터 인도함을 받고,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를 인도하며, 또 빌립은 나다나엘을 인도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만남을 통해서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쉬운 예로, 우리가 결혼을 하려고 할 때 서로 상대방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서는 안됩니다.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4-45)
예수와 나다나엘의 만남은 실로 극적이었습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메시아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친구 빌립이 와서 메시야인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되물었죠. 나다나엘은 여느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모세와 여러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나사렛이라는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갈릴리 출신의 선지자는 없다"는 속담까지 있지 않는가요?
예수와 만나지 못한 나다나엘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와 만난 빌립은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빌립은 의심하는 나다나엘을 향해 자신 있게 "와서 보라"고 하였죠.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오지 못하리라”(요 7:41, 52)는 것은 그 당시의 전통이요, 나사렛은 그 중의 한 작은 촌락이어서 구약성경 어디에도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나다나엘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구세주가 될 분이 이런 곳에서 날 수 없다는 결론이었죠.
그때 빌립은 정말 현명했습니다. 그는 간단하게 “와 보라”고 말했죠. 우리가 교회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이론적으로 설복이 되어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논증은 유익을 가져오기보다는 해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개인전도 훈련 때 주의할 사항 가운데 하나가 논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나와 예수를 만나 믿고 안 믿는 것까지 염려할 것이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따졌지만 빌립은 나다나엘과 한마디도 논쟁하지 않았죠. “와 보라.” 빌립의 할 일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주님의 도를 배우고
주님의 길로 행하리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제자(48절)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이스라엘 나라 전역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란 말 그대로 꽃이 피지 않고 열매가 열리는 나무로 그 열매는 맛이 좋아 식용으로 쓰이고 약용으로도 쓰이는 나무죠.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일종의 개인적인 휴식처였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약 4m의 높이로 자라고 가지는 사방으로 7m를 덮죠.
이스라엘은 매우 더운 날씨이지만 건조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늘 아래에 있으면 시원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무 그늘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묵상을 하게 됩니다.
나다나엘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하여 무화과 나무 아래를 찾았습니다. 무화과 나무 그늘은 나다나엘이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빈방을 기도장소로 마련하기도 하죠.
철저하고 규모 있는 기도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제목과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데 실패하고 말죠.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신앙이 깊은 사람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마 나다나엘의 친구들조차 그가 배에 없으면 정원의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죠. 나다나엘은 하나님을 찾는 기도의 사람이니까요.
나다나엘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을 찾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부르심이라는 책을 쓴 「월리암 로」는 “항상 같은 곳에서 기도하라 그 장소를 거룩하게 보존하라. 거기서 다른 일을 더불어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경건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 장소에서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 외에는 다른 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낮과 밤이 바뀌어서 불도 하루종일 켜 있고, 내 영혼의 중심을 잡기조차 힘들 정도로 너무 바쁘고 복잡합니다. 지난 한 주간에 당신의 내면의 평안과 능력을 위해 1주일 168시간 가운데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무능력해서 세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상처투성이인 인생으로 살도록 부르신 게 아니라 우리의 심령 속에서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기름 붓듯 하셔서 우리로 능력있게 살기를 원하시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항상 그 기회를 놓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아이를 키우느라 바쁘고 살아가느라 바쁘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랍니다.
이리 저리 시간에 쫓겨 다니면서, 예수님의 품안에서 잠잠하고 온유하게 평안과 만족을 누리는 영혼을 위한 시간빼기는 힘든 시대죠. 그러나 내 스스로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외적인 모든 도전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안식을 위해 나다나엘이 시간을 내어 무화과나무를 찾아갔듯이 우리 삶에도 나만의 무화과나무 밑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떠밀려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내 삶을 다스리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도 붙잡아 주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만의 무화과 나무 시간을 반드시 회복해야 하죠. 당신의 기도의 자리가 회복되십시오. 누구라도 무화과나무 밑에서 명상하는 시간, 주님을 만나는 시간, 하나님의 안식을 내 영혼에 공급받는 시간이 없이는 결코 영적인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는 차가운 새벽이었소
주님 맘속에 여명 있음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소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나에게 영원한 사랑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빌립의 인도로 자신 앞으로 나아오는 나다나엘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간사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도로스, 안에 미끌미끌하게 달아진 돌멩이나 불순물이 들어있는 곡식과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속적인 면이 강한 육적인 사람이죠.
‘간사하다’ 하면 당신은 누가 떠오르나요? 저는 야곱이 떠오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둘째 아들이죠. 야곱은 이삭이 40세에 결혼하여 60세가 되던 해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창25:26)
야곱은 재산을 모으는 일, 남을 속이는 일, 자식을 낳는 일, 향락을 즐기는 일등 너무 세속주의적이며 육체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적으로만 보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가 있죠.
