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kftG5J9fjE?si=HPUcH_ugSwJGwn4o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단 하나의 줄
빌(3:5-9)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가 무대에서 어려운 곡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뒤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가장 가느다란 줄이 툭하고 끊어져 버렸습니다. 이 줄이 없으면 연주는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는 얼굴을 찡그렸으나 즉흥적으로 계속 연주를 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지휘자가 기겁을 하는 가운데 또 한 줄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셋째 줄 마져 끊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의 바이올린에는 세개의 끊어진 줄이 늘어져 있었죠. 그러나 거장은 남아있는 한 줄을 가지고 끝까지 연주해 냈습니다.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환호했습니다. 그들은 외쳤죠. "파가니니, 한 개의 줄!" 그는 다시 그 한 줄 바이올린을 턱 밑에 고이고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오지 않고 그 대신 슬픔과 아픔이 오는 수가 있습니다. 또는 기약 없이 오래 기다리기도 하죠.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역경속에서 예수의 향기를 날리며 아름답게 피는 한 줄기 꽃이죠.
각자는 자기 속에 있는 것으로 아픔을 딛고 삶의 태도를 만들어 갑니다. 작가는 그저 글을 쓰고 화가는 자신의 아픔을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각자 자기의 일에 몰두하여 <인생>이란 작품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요? 바로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의 임재가 그의 말씀이 그리고 그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태도를 만들어 냅니다.
한 개의 줄을 가지고도 최상의 연주를 펼칠 수 있는 원동력,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인생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슬픈 일을 경험합니다. 병에 들기도 하고 사업의 실패를 맛보기도 합니다. 너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너무 기분 나쁜 일을 당하기도 하죠. 큰 손해를 경험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아픔들이 사람들에게 주어지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는 비통해 하죠. 홀로 이 넓은 세상에서 아픔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삶의 태도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교만하게도 하고 그것이 비참한 느낌을 갖게도 만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떠나고 한 가닥 목숨만을 부지하고 있을 때 나오는 삶의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위대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갈 수 있는 단 한 개의 줄,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군가가 당신한테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전도학에서는 이것을 간단하게 정의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요, 내 주인이요, 내 중심이요, 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목적이 아닌 수단인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출세하고, 병 낫고 복 받고, 또 예수님의 능력으로 내가 잘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사람, 그런 생각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한테는 내가 목적이요 그리스도는 수단이기 때문에 교회에 좀 다니다가도 뜻대로 안 되면 얼마든지... 미련없이 어디로든지 가 버릴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니까 그 수단은 얼마든지 바꿀수 있는 것이지요. 목적에 걸맞는 수단이 아니라고 생각 될 때에는 가차 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스도가 목적이요 주인이요 중심이 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속사람이 변화되고, 그 가치관이 전적으로 달라집니다. 바울은 예수께 미쳤습니다..
어떤 이는 사랑에 목메어 이성에 미쳐 살고, 어떤 이는 돈에 환장해 살았지만, 바울은 인생의 환란가운데, 예수께 미쳐서 살았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 26:24)
어느 분야든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혹 어떤 일에 통달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미쳐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께 제대로 미쳤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핍박인 줄 모르고 뛰었고, 배고픔이나 헐벗음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죽음도 불사할 만큼 그는 예수께 미쳤던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에 미쳤는지, 일어나자마자 자리에 누울 때까지 항상 방언으로 기도하며, 말씀보고, 주님을 찬양하며, 눈을 떠도 예수, 눈을 감아도 예수. 오직 예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좋던 것이 아직도 좋고, 술집 앞을 지나려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 은 아직 예수님을 온전히 좇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에는 이런 것이 나를 유익하게 한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해롭습니다. 취미도, 생각도, 행복관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일들 때문에 기뻐했으나 이제는 그런 것을 생각만 해도 비참해집니다. 예수님께 사로잡히기 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미쳤으나 이제는 그 정반대의 일을 위해 내 온 정성을 쏟고 삽니다. 심지어 행복관과 취미는 물론 입맛까지도 변합니다.
