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산책/빌립보서

주은총목사/ 빌립보서13/ 무지개를 찾아다시나요?

by 주은총목사 2024. 12. 27.

https://youtu.be/BmAAIA5I-es?si=27MZttIplXtkDOEK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13/ 무지개를 찾아다시나요?(31216)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8세기 프랑스의 가장 대표적인 화학자 르불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화학 공정에는 소다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소다를 만들기가 당시에는 대단히 어려웠죠. 자연히 값도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수백만 프랑의 현상금을 걸고 싸게 소다를 만드는 법을 찾았습니다. 응모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르불랑 교수였죠. 획기적인 공정식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는 정부의 지원으로 공정탑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소다는 싼값으로 대량 생산되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버티면, 몇 일 있으면 수백만 프랑의 거액이 주어지게 되었죠. 이제...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차지하는 순간이 얼마나 기대가 차고 마음이 들떠 있었을까요?

 

그러나 아뿔싸.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대 혼란이었죠. 돈을 약속한 정부는 넘어지고 르불랑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르불랑 박사는 사라졌습니다. 아무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 가족과 제자들이 며칠 걸려서 겨우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어디서 발견이 되었을까요? 바로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만든 공정탑 속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권총으로 자기 이마를 쏴 자살한 시체로 말이죠. 그는 돈과 명예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좌절과 낙망에 빠져 탑 속에서 발견되고 만 것이죠.

 

사울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그는 신뢰할만한 육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였지만, 헛된 자신을 발견하고 "가장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로지 하나님의 것으로만 살기로 결정합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기를 갈망합니다. 그의 안에 영원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은 거기 비하면 그림자였을 뿐이죠.

 

우리는 먼데서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러한 허무를 체험합니다. 사춘기 때는 사랑에, 청년의 시절에는 결혼에, 3,40대에는 성공, 가정, 자식, 집 장만에 그러다가 덜컥 갱년기가 오고 인생의 황혼이 오면 허망해 집니다.

 

한평생을 남편을 바라보고, 자식을 키우고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사라져 버린.. 희생만 하는 삶. 그들에게 자신의 시간과 수십 년의 인생을 주었기에 30 여년이 지나가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나의 프레임이 없이 홀로 인생을 개척하지 않았기에 남에게 의지하는 삶밖에 남지를 않았던 것이죠. 나 자신을 어느 새 잃어버렸습니다. 닭 쫓던 개꼴처럼 남편도 자식도 품을 떠났습니다. 공허합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삶의 의욕을 잃어 버렸습니다. 밥맛도 없습니다.

 

오매부망, 애지중지 키운 자식은 떠나간 뒤에 전화한 통하기가 힘들 정도로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혹시나 자식에게 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또 다른 의지할 대상을 찾지만 기대 한것 만큼 실망도 큽니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부아만 끓어 오르고 삶의 의욕도 없고 누워만 있습니다.

 

이제는 남편의 인생, 자식의 인생, 할머니의 인생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제는 자신의 인생을 사십시오. 어떻게 인생의 방향을 설정할지를 오늘 하나님 안에서 찾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귀중한 인생의 철학을 확실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성공 여부는 그가 세운 목적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가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세웁니다. 내 욕망을 따라 세우거나, 어떤 때에는 남이 세운 목적이 좋아보여 그것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처한 입지(立地)나 자신의 달란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세워놓은 목표가 보기 좋아서 '나도 저렇게 한 번 해보았으면'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상담학을 공부하며 결혼에 관하여 쓴 어떤 책을 읽어 보았더니, 결혼에 대하여 범하기 쉬운 가장 무서운 생각은 친구가 결혼하는 걸 보고 나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친구의 신랑과 비슷한 학벌, 비슷한 조건, 그 아래여서는 안 되고 그보다 조금 나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하는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실한 자기 뜻이 있어 결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질투로 결혼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출발했으니 실패하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을까요?

 

목적을 잘 못 세우면 그것이 곧 실패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은 그가 세운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따르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목적은 자기 스스로 세운 목적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목적을 자신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질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세워 준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은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의 원문은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올림픽 경기 때 100미터 200미터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보면 땅에 몸을 기울이고 있다가 ''하고 신호가 나면 총알같이 달려갑니다.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달려가는 선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선수에게는 딴생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 달리는 거죠. 바울은 그와 같은 경주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쫓아가는 과정(Process) 그 자체가 <자기의 생애>라는 것입니다. 경기장에 선 자기, 이미 출발해서 막 달려가고 있는 그 현장, 그 시간이 '나 바울'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히브리 종교에 능통하고 정통 바리새파이며, 학문으로는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을 제일 우러러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능통한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어느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못지 않은 공부를 하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을 제일로 쳤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모든 것에 능통한 마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대에서 공부한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고집과 학식이 하늘을 찌르는데. 그런 사람이 대체 누구의 말을 들을까요?