그는 아름다운 여인 네 명을 아내로 삼았으며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물을 모아 거부가 되었으며 수백 명의 종을 거느리면서 향락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란에 머물러 있는 동안 야곱의 생애는 철저하게 육을 따라 사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삶을 끊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었죠. 그와 그의 가정에는 고통스러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장인과 처남 집과의 갈등, 아내들의 갈등, 아내가 4명이나 되니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배다른 자식들의 갈등, 특히 요셉에 대한 고통,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것들이었습니
다. 야곱은 이 같은 고통을 바로 앞에서 “내가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하죠.(창47:9)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복을 받으려 하던 야곱은 육의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야곱이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노인이 된 이스라엘은 아주 성숙한 영적생활 곧 성화되어진 생애를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죠. 야곱은 지팡이를 의지하면서 걷고 살았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죠. (창 32:28). 얍복강을 건넌 야곱은 벧엘과 하나님을 늘 사모하며 예배하며 살았습니다.(창35:)
예수님께서는 나다니엘이 빌립과 함께 나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하셨죠.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시편 32편 2절 ) 그러자 나다나엘은 놀래서 “어떻게 하여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죠. 그때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너를 보았노라.” 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어 보면, “나는 한 무화과나무 아래 쓰러져 엎드려 정신없이 눈물에 잠겨 있었나이다. 그리고 내 눈에서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그 제물이 주 앞에 상달하였나이다.”라고 적혀 있죠.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새기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심중의 가장 깊은 곳을 통찰하고 계신 것을 발견하였죠.
자기의 심중 깊은 곳을 통찰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나다나엘은 스스로 말했습니다. “오, 나의 기도를 아시는 분이 바로 여기 계시는 구나! 나의 은밀한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소원을, 감히 입 밖에도 내지 못했던 갈망을 아시는 분!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름부음 받은 자다.”
나다나엘은 고백하였습니다.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
예수님은 나다나엘 즉 바돌로매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 1:50).
그 '큰 일'은 다름아닌 예수의 십자가라고 깨달은 바돌로매는 동방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아브디아스의 저서 '사도의 역사'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죠.
바돌로매의 인도 선교
바돌로매는 인도와 아르메니아와 루가오니아와 메소포타미아 및 페르시아 각 지방에서 선교하였습니다. 그는 장발에 수염이 길었으며, 피부는 희고 키는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같은 옷에 보라색 띠를 띠고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하죠.
역사가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헬라 철학자로서 주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판타누스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뜻하지 않게 바돌로매의 소식을 들었죠.
회개한 판타누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동방 여러 나라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움을 겪으며 인도 땅에 이르렀죠. 거기서 판타누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판타누스는 알렉산드리아 총회 본부에 인도 지역 전도 결과에 관해 보고합니다. 예수의 사도 중 한 명인 바돌로매가 이미 인도 사람들에게 전도하였을 뿐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록된 마태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지금도 히브리어 마태복음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 왕 폴리미오의 병든 딸을 고쳐주고, 그들의 우상 숭배가 헛되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왕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바돌로매에게 세례를 받았죠.
그러나 왕위를 빼앗은 폴리미오의 아우 아스티아게스와 우상 숭배자들은 바돌로매를 체포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돌로매를 산 채로 껍질을 벗기고, 아르바노폴리스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주님 앞에 가 나를 맡겼네 진정 기쁜 날이네
삶은 의미 없고 안식 없었네
그러나 이제는 달라 새 삶이 내게 임했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잿빛 생활에 지쳤음을
세상 쾌락을 찾아봤으나 고통뿐이었다네
삶은 의미 없고 안식 없었네
그러나 이제는 달라 새 삶이 내게 임했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그가 내게 와 나를 구했네 진정 기쁜 날이네
나다나엘의 사도로서의 상징은 더러는 무화과 나무이기도 하지만 칼로 살갗을 벗기웠기 때문에 그의 상징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이었습니다.
● 외경 '바돌로매의 질문'
신약 외경 중 '바돌로매의 질문'이라는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 문서에는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바돌로매가 예수에게 여러 가지 궁금한 일을 질문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바돌로매는 주 예수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어디에 가셨으며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죠. 주 예수는 임종하는 길로 하데스(음부)에 내려가 사탄의 두목 베리알을 공포로 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특히 아담을 하데스에서 구출하였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둘째, 주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이레 전에 바돌로매에게 "네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바돌로매는 사탄의 무리가 갇혀 있는 곳을 보게 해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 예수는 바돌로매로 하여금 높은 산 꼭대기에서 무저갱을 보도록 해주셨습니다.
셋째, 바돌로매의 간청에 따라 예수는 천사로 하여금 무저갱의 사자 아바돈(아볼루온)을 끌어올렸습니다. 주 예수는 바돌로매에게 아바돈을 짓밟으라 하셨죠. 예수는 "말세에 사탄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 동안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계 20:2~3).
네번째, 바돌로매는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이냐고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주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위선과 배신과 남을 헐뜯는 것으로서,이 세 가지는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런 일이 있은 후 바돌로매는 주 예수의 손을 붙잡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원히 영광이 있으소서"하고 찬미하였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인물이나 세계적인 신앙의 지도자들은 모두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가 되었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울은 전도자 바울로 변했으며 낙담하며 본업으로 돌아간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초대교회 창시자들이 되었습니다.
부디, 나의 무화과 나무의 자리에서 날마다 주를 만나서 하늘이 주시는 새 힘으로 그 좁고 험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기도의 자리가 회복이 되게 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게 하소서. 내 마음에 간사함이 없게 하시고 나다나엘처럼 전도와 선교에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아멘.
복음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
평화전하며 복된 소식을 외치네
주 다스리시네
주 다스리시네 주 다스리시네
주 다스리시네 주 다스리시네
[네이버 지식백과] 나다나엘 [Nathanael]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다나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뜻. 빌립의 소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갈릴리 가나 사람(요 1:45; 21:2).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의심했으나(요 1:46) 예수님의 영적 통찰력을 발견하고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하였다(요 1:47-48).
후에 디베랴(갈릴리) 바다에서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요 21:2). 한편 그의 이름이 사도들의 명단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보인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인도와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전도하다 살갗이 벗겨지는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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