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kKY0pwBsmw?si=xut2e7LmQ1r_ezVR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창38/ ‘여갈사하두다’ & ‘갈르엣’ 언약
(창세기 31장 43~55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은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조건 돌진, 전혀 좌우를 돌아보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야곱의 장점이라면 ‘간절함과 정열, 책임감과 끈질김’이 있는 사람이죠.
그러나 그는 복을 받지 못할 성품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은 야곱보다 더 징한, 더 야비한, 권모술수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라반‘을 붙이셔서 얼마나 시달리게 하셨는지. 마침내 야곱을 자신의 욕망과 뜻이 아닌 ’하나님의 신본주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게 하셨습니다.
에서는 자기 본능대로 살다가 믿음의 길을 떠난 사람이죠. 누구보다 자격이 있었던 장자이었지만, 그는 믿음의 길을 스스로 떠나버렸습니다. 사울 왕 역시, 아무 훈련 없이 왕이 되었다가자기 좋을 대로 살다가 자녀들과 함께 멸망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젊은 시절 황금기를 도망자로 보내면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수 많은 시편들을 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었죠.
하나님이 야곱을 위해서 특별히 붙히신 훈련조교가 바로 ’라반‘입니다. 라반이 없었다면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될 수가 있었을까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역대 대통령이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인데,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40대 이후에는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실제로 사람의 삶의 태도와 자세가 일에서 나타나는데, 일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얼굴과도 같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상태가 얼굴로 드러나지 않는가요?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어봅니다.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나타나는 거죠.
또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길거리를 걸어가면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포시 웃고 있습니다. 기분이 좋다는 거죠. 나도 모르게 싱긍벙글 합니다.
실제로 ‘얼굴’이라는 말은 영혼(soul)을 뜻하는 ‘얼’과 호흡함(breathing)을 뜻하는 ‘굴’이 합쳐서 된 단어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창이라는 말입니다.
가끔씩 크리스챤 부부들도, 서로 다투다가, 남편이 “야, 이 사탄아!” “네가 할 줄 아느게 뭐가 있니?” “넌, 종교중독이야” 라고 말해서 아내가 씩씩 거리며, 남편이 자기에게 ‘사탄이라고’ 말했다고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경우도 여러 번 봤습니다. 더군다나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식들에게 까지 희생을 강요당하는 구나’ 싶어 어쩔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사람도 있죠.
많은 부부들이 가정불화로 몇 십 년씩 속병을 앓다 보면 얼굴에 표정이 없어집니다. 기쁘고 즐거운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분노와 좌절의 표정조차 사라진지죠. 한 마디로 잘 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험한 세월을 산 사람은 얼굴에 표가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의 얼굴은 어둡지가 않죠. 마음의 평강을 유지합니다. 우리 삶의 풍성함은 우리 영혼의 상태에 달려 있죠. 영혼이 건강하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생명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말을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것을 오히려 온전히 기쁘게 여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기쁨이 아니라 불평과 불만이 한가득입니다. 가족을 원망하고, 친구를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원망합니다. 내가 시험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시험의 피해자입니다. 상대방은 전부다 가해자죠.
부부 사이에도 '당신 때문에 내가 이처럼 나빠졌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변하게 했어.’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물들고 내 영혼이 망가졌어.”라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사실이야 그렇든 말든, 어쨋든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하니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라반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이 사람 좀 제발 내 눈앞에서 치워주세요.’ 라고 할 때 정말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좋아할 게 없습니다. 그 사람이 사라지면 또 다른 사람이 옵니다. 더 지독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죠.
그러나 라반을 통한 훈련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나를 겸손하게 만드시고 나를 하나님께 붙들리게 하려는 축복이야.’ 라고 고백하며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때가 될 때 그들이 사라지게 하실 것이고, 오히려 놀라운 말과 함께 ‘당신에게 미안해하면서 떠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드디어 20년간의 종살이를 공식적으로 끝내고 자유를 얻습니다. 라반에게서 드디어 야곱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라반이 두 눈 뜨고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자유를 얻었죠. 해병이 아닌 ’해방‘입니다.
오 이기쁨 주님 주신 것(민희라)
오 이 기쁨 주님 주신것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주께 영광 할렐루야 주만 찬양해.
앞뒤동산 꽃을 피웠고 내 맘속에 웃음꽃 피네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주께영광 할렐 루야 주만 찬양해
높은 하늘 종달새 울고 내 맘속에 한 송이 있네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주께 영광 할레룰야 주만 찬양해
오 친구여 함께 노래해 오친구여 함께 노래해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주께 영광 할렐루야 주만 찬양해.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한 번 라반의 종이면 영원한 라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라반은 지독한 사람이었죠.
