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래
본문: 창16:1~6
(창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류마티스 내과 교수 김현아씨가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라는 책을 썼죠. 언제 시간이 되면 책을 정독하기를 권합니다. (김현아는 류마티스, 남편 정청기 교수는 신경외과 의사다). 그녀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남편과 저 같은 안정된 사람들은 냇물 따라 흘러가는 인생을 살아요. 그러다 50대에 이르러 망망대해를 만났죠. 저희 집안에 공개할 수 없는 법적 송사가 16개가 걸렸고 지금은 그중 14개를 해결했어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김현아 에세이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중에서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아이는 천천히 팔소매를 걷어 보였다. 하얀 팔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가로로 그어진 칼자국들이 있었다. 사회성이 없어 힘들어하는 큰애에 비해 둘째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둘째가 무너지고 있었다.’-
김현아의 둘째 딸 안나는 7년 동안 정신 병동에 16번 입원했습니다. 카카오톡 메시지 확인 표시가 바뀌지 않아도 내 아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사는 삶. 그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고 했죠.
김현아씨의 딸은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양극성 장애는 조증과 울증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병이죠. 우울증은 본인이 가장 힘들고 조울증은 옆 사람이 함께 힘듭니다.
이 병을 가진 환자들이 대부분 문제를 주변 사람에게 투사하면서 환자와 부모가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가 흔해요. 주변을 보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둘러 경찰을 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양극성 장애 환자는 2000년대 들어서 성인은 두 배. 젊은 층은 40배 가까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담은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죠.
우리나라 통계청이 발표한 데이터를 보면 2015년 이후 남성 자살자가 19.7% 증가한 데 비해 여성 자살자는 64.5% 증가했습니다. 한 사람이 아프면 개인 문제지만, 여러 사람이 아프면 사회 문제라고 했습니다.
일본은 더 심각해서 2020년 여성 자살률은 전년에 비해 70%나 늘었다고 했습니다. ‘지뢰계’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습니다.
“밟으면 지뢰처럼 터져서 ‘지뢰계’라고 부릅니다. 버블 경제 붕괴 후에 부모와 연이 끊어진 아이들이 거리로 나온 거죠. 양극성 장애, 경계성 인격장애 아이들이 화장 진하게 하고 자해 상처를 드러낸 채 번화가 전철역에 모여 노숙하는 광경이 흔해요. 그들 사이에서 자해도 점점 늘고 있고요.”
“고대 이집트에도 자해 기록이 있어요. 손목을 칼로 긋거나 하는 걸 통해서 통제감, 존재감을 느끼는 거죠. 영화 ‘세 자매’를 보면 노래 부르다 말고 마이크로 자기 머리를 치는 남자아이한테 주인공이 다가가서 “그렇게 하면 좀 시원해지죠?” 하면서 공감하는 장면이 나와요. 자해를 하면 좀 터지는 느낌이 있다고 해요.
의사인 김현아씨는 20대의 여성 자살률이 이렇게 높은 이유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랄 땐 평등하게 컸는데 졸업해 보니 이 사회는 그들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친 거죠. 일자리도 급여도 차이가 나고, 폭력적인 환경을 접하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접는 겁니다. 우울이 시대의 정서처럼 번져가고 있어요. 20대 여성들은 그렇게 디스토피아적인 우울로 무너집니다.
요즘엔 정신질환으로서 사회적 요인도 커지고 있죠.” “자기들끼리 경쟁이 너무 심하잖아요. 우리 애도 학업 스트레스가 심한 친구가 저희 아이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아서 풀었던 것 같아요. ‘별꼴이야’ 하며 넘기면 될 일을, 예민한 아이라 그대로 상처받고 자기 비하로 빠져들었어요.”
아이가 자살 충동 때문에 위급하니 보호자가 와야한다는 전화가 응급실에서 시도 때도 없이 걸려왔습니다. 중요한 차이는 결국 가족이 포기하느냐 안 하느냐였죠.
“저희 가정은 7년이 됐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고혈압 고지혈증 약처럼 약으로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요. 우리 애는 약 먹으면 3일을 못 일어날 때도 있어요. 뇌라는 복잡계를 이해할 수 없으니 어려워요. 힘들어도 가족이 정서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에서 김현아씨는 딸아이를 가리켜 ‘속이 다 빠져나간 헝겊 인형 같은 내 아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7년간 딸과 함께 공황, 불안, 자해, 응급실, 보호 병동을 오가며… 그래도 안도가 되던 때는 언제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응급실에서 전화 오면 매번 가슴이 철렁하죠. 그래도 오히려 공격성이 없는 아이가 나한테 화를 내면 안심이 되더라고요. 마음은 좀 상해도 이 아이가 엄마에게 대항할 힘이 있구나 싶어서… 뇌 질환은 만성질환이에요. 환자도 가족도 무한한 인내가 필요해요. 정신질환자의 부모들은 다 몸에서 사리가 한가득 나와요.
