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AQ7QXEgo1o?si=uMZXjomwFB-LcOEn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순복음교회/ 주은총목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립보서 2:5~11)
1차 대전 중 크리스마스 전날 밤,
영국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에 이르는 기나긴 전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쟁 중 독일군 참호 바로 위에 크리스마스 츄리가 세워졌고, 불빛이 환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저들 밖에 한밤 중에" 우리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영국군은 박수로 응답하고 이어서 영어로 "참 반가운 신도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독일군도 뒤질세라 박수로 응답하며 같은 찬송을 독일어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평화의 시간은 1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양쪽 군인들은 전쟁도 잊은 듯 서로 참호에서 기어 나와 크리스마스 축하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고, 축구시합도 했습니다. 선물교환도 했으며, 즉석에서 오케스트라도 연주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마는 성탄절 이 24시간 동안 화염은 멈추고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을 마음껏 축하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천군 천사들이 노래했던 것처럼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원래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두 단어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매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매스는 예배 드린다, 축하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생각해 볼 때 크리스마스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탄절을 맞이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탄절은 어떻게 보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이 날의 주인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알면서 사람들이 성탄절을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혹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론가 간 곳 없고, 사람들만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축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쉬운 성경>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어드립니다.
6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7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8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9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10하늘과 땅 위, 땅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11"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심을 선포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주님은 낮아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철저하게 낮아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영광 다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근본(根本)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同等)됨을 취(取)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自己)를 비어 종의 형체(形體)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模樣)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自己)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으니 곧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이라.>
바로 이 점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일을 하려면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이 되려고 애쓰는 것 아닌가요? 심지어, 교회에서도 일을 하려고 하면 중직자가 되어야 하고, 무언가 한 자리 해야 교회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들은 무언가 큰 일을 하려면 물질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 인간들과는 철저하게 다르십니다. 완전하게 다르십니다. 근본적으로 다르십니다. 인간들은 높아지려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자기이름을 들러내고 물질을 쫓고 쾌락을 추구하는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늘까지 그 이름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낮아지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에 종의 형체인 육신을 입고 찾아오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나를 위해 오신 주님
나를 위해 오신 주님 나의 죄를 위하여서
유대민족 들에게 잡히시던 그날밤에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예수십자가를 지셨네
그러나 언젠가 주님을 부인하며 원망하고 있을때에
나에게오셔서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셨네
거절할 수 없어 외면할 수 없어주님의 그 손을 잡았었네
주님의 사랑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야말았다네
이 세상에 오신 주님 나의 죄를 위하여서
로마병정창과 칼에 찔리시던 그날 오후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에게 평안을
약속하신 주님예수 십자가에 못박혔네
인생을 살면서 의욕을 상실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의욕을 상실했다는 것은 가슴에 열정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타오르는 불이 꺼져간다는 것이죠. 의욕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생명이 태어나고, 문명이 탄생되고, 위대한 과업이 성취되는 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죠. 이처럼 삶이란 사랑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사랑에 의해 불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주님께 향한 것이든, 자식에게 향한 것이든, 남편과 아내에게 향한 것이든 사랑은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거대한 힘입니다.
차마, 나이 드신 노인들도, 인생을 살아갈 힘을 ‘사랑’에서 얻죠. 요즘은 60, 70이 넘어 재혼한 후에 마치 청춘처럼 사는 노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사라’하고 평생 잉꼬부부처럼 살았던 아브라함도, ‘사라’가 죽자 100살이 훨씬 넘은 노인 임에도 불구하고, ‘그두라’하는 여인과 재혼해서 6명이 넘는 자식들을 낳고 잘 살았습니다.(창 25:1-2) 물론 혼자서도, 기러기처럼 정조를 지키며 평생을 사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든지 간에,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태어납니다. 사랑 안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인간이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엄청나게 사랑하셨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능력이요, 사랑의 지혜요. 이것이 사랑의 결과입니다. 확실하게 가르쳐 줍니다.
아주 오래 전에, 어느 아들이 한약상을 하는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죄악의 물줄기는 부모에게서 자식에게 흘러간 것입니다. 잘못 가르치고 잘못 길렀기에 그 열매가 맺힌 것이죠.
그 아들은 어려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데 장남인 자신은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인 열등감을 동생들에게 늘 느껴왔고, 아버지에게는 눈에 박힌 가시와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죠.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성적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혼이 나고 죄송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으면 건방지게 째려본다고 매를 맞았습니다.