1. 마침내 놓아주는 라반 (43~44절)
야곱은 고향을 떠나올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귀향길’에서도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자기가 그곳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외삼촌 라반이 출타 중에 가족과 재산을 정리하여 귀향길에 오르죠. 야곱이 도망한 지 사흘 만에 그 소식을 들은 라반은 즉시 야곱의 뒤를 쫓아 왔습니다. 그 두 집단은 마침내 길르앗 산간지방에서 마주쳤습니다. 여차하면, 친족 간에 잔혹한 폭력이 자행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의 재산이 불어나자 라반의 아들들의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돈이 부정적으로 개입하는 순간 아름다웠던 관계는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말씀하셨죠. 가족 간에도 돈 문제 때문에 많은 긴장과 불화가 빚어집니다.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재산 문제는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고와 같습니다. 언제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죠.
야곱을 추격해 온 라반은 도둑맞은 자신의 드라빔을 찾았지만 발견되지 않았고, 이에 야곱은 라반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울분을 토해냅니다. 자기 허물이 무엇이냐고 거칠게 묻죠. 지난 스무 해 동안 장인의 무모한 요구를 다 받아들이며 머슴처럼 죽도록 일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8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40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창31:38-40)
이런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인 라반이 그의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쳤다고 울분을 토합니다. 봉급을 네 번은커녕, 한번만이라도 안 받아 보십시오. 당장에 노동고용부에다가 고발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을 보고 계셨죠. 사회적 약자인 야곱은 불의한 현실을 바로잡을 힘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정의를 세워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마음속 깊이 느끼면서 라반에게 고백합니다.
‘내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이삭이 경외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빈 손으로 고향으로 가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죠.
자칫하면 친족간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폭력의 충동을 내려놓고 대화를 시작했고, 하나님을 그들 사이에 모심으로 화해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가까운 지인이나 형제 자매가 투자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죠. 돈 때문에 이해관계가 엇갈려 서로 반목하고 깊은 갈등에 빠지기도 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이런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죠. 하나님은 약자들의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겪은 고난과 제가 한 수고를 몸소 살피시고, 어젯밤에 장인 어른을 꾸짖으셨습니다“(창 31:42).
그러자 라반이 뭐라고 합니까? 성경을 한 번 읽어 볼까요.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창31: 43-44절)
이 말이 무슨 뜻인가요? 원래 그는 야곱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죠. 라반이 야곱에게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라고 한 말을 보면, ‘전부 다 내 것이고, 네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라반은 야곱이 결혼한 아내들과 낳은 자식들이 야곱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 소유라고 주장합니다. 라반은 평생 야곱을 종으로 부려먹기 위해서 딸들도 주고 자식도 낳게 하고 재산도 모으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라반은 야곱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던 라반이 이제는 뭐라고 하는가요? 먼저 언약을 세우자고 제안합니다(44). 자신이 이제 야곱을 평생 종으로 부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죠.
라반은 라헬도 레아도 자기 딸들이고 자신의 성질대로 무력으로라도 야곱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힘으로 밀어붙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나발처럼 가만히 두지 않으셨겠죠.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고 죽여 버리셨겠죠.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왕에게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리려고 한 아비벨렉의 꿈에도 나타나셔서 협박하였습니다. 웃기지 않았요. 하나님이 얼마나 다급한지 꿈에 나타나셔서 협박을 합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20:7)
아비멜렉은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라반 역시,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협박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라반은 죽지 않으려고 다 잡은 야곱을 순순히 그냥 보내 줍니다.