딸이 보호병동에 들어가는 날, 철커덩 문 잠기는 소리에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보호병동은 일상의 감옥이죠.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자유롭게 출입이 안 될 뿐. 아픈 아이들은 대체로 빨리들 적응합니다.
안나는 엄마에게 웃으며 보호 병동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한밤중에 ‘국정원에서 특명을 받았다’고 벗고 돌아다니며 소란을 일으키던 한 청년은 퇴원할 때 보니 멀쩡하게 잘생긴 훈남이더라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환자가 있고, 증세가 나아져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이들이 서로의 거울이 되어주는 보호 병동의 나날들.
잠긴 문 안에는 괴로워하는 비슷한 영혼들이 있고, 그런 환자들을 도와주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감사하다고. 아이가 보호 병동에 입원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또 그렇게 삶은 흘러가더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아픈 것…그건 업보가 아니라 그냥 인생이었어요. 죄도 벌도 아닌 그냥 인생.
살아보니 완벽한 삶은 없었어요. 모든 가족은 다 상처가 있는 역기능 가족이에요. 시간이 갈수록 아픈 자식도 적응이 되고… 그럭저럭 살다 보면 가끔 좋은 날도 만나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김현아씨가 남긴 말중에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의 창세기에도 선악과를 따먹은 후 아담은 이브 탓부터 합니다. 남 탓의 죄의 뿌리가 깊은 데, 거기 빠지지 않은 게 신기하군요.
양육 환경 탓을 하면 엄마들이 제일 불쌍해져요. 저희 아이 주변에 시설에 간 아이, 히키코모리가 된 아이, 뛰어내린 아이가 다 있어요. 예후가 나쁠수록 1부터 10까지 부모 탓을 합니다.
“남 탓이 나쁜 건 자기 파괴적이기 때문이죠. 몹쓸 부모를 만나도 성인이 되면 선을 긋고 자기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뇌 회로의 문제겠지만, 남 탓 특히 가족 탓을 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요. 남 탓은 미성숙의 시그널입니다.”
사라는 마음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섬기는 일을 할 때 힘과 끈기를 발휘하지 못하죠. 그들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절망하고, 삶을 지탱해 나가는 것도 버거워하죠. 차라리 화를 내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기다림과 절망 때문에 영적인 힘과 의지가 시들어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가 싸우고 있다는 표시이거든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게으른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살전 5:14).
우리가 함께 걷는 이 길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 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아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죠.
이렇게 하나님과 약속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나이는 점점 많아지고 신체적으로 더 이상 자손을 둘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식을 얻을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게 된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습니다. l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아내 사라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세월이 다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였을까요?
기도하고 기도해도 응답 되지 않는 답답함 때문에 내가 가진 신앙을 의심해 본적이 없나요? 이것은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했던 일이 전혀 성취될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반드시 약속한 대로 되리라는 보장을 받은 다음에 그 일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그 낙담의 크기는 얼마나 클까요?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여야 할 하나님이 나에게 자꾸만 응답하지 않고 지체되어 가기만 할 때 얼마나 점점 지쳐 갈까요?
바로 아브라함의 가정이 바로 형편이었습니다. 초조해진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로 제의를 했습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반드시 주실 거예요. 그런데 내 형편이 이제는 생산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내 몸종 하갈을 통해서 주실 것 같아요. 내가 그 하갈을 당신께 맡길 터이니까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읍시다.”
아브람 당시 팔레스틴의 풍속으로 본처에게 자식이 없을 때에는 여종(노예)이나 다른 여자를 남편에게 주어 자기를 대신하여 자식을 얻게 하는 일이 흔했습니다.(창29:15-30, 30:1-9) 기다림에 지친 사래는 결국은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하갈은 애굽 여인으로서 아브람이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 바로가 사래를 자기 아내로 취하면서 많은 양과 소와 암수 나귀, 약대, 그리고 노비를 결혼 예물로 아브람에게 주었습니다. 이때 노비가 올라왔는데 이 노비가 ‘하갈’이라고 합니다.(12:16)
당시 노비는 주인의 재산에 속했죠. 노비는 사고팔았음은 물론, 예물로 주기도 하였습니다. 노비는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재산으로 여겼으니까요. 그러므로 소나 나귀가 새끼를 낳으면 주인의 재산이 되듯이 이 하갈이 새끼를 낳으면 주인 사래의 것이 되는 것이죠. 기다림에 지친 사래는 이러한 방법으로 자녀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수단을 쓰려고 작정한 사래의 말에 아브람의 반응은 어떠하였는 가요?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16:2)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하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 사래의 말을 들은 것은 큰 잘못이었죠. 큰 실수였습니다.