 

그런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이 핍박하고 잡아들이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그 때에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려옵니다. 그것은 정오에 일어난 일이었죠. 만약 밤 12시에 그랬다면 꿈으로 돌릴 수도 있고, 혹 산속에서 보았다면 내가 환상을 보았나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웃긴 것은 기도 시간도 아닙니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죠. 갑자기 정오에 환한 빛이 내려옵니다. "사울아"하고 부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는 꿇어 엎드리게 됩니다. 그는 아주 야무진 사람이라 그런 경황중에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묻습니다.

 

"주여, 뉘십니까?" 얼마나 대담한 사람입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마침내 바울은 예수의 포로가 됩니다. "잘못했습니다.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어떤 요구나 무슨 소원이나 그런 것은 아랑곳없이 예수님은 직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다메섹으로 가라.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일방적인 통고입니다.

 

바울은 그 길로 다메섹으로 들어가 아나니야를 만나 안수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한마디로 예수의 포로가 되죠. 지금까지 가던 길을 멈추고 지금까지 하려고 했던 것을 다 포기했죠. 그러나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 수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마침내 바울은 생활 철학을 일신해 버립니다. 그는 온전히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몸만 포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신앙이, 이상(理想)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적까지 바꾸어 버렸습니다.

 

바리톤 김영민이 부릅니다. 그대 무지개를 찾아다시나요?

무지개를 찾아 다니시나요

돌고 도는 생활 하시나요

헛된 모든 꿈을 다가지고

주님 발 앞에 모두 놓아요

 

<후렴>

드려요 모두 다 주님께 드려요

깨진 꿈 상한 맘 지친 몸

드려요 모두 다 주님께 드려요

슬픈 마음 기쁨으로 변해요

 

2.

맑은 날만 있다 하지 않아요

궂은 날도 있을 꺼예요

그런 날도 찬송할 수 있지요

주님이 우리 도와 주세요

 

<후렴>

드려요 모두 다 주님께 드려요

깨진 꿈 상한 맘 지친 몸

드려요 모두 다 주님께 드려요

슬픈 마음 기쁨으로 변해요

 

바울은 말하죠. "나는 자유가 없다."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다메섹에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아니, 이제 뒤늦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으면, 바울이 훨훨 복음 전도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게 하시지 하나님은 그를 쇠사슬에 꽁꽁 묶어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얼마나 불만이 많았을까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일단 붙잡힌 이상, 전에 좋아하던 것을 다 내버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됩니다. "붙들린 것 감사합니다" "실패한 것 감사합니다" "다 망한 것 감사합니다."하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좇아갔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곳으로 불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깊으신 뜻이 있어서, 그것을 위하여 쇠사슬에 딱 묶어 놓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여기서 '온전히 이루었다'는 말의 어원은 '텔레이오스'입니다. 완성을 뜻하는 철학적 용어이죠.

충분히 성숙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이루었다' 함은 성숙한 제자, 그리스도의 의로써 세례받은 완전한 교인, 순교까지도 할 수 있는 교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순교하게 되면 언제라도 ""하고 죽을 수 있는 성숙한 교인을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 아직 순교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일만한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만 가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진실하고 솔직한 고백인가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천사의 얼굴로 찬송하는 것을 본 그로서는, 스데반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완성이요 성숙인데, 자기는 아직도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갔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마세요. 과거에 너무 집착하여 현재 주어진 삶에서 세월을 허송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두 가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먼저 교회를 핍박한 것을 잊어 버려야 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사도행전 7:58). 그는 수많은 교인들을 박해하고, 그는 열심히 교회를 핍박했습니다(빌립보서 3:6). 그러나 복음을 받고 변화된 이후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일입니다. 이러한 것을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집착한다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죄의식(guilt)에 빠져 오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은 우편 강도가 회개했을 때 즉시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고 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를 완전히 옮겨 기억지도 않게 하십니다.

 

하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쫓아 푯대를 향하여 그는 달려갔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1-2)

 

예수님만 바라보세요. 그리고 바다위를 걸으세요. 당신의 눈이 예수님을 고정하지 않고 바다를 바라보고, 자식을 바라다보고, 남편을 바라다보고, 사람을 바라다 본다면... 당신은 그들의 영향력을 크게 받아서 휘청거리며 흔들흔들하고 하루의 삶이 망가질 것입니다.

 

그렇게 기분과 마음이 지랄같이 엉망이 된 채, 며칠씩 못 일어나고 갈피를 못 잡고 바닷물속으로 첨벙첨벙 깊숙이 빠져들어 갈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지면서 정신병 걸린 미친년처럼 제 정신이 아니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 영혼이 마비가 됩니다.

