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r7IhE0KC3iI?si=h4ztxB9HOv0RkmGA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주안에서 기뻐하라 (빌립보서3장1절-3)
어느 분의 간증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삶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를 따라 교회를 가고, 아내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 해주는 이른바 무늬만 성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주셨습니다.
딸아이가 고교 2학년, 아들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봄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쉽게 피로를 느끼는 아내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통증을 호소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자궁경부선암 2기말이라는 청천벽력의 진단결과가 나왔습니다.
당혹감과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고 억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다른 병원을 찾아갔지만 진단결과는 똑같았습니다. 의료진은 암세포가 다른 기관으로 퍼지기 전에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채근했습니다.
아내를 원자력병원에 입원시켰죠. 입원하기 전에 나와 아내는 두 손을 마주잡고 말 없이 눈물을 흘리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지금도 그날 밤의 참담했던 심경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해 간병인을 둘 수도 없었습니다. 경기도 군포시 집에서 안양시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했다가 서울 공릉동 원자력병원으로 가서 아내를 돌보고 간이침대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그리고는 새벽 4시쯤 일어나 군포시 집으로 돌아가 딸과 아들의 도시락을 싸주고 자동차로 등교시킨 뒤 직장으로 갔죠.
거의 4개월 동안 매일 군포,안양,공릉동을 오갔습니다. 간병 기간이 오래 되면서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천근만근 무거워졌습니다. 여러 환자가 함께 쓰는 병실이라 편한 잠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 없는 집에서 꿋꿋하게 생활하는 남매와 유일하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피곤함도 잊고 지냈습니다.
출근을 했지만 나만 기다리고 있을 병상의 아내를 생각하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참 나쁜 놈입니다. 그렇지만 제 아내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살아온 착한 여자입니다. 하나님, 제발 착한 제 아내를 살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정말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딸도 찬송가 395장 ‘너 시험을 당해’(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를 찢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성도들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러 번 찾아와 자기 가족 일처럼 중보기도를 해줬습니다.
나의 기도와 딸과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마침내 하나님께 상달된 모양이었습니다. 아내는 무사히 수술을 끝내고 수십 차례 방사선 치료도 모두 이겨냈습니다. 아내가 암이란 병마를 툭툭 떨쳐버리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련을 통해 보잘 것 없는 나를 믿음의 반석 위에 올려놓으신 것이었습니다.
4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아내는 지금까지 15년 동안 몸살 감기 증세로 병원을 찾은 적은 있지만 암을 비롯한 다른 질환 때문에 병원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칠흑같이 어두운 로마감옥에서 발목을 쇠사슬에 묶인 채 이렇게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기쁨이 찾아올 때만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슬픔이 찾아올 때라도 고통이 너를 뒤덮을 때라도 여전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이것은 명령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질병이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원하지 않았던 인간관계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기쁨으로부터 내몰죠. 각종 실패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기쁨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 분수처럼 솟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쁨은 우리들의 삶의 활력소입니다. 기쁨을 잃은 사람은 삶의 가치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삶의 환희를 체험하려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거나 권력을 얻으려고 하거나 금전을 모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모두 '허무한 행위'입니다. 권력이나 금전이나 향략추구에서 얻는 기쁨은 일시적인 기쁨에 불과합니다.
1.주안에서 기뻐하라!
기뻐하라고 하는데 기뻐할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안에서'입니다. 이 '주안에서'는 사도 바울의 전용어입니다. '주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이러한 말이 그의 편지 가운데 132회나 나옵니다.
이 '주안에서'라는 말은 아주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철학과 기독교를 구별짓는 큰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주밖(?)에서 ‘기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대개가 <욕구 충족>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나는 그대로인데, 환경이 바뀌면서 내게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내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여건이 충족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에 좋은 음식 먹으면 기쁘고, 좋은 대학에 가면 기쁘고, 대기업에 취직을 하면 기쁘고 자녀가 결혼을 잘해서 좋은 사위를 얻으면 기쁜 것처럼 이것은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기쁨입니다.
재물이 많은 자는 기쁨의 이유를 재물에게서, 명예가 있는 사람은 기쁨의 이유를 명예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쁨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밖이 아니라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아무리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에게는 수고롭거나 번거로운 일이 아니고, 또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안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2. 기쁨의 원천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원천이 되십니다. 성경은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1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하므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은 사람은 진정한 기쁨을 상실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악의 담이 생겼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기쁨을 잃고 슬픔과 절망 가운데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쁨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교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단절은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마음속에 기쁨을 잃고 미움과 원한,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되는 기쁨이 없을 때에는 돈을 벌어도 걱정이요, 출세해도 불안합니다. 뭔가가 휑하고 사람을 사귀어도 고독하고 괴로울 뿐입니다.