아브람은 언약의 말씀에 굳건히 서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담]도 자기 아내 [하와]의 말을 들었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보다 자기 아내 [사라]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담과 다를 바 없는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 3장) 내용과, (창세기 16장) 내용의 두 사건을 비교해 보면 하와가 하는 말투를, 사라가 그대로 따라합니다.
(16:2)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17) “네가 여자의 말을 들었으니” (3:6) “여자가........그 실과를 먹고, 남편에게 주었다” (16:3) “사래가....하갈을 가져 그 남편에게 주었다” (16:2)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3:2~3) “여자가 말하기를,.....혹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흐리게 만들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불신하게 만드는 죄를, 두 여인이 똑같이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래의 말을 듣죠. 이 일로 인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바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소원이 이루어지고 숙제가 풀린 것이 아니라 더 일이 복잡하게 꼬여 버리게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사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아브람의 가정에 어떤 일이 일어 났을까요? 본문 4절을 보십시오.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첫 번째 갈등은 가정의 불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죠. 당연히 부부싸움이 납니다. 아무 문제가 없던 가정에, 싸움이 나고, 큰 소리가 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한 남자를 둘러싼 본처와 후처 사이의 삼각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각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생기니까 하갈이 자기 여주인 사라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몸종이, 세상에 자기 여주인을 멸시합니다. 임신도 못하는 주제에, 여주인 노릇 한다는 거지요. [사래]가 얼마나 기가막힐 노릇입니까?
사래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여종으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요? 그 중간에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피를 말리는 곤란을 겪었을까요?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16:5)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도 정신적인 부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80세가 넘도록 별로 다투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고부터는 정신적인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여전히 아니 그전보다 더 신경을 써서 대하노라고 했지만 사라의 체감온도는 달랐죠.
아브라함의 눈길이 하갈에게 가는 것을 느꼈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스마엘에게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나이 80이 넘어 얻은 아들이니 얼마나 귀여웠을까요? 아브라함의 마음은 작은 아기, 꼬물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아, 내가 아빠가 되다니. 우주를 모두 가진 것 같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가 되었죠. 이스마엘이 생김으로 인해서 사라는 혹독한 정신적인 아픔의 대가를 치러야 하였습니다.
두 번째 갈등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는 아픔입니다. (17장 1절에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 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했습니다. 그러니까 l6장 마지막 절과 l7장 첫절 사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 99세 되기까지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이때가 아브라함이 견디기 가장 어려웠던 영적 암흑기입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브라함이 실수를 하는 바람에 13년 동안이나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참 기가 막힐 일이죠. 친하던 친구하고 교통이 끊어져도 괴로운 일인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왔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고 나니 그 고뇌가 얼마나 컸을까요?
세 번째 갈등은 자손간의 불화입니다. 이스마엘 때문에 사라와 하갈의 갈등이 생기게 되고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이죠. 이스마엘은 아랍 자손의 조상으로 중동 분쟁의 큰 불씨가 되었습니다. 그 불씨는 점차 커지게 되어 민족적 싸움으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계속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쉴곳이 아주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들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길 멀지 않네 산넘어 눈보라 세차게 불어도 돌아갈 내고향 하늘나라 날구원 하신 주 모시옵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리라 그리던 성도들 한자리 만나리 돌아갈 내고향 하늘나라 아멘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사람의 일로 가득한, 하와와 사래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쪼갠 고기 사이로 스스로 지나가시고, /스스로 언약의 말씀을 지키시는, /성실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삽니까?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당신에게 있나요? 경건의 시간이 있습니까? 살아계셔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까?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살아 있나요? 아니면 복잡한 세상소리에만 귀를 열고 있지는 않나요?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라함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소리,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충고와 조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가 내게 던져준 최선의 충고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드시 비추어보아야 하죠.
'하나님, 이것이 당신의 뜻에 맞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의 여론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니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없고 영혼을 위한 공간도 없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시내산에 올라갔던 모세의 모습을 기억하시나요 ?모세가 왜 시내산에 올라 갔나요?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러 올라갔습니다. 곤란과 역경에 처한 민족의 앞길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 그는 시내산 기도원에 올라갔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 모세의 형 아론은 산 아래서 누구의 말을 들었나요? 백성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이를 더이상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신을 세웁시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어디서 좋은 소리가 들려오는 가 하고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부인이었던 하와의 소리,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의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에 반하여, 미가 선지자는 고백합니다.
5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7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8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가서 7: 5, 7-8)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기울이시고 내기도를 들어주신다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주시고
나의 발을 반석위에 세우시사
나를 튼튼히 하셨네
새 노래로 부르자 라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노래로 부르자 하나님의 사랑을.
