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2:18~3:10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죠. 그리고 온 지면에 있는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사람의 식물이 되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지으신 그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습니다. (창 1:26-31)
하나님이 보시기에 에덴동산에서 안주하며 사랑하며 사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보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흐뭇했죠.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속아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불순종했죠.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숨어 있는 그들을 마치 범죄자 지명수배하듯 찾아내듯이 찾아 가셔서 질문을 하셨죠.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초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너무 잘 숨어서 하나님이 못 찾겠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가슴 아픈 탄식이죠.
저는 창세기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최초의 질문을 묵상할 때, 사역에 지쳐 있는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도 하나님과도 멀어지지만, 지쳐 있을 때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우울하고 무기력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 버리면 인생의 의미를 잃어 버립니다. 의욕도 없어지죠. 사랑을 한다는 것은 엔돌핀입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이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잃어 버려면 인생의 길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잃고 인생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하나님이 친히 아담에게 찾아오셨죠.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짧은 한 마디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죠.
첫째, 아담의 위치를 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아담이 숨은 장소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죠. 당당하게 동산을 주관하고 다스리며 살아가야 할 네가 왜 그렇게 초라하게 나무 뒤에 숨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 왜,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왜 숨어 있는 거니?”
이것은 바로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할 인간의 본분을 망각하고 피조물로서의 자기 위치를 떠나버린 우리들을 찾으시는 거죠. 하나님이 잃어버린 심령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나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젠 나를 피해 달아났구나. 전에는 네가 행복하더니 지금은 불행하게 되었구나. 너는 전에는 영광스럽고 복스러운 나의 형상을 지녔었는데 지금 그 형상이 어떻게 되었느냐? 나의 형상이 네 안에서 어그러지고 너는 이제 네 자신을 흙으로 만들어 다만 감각적이며 마귀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오, 불쌍한 아담이여.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지금 네 자신을 보아라. 너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비참한 존재가 된 것을 발견하느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두고 슬퍼하고 계시죠. 사랑하는 자녀가 방탕한 길로 나아갔습니다. 맨나 학교에 가서 학부모 상담을 하고 소년원에 가기 직전이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자녀로 인해 살기도 싫고 인생의 재미도 없고 퇴근 후에 집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서 아파트 주차장에서 한참을 울고 들어가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달려갔죠. 아버지는 달려갔습니다. 쾌락과 방탕과 죄에 몸을 맡긴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복음성가)
억새풀 우거지고 어둠 내린 험한 산길에 방황하며 헤메일 때 주님 음성을 들었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쉴 곳 없는 나그네 두 손을 마주 잡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비바람 천둥소리 들려오는 텅 빈 들판에 세상 노래 부르다가 주님 음성을 들었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검은 파도 설렐 때 나를 품에 안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메마른 빈들 지나 주님 따라 동산 오를 때 손 내밀어 내 손잡은 주님 나를 구원하셨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가시밭길 지날 때 나를 등에 업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엘리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통쾌한 승리를 거둔 사람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의 역사를 이룬 인물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오는 권력 앞에서 갑자기 나약한 존재가 돼버립니다.
이세벨은 바알 제사장들의 배후가 되어 그들을 지원하면서, 여호와 신앙을 지키는 제사장들을 죽이고 가두고 핍박하며 씨를 말리려 하였죠.
여호와 신앙의 투사 엘리야가 그녀에게는 공공의 적 1호였습니다.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일이면 네가 죽을 차례라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세상과 권력을 보고 좌절했고 절망했습니다. 기적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엘리야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의욕을 잃고 실의에 빠져 도망친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죽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무기력하였죠. 간신히 떡과 물에 의자하여 용기를 얻은 엘리야는 40일 밤낮을 걷고 걸어 호렙산 굴을 찾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호렙산의 굴속에 머물고 있는 엘리야에게 나타나 질문을 합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열왕기상 19장 13절)
엘리야가 이렇게 대답을 하죠.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카노 키네티)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열심히 특심하였습니다. 열심히 특심할 정도로 열심히 했는데 왜 실패했느냐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었죠. 하나님 내가 누구보다 기도도 전도도 헌금도 많이 하고 죽도록 충성하였는데 왜 이렇습니까? 더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이 그토록 헌신적으로 일했는데 성과가 없었습니다.
자기는 <열심히 특심>일 정도로 최선을 다 했는데 왜 실패했느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실패와 좌절에 대한 상처가 가슴에 컸습니다.
과거의 실패들을 잊지 못하고 곱씹고 되씹으며 토굴 속에 드러누워 신음합니다. 뼈가 욱신거릴 정도로 아픕니다. 잠을 잘 못 이루고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물론 점점 열심히 식어지고 무기력하고 우울해졌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못 믿고 신앙 생활을 해 왔나’라는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제단이 다 허물어 지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언약이 사라졌습니다. 오직 나만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천지에 이런 지독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혼자가 되어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죠.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함부로 말하고 판단하면 안됩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그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른 교파는 다 죽었고 다른 교회는 다 죽었고 내 교회만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죠. 다른 교회에는 복음이 없고 우리 교회에만 복음이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발상이죠. 다른 교인은 다 틀렸고 나만 옳다고 하는 자세는 영적 교만입니다.
