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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창세기

주은총목사의 창세기6/ 에녹

by 주은총목사 2024. 3. 26.

https://youtu.be/Ak1ZvnsYAgg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

에녹(창세기 4-5)

 

동명이인의 에녹

구약 성경의 창세기 4장과 5장에는 "에녹"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다른 인물이 나오는데

이를 보통 우리는 동명이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저 창세기 4장의 에녹과 같이 될 수 있고 창세기 5장의 에녹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에녹이 될 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쁨을 안겨 드리는 에녹이 될 수 있고 하나님과 그저 상관없이 사는 에녹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에녹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창세기 5장의 에녹

에녹의 첫 번째 특징은 바로 평범성

먼저, 창세기 5장의 에녹을 살펴봅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하게 한 시대를 살아갔던 신앙의 위인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죠. 아브라함이라든가, 모세라든가, 엘리야, 바울, 베드로 등 많은 분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위인들은 뭔가가 대단하고 뭔가 레전드...전설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하면 에녹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아주 평범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 내용을 보아도 아주 간단하죠.

 

모세처럼 바다를 가르고, 기적을 행하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하는 그런 유별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아브라함처럼 방랑 생활을 하고, 100세에 아들을 낳고 하는 그런 극적인 면도 하나 없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365세를 살면서 자녀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그는 평범한 인생입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노아나 아브라함, 모세, 야곱, 요셉같은 신앙의 위인들을 소개하면서 에녹이라는 사람도 그들과 동등하게, 같은 위치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그냥 넘겨 버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평범성 때문입니다. 에녹의 첫 번째 특징은 바로 평범성이죠.

 

국어 사전을 보면 평범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뛰어난 점이 없이 보통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이 에녹을 성자로 만들어 낸 요소입니다.

 

가정-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

하나님은 창세기 첫 시작부터, 소중한 가정을 주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가톨릭에는, 신부도 있고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또 개신교에도 경건한 수도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한 목적으로 평생을 혼자 살면서, 그렇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그들처럼 혼자 살지 않았습니다. /에녹은 결혼하여 정상적인 가정을 꾸미고 살았습니다. 아들딸 낳고, 평범한 삶을 살았죠. 에녹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엄마의 불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에 귀농한 아버지를 놔두고 산악회에서 만난 남성과 불륜을 하는 어머니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는 사연이 어느 신문에 소개가 되었습니다.

 

엄마의 불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었죠.

 

글쓴이 A(29)는 부모님은 현재 별거 중이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A씨는 이어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간이 안 좋으시고 당뇨까지 있으셔서 사업들을 다 정리하고 혼자 귀농해서 건강을 챙기고 있다라고 별거 이유에 대해 설명했죠.

 

A씨는 어머니는 혼자 도시에 살고 있다면서 직장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어머니 집에 방문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A씨에 따르면, 학창시절 A씨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자주 폭행했다고 하였죠. 그때부터 A씨 어머니는 술에 의존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기간이 15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산악회에 다닌 지는 10년이 조금 넘었죠.

 

A씨는 등산동호회에 대한 안 좋은 인식 때문에 가끔 어머니를 데리러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A씨는 약 3주 전에 어머니의 불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엄마의 휴대전화로 계좌이체 할 게 있어서 보는데 메시지가 계속 오더라. ‘같이 내려가서 살자’ ‘이런 적이 처음이다등 불륜남이 메시지를 보냈다면서 프로필에는 엄마랑 같이 찍은 사진과 며칠 연애했는지 써놨더라라고 하였죠.

 

이어 엄마가 어디로 산을 갈 건데 외박해야 할 것 같다면서 KTX 예약을 해달라고 하더라라며 불륜남이랑 놀러 가는 걸 아는데 제가 모르는 척하면서 예약해 주는 게 너무 화가 나더라라고 토로했습니다.

 

참다못한 A씨는 아버지께 어머니의 불륜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이 40~50세 먹고 피우는 바람은 그냥 그러려니 해라. 모르는 척해라. 엄마만의 사생활이라고 말했습니다.