두 사람의 주장이 거칠게 맞부딪쳐 파열음을 내며 심하게 싸우며 경찰이 출동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세상 법정, 세상 재판관이 아닌 그들은 하나님을 둘 사이의 재판관으로 모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하늘에 계시니
온 천하만민 주앞에 찬송하네
이 천지 만물도 주앞에 엎드려
그 거룩하신 이름을 높이네
주언약 하신것 끝까지 지키니
저 하늘나라 향하여 곧 가리라
주 얼굴 뵈올 때 내맘이 기쁘고
영원히 주의 영광을 찬양하리
The God of Abraham praise
Who reigns enthroned a bove
Ancient of everlasting days And God of love
Jehovah great I AM
By earth and heav'n confessed
I bow and bless the sacred Name forever blest
Jehovah great I AM
By earth and heav'n confessed
I bow and bless the sacred Name forever blest
A men
그들은 상대에게서 무언가 이득을 취할 기회만 노리고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감시하며 20년간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서로 감시하기를 그만두고 하나님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록 하는 데 동의했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창31: 47-49절)
아람어를 사용했던 라반은 “여갈사하두다”라고 불렀고, 히브리어를 사용했던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불렀습니다. 둘 다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이 돌무더기는 미스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미스바는 ‘망루’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라반의 부탁과 관련되죠.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자네와 나를 감시하시기 바라네!“
라반은 또 야곱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죠.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1-52절)
이 증거의 돌무더기는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제 라반은 이 돌무더기를 넘어 야곱을 해치고 잡으러 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야곱 역시, 이 돌무더기를 넘어 다시 라반의 종이 되어 그 밑으로 들어가거나 그의 도움을 받으러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둘 사이에 영원한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혹시 우리가 이 세상이 주는 것들이 너무나 재미있다면, 아직도 하란을 떠나지 못하고 라반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언제 진정한 자유를 얻을까요? 세상에서 만족을 얻겠다는 시도를 포기할 때입니다.
배고플 때 먹고 싶은 욕망, 이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람한테는 굉장한 생존력이 발동합니다. 배고파서 굶어죽을 정도가 되면 사람이 쥐까지 잡아먹습니다. 그것도 굽거나 요리를 하지 않고 날것으로 마구 먹어치웁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이토록 먹고 싶은 욕망이 대단하죠. 그런데 먹고 싶은 욕망이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이제 입고 싶은 욕망, 가지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집 없는 사람은 자기 집 한칸 마련하려고 지독히도 고생을 하죠.
‘주식투자를 하고, 사업을 크게 벌리고 돈을 왕창벌어 봤으면 좋겠다. 우리 자녀들이 좋은 학벌을 가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들어 갔으면 좋겠다는 소원과 바램을 가지고 치열하게 매달리고 싸웁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뭐죠?
자식과도 더 이상 화합할 수 없는 레테의 강을 건넜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계속해서 왜 부모의 생각을 강요하냐?” 라고 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내가 너를 위해, 유학을 위해서, 집을 몇 채 값은 해 넣은 줄 도재체 알아???!! 몰라?!” “나이도 있는 데 결혼도 못하고” “네가 박사학위만 받으면 다냐?” “어이, 저 병신” “제대로 된 자리도 못 잡고” “너는 도대체 말을 들어 먹는 것이 있기나 해?” 급기야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며 큰소리와 욕, 손찌검은 물론 영혼과 마음속에는 잔혹하게 한바탕 휩쓸고 간 쓰나미만 남아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 나름으로, 정치인은 정치인 나름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이 말했다. 저 말했다.’ ‘간줬다. 쓸개줬다.’하며 처신을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국가가 혼란하고, 경제가 흔들리고 무질서, 공허함, 허영과 사치, 방종과 타락, 마약, 살인, 동성애. 그뿐만이 아닙니다. 돈을 겁나게 벌어 보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사업도 크게 벌려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건강 이상, 이혼, 감당할 수 없는 큰 부채뿐이었습니다. 상처뿐인 영광이었죠.
성경은 우리가 세상의 그런 것들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고 계속해서 알려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결국은 해볼 대로 다 해본 솔로몬이 씁쓸하게 외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은 실제로 최고의 것들을 다 누려보았던 사람입니다. 수많은 아내들, 엄청난 학식, 또 명예와 권력을 다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정한 만족이 없었습니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전2:4,8)
그러나 그는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구나.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1:2-4) 라고 탄식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합니다.(요한1서 2장 17)
나는 알았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주님 앞에 와 나를 맡겼네 진정 기쁜 날이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잿빛 생활에 지쳤음을
세상 쾌락을 찾아봤으나 고통뿐이었다네
삶은 의미 없고 안식 없었네 그러나 이제는 달라
새 삶이 내게 임했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주가 내게와 나를 구했네 진정 기쁜 날이네
라반은 나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끈질기게 붙들려고 합니다. 회유하기도 하고 재산이나 좋은 것으로 끈질기게 유혹하죠. 한 번만, 한 번만 더 투자해봐! 그러나 우리는 라반이 ‘나’를 포기하게 만들어야 하죠. 자꾸 뒤를 돌아보지 말고 세상이 나를 포기하게 만들 때 사실은 거기에 진정한 만족이 있고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출애굽 때 이집트를 떠나서 홍해를 건넌 후 광야로 들어가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이 길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이집트 군대가 자기들을 쫓아올 때 그것을 느꼈죠.