사람이 왜 시험을 받을까요? 그것은 마음에 기쁨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래서 여기 가면 기쁨이 있을까? 저기 가면 기쁨이 있을까? 하여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다가 유혹에 빠지고 시험에 들게 되죠.
미국 네바다 주에 있는 유명한 도시 라스베이거스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순전히 사막 한가운데 인공적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리고 도박을 법적으로 허용한 미국 안의 유일한 도시입니다.
사람에겐 사행심리가 있어서 작은 것을 넣고 큰 것 얻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1불 넣고 기계를 돌렸는데 오백불, 천불이 쏟아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1000원을 넣었는데, 500배, 1000배로 쏟아져 버리니 사람들이 환장하죠. 그 운이 계속될 것을 기대하면서 밤을 새워가며 돈을 넣고, 기계를 돌리며 도박을 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도시가 라스베이거스라고 합니다. 거기에서는 불경기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여듭니다. 그러다 보니 계속 호텔이 모자라서 큰 호텔을 짓는데 우리 나라 큰 호텔하고는 도대체 비교가 안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호텔 방이 300-400개 있으면 큰 호텔입니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에는 3000-4000개의 방을 가진 호텔이라고 해야 큰 호텔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호텔은 객실만해도 5천개가 넘습니다.
왜 이렇게 라스베이거스가 발전할까요?
여기에 와서 기쁨을 찾아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복싱 경기나 쇼도 거기서 합니다. 그런데 도박에 맛을 들이게 되면 헤어나오지를 못합니다. 도박에 재미를 붙여 가지고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이 파괴된 경우가 한 둘이 아니죠. 죄악에 낙이 있으니, 자꾸만 중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참 기쁨, 참 즐거움이 아닙니다. 참 기쁨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10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주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주안에서의 기쁨을 지켜내십시오. 구원 얻은 기쁨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기쁨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주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아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주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교제를 뜻합니다. 주와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 심령에서 염려와 근심의 어둠을 몰아내고 기쁨의 환한 빛으로 나타납니다.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 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것들도 부럽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풍파도 두렵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하나님이 너희를 향하신 뜻이니라.>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쁨을 저해하고 기쁨을 좀먹는 것을 삼가고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기쁨을 쏟지 않기 위해서
본문 2절에 보면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여기 삼가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하여 나옵니다. 삼가라는 말씀은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를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이 말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이방인들을 향해 사용한 말이었으나 바울은 같은 말로써 유대인들을 역습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언급할 때 개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본문에서 그릇된 교리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유대주의자들을 향해 이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개들은 애완동물이 아니라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길손에게 덤벼드는 사나우며 악독한 동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언제나 불결, 비천, 비양심, 탐욕스러운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2천 년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떠돌이 개들의 천국이었습니다. 개들 때문에 집단속을 잘 해야 했고, 여행 다닐 때에는 막대기를 가지고 다녀야 했는데 이것은 성가시게 따라붙는 개들을 물리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하시면서 개들이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고 하셨습니다(눅16:21). 냄새가 나고 진물이 나니까 개들이 와서 물어뜯는 장면을 예수님이 아주 생생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가리키는 개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개"를 조심하라는 말씀은 개와 같은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할 때 "개 같은 놈" 혹은 "개 새끼"란 말을 합니다. 불결하고, 더럽고, 비천하고 비양심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을 말할 때 "개 같은 놈"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개'가 의미하는 첫 번째 특징은, 떠들고 싸우는 것입니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대고 물어뜯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물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의 특징은 싸우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마 7:6)'고 하신 바 있습니다.
개는 더럽습니다. 그리고 음란합니다. 음란하기 때문에 종교적 음란을 비유할 때에 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개는 회개하고서 다시 옛날 죄로 되돌아가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개가 기침을 하며 먹은 것을 다 토해 놓고는 잠시 후에 그것을 다시 핥아먹습니다.