그는 본래 눈매가 치켜 올라간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만 보아도 남이 보기에는 쏘아본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선하게 보이려고 눈을 성형수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더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모를 죽인 패륜의 범죄도 끔찍하지만 자식을 그 지경으로 만든 부모도 철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자라갑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기계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사랑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미움이 곧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자식에 대한 미움이 자식을 영적으로 죽였고, 그 자식에 부모가 살해를 당했습니다.
미움의 배후에는 악한 원수 마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게 하며 갈등하게 합니다.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수십년을 같이 사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서로 말이 안 될 정도로 어려운 것이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하고도 얘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하나님께로 까지 원망이 올라가게 됩니다.
원망은 거슬러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작은 사건 때문에 이래저래 원망하다 보면 나중에는 별난 원망을 다 하게 됩니다.
어떤 부부는 10년 넘어 살면서도 한번 다투고 나면 중매쟁이를 원망합니다. 또 주례해 준 사람, 낳아준 부모, 그 다음은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이처럼 원망을 한번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더 심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사명의 길을 걸으면서도 늘 찌르는 혈육의 가시,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저절로 겸손해졌습니까? 그 같은 겸손을 얻기 위하여 그에게는 사단의 사자,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평생 따라다니는 가시, 빠지지 않는 고통의 가시가 항상 그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대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진실하고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실 때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만일 그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 반드시 무릎을 꿇게 만드십니다.
이번주 수요예배에 80살의 김성영 목사님께서 오셨습니다. 매일 정자처럼 앉아서 하루에 3번씩 기도를 하면서 평생을 살다보니, 자신이 <정자>처럼 느껴져서 <성영>으로 바꾸셨다고 하셨습니다.
김성영 목사님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은혜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병치례로 죽어갈 때에,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학교가 끝나고 나면 아버지와 함께 수년동안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정자야, 이제는 오지마라. 네가 바로 전도사이다”라고 하셨죠. 김성영 목사님은 선생님을 하면서 형제들 일곱을 거두었고, 그후에 학교 선생님을 그만두고 신학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딸이 결혼을 하자마자 자식을 하나놓고, 사위가 딸과 같이 살지 않고 집을 나가 20년동안 나갔습니다. 딸아이는 정신이 미치고, 우울증에 걸리고 그랬지만 하루에 3번씩 딸을 붙들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후로 방에 갇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학교도 가지 않고, 오로지 방에서만 세월을 보냈죠.
그러다가 그 아들이 40줄에 신학을 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풀러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주 수요일에 그분이 우리 준수를 보자, 기도를 해주시면서 “준수야, 너의 이름 참 좋다. 준수. 너는 보배롭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야.” 그러면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해주시는 지.
김성영 목사님은 김희숙 목사님의 어렸을 적 동네 언니입니다. 팔십의 나이에도 그 인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제가 첫 만남에 3년동안동안 늘 잊지를 못하는 분입니다. 그 불가운데를 걸어가면서도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한 분이죠.
많은 분들이 딸이 모든 것을 잊고 새 출발을 하라고 합니다. 그 사람하고는 소망이 없으니 정리를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80의 김성영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야. 사람들은 나에게 사위하고 이혼시키고 새출발을 하라고 그래. 하지만 사위는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선물이야. 나는 그것을 사위로 들어온 2년째에 하나님께 받았어. 나는 늘 사위를 볼 때 마다 두 손을 잡고서 기도를 하지. 예외가 없었어. 길에서 보더라도 늘 사위의 손을 잡고 기도를 했어. 사위는 그러는 내게 20년 동안 단 한번도 딸과 이혼하겠다는 말을 안 꺼냈어. 매주 금요일이면 우리 손자를 데리고 가서 주말을 아버지하고 같이 보내고 와. 물론,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런 희망도 없어. 그러나 하나님은 하셔.”
그러면서, 안 믿은 시댁식구들 전체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지. 그 과정속에 어떻게 희생을 하였는지를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복음성가)
억새풀 우거지고 어둠 내린 험한 산길에 방황하며 헤메일 때 주님 음성을 들었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쉴 곳 없는 나그네 두 손을 마주 잡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비바람 천둥소리 들려오는 텅 빈 들판에 세상 노래 부르다가 주님 음성을 들었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검은 파도 설렐 때 나를 품에 안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메마른 빈들 지나 주님 따라 동산 오를 때 손 내밀어 내 손잡은 주님 나를 구원하셨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가시밭길 지날 때 나를 등에 업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사랑이 쉬운 줄 압니까? 왜 문제가 될까요? 방탕한 남편과 살면서 자기는 깨끗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계속해서 일어나죠. ‘너는 여자들이랑 음란한 짓을 일삼은 놈이고, 자신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은 점점 더 못된 짓만 하게 됩니다.