이제는 광야에서 굶어 죽거나 목이 말라 죽는 일이 있어도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홍해를 건넘으로써 애굽과 완전히 끊어졌죠. 애굽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죠.
야곱에게는 증거의 돌무더기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돌이 세워짐으로써 이제 라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죠. 라반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좋지만, 동시에 자기가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더 이상 라반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생활도 더 어려워지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위 ‘잘나가던 때’가 그리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을 더 포기해야 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역시, 야곱의 돌무더기와 같은 경계선이 있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의 주인으로 모셔 들였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무의미한 삶과 헛된 욕망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라반의 종이었죠. 그러나 야곱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까, 라반이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존귀하게 보이기 시작했죠.
어느 치과의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환자가 들어올 때마다 ‘요건 얼마짜리, 요건 얼마짜리’라고 환자를 구분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보니까 비로소 환자가 사람으로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으로 보였죠.
어떤 사람은 배우자까지도 성공을 위한 도구로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돈이 좀 많고 여유가 좋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성공했을텐데.’하며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배우자가 지참금, 혼수를 적게 가지고 왔다는 거지요. 어떤 때는 정말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배우자끼리도 믿지 못해서 ‘저 웬수가 언제 내 돈을 빼갈지 모르지.’‘ 제 고집대로 하다가 망해서 자녀들에게 까지 빚을 상속하면 어떻게 하지?하고 두려움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허무하게 끝난 사람, 비참하게 서로 싸우다 끝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런데 라반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그 속에 있는 영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야곱에게 자신의 딸들을 부탁합니다.
”야곱! 너 내 딸들을 두고 박대하거나 바람피면 안돼! 내 딸들을 아껴줘야해.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야”(창31:50)
라반은 딸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좀 더 잘해 줄 것을” 그들은 ‘증거의 돌무더기’ 옆에서 예배를 드리고 함께 음식먹고, 그 날 밤을 함께 지냈습니다. 인생에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된 것이죠. 다음 날 라반은 손자 손녀들과 딸들에게 입을 맞추고, 그들에게 축복하고, 길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때가 될 때 하나님은 그들이 사라지게 하실 것이고, 오히려 놀라운 말과 함께 우리에게 미안해하며 축복하면서 떠나는 날이 오는데, 야곱에게 바로 그 날이 왔습니다.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55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창31:54-55)
'태양이 구름에 가려 햇빛을 볼 수 없을 때에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에라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엄연히 계심을 믿습니다'라고 제2 차세계대전 때에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어느 전쟁 포로가 하나님께 고백한 기도처럼 야곱도 그 험악하고 길고 긴 어두운 지하터널을 지나 드디어 빠져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인생 말년에 애굽에 내려가 바로 앞에 섰을 때 나이를 묻는 왕에게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험악한 세월‘이라는 말 속에 그가 경험했던 온갖 고통과 슬픔이 다 담겨 있습니다.
야곱의 삶은 영웅들의 서사와 매우 닮아 있죠. 영웅들의 서사시는 몇 가지 전형적인 패턴으로 전개됩니다. 평안했던 삶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 떠남에서 비롯된 온갖 시련과 극복,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 그리고 귀향이 바로, 그것이죠. 야곱도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고향으로 출발! 출발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도 영웅들과 동일한 패턴을 따라갑니다.
쌍둥이 형 에서와의 갈등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상황, 돌베개로 상징되는 위기와 시련,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엉덩이뼈가 골절되고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 과정, 그리고 고향에서의 정착이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야곱의 이름은 개인적인 이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국가 이름이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허투루 들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니까요.
주님, 내게 주신 여러 가지 시험들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게 하옵소서. 마음이 황폐해지고 심신이 미약해지고 정신이 병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기도의 신앙으로 바뀌게 하소서. 내게 주신 갈르엣 언약을 감사하며 사명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나의 피난처 예수 의지해요
나의 피난처 예수 의지해요
나의 가는 길에 거센 바람
몰아쳐와도
나의 피난처 예수 의지해요
나는 영원히 주님 사랑해요
나는 영원히 주님 사랑해요
세상 어떤 것도 나의 사랑
끊을 수 없네
나는 영원히 주님 사랑해요
아바 아버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모든 것 주께 드려요
아바 아버지 내가 여기 있으니
주님 영광 위하여 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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