뉘우치고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맹세하고 죄짓고…… 이러한 악순환 -- 예수님을 믿으면서 또다시 믿기 전의 옛날로 되돌아가는 행위를 가리켜 개와 같다고 합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요즘 예배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 요즘 직장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요? 그것이 내 영혼의 건강 표지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경우에 기쁨을 잃고 침체에 빠지게 될까요? 우리의 겉모습은 풍요롭고 화려하지만 왜... 속은 텅비어 있을까요?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홍해를 건넜을 때에 거기서 춤을 추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불과 보름도 못 가서 원망으로 바뀝니다. 그만큼 은혜를 완전히 소유하고, 은혜의 사람이 되고, 은혜의 세계관으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감사한 마음이 며칠이나 갈까요? 아니 몇 시간 갑니까? 그 순간에야 그저"고맙습니다" "백골난망입니다" 하다가도 몇 시간 지나면 그게 아닙니다. 성령과 기도와 기쁨의 총알이 떨어질수록 삶은 지치고 짜증나고 버티기가 힘들어집니다. 감사한 마음이 사라지고 우울해집니다.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유지하기가 힘이 들정도로 무기력하죠
“가장 위대한 사람을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의 부족은 모든 것의 부족이다!”
“기도하지 못하는 영혼은 죽은 영혼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 잔바람에도 흔들리고, 하룻밤 눈서리라도 내리면 얼어 죽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잠시 동안도 기도하지 못하고 잠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14:3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죄와 불안과 미움과 공포가 가득찬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시시때때로 염려와 근심에 묶이게 되죠.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의와 희락과 평강>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에게 <정죄의식과 불안과 근심>을 줍니다.
문봉주 목사님(서울대 출신의 외교관)의 새벽형 크리스천에 나온 기도에 관한 간증입니다.
나는 앞이 깜깜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안 나는 단지 잠자리에 들기 전과 식사하기 전에 습관처럼 잠깐 감사와 회개 기도를 되풀이하는 게 고작이었다. 교회에서도 개인기도 시간이 되면 나는 5분, 10분을 넘어서기가 어려웠는데 옆에서는 통곡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나라 말, 그러니까 방언 기도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어찌나 막힘 없이 기도들을 잘하던지.
나는 그때부터 말씀을 배우러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기도 세미나란 세미나는 마구잡이로 쫓아다니고, 기도에 관련된 책을 뒤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는 말씀과는 달랐다. 기도는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실행의 차원이었던 탓일까. 나도 눈물 콧물 쏟아가면서 기도하고 싶다는 것, 그때의 유일한 내 소망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소망의 깊이가 더하면 더할수록 기도란 배워서 되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만 확실해졌다.
나는 버티는 데까지 버티다가 하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목사님, 저 정말 기도 못하겠어요. 어떻게 기도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하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기도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목사님 말씀에 따라 기도의 영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기도는 어려웠다. 한 달 뒤에 또 여쭸더니 이번에는 기도 줄을 잡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빨랫줄도 아니고 철사 줄도 아니고 기도 줄이 대체 뭐냐’ 하는 심정이었다. 목사님께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착실한 기도 생활을 했다.
때로는 ‘내 기도가 외식하는 자의 기도가 아닌가’ 하는 부담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중국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었는데 그렇게 가기 싫어하던 중국이었는데도 나는 기뻤다. 그 기도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중국으로 가는 것도 좋았던 것이다.
울면서 부르짖고 싶었고 무릎꿇고 싶었다. 그러나 외마디 소리만 나올 뿐 기도가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알았다. 기도란 평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평소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은 갑자기 힘든 상황이 닥쳐도 기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욥기에 보면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기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욥 1:10). 여기에서 사탄이 말하는 산울이란 바로 기도의 울타리, 즉 천사의 울타리를 말한다. 사탄은 욥을 치고 싶어도 그 천사의 울타리 때문에 칠 수 없으니 그걸 잠깐 치워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천사의 울타리를 둘러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나는 주말마다 비행기를 타고 웰링턴과 오클랜드를 오가면서 말씀을 전했다. 그런데 그렇게 8개월쯤 지났을까, 갑자기 몸이 좋질 않았다. 혹시 암이 재발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몸과 영혼이 완전히 다운되었다. 하나님께 물었을 때 뭔가 희미하게 짚이는 게 있었다.
어느 새 내 마음에 영적 교만이 싹트고 있었다. 아무리 말씀으로 충만하다 한들 기도가 없다면 결국 영혼이 병든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중보 기도의 위력도 실감했다. 생각해 보니, 예전 중국이나 한국에서 말씀을 전할 때는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늘 성도들의 중보 기도가 있었던 것이다.