 

A씨는 결국 어제 일이 발생했습니다. 알고 보니 엄마가 매일 술 마시고 밤에 아빠한테 이혼하자고 카톡 하면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엄마한테 바람은 피워도 되는데 쪽팔리게 자식한테 걸리지나 마라라고 얘기했다고 적어서 보냈죠.

 

그는 이어 엄마는 술에 취한 상태로 제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왜 남의 것을 보느냐’ ‘아무 사이도 아니다’ ‘학교 동창이다변명만 늘어놓더라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면서 밤에 그 불륜남한테 전화해서 우리 엄마랑 그만 만나라고 욕 좀 했다. 현재 부모님은 연락 두절이라며 제가 계속 참았어야 했나. 친인척에 알려서 아빠의 이혼을 도와드려야 할지,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글을 마무리 했습니다.

 

신문에 실린 이 글에 댓글이 수백가 달렸습니다. 저는 그중에 너댓개의 댓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았습니다.

 

엄마가 아빠한테서 맞고 살아온거 봐오고도 엄마가 불쌍 하지도 않나????오죽하면 술에 의존해서 살고, 살기 위해 산 다니고, 다른 이에게 의지할까 ....2023.11.30. 19:24

 

배우자한테 맞은 기억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나. 아무리 자식이라도 참 철없다. 저 집은 엄마가 더 외롭네. 알콜의존하면서도 살아가려고 발버둥인데 자식이 엄마 허물을 일러바치고. 남편도 이해하는데 내 배로 낳은 자식이 이해도 못 하니.. 집구석에 무슨 애정이 남겠나. 응당 이혼해서 셋 다 각각 사는 게 맞다.2023.11.30. 20:14

 

bead****

힘들겠지만 이혼하라고 해라, 그 정도면 살아도 사는게 아니야, 감정의 골이 깊을 대로 깊어서 웬수도 그런 웬수 없다, 서로 감정에 자유로워지게 헤어지는게 서로 다 좋다,2023.11.30. 18:42

 

skgu****

머래냐?애가 철도 안들고~반대로 장가간 아들이 바람피운다고 엄마가 며느리한테 고자질 하겠음?친척들한테 얘기하고 이혼 시키겠음?별 희안한 오지랖일세.2023.11.30. 19:43

 

결혼생활이 뭐 어디 쉬운가요? 신데렐라와 왕자님이 결혼에 성공을 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 결혼이후 지지고 볶는 그런 라이프 스토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치만,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수학문제 풀 듯, 그렇게 만만찮은 게 아니잖아요. 사실 국어, 영어, 수학보다 더 어려운 것이 결혼이 아닌가요?

 

가정생활을 잘한 에녹

에녹은 일생 동안 그저 열심히 가정을 중심으로 충실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에녹이 아브라함처럼 첩을 얻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정부나 애인이 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저 묵묵하게 가정에 충실해서 365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집안을 떠나지 않고 자식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요즘 사람들은 목회자라고 해도 자녀 세 명을 낳고도 이혼을 당연시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자녀를 낳아놓고도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일절 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처에게 떠넘기고 새로 장가를 가려고 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일부 다처주의 시대입니다. 그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이죠. 부인이 몇 명 된다고 해서 그것이 흠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가정에 충실해서 가정을 굳게 지키고 300년 동안 집을 떠나지 않고, 한 여자에게서 자녀들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가정 중심의 사람입니까?

 

여성들은 이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는 문제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기회와 여건이 주어지면 언제든지 흔들리게 되어 있는 것이 남자이죠. 남자는 언제나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기 좋아합니다.

 

사람의 일생 중에서 중년이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눈을 돌립니다. 3, 40대의 사람들은 좀처럼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그때는 그럴 만한 여유도 없는 시기입니다. 그때는 오직 세워 놓은 목표를 위해서, 성취를 위해서, 위치 확보를 위해서 정신 없이 뛰어다닐 때입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발버둥치죠.

 

그렇지만 목표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기반도 닦인 중년의 때가 되면 방심하게 됩니다. 한눈을 팔기도 하고, 외도도 하고 그러는 것이죠. 하나님과 마음에 합한 그 위대한 다윗도 유부녀인 밧세바에게 넘어졌습니다. 그 정도로 중년의 때는 위기의 때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가정생활을 잘하였습니다. 사람이 밖에서는 인정받기가 쉽습니다. 인심 쓰고, 돈 잘 쓰고, 인정을 베풀면 밖에서는 인정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집안에서 인정받기는 참 어렵습니다. 먼저 부인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죠. 오늘 한번, 아내에게 물어보세요. “여보, 나 가정과 당신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나 어때요?”