주없이 살 수 없네
나 홀로 있어도 아픈 마음 감싸줄 사람 하나 없어도 살 수 있어
나 꿈이 없어도 저 아름다운 수많은 별들 만질 수 없어도 살 수 있어
세상 소중한 모든 것 나 가질 수 있어
하지만 나의 마음속에 주님의 소망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네
주님의 사랑의 팔로 날 안아 주지 않는다면 단 한순간도 못 사네
난 주 없이 살 수 없네
나 홀로 있어도 아픈 마음 감싸줄 사람 하나 없어도 살 수 있어
나 꿈이 없어도 저 아름다운 수많은 별들 만질 수 없어도 살 수 있어
세상 소중한 모든 것 나 가질 수 있어
하지만 나의 마음속에 주님의 소망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네
주님의 사랑의 팔로 날 안아 주지 않는다면 단 한순간도 못 사네
난 주 없이 살 수 없네
오 주님 내 생명 되시네 내 호흡과 같네 오 주님 내게 모두 주셨네
주 나의 모든 것
진실로 나의 마음속에 주님의 소망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네
주님의 사랑의 팔로 날 안아주지 않는다면 단 한순간도 못 사네
난 주 없이 살 수 없네 난 한순간도 못 사네
난 주 없이 살 수 없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의 「옥중서신」에 보면 그는 이런 시 한편을 썼습니다.
“나는 어떤 자일까?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떤 자이건, 아!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십니다. 내가 누구이든, 선하든 악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나는 분명히 당신의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나 자신도 나를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살아올 때는 자신의 인생을 다른 것에 붙잡혀 살때는 세상사람이 원하는 대로 그런 삶을 살았지만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삶을 살면서 예수님의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빌7절-9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그 자신은 유대 사람으로서 유대 언어와 습관과 생활방식을 지닌 철저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것은 부모와 그의 할례를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가 있는데 일부 유대주의자들과는 달리 그의 부모는 양쪽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것을 강조함으로써 이방인이었다가 개종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 백성중에 하나인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어느 면에서도 다른 유대주의자들보다 못하지 않음을 출신 배경을 통해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크게 존중을 받았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으며 백성 가운데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의 일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다 당시 율법과 동등하게 해석되었던 자기들의 규칙을 덧붙여 수많은 시행 세칙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에 열성이었고 유전을 중요시하며 외부적 시행 시칙들에 주의를 기울이던 이들은 사람에게는 존경과 찬사를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영적무지를 나타낸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적인 의인으로서 바울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모세 율법에 기록된 모든 규례를 따르는 데에 매우 신중했으므로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아무도 흠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 전의 교회를 핍박했던 열심을 보아 그가 얼마나 유대교를 위하는 자였는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로 변하기 이전의 나를 괴롭히던 수 많은 사울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 맡기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당신의 신앙을 핍박하던 남편, 시누, 친구. 직장상사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은 자신의 강퍅함과 고집, 가치관들을 버리고 영적이고 예수님을 위한 생애를 사는 멋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을 것입니다.
가끔 믿는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 농담하는 것을 듣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어서 손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마실 것 못 마시고, 먹을 것 못 먹고, 가고 싶은 곳에 못 갑니다. 특히 주일날 골프 치러 못 갑니다."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앙에 있어 가치판단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본문 빌립보서 3장 7절을 보면, 그는 이전에 유익하던 것을 지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해로 여긴다'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죠. 세상의 자랑거리가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고 새로운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데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류대학 나왔다는 것, 우리집 가문이 어떻다는 것, 왕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
세상에서 나의 지위가 어떻다는 것.
세상의 모든 자랑할 만한 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예수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 새로운 인생의 삶을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절 이하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전에 그처럼 자기가 좋아서 추구하던 모든 것, 명예, 자랑 등을 다 내버렸고, 전에 아끼던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 다 분토로 여기고, 잃어버리고, 해로 여겼습니다.
신앙이란 세상의 모든 보화와 그리스도 한 분을 서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해 나머지 것을 다 팔아치우는 마음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마음, 그 뜻, 그 기쁨이 내 가슴과 내 몸에 전달되고 일체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내가 동일시되는 체험,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입니다.
