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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창세기

주은총목사/ 창39/ 내 인생에 남은 숙제

by 주은총목사 2025. 2. 27.

https://youtu.be/2a5DRn5JbH0?si=7wC-Hk4pY0D504pz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39/ 내 인생에 남은 숙제

창세기 32:1-32

 

20세기 미국 대표 초상화가중에 유명한 <앨리스 닐>이라는 화가의 실화입니다.

 

<‘명사 초청 특강 : 이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

 

동네에 붙은 현수막을 본 딸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날 버리고 떠나간 엄마, 그리고 지금은 성공한 화가이자 유명 인사가 된 엄마를 30년 만에 볼 기회였거든요.

 

나를 본 엄마는 뭐라고 말할까. 미안하다며, 그간 고생이 많았다며 안아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오랜 세월 엄마 없는 아이로 살며 쌓인 설움을 터뜨릴까. 아니면, 세월이 흐르고 여러 일을 겪은 지금, 나도 그때 엄마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해줄까. 강연장 맨 앞줄에 앉아 엄마의 강연을 들으면서도 딸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열린 칵테일파티에서 마침내 엄마는 딸에게 걸어왔습니다. 딸을 본 엄마는 활짝 웃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오늘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강연은 잘 들으셨나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30년 만에 딸을 만난 엄마는, 이렇게 말한 뒤 또 다른 사람에게로 향했습니다.

 

엄마가날 못 알아봤어.’ 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습니다. 칵테일파티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4년이 흐른 뒤 엄마는 연락 한 통을 받았습니다.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본 위대한 휴머니스트 초상화가. 딸을 알아보지 못한 비정한 어머니. 앨리스 닐(1900~1984)의 진짜 얼굴은 둘 중 무엇이었을까요. 이 모녀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닐은 24살의 여름, 닐은 쿠바에서 온 한 청년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낭만적이고 반항적이며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화가를 지망하는 잘생기고 키 큰 청년이었습니다. 둘은 금세 뜨거운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듬해인 둘은 결혼식을 올렸죠.

 

환상 같은 행복으로 시작된 둘의 결혼 생활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가정을 이루고 살기에는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부는 가난했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릴 테니 돈을 벌어와 줘. 내가 더 잘 그리니까 당신이 희생해야지.” “무슨 소리야. 그 반대지. 내가 그림을 그려야 해.” 둘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며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어설프게 일하고, 어설프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첫째 딸이 태어난 뒤에도 이런 상황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딸은 첫돌도 되기 전 병에 걸려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닐은 울며 후회했습니다. ‘우리가 작고 더러운 방에 살지 않았다면, 5달러짜리 기름 난로만 있었다면 아기가 그렇게 심하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의사를 부를 돈이 있었다면 아이를 살렸을 텐데.’

 

닐과 남편은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아이를 잃었다는 죄책감과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곧바로 둘째 아이를 갖기로 한 건 그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런 슬픔과 고통도, 새로 태어난 둘째 딸 이사베타도 이 부부의 본질을 바꿔 놓지는 못했습니다. 계속된 싸움 끝에 결국 남편은 닐과 상의도 없이 이사베타를 쿠바에 있는 자기 가족에게 맡긴 후 프랑스로 도망가버렸습니다.

 

한순간에 가족과 생이별하며 큰 충격을 받은 닐은 정신질환으로 1년간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예술가로서의 삶과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 두 가지를 모두 이루려 노력했던 지난 세월은 헛된 노력에 불과했다는 후회를 그림 속에 담아내었죠.

 

하지만 닐은 결국 충격을 이겨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퇴원한 그는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초상화라는 그림 자체가 원래 귀족과 상류층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시작된 장르였고,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닐은 달랐습니다. 상처받고,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갔습니다. 그 자신도 그랬으니까요.