 

당신이 힘들다는 걸 알아요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것도

하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요

내가 함께 기도할게요

미안해요 당신의 아픔을

내가 다 안아주지 못해서

나에게 한번만 더 기횔 줘요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이제는 더 이상 울지 말아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랍니다

영원토록 당신의 눈물을

내가 함께 닦아줄게요

내가 함께 닦아줄게요

 

참신앙이란?

산속의 성자는 혼자서 세상과 등지고, 처자식 먹여 살릴 책임 없이 산속에서 수도하며 맑은 물 마셔 가면서 수도를 합니다. 그런데 가정 속의 에녹은 어떠하였을까요?

 

그는 성년이 되어서 장가를 들고 하나의 평범한 남편이요 가장으로서는 자녀를 낳고 기르며 먹여 살리기에 골몰하고 급급하였죠. 때론 바가지를 긁는 아내와도 다투는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경건한 수도사들 처럼 집을 떠나 수도에만 전념한 그런 사람도 물론 아니었죠. 그는 많은 자녀를 거느린 가장들이 당하는 그 수고와 고난을 같이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밤과 낮으로 복잡한 세상에서 피곤하게 수고로이 일해야 했던 한 가정의 아버지였죠.

 

참 신앙이란 특별한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평범한 생활 중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찾아야 하죠. 에녹은 가정에 충실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시종일관 300년 동안이나 믿음 생활이 변함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에녹. 그래서 에녹을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셨겠습니까?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

에녹이 살던 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에게 아들을 주시고 므두셀라라고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은 장차 멸망을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사망이 도래한다는 뜻이죠. 하나님께서는 므두셀라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죄악이 관영했던 당시의 사람들을 홍수로 멸망시킬 준비를 하셨습니다. 므두셀라는 당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므두셀라를 부를 때마다 장차 하나님께서 멸망을 보내

신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셨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멸망을 보낸다는 므두셀라를 그렇게 부르면서도 죄악에서 떠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더욱 많은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최초의 심판이었던 노아 홍수는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임했던 것이지요.

 

심판을 앞둔 사악한 시대에 그들과 어울려 죄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돌아선 적도 없고 하나님을 떠난 적도 없이 365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아도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 갈 곳으로 갔고하는 말이 나옵니다. 한동안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했는데 얼마 지나다 보니까 세상이 더 좋아 보여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데마만 그렇습니까? 우리는 어떤가요? 하나님을 향했다가는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고, 기도하며 가까이하는 것 같았다가는 삶이 힘들면 멀어지기도 하며 교회도 안 나가고 얼마나 변덕스럽습니까? 그러나 에녹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365년 동안을 한결같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에녹은 꾸준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돌아서거나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과 더불어 깊은 교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1, 2년 사귄 사람이 아니라 20, 30년 사귄 사람은 좀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계속 교제하지 않습니까? 개척교회를 일으키는 데도,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이처럼 계속적인 교제가 필요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람은 딱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바로 에녹과 [노아]입니다.

(6:9)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어디 이 두 사람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왜 이렇게 두 사람만 기록되어 있는가? 했을 때, “동행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 질 것입니다. 동행하다는 말은 하다크로서 함께 걸어가다”, /“~와 잘 알고 있다이런 뜻입니다.

 

말 그대로,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만, 무작정 함께 걷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상대를 잘 알고 걷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쳐다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무얼 생각하시는 알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과 사건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5)에서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말합니다.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했지?

에녹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 드렸을까요?

 

(유다서1:14~16)

에녹은 사람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지금, 여기 (유다서)에 나와 있는 이 말씀은 [에녹]이 당시 사람들에게 예언했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이, /에녹이 하나님과 어떻게 300년을 동행했는지를 보여 주는, 동행하는 삶의 모든 증표가 되는 구절입니다. 에녹은 사람들에게 선포하기를,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경건치 않은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이 경건치 않은 사람들인가? 했을 때,

(16)이사람들은 원망하는자며/불만을토하는자며/그 정욕대로행하는자/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는사람들이라고 성경은 정의를 합니다.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것이나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언어와 행실이죠.

