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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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3/ 놀라운 기적의 인생을 사십시오! (by 주은총목사와 함께 하는 영성산책)
놀라운 기적의 인생을 사십시오! 본 문 : 요 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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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있는순복음교회/ 주은총목사
놀라운 기적의 인생을 사십시오!
본 문 : 요 4:1-14
사마리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젊을 때부터 ‘현모양처’라는 꿈을 가지고 인생을 한껏 행복하고 가치 있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녀이기에 영롱한 꿈을 안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첫 결혼은 파탄에 이르게 되고 결국 그녀는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딘가에 파랑새는 있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있다’라는 희망을 여전히 마음속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라는 생각에 두 번 째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초에는 무언가 잘 되어가는 것 같았으나 또 전과 같이 모든 일이 순조롭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다시금 세 번째 결혼을 했지만 곧 낙심하고 말았습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결혼도 마찬가지였죠. 그녀는 여섯 번째는 결혼도 하지 않고 오다가다 만난 사람과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사람을 만나기조차 싫어졌고 인생에 깊은 환멸을 느끼자 마음속은 좌절감으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한 번의 결혼과 한 번의 헤어짐>만으로도 ‘절망과 저주와 상처’가 찾아오거든 하물며 다섯 번의 헤어짐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하나의 헤어짐마다 분노와 절망과 수치와 죄책과 우울감과 악독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그것이 사마리아 여인을 저주와 한의 사람, 얼굴에는 감정이 없는 무표정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재혼을 해도 ‘수근 수근’ 거릴 판인데, 다섯 번이나 남편을 맞이해야 하고, 그나마, 지금 있는 남자는, 남편도 아닙니다. 이 얼마나 기구한 인생인가요?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살 수밖에 없는 열등감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피하는 것은 물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아침 일찍 우물로 물을 길으면서 세상사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었죠. 그녀는 그 시간대를 피하여서 사람들이 아무도 오지 않는 대낮에 혼자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을 줄 알고 간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 남자가 우물가에 앉아 있다가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원래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개로 취급하고 상종을 않거나 말도 건네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랫동안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주전 720년 앗시리아인들이 북왕국 사마리아에 침입해 와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가고 그곳을 정복하였죠. 그리고 그들은 그때 정복자들이 보통 하는 대로, 이 지방에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민시켰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자연히 사마리아 지방인들은 이민해 온 외국인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그 당시 유대인에게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순수성을 강조하는데 사마리아인은 결국 민족의 순수성을 상실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이라고 불릴 권리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흘러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남왕국도 침략을 받아 함락이 되었습니다. 유다 시민들도 역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국민성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완고하게 유대인의 혈통을 그대로 보존하였습니다. 시편 137편에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에 그 포로들은 파사 왕의 혜택으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들의 시급한 과제는 흩어진 성전을 보수하고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이 와서 이 신성한 과제에 협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고 그들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의 상속권을 상실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전을 재건하는 데 동참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거절이 그들을 분개하게 하여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과는 아주 적대관계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분쟁이 일어난 때는 B.C. 450년경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이와 같은 감정 대립이 심했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의 다툼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었습니다. 그와 같은 다툼은 여전히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서 유대인인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을 건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그 어느 날 새가 그물에 걸림같이 내 삶 속에 덫이 임했네
몸부림쳤지만 허우적거렸지만 나는 약한 자였었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라 나의 좋으신 주님
태양을 멈추며 혈루증을 고쳤던 주님
기적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그는 나를 고쳐 주셨네
그 어느 날 아무 예고도 없이 내 삶 속에 슬픔이 임했네
원인을 찾으며 애써 봤지만 나는 무력한 자였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라 나의 좋으신 주님
죽은 자를 살리며 모든 병을 고쳤던 주님
기적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그는 나를 고쳐 주셨네
본문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했습니다.