어린 아기들은 신기하게도 자기 어머니를 정확히 알아봅니다. 다른 사람이 안으면 울고 제 엄마가 안으면 좋아합니다. 자기 엄마와 눈이 마주치면 좋다고 까르르 웃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기가 무엇으로 어머니를 안다는 것입니까? 어머니의 나이를 압니까? 생일을 압니까? 결혼 날짜를 압니까? 아기가 안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하는 것, 이것을 아기의 온몸으로 느끼고 알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예수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스도처럼 죽고 그리스도처럼 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로 그러한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빌립보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불편한 몸을 가지고도 늘 감사하며 늘 찬송하며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고, 온 세계를 바꾸어 놓은 큰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주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세상 어딜가나 슬픔뿐이요 먹고자고 애써 일 할뿐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여 나는 무엇하리까?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주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어둠 속에 손펴 도움 바랄 때 돌연 빛이 나를 비추네 예수님이 서서 눈물흘리며
지체말고 오라하시네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주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2차 세계 대전 시에 유태인 빅톨 프랭클 박사는 여러 해 동안 나치 수용소에서 수치와 학대를 당하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석방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치료의 획기적인 방법을 내놓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치료했던 방법이었습니다.
시련의 초반에 그는 게쉬타포에게 끌려갔습니다. 별안간 어느 날 모든 것 집과 가족, 모든 소유물, 권리, 자유와 결혼반지까지 빼앗겨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박박 밀었고 벌거벗겨진 그는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았고 너무도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유태인들은 급속히 죽어갔습니다. 또한 이것이 당국자의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주위의 유태인들은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울고 미치고... 그도 역시 잔악한 행위를 즐기는 자들 앞에 세워진 인간 이하의 무력한 희생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욕과 배고픔과 불결함은 끝이 없었죠. 하루 하루가 저주였고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비참한 동물로 만들어져 갔습니다. 죽음보다도 못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그를 살아남게 만들었던가? 그는 문득 아직 자기에게 빼앗기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누가 그에게 어떤 일을 행하든,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던, 삶의 태도를 선택하는 권한만은 그에게 있었습니다.
분노에 몸을 던져 버릴 것인가? 아니면 용서할 것인가? 삶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아름답게 살아갈 것인가? 참고 참으면서 아직도 사람으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죽는 순간까지 갈 것인가? 자포자기 속에 그리고 자기 연민 속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하소연하고 슬퍼하고 동정받고 이성이 마비되어 미쳐 갈 것인가? 이 상황은 마치 "빅톨 프랭클, 한 개의 줄!" 처럼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말했죠. 내가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일을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다.“라고 쉴 새도 없이 계속해서 몰려오는 고통을 이야기를 하죠.
세상에서 우리는 정말, 쉬지 않고 고난을 맛봅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불쾌한 상황을 맛보게 될 때 아픔을 경험하게 될 때 거기에 대처하는 태도가 우리의 위대함을 결정하죠.
제가 성경의 인물 가운데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인물은 바로 「에녹」입니다.
정말로 평범하게 살아간 사람. 아브라함처럼, 노아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바울처럼. 살아가지는 못했지만 일생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변하지 않는 믿음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 사람. 정말로 한낮 농사지며 좋은 학벌도 가문도 내세울 만한 업적도 없지만 하늘로 들려 올라간 사람.
당신의 인생에 모든 것이 다 떠나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를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록 모든 소망은 끊어지고 마지막 목숨까지 위태로워졌을지라도 마지막 한 줄의 연주를 계속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내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줄, 바로 ”예수 그리스도!“
주님, 니콜로 파가니니가 바이올린 줄이 다 끊어지고, 단 하나의 줄로도 연주를 마친 것처럼 내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게 하옵소서.
오늘을 위한 기도
잃어버린 것들에 애달파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일에 탐욕하지 않으며 나의 나됨 버리고 오직 주님 내 안에
살아있는 오늘이 되게 하옵소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으며 부요해도 오만하지 않으며
모두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억울한 일 당해도 원통하지 않으며
소중한 것 상실해도 절망하지 않으며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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