 

에녹은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유다서의 기록대로 원망하는 사람, 불만을 토하는 사람, 정욕대로 행하는 사람,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에녹을 거슬리는 말을 했습니다. 에녹의 증거를 비웃고, 거절했고, 에녹의 심령을 괴롭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맺은 교제를 끊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에 애달파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일에 탐욕하지 않으며

나의 나 됨 버리고 오직 주님 내 안에

살아 있는 오늘이 되게 하옵소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으며

부요해도 오만하지 않으며

모두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억울한 일 당해도 원통하지 않으며

소중한 것 상실해도 절망하지 않으며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하소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으며

부요해도 오만하지 않으며

모두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억울한 일 당해도 원통하지 않으며

소중한 것 상실해도 절망하지 않으며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하소서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하소서

 

창세기 4장의 에녹 VS 창세기 5장의 에녹

에녹의 생활은 이처럼 평범했을 뿐 아니라 지극히 미미하였습니다. 창세기 4:16절 이하에 보면 가인의 아들인 에녹은(동명 2) 큰 성을 쌓아서 그것을 에녹 성이라 하여 자기 이름을 남겼고 야발은 큰장막을 치고 많은 육축을 기르는 목축가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 동과 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5장의 에녹에게는 이렇다 할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재단을 쌓아 후세에 남기지도 못했고 이삭과 같이 우물을 남기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지극히 평범하였습니다. 에녹의 모범은 바로 여기에 있죠. 가정을 꾸리며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기르며 수고하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

 

우리는 이 땅의 성에 살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에녹이 될 수도 있고 이 땅에서는 성에 살지 못 하였지만 하늘 나라의 성에 들어간 에녹이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 16 절에서 18 절입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

 

이름값좀 해라!

우리가 흔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었을 때 그 군대 졸병 중에서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에 대해서 듣자하니 군대생활을 엉망이었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친히 찾아가서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갈든지 아니면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답게 행동하든지 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에녹도 똑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서로가 전혀 달랐습니다.

 

창세기 4 장에 나온 에녹은 동생을 죽인 가인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그저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인 가인이 이름을 짓고 그 이름으로 에녹이란 성을 쌓아 그 성안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이름만 남았지만 그 외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4 17절 외에 다른 어떤 책에서도 그 이름을 다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5장의 에녹은 다릅니다. 5 24 절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4 장의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5 장의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창세기 4 장 에녹은 육신의 아비가 지은 땅에 있는 성에서 살았지만 창세기 5 장 에녹은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의 성에서 천국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 장의 에녹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적도 없었지만 창세기 5 장의 에녹은 하나님을 친근히 하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 이름이 성경에 길이 남았습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에녹과 같이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창세기 5장의 에녹과 같은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결과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산 것에 대한 결과는 무엇일까요?

먼저, 그의 아들이 장수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 무드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인류 중에 가장 오래 장수하는 복을 누렸습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 부모나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모인 우리가 신앙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식이 그것을 본받아 복을 받습니다.

 

원망하는 말, /불만을 토하는 말

자랑하는 말/ 이익을 위해 아첨하는 말,

그리고, 정욕대로 행하지 않은 행실.

이것이 우리 부모의 언행에서 먼저 나와 줘야 자식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결과는 /에녹이 죽지 않고 하나님께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는 각 인물들이 주로 누구의 자식이며 몇 해를 살다가 죽었는지가 기술되어 있는데, 죽음에 대해서는 "죽었다(died)"라는 낱말이 명시적으로 사용되고 있죠. 에녹의 경우는 이와 달리, "죽었다(died)"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고 창세기 공동번역과 킹 제임스 버전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입니다(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t; for God took him)" (창세기 5:24, 공동번역 & KJV). 전통적으로, 이 진술은 에녹이 아담의 다른 자손들과는 달리 죽음을 겪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죠.