 

그림을 그리면서도 닐은 새로운 애인들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아들도 두 명 생겼습니다. 하지만 닐이 만난 남자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임신했다고 하자 도망가버린 남자도, 닐이 자신을 떠나려 하자 그녀의 작품 300여점을 찢고 불태워버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느덧, 60대가 된 닐에게 마침내 전성기가 찾아왔죠. 추상화가 저물고 전쟁이 끝나고 시대가 변하면서 다양한 인간들의 내면에 관한 관심이 생겨나고, 사회적 약자를 주목하는 시선이 힘을 얻는 등 그야말로 마법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작품을 외면하던 미술계도 앞다퉈 닐을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술 잡지 아트뉴스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현대 미술에서 초상화가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닐의 그림을 보고 나서 입을 꿰매야 할 겁니다.”

 

하지만 말년의 닐에게 또 한번의 비극이 닥칩니다. 남편이 데려갔던 둘째 딸 이사베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겁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는, 닐의 강연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이사베타를 쿠바로 데리고 간 뒤 모녀는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식구들은 이사베타에게 너희 엄마가 그림 때문에 너를 버렸다고 하였죠. 또한 닐의 편지를 중간에서 가로챘습니다. 이사베타는 자라나며 닐을 증오하게 됐죠.

 

긴 세월 이 흘러 이사베타는 이혼을 비롯해 여러 일을 겪었고, 닐을 이해해보려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하게 됐습니다. 엄마를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이사베타가 사는 동네에 닐이 강연을 왔을 때 참석해 맨 앞줄에 앉았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죠. 하지만 시력이 좋지 않은 데다 백내장을 앓고 있었던 닐은 그녀의 딸인 이사베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원래 앓고 있던 우울증은 그 이후 더 악화됐고, 4년 뒤인 1982년 이사베타는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 이사베타 꿈을 꿨는데.” 그리고 2년 뒤인 1984, 닐은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마다 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숙제 같은 것입니다. 그 숙제를 해결하면,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해결하지 못하면, 늘 마음이 눌리고, 언젠가 그 문제가 발목을 잡기도 합니다. 나의 남은 인생의 숙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오늘 성경에, 야곱이 인생에 남은 숙제를 해결해 가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20년 전에 나쁜 감정을 남기고 헤어졌던 형 에서와의 화해 문제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21절과 2절은 영적인 세계의 법칙의 놀라운 말씀으로 시작을 하고 있죠.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1-2)

 

야곱은 20년 전 에서를 피해서 도망치다가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는 그 밤에 사닥다리 위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꿈이 아니라 길에서 직접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천사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 천사 떼거리들을 만났습니다. ‘마하나임군대또는 진영이라는 뜻인데, 특히 두 진영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두 무리나 되는 천사들을 만난 것이죠.

 

하나님의 천사 군대가 출동하여 야곱을 보호하고 있던 것이죠. 야곱의 앞과 뒤를 호위하였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자 천사부대를 만났던 그곳을 마하나임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너를지키시는자

너의 우편에 그늘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자

너의 환란을 면케하시니

그가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야곱이 가나안에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고 야곱은 약속의 땅에서 받을 기업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일이었죠.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에는 형 에서와의 관계가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은 일대 전환점을 이루게 되죠. 그것은 육의 사람 야곱이 영의 사람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육의 사람 야곱이 영의 사람 이스라엘로 변화하는 것이죠.

 

에서는 야곱이 떠나있는 동안 자신의 욕망에 따라, 아버지 이삭을 떠나 세일 산으로 갔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으로 부터 떠났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땅의 소유권은 형제 사이의 죽고 죽이는 일이 없이도 야곱을 위해서 <임자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대대로 이어오는 신앙생활에 얽매여서 살기가 싫었죠. 그는 이삭으로 부터 간섭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여 신앙을 떠났습니다. 세일 산에 자리를 잡으려 큰 부자가 되었죠. 왕처럼 독재자처럼 군림하였습니다. 자기 힘을 믿고 사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언약 보다는 세상의 물질적인 욕망이 더 중요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야곱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말라기 13절에서는 이렇게 에서가 아버지 이삭을 떠나 홀로 세일 산에 거한 사실을 성경은 일종의 추방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에서는 비록 스스로 그곳을 떠났지만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의해 자기가 간절히 소원했던 땅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그는 현재의 욕망을 따라 살기 원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서로를 향한 불편함과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형제끼리 경쟁하느라 생긴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의 가치관의 차이였죠.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같은 집에 살면서도 가치관이 다른 가족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러면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그러나 같은 집에 살면서 <에서처럼 자기 일에 아주 뛰어날 뿐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약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꼬집어 내는 가족은 아주 고통스럽고 괴로운 존재입니다.