방탕한 남편과 산다면 저도 방탕한 사람이지요. 죄인을 사랑했으면 그도 죄인이지요. 탕자의 아버지도 탕자입니다. 아이들이 잘못 가고 있나요? 문제아가 있다면 나도 문제의 부모라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것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죠. 네가 문제아 이기 전에 내가 문제의 아버지다 -- 이 마음, 이 생각이 먼저 있어야 사랑이 통하고 ‘너의 영혼을 어떻게든 살리고 싶다’는 진심이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같이 되셨고,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죽으십니다. 치욕의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책임을 대신 지십니다. 저주를 대신 받으십니다. 육체만이 아닙니다. 명예와 의까지 다 주고, 그는 죄인의 모습으로 대신 죽으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만이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정말로 버려야 할 것을 버렸습니까?
참 평화를 알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자식이 사고를 쳐서 어디 갇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감옥인들 안 가겠습니까?
파출소인들 안가겠습니까? 그 어떤 자리인들 안 가겠습니까?
대접받는 자리, 칭찬 받는 자리, 영광의 자리는 아무나 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먹은 자리, 희생하는 자리는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생명을 내놓는 죽음의 자리는 정말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의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단순히 욕 좀 먹고, 비난받고 수모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이 정도 수준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한번 나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존재인가요?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존재입니까? 왜 겸손하지 못합니까? 왜 낮아지지 못합니까? 왜 버리지 못합니까? 왜 순종하지 못합니까?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참 평화, 참생명, 참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은혜는 힘에 논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높아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고, 자신의 모든 권리를 버리고, 우리 주님처럼 완전하게 죽어지게 될 때 비로소 이 땅에 진정한 평화, 생명, 자유,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 쉬운 것 같지마는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자기를 비우십시오. 그렇지 않고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자기가 다 없어지고 맙니다. 자꾸만 손해를 보고 바보가 됩니다. 할 수 있으면서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취할 수 있는 당연한 일에도 다 버리게 되고 맙니다. 스스로를 비하시키고, 완전히 비워버립니다.
우리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버릴 때 얻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기를 원하십니다.
남을 섬기는 종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낮아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죽기까지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들의 이름도 높아질 것이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예수님.
하늘도 산과 들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 조차 빛을 잃고 캄캄하게 되었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 끝 없도다. 오 주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나의 죄 너의 죄와 우리의 모든 죄를. 모두다 사 하시려 십자가 달리신 주.
얼굴과 손과 발에 흐르는 그 귀한 피. 골고다 언덕위를 붉게 물들이셨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 끝 없도다. 오 주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 끝 없도다. 오 주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당하신 고난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내내 고난이 끓일날이 없습니다. 육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영적인 고난도 당하셨습니다. 정신적인 고난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고향 나사렛에서 당한 일). 사람들은 육체적인 고난을 가하셨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의 모습입니다).
그가 당하신 고난이 얼마나 컸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 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 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수많은 고통을 피하시지 않았습니다. 거부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건진다는 말입니다. 끌어낸다는 말입니다. 살린다는 말입니다.
다시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새롭게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지옥형벌을 향해 끌려가는 우리들을 끌어 내어 천국으로 옮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 쓰러진 우리의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워 복된 가정으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을 날마다 새롭게 해서 소망가운데 있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바람소리거세고 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닷물에 빠져가는 가요? 쓰러져갑니까? 구원주이신 예수님을 붙드세요. 인생에서 실패했습니까?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습니까?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을 붙드십시오. 이제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도 없습니다. 이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십시오.
이 환경을 붙이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을까를 곰곰이 사색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복종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복종의 미덕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종하고 순종하면 자기가 무시되는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인격 때문에 복종하는 그 시간을 괴로워서 못 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쳐서 하나님 앞에 죽기까지 복종하십시오. 겸손히 낮추심으로써 다시 높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복종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복종하지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 믿음을 아는 자, 그 원리를 아는 자는 복종할 수가 있습니다. 낮추심과 높이심의 원리를 이해하는 자는 스스로 낮추어 복종하는 것입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게 하소서. 나를 낮추고 하나님 앞에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내 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 때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가는 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으나 주께서 함께하며 내 짐을 지시네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희망이 사라지고 친구 날 버릴 때 주 내게 속삭이며 새 희망 주시네
싸움이 맹렬하여 두려워 떨 때에 승리의 왕이 되신 주 음성 들리네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번민이 가득차고 눈물이 흐를 때 주 나의 곁에 오사 위로해주시네
환난이 닥쳐와서 어려움 당할 때 주님의 능력 입어 원수를 이기네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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