갈급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려고 애쓰던 중, 당시 뉴질랜드에서 텔레비전 복음전도자로 활동하던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찰스 스탠리 목사님의 성령 충만한 설교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그분의 저서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두 권을 챙겨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 책은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분이 30년 동안 혼자서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깨달아 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록한 것이었다.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 책을 정말 단비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그 책에서는 성령 충만한 삶이란 순간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성령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불타올랐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내 전인격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찰스 스탠리 목사님은 말했다.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일뿐이라고…. 결국 말씀과 기도와 훈련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한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찰스 스탠리 목사처럼 간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방법을 알려 주세요. 제게도 증거를 보여 주세요.”
얼마 뒤 나는 예언 은사를 받은 여자 집사님을 뵐 기회가 생겼다. 그분은 대뜸 내게 방언기도를 하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고 곧 이어 그분과 나는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혀가 나도 모르게 움찔대며 춤을 추었다. 방언이 터져 나온 것이다. 삽시간에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었다.
함께 기도하는 중간 중간 그분이 내 방언 기도를 통역해 주셨을 때 나는 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방언 기도는 내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날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야말로 세밀하게 내 모든 존재의 기록들이 몽땅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모든 죄를 토해 내고 있었다. 내 힘으로 회개하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온갖 죄까지 성령님은 회개하도록 도우셨다. 무의식의 깊은 바다를 마구잡이로 휘저어 모든 것을 수면 위로 떠올리셨다.
그 뒤로 나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라는 말씀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방언으로 기도했다. 기도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감정이 눌려 있습니다. 죄에 사로잡혀 있든지 아픈 상처에 눌려 있는 것이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로 토해 내지 않으면 이 죄와 상처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눌려 있는 것들을 다 쏟아 놓게 해서 참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입니다. 슬퍼하는 자, 애곡하는 자들이 죄와 슬픔을 고백하고 성령의 평강과 위로와 사랑의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들은 비로소 죄와 상처와 슬픔과 근심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립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기도의 즐거움을 누리실 수 있기를 간절하게 축복합니다.
. 지금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진정으로 기도할 때니 모이자 하나되자 우리가 갈 길이라 2. 지금 우리가 하나님 의지하고 담대히 나아갈때니 모이자 하나되자 주님이 지키시리라 찬양과 온 맘과 정성을 다해 기도와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말씀 속에 권능으로 임하시니 사랑으로 하나되자 우리의 생명 모두 다해 주님을 찬양하며 온 세상에 주의 사랑 전하리라 일어나 새벽을 깨우리라 지금 너희가 기도할때이니 일어나 새벽을 깨우리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성도와의 교제와 기쁨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가고 무엇 때문에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느냐, 혼자 기도하고 성경 읽으면 되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주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고 교제를 나눌 때 흑암의 세력이 물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말세인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서로 신앙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해외에서 날고 기었다는 선교사님들도 한국에 돌아오면, 자신을 낮추어 개 교회속으로 들어가 교회를 섬기는 분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자아를 쳐서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혼자서 <제단>을 쌓는 선교사님들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주님께 쓰임을 받지 못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리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하는 삼겹줄은 마귀의 역사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모이기에 힘쓰십시오.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구역예배에도 참석하고 이웃에 있는 성도들과 자꾸 만나 서로 교제하십시오. 장작불이 하나 타는 것과 두 세개가 모여 타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기도하며 교제할 때 신앙의 불꽃이 활활 타오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시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서로 대인관계를 유지하며 살듯 신앙생활도 성도들과 교제를 통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고받을 때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3:3)
예배가 영어로 무얼까요? 써비스(service)입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봉사는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성령 안에서 예배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것은 예배로 표현되고 사람 앞에 봉사하는 것은 봉사로 표현됩니다. 성령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성령이 알게 하는 대로, 성령이 깨닫게 하는 대로, 성령이 감화하는 대로 조금도 거역함 없이 성령 안에서 그대로 예배하라, 신령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 생활을 하면서 무슨 재미가 있다고 오히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하였을까요? 사도바울은 남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라”고 하면서 그냥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레슬리 웨더헤드는 오히려 ‘기쁨의 반대는 슬픔이 아니라 불신앙이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내 생애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내가 기쁨 가운데 산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기도 : 주님, 감옥 속에서도 사형을 앞두고도 기뻐하던 사도 바울처럼,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의 생활에 늘 하늘의 기쁨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나의 삶으로 드리는 찬양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나의 삶으로 드리는 찬양
성령님의 힘을 입어 부르는 찬양 내가 영으로 부르는 찬양(반복)
찬양의 가사가 내 삶의 내용이 되고 주제가 되어
보석 같은 신앙을 가지라고 주님이 내게 주신 찬양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나의 삶으로 드리는 찬양
성령님의 힘을입어 부르는 찬양 내가 영으로 부르는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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