 

형제지간이라도, 또 부부로 같은 집에서 산다고 해도, 두 사람의 신앙이 각각 다르면 대화가 잘 되지를 않습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나 가치관이 너무나 다르죠. 그들은 내면적인 변화나 영적 성숙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세상적인 가치관, 출세, , 성공입니다.

 

, 이번에 큰 오빠 자식이 서울대 의대에 들어갔다더라. 둘째 오빠네 사위는 얼마나 좋은 놈이 들어왔는지. 김앤장에 다니는 변호사래.”

 

하나님의 사람에게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영혼인데, 세상 사람들은 겉모습, 겉포장이죠. 얼마나 돈을 잘 버는지. 얼마나 잘 나가는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뿐입니다.

 

같이 살지 않는다고 해도 어쩌다 한 번씩 만날 때마다 한두 마디 툭 던지는데, 그 한두 마디가 1년 동안 열심히 쌓아온 믿음을 뒤흔들어 놓죠.

 

신앙이 없는 친구나 형제들 앞에서 잘 이야기가 통하지 않으니까, 동창회 모임, 또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잘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해보았자 서로의 가치관도 다르고 만나면 상처만 받고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고향이 가까워지니까 점점 마음에 염려가 가득했습니다. 형의 마음속에 있는 원한이 풀렸는지, 과연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형이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고 이렇게 나를 미워하고 있나 하는 것이 마음에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슬픔걱정 가득차고 내맘 괴로와도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죄짐이풀렸네

놀라운 사랑의갈보리 갈보리 갈보리

놀라운 사랑의갈보리 영원한 갈보리

 

너의근심 모든염려 주께 맡기어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죄짐이풀렸네

 

야곱과 에서의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었습니다.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 에서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자기를 낮추고 사람들을 미리 보내어 자기도 가난하지 않고, 신세를 지러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메시지를 전달하죠.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32: 3~5)

 

, 그런데. 세상에나.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만나러 온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야곱의 반응은 어떤가요? 야곱은 그 말을 듣고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죠. 성경은 창세기 327절에서,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야곱이 굉장히 예민하고 극단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건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직, 야곱의 마음속에 <에서라는 존재>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크게 남아있는 것이죠.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면, 그 문제로 인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죠. 상처가 다 나았으면 남이 건드려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아직 아물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도 싫고, 또 누가 건드리기도 전에 미리 과민반응을 보이게 되죠.

 

야곱은 최악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벌써 에서가 쳐들어와 자기 가족들을 죽이는 상황을 그리고 있죠. 다 같이 창세기 327절과 8절을 읽습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7-8)

 

야곱은 우선 최선의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에서의 공격에 대비해서 동행자와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한 떼를 치면 다른 떼는 피할 셈이었죠. 또 에서를 위해 많은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그것을 각 떼로 나누어서 순차적으로 보냈습니다. 예물로 에서의 감정을 푼 후에, 자신을 받아주면 만날 계획이었습니다. 최대한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야곱은 기도를 하죠. 그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갈등과 고민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야곱의 기도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지금 닥친 문제를 있는 그대로 아뢰는 진솔함이 있죠.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32:9-11)

 

야곱은 지팡이 한 개 밖에 없던 자기가, 지금은 두 떼나 되는 무리를 거느리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죠.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방법을 씁니다.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고 많은 가축들을 보내죠. 한마디로, 뇌물을 쓰는 거죠.

 

그는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갈 나무가 있냐? 형이 아무리 원한의 골이 깊어도 내가 이 정도로 돈을 가지고 입에 쳐 넣는데 하는 식으로 선물공세를 마구 해댑니다. 염소, , 낙타, 암소, 황소, 암나귀 등 모두 오백 오십 마리가 넘는 가축을 선물로 차례로 보냅니다. 형이 이 선물을 받으면서 마음을 좀 누그러뜨렸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보내지만 그것으로도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마귀가 노리는 것이 있죠. 그것은 야곱이 에서가 온다는 소식 앞에서 신앙의 모습을 다 잃어버리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은 두려움이 핵심이죠. 스스로가 두려움앞에 무너져 내리는 거죠.