 

창세기 5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모든 사람은 결국은 죽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에녹은 그 어느 곳에도 죽었다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죠. “그는 하나님이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죄의 댓가입니다. /죽음은 고통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고통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과 300년을 동행한 에녹에게 죽음의 고통조차도 주시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에녹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의 아들에게 최 장수의 복을 주시는데 그치지 아니하시고,

누구나 겪게 되어있는 죽음에 대한 고통도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에녹의 승천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뛰어넘은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시고, 성도가 받은 최후의 보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By faith Enoch was translated that he should not see death)"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5, 공동번역 & KJV).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11:5)

 

기도> 주님, 창세기 4장 에녹이 아닌 창세기 5장 말씀의 에녹과 같이 살기를 원합니다. 잠시 지나가는 인생, 잠시 떠나가는 인생에 집착하지 않게 하시고 이 땅에 성을 쌓고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저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에서 특출나지는 않지만 평범한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평생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이 세상을 산다며는 얼마나 살 건가요

몇 백 년을 산다 해도 몇 천년을 산다 해도

주님 계신 영원한 곳 하루 만도 못합니다

힘쓰세요 힘쓰세요 주의 일에 힘쓰세요

세상 욕심 떨쳐내고 주의 사명 탐내세요

하늘나라 영광 나라 우리 위해 있답니다

부귀영화 세상 권세 일순간 지나는데

 

단 하루를 살더라도 주님 위해 살아야지

주님 오실 그날에는 통곡하게 된답니다

전하세요 전하세요 주의 복음 전하세요

우리 복음 기다리다 듣지 못한 부모 형제

하늘나라 영광 나라 쳐다보고 운답니다

주님 위해 일하는데 어려움 많다지만

어려운 일 참아내면 기쁜 일은 더 많지요

 

어찌하여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답니까

일하세요 일하세요 주님 위해 일하세요

전도 충만 기쁨 충만 기도 충만 성령 충만

하늘나라 영광 나라 저기 저기 보입니다

 

저자

주은총목사는 경희대학교에서 법학석사를 마친 후, 한세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녀는 또한 여성으로는 드물게 맨 몸으로 꿈이 있는 교회를 개척하여, 도전과 모험의 길을 걷고 있다. 저서로는 <, 행복한 사람아>(쿰란), <딸아, 너의 결혼은 지금 행복하니?> (쿰란) 등이 있다.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산속의 성자는 혼자서 세상과 등지고, 처자식 먹여 살릴 책임 없이 산속에서 수도하며 맑은 물 마셔 가면서 수도를 합니다. 그런데 가정 속의 에녹은 어떠하였을까요?

 

그는 많은 자녀를 거느린 가장들이 당하는 그 수고와 고난을 같이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밤과 낮으로 복잡한 세상에서 피곤하게 수고로이 일해야 했던 한 가정의 아버지였죠.

 

참 신앙이란 특별한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평범한 생활 중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찾아야 하죠. 에녹은 가정에 충실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습니다.

 

믿음 생활이 변함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에녹. 그래서 에녹을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셨겠습니까?

시종일관 300년 동안이나

 

그는 성년이 되어서 장가를 들고 하나의 평범한 남편이요 가장으로서는 자녀를 낳고 기르며 먹여 살리기에 골몰하고 급급하였죠. 때론 바가지를 긁는 아내와도 다투는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경건한 수도사들 처럼 집을 떠나 수도에만 전념한 그런 사람도 물론 아니었죠.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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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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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페이지

판권 페이지

1.동명이인의 에녹

2.창세기 5장의 에녹

3.가정-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

4.엄마의 불륜을 어떻게?!

5.가정생활을 잘한 에녹

6.참신앙이란?

7.므두셀라의 이름의 뜻

8.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9.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했지?

10.창세기 4장의 에녹

11.이름값좀 해라!

12.하나님과 동행한 결과는?

13.기도

그림설명

창세기 5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모든 사람은 결국은 죽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에녹은 그 어느 곳에도 죽었다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죠. “그는 하나님이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죄의 댓가입니다. /죽음은 고통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고통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과 300년을 동행한 에녹에게 죽음의 고통조차도 주시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선교헌금

우체국 401562-01-004269 꿈이있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