기다림에 지친 한 여자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6년 넘게 연애를 하면 한 사람은 더 사랑하게 되고 한 사람은 슬슬 권태기를 느끼며 지쳐가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서로에게 너무 편안해져 더 이상 처음처럼 설레임 하나 없는 그런 무미건조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특별해지지도 더 편안해지지도 않는 딱 중간에서 헤어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더 앞으로 나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먹다 남아버린 ‘라면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느날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결혼할까~?"
그러자 정말 솔직한 그가 얼굴이 경직되고 빨갛게 되어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에이 농담두" 라거나 "갑자기 왜" 라는 말이라도 했으면 내가 덜 상처 받았을텐데. 정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가 정말이지 미웠다.
그리고 생각했었다 ‘이 녀석은 나를 뭐하러 만나나...그런생각~?’
하지만 무작정 헤어지긴 싫었다
나이 32살에 직장이라곤 작은 구멍가게 같은 회사에서 말단 사원으로 일하고...돈이라곤 5년 만기 적금 500만원이 전부인 정말 쥐뿔도 없는 내가 가진 거라곤 지금 옆에 있는 ‘그’ 뿐이라서 헤어지면 내가 정말 초라해 보일까 봐 헤어지기 싫었다.
어쩌면 6년 동안 사귀면서 ‘난 이 남자도 꼭 결혼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너 많이 사랑하는거 알지~?"
그가 항상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오랜 연애가 지속되면 여자가 편해지고 가족처럼 느껴지고 여자는 오랜 연애가 지속이 되면 남자가 그만 자신을 데려가 주길 바란다. 여자는 남자가 가족이 되길 원하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가족처럼 느껴지는데 바란다.
어쩌면 나의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나는 이만 이 연애를 끝내고 싶다. 왜냐면
"근데 넌 너랑 결혼할 사람이 어땠으면 좋겠어~? 착했으면 좋겠어~? 아님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결혼 할 사람은....적어도 날.....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인간의 사랑은 변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변하는 사랑이라도 지팡이를 삼아 의지하려고 병적으로 집착하고 매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고 영원토록 동일하시죠. 하나님은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는 사랑,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시는 아낌없는 사랑을 주십니다.
인내란 성공을 달성하는 데 어려움이나 지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사바르 (sabar)는 “인내하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다, 굴복하지 않고 견디다”를 의미합니다(James Strong, Strong's Concordance).
그리스어 휴포 모네(hupomone) 는 “확고함, 불변성, 인내; 신약에서는 가장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목적과 신앙과 경건에 대한 충성심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의 특성을 나타냅니다.”(Joseph Thayer, Thayer's Greek Lexicon)
휴포모네 는 “수동적으로 견디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적극적으로 장애물을 극복하는 정신”(Tyndale Bible Dictionary)을 말하죠. 그러므로 성경적인 인내는 단지 수동적인 기다림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힘을 얻는 적극적인 인내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는 어려움이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꾸준한 결심입니다. 그것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장애물에 직면했을 때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는 “방해, 낙담,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려는 끈질긴 결심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보통 편리하고,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을 좋아합니다. 인내해야 하는 쪽을 우리가 좋아서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조급함(Impatience)은 우리 삶을 위하여 정해 두신 하나님의 타이밍을 신뢰하고 순종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생겨납니다.
반면에 인내는 우리 삶이 혼란스럽고, 계획이 지연되고, 실망스러운 일이 생길 때 비로소 그 존재의 필요성이 드러나죠. 인내는 치열한 삶의 전투 현장에서 길러집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주도할 수 없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는 깊고 변함없는 신뢰에서 자라납니다. 인내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겸손히 바랄 때 자라나는 거죠.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주에 비유하죠. 이 경주는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시작되고 이 땅을 떠날 때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계획한 경주는 평지가 아닙니다. 언덕도 있고 계곡도 있으며 광야도 지나는 힘든 경주입니다. 이를 잘 마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인내해야 합니다.(히 12:1)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진정한 인내는 단순히 불편하고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의 영역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러한 인내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가 도무지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내는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에서만 가능합니다(갈 5:22-23).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오직 예수를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기다림에 아무리 지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며 환난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하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나 영혼은 비록 갈해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세상 풍파 속에 있어도 나를 인도 하실 이 믿네
저 높은 곳에서 나를 항상 바라보시는 주님
나의 갈 길 막막하여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나 몸과 맘 매일 지쳐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세상 근심 속에 있어도 나를 도와 주실 이 믿네
저 높은 곳에서 나를 항상 지켜주시는 주님
나의 갈 길 멀고 험해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나 모든 삶 연약하여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세상 불안 속에 있어도 나와 함께 하실 이 믿네
저 높은 곳에서 나를 항상 위로하시는 주님
나의 갈 길 끝을 몰라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나 소망은 희미하여도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세상 의심 속에 있어도 말씀 증거 하실 이 믿네
저 높은 곳에서 나를 항상 평안주시는 주님
나의 갈 길 빛이 되신 주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나는 선한 주님을 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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