 

그러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하면 물위를 걸을 수가 있습니다. 당신이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홀로서기를 한다면, 오히려 도망갔던 그들이 당신의 품속으로 돌아올 겁니다. 잡으려고 하면 숨통이 막혀서 오히려 더 멀리 도망가죠.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예수님께 시선을 맞추고 고정하면서 물 위를 걷는 것입니다. 바람도 일고, 사람들의 말도 많고 파도도 높고 폭풍우가 거세게 불어 닥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로 주신 소명의 땅을 향해 가면서 요양원도 세워 나가고, 교회도 세워 나가도, 하나님이 주신 일들을 홀로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땅으로 한 걸음씩 나갈 때에 수많은 적들과 견고한 성이 두렵게 할 것입니다. 소송도 계속해서 당하고 비방도 많고, 당신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고, 당신에게 능력도 없고 문제가 많다고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누수가 터지듯이 문제는 계속해서 이것 저곳에서 빵빵터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고린도전서, 데살로니가,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믿는 사람, 종교인, 유대인, 그리고 주님의 일꾼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그렇게 높이 칭찬받던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쇠고랑에 묶이어 매도 수없이 맞았고 굶기도 셀 수 없이 하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곁을 떠났습니다. “너에게 문제가 있어서 사람들이 떠나는 거야!” 라는 사람들의 시선과 말, 무력함

과 가난함 홀로 교회를 지키는 외로움 그 가운데서 자신을 보는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부요함과 권능 안에서 자신을 보려고 안간힘을 다 하였습니다. 오직 그에게는 한 가지의 목표만이 있었습니다. 오직 하늘의 부르신 부름의 상을 쫓아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

 

오늘도 하룻길 나그네 길을 나 혼자 가야 해

멀고도 험한 길 나그네 길을 나 혼자 가야 해

 

나 혼자 가야 해 아 아 아

갈래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갈래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내 집은 갈릴리 해변 푸른 풀밭 쉬어갈 수 있는데

 

내 사명 다하기까지 갈 수 없네 그리운 내 본향 집

그리운 내 본향 집 아 아 아

갈래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갈래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예수 믿기 전에 하던 못된 것, 취미, 그릇된 습관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려야 하는데, 한 마디로 입맛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아서, 이를테면 지난날에 빠지던 취미 같은 것에 미련이 남아서 심심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개척 교회에 까지 와서 사람이 없으니까 '심심해서 못 견디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혼들을 위한 기도로 매일의 삶을 채워 나가야 하는 데도. 기도는 널뛰기를 하고 하늘의 능력은 반토막이 나는 거죠. 하루 하루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가야 하는데, 겨우 자신의 신앙만을 유지를 하죠. 아니, 유지라도 해도 다행입니다. 개척교회에 사람이 하나라도 버티고 있으면 최소한 온기라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마저도 희생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다가 뛰쳐 나가죠.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구두닦이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잡힌 바 된 그것, 주님이 주신 소명의 길, 그 길로 기쁜 마음으로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우리 삶의 존재 이유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존재하죠. 내가 그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조차 하나님이 바로 잡으시며 나타내십니다. 그러니 견디어 내십시오. 버티십시오. 이를 악물고 참아 내십시오.

 

본문 15절에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또 한번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계시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16절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너희가 어디까지 달려왔는지 뒤돌아보지 말고, 능력이 있든 없든지, 말이 많든지 없든지. 그대로 앞으로 밀고 나가라, 추진하라고 명령 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의 안에서 발견되는 것, 이것이 평생을 통한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의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었습니다. 전 처럼 자신의 잘남이나 위대함을 허세로 내세우려고 포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찬란하고 완전한 의는 바울의 의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과 죄 속에서 자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연약하고 쓰러지는 자신을 부여잡고 날마다 새로운 힘으로 새롭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보였지만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였습니다. 배고픔이나 부요함. 욕됨이나 영광.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을 초월해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이고 영원한 나라고 따로 없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보라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거늘, 바울이 어디 있는지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그의 푯대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달음질을 마쳤습니다. 보라 그의 열매를. 세세 대대로 누려지는 구원의 열매를. 보라 그의 위대한 유산을, 그리고 면류관을.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주님,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게 하소서.

 

사람의 말이나 환경, 거센 폭풍이나 파도들을 보지 말고 오직 시선을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첨벙첨벙 물에 빠져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로 인하여 매일의 삶에 일어날 새 힘을 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나 주의 믿음 갖고 홀로 걸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노래부르네. 폭풍 구름 몰아치고 하늘 덮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실망치 않네. 주는 내 친구- 진실한 친구 세상 끝까지- 주를 믿으리 폭풍 구름 몰아치고 하늘 덮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실망치 않네. 내 주는 선한 목자 인도하시네.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시니 나 주를 따라가리. 언제까지나-. 주는 내 목자- 선하신 목자 어디 가든지- 함께 하시네. 주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시니 나 주를 따라가리.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