. 개척교회에서 교회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 어느 한 가정의 집사 부부가 10여 년을 죽도록 충성 봉사하였습니다. 담임목사님의 막내 자녀가 대학을 가기까지 물질적으로라도 힘이 되어 주기 위해서 싫어도 꾸욱 참았습니다. 헌신과 수고에 비해서 제대로 된 교회 성장과 부흥이 없으니 상처들이 엄청나게 쌓여 갔습니다. 결국은 개척교회에서는 제대로 된 주일학교, 청년부가 없었기에 자녀들의 신앙성장을 위해서 대형교회로 옮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을 합니다. 작은 교회는 문제도 많고 상처도 많고 돈도 많이 들어. 그러니까 큰 교회를 다녀야 되. 큰 교회를 다니니까 사회적으로도 인지도도 있고 얼마나 당당해. 라는 자존감도 높아졌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이나 이적, 대단한 업적이나 성공, 놀라운 신유의 역사, 웅장하고 으리으리한 성전, 수많은 성도가 모이는 대형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크고 작고를 떠나서,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사역의 현장입니다. 그 사역의 현장에서 맡은바 사역을 잘 감당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작고 낮은 모습으로 사명을 잘 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엘리야는 '오직 나만 남았다' 고 여기고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해온 것처럼 여겼겠지만 사실상 그 뒤에는 7천명의 남은 자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숨은 기도의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도 남은 자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기도하는 그들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복음의 횃불로 타오르게 하실 것입니다.
엘리야의 불만이 무엇인가요?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제단이 다 허물어지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하며 주의 선지자들을 핍박한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생명을 찾으러 다닌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비관적이 되었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이세벨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면서도 생명을 위협하는 경제적 문제로 두려워합니다. 이때 엘리야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주님 비록 나만 남았고 이세벨이 나의 생명을 찾아 다니지만 주께서 저를 지금까지 지켜주셨으니 앞으로도 저를 보호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의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이세벨의 손에 달려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지 않나요? 그런데 왜 잊고 살까요? 자신의 열심과 특심과 노력에 비해 성과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지쳐 있었죠. 더군다나 하나님이 하시리라는 믿음이 없으니 어둠침침한 절망의 동굴에 숨어있을 수 밖에는요.
하나님은 엘리야의 이런 상황을 하시고 그 놀라운 이적이 아니라 너무도 미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다시 찾았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야, 네가 왜 이곳에 있느냐? 네 길을 돌이켜라. 네 길을 돌이켜서 네가 일해야 할 그곳으로 가라. ”
레나 마리아, 스웨덴 태생인 그녀는 선천적 장애인입니다. 그녀는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마저 짧은 중증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크리스천이기에, 이는 하나님이 주신 아이로 확신하고 그녀를 정상아와 똑같이 양육했고, 그녀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신앙을 주입했습니다.
그 교육과 신앙을 힘입어 그녀는 정상인처럼 일상생활은 물론이요, 십자수, 요리와 피아노, 운전, 성가대 지휘에 이르기까지 하나밖에 없는 오른발로 많은 것들을 해나갔습니다. 심지어 세계 장애인 수영선수권대회에 스웨덴 대표로 나가 4개의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천상의 목소리로 스톡홀름 음악대학 현대음악과를 졸업하고 세계적인 가스펠 가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실, 레나 마리아의 인생을 몇 줄의 글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 올곧은 신앙으로 그가 정상인과 같이 생활하고, 세계적인 복음가수가 되었지만,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고군분투했을 그의 삶, 눈물겨운 노력을 어찌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 중증장애인이 정상인의 삶을 살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넘어서며 얼마나 피땀 흘리는 노력을 많이 했겠습니까.