나를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속에 극복하지 못한 마음의 상처와 분노가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 내 마음속에 있는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깨지기 위해서죠.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너는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사탄이 자기가 진줄 알고 슬그머니 도망을 갑니다.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뺑소니를 치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입니다. “, 이긴 자야!” “넌 두려움을 이긴자야!” “넌 승리한 이스라엘이야하고 여호와의 사자가 선포합니다.

 

그날 밤에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얍복 나루를 건너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자신은 두려움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안절부절 합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32:22-23)

 

깊은 밤 홀로 우는 그대여 그대 눈물을 내가 아노라

그대 눈물은 가슴을 적시고 발을 적시고 땅 위에 내린다

그대 아픔을 내가 같이하노라

그대 슬픔에 내가 기쁨 주리라

그대 눈물을 내가 다 마시노라

깊은 밤 홀로 기도하는 그대여 그대 기도를 내가 듣노라

 

야곱은 식구들을 얍복 강 건너로 보내놓고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립니다. 때때로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혼자 외롭게 절망의 밤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러한 큰 문제와 시련 앞에 우리가 고통하며 밤을 새울 때가 있습니다.

 

가족들도 있고, 가까운 친구도 있지만, 결국 마지막은 홀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고통을, 내 마음의 슬픔을, 내 마음의 두려움을 가족,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 할 때가 많죠. 몸이 너무 아파서 이런 몸으로 살면 무엇 하나 차라리 죽었으면하고 고통의 밤을 보내지만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그 아픔을 나눌 수가 없죠. 아픈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죠. 외롭게 홀로 설 수 밖에 없는 그런 때가 찾아왔습니다.

 

이제 야곱은 모든 인간적인 수단에 의해서도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해결될 수 없음을 알게 되죠.

 

그는 홀로 남아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두려움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때 야곱은 그 천사와 씨름했다고 성경에 기록했는데, 이 사실에 대하여 호세아서 12:4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라고 말씀하고 있죠. 야곱은 울며 간구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야곱은 울며 기도했던 것이죠.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마주하여, 그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당신의 인생에 남은 숙제는 어떤 건가요? 수 십년째, 딸과 별거를 하고 있는 사위를 만나는 일입니까? 사위의 입에서 이제는 이혼을 하겠습니다라는 소리가 듣기가 무서운가요? 남편 앞에서는 일이 두려운가요? 최종 해결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외롭게 홀로 절망의 문턱에서 몸부림 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 오시죠. 인생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절망의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주님, 내 자신이 무너지고 공황장애에 걸릴 정도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 있습니다. 얍복강에서 씨름하던 그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어 두려움이 깨어지게 하소서. 내 자신을 이기고 사람을 이기게 하시어서 하나님의 사자가 , 이긴 자야!” “넌 두려움을 이긴자야!” 하나님과 사람들을 겨루어 이긴자 라는 선포를 듣게 하옵소서. 경제적 파산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소서., 인간관계 파괴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소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게 하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내가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택했나니 너는 내 신부라

세상에서 사는 동안 암울한곳 빛이 되어 내가 너의 구주됨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임은 내가 너를 불렀음이라

내가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내 기업이라 내가 너를 택했나니 너는 내 자녀라

세상에서 사는 동안 썩어진 곳 소금되어 내가 너의 구주됨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

불이 너를 사르지 못할 것임은 내가 너를 불렀음이라

내가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내 축복이라 내가 너를 택했나니 너는 내 유업이라

세상에서 사는 동안 주의 사랑 베풀어서 내가 너의 구주됨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

세상 끝날 까지도 너를 지킴은 내가 너를 불렀음이라

 

나는 오늘 하루도 주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호흡 하면서 주 임재 안에 갇혀 있네

그러므로 내 영혼 기쁨의 노래를 부르면서

주를 향하여 내 마음 고백 드립니다.

나의 사랑 예수여 주님만 나의 자랑 이시며

주님 만이 내 기쁨 내 행복 내 모든 것 되시니

남은 오늘 하루 삶에서도 주님만 의지하며

주의 영광 만이 나타 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