‘노력’이 가장 무서운 무기인 것은, 노력 속에는 엄청난 부지런함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노력하면 레나 마리아처럼 절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당신은 사지가 멀쩡하지요? 두 팔과 두 다리가 있지요? 그런데도 성장하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 때문도 아니요, 환경 때문도 아니요, 부모 때문도 아니요, 오직 당신이 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있는 두 친구 바로, ‘기도와 노력’이죠. 엘리야가 홍역처럼 겪은 지독한 우울증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기도와 부지런함’을 다시 찾기를 축복합니다. 저 역시, 하루 4시간씩 기본으로 기도를 하고 부단히 글을 쓰고 전도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우울증’과 ‘무기력’ ‘게으름’이란 블랙홀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거기에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 깊이 빠져들 뿐이지요. 옛말에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무기력과 게으름은 마약과도 같아서 떨쳐버리기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게으름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당신의 인생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성경에 명확하게 말씀하셨거든요.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13:4),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누가복음 13장에 3년 동안 열매를 못 맺는 무화과나무를 주인이 찍어버리라고 하자 과원지기가,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라고 말하며 1년의 유예기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동안 게으름 피웠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부터 부지런히 노력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면 과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1년만 부지런을 떨어도 소출을 낼 수 있습니다. 1년만 부지런히 기도해보세요. 1년만 부지런히 책을 읽어보세요. 1년만 부지런히 운동해보세요. 분명한 결과가 나옵니다. 1년을 부지런 떨다 보면 부지런이 습관이 되어 인생을 바꾸게 됩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적 기본원리들을 다시 장착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시급한 문제란? 하나님이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는 것이고, 떠나라고 하면 떠나는 것이죠. <17:5 "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는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과거의 실패와 상처 아픔, 사업의 경제적 문제가 아니고 부도나 이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던 삶을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그 사랑 멀리 떠나서 무너진 나의 삶 속에 잊혀진 주 은혜
돌 같은 내 마음 어루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를 사랑합니다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라
주 너를 보호하시고 널 붙드시리 너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의 자녀라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이전에 행한 모든 일 생각지 않으리
사막에 강물과 길을 내시는 주 내 안에 새 일 행하실 주만 바라봅니다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라
주 너를 보호하시고 널 붙드시리 너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의 자녀라
다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질문하신 장면으로 되돌아 갑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은, 두 번째로, 아담의 상태를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상태를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니죠. 아담의 범죄 행위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은 그저 ‘두렵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책임을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가정이 망가지고 경제가 파산이 나고 부숴 졌지만, 죽어도 ‘신용불량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 같이 죽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고파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존심이 상해 죽고, /배신 때문에 죽습니다. /명예를 잃으면 죽습니다. 결국은 책임회피를 합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도록 주신 그 여자가 줘서 먹은 것입니다.” 이 여자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즉, 하나님 책임이라는 거죠.
지금 현대인의 상태가 아주 심각합니다. 모두가 다 자신의 문제점이 이 사회와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착각하고 있죠.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도, 자신의 방탕도 모두 다른 사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죠. 하와를 탓하고 하와는 뱀을 탓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지으신 손길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질문을 거듭 네 번을 하죠. 질문이 거듭되면서 네 번째 질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마음을 명백히 알 수 있게 됩니다. 무슨 대답을 기대하셨을까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했고 교만했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탓하기에 급급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은 없습니까. 불순종과 방황의 이유를 환경 탓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돌리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진실한 회개입니다.
우리는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는 어디인지, 자신의 신앙상태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나를 보시고 “네가 어디 있느냐” 하며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소리는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 모습이 비록 부끄럽고 추할지라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을 의지합시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안아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일흔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네가 어디 있느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회사와 어떤 거래 계약을 맺기 위해서나 혹은 국가 기관의 무슨 공사를 수주받기 위해서 상대방 회사의 관계자나 해당 부처의 공무원을 만나 부탁을 하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부탁한 쪽으로서는 제일 애매모호하고 곤란한 대답이 바로 "좀 기다려 봅시다."나 "곧 될 겁니다."라는 말이라고 하죠.
차라리 그냥 안 된다고 잘라 말하면 깨끗이 포기라도 할 수 있겠는데, 그처럼 '될 듯 안 될 듯한' 약속을 해 주면 기다리는 쪽에서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믿고 기다렸다가 잘되면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으니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좀'과 '곧'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될 것인지는 아무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이니 잘못하다가는 다른 기회들마저 놓치는 가운데 손해만 크게 보고 끝나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인간사회에서는 그런 불확실한 약속 하나 믿고 기다리다가 끝내 '쫄딱 망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신실함을 붙잡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언제나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용서해주시고 품어주시는 주님. 이 시간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길 원합니다. 혹시 내 삶 속에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모습은 없는지요. 언제나 자기 위치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네가 어디 있느냐’
주님, 이 시간 주님의 넓으신 사랑 의지하여 회개하오니 용서하옵소서. 믿음도, 기도도, 전도도, 노력도, 부지런함도, 기쁨도 많이 잃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와 동행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 영혼은 비록 갈해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세상 풍파 속에 있어도 나를 인도하실 이 믿네
저 높은 곳에서 나를 항상 바라보시는 주님
나의 갈 길 막막하여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나 몸과 맘 매일 지쳐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세상 근심 속에 있어도 나를 도와주실 이 믿네
저 높은 곳에서 나를 항상 지켜주시는 주님
나의 갈 길 멀고 험해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나 모든 삶 연약하여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세상 불안 속에 있어도 나와 함께 하실이 믿네
저 높은 곳에서 나를 항상 위로하시는 주님
나의 갈 길 끝을 몰라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나 소망 희미하여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세상 의심 속에 있어도 말씀 증거 하실이 믿네
저 높은 곳에서 나를 항상 평안 주시는 주님
나의 갈 길 빛이 되신 주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예수 그리스도는 날마다 쓰러지는 우리에게 진정한 능력이요 참된 소망이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별수 없이 죄에 쓰러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 안에서 구원의 기쁨,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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