물질적 생애만 추구하는 그 여자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일개 평범한 유대인으로만 보인 그가 참 메시야인 것을, 야곱의 우물물을 구하는 그에게 생수를 알려주심으로 주님은 이 타락한 여성의 마음을 영적 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녀는 다시 여쭈어 보았습니다. "주여, 물기를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을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1-12).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이 여인이 알고 있는 지식은, [야곱]이라는 사람이 가장 큰 자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지식의 한계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아야 ‘영생’이 있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야 ‘생명수’가 있을텐데, 이 여인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야곱]이 전부입니다. /[야곱]이 가장 큰 자입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내 인생을 변화시키셔서, 나를 세워주시고, 내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그런 예수님을 믿어야 하죠. /내가 가진 것이 있건 없건, /내가 잘나건 못나건,/내가 건강하건 건강하지 않건, 나를 진정으로 목마르지 않도록, 생명수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야곱보다 백배 천배 크신 분입니다.
수세기동안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 혈통을 목숨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은 이방의 민족과 혈통이 섞인 사마리아인을 멸시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죠. (열왕기하 17:24, 요한복음 4:9). 그러나 이례적으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서 만난 여인과 대화하며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이 아닌 정통 유대인들은 예수를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유대인들은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고(누가복음 3:23), 예수를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했고(요한복음 7:15), 예수가 한낱 사람이면서 하나님 행세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요한복음 10:33).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증거를 거짓으로 치부했죠.(요한복음 8:13).
이것이 당시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 동안 생명수를 주시면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조차 그를 선지자 정도로 생각했죠. (마태복음 21:10~11, 16:13~14, 누가복음 7:16, 요한복음 6:14). 오랫동안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 빌립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요한복음 14:7~9).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쉽사리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죠. 생명수를 받으라고 말씀하신 분의 모습이 너무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실상 그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셨습니다(로마서 9:5, 빌립보서 2:6~7).
2천 년 전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설정한 하나님의 모습이 있었죠. 옛적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반포하셨을 때처럼 일곱 우레와 뇌성과 번개로 말씀하시는 위엄이 가득한 모습이어야만 했습니다(출애굽기 20:18~19). 하나님은 오직 영으로만 존재하셔야 했습니다. 때문에 자신들이 설정한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죠. 이렇게 잘못된 설정에서 시작된 믿음은 군중과 여론과 거짓 증인들을 동원해 예수를 ‘정신이상자’, ‘종말론자’, ‘이단자’로 몰아세웠습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녀는 기득권의 교리를 잣대로 예수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히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이는 생명수의 비밀, 곧 사람으로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는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에게 “물 좀 달라”고 함으로써 무명의 처녀를 아브라함의 집을 이을 선민의 어머니로 삼아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물 좀 달라” 하심으로 타락한 여인, 천한 여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을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오 4:13-14).
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는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10:15).
이전까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쫓아 살아왔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면서 살았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느껴지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다가도 한세상 살다 죽으면 ‘한 줌의 재’밖에 무엇이 남겠는가 하고 허무감이 밀려왔습니다.
왜 사람들이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지고도 참 만족이 없고, 오히려 더 목마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은 밖으로 보면 물질이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이 만족함을 얻기 전에는 참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영혼의 참 만족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시는 생수로 우리의 갈증을 해결할 때만 누릴 수 있죠.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갈 때 가슴 속에 즐거움 즉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도 기름을 치지 않으면 망가지는 것과 같이 사람들에겐 가슴 속에 황홀감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밥만 먹고 옷만 입고는 살 수 없습니다. 왜 가정 주부들이 신경쇠약증에 걸릴까요? 결혼하고 여자에게 남편과 자식은 그녀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소중한 보물 1호가 되었던 것이죠. 아이를 키우느라 집에 들어앉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밥을 차리고, 설거지하고 집안 청소하고 점심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저녁이면 또 저녁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죠.
그리고는 너무나 힘이 드니까, 직장에 있는 남편에게 마음의 위로를 받으려고 톡을 하고 문자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받아 주다가 남편은 아내가 귀찮아집니다. 점점 멀리하죠. 말투가 퉁명스럽고 짜증을 냅니다. 작은 일이 오해가 쌓여서 세월이 갈수록 부부 관계가 악화가 됩니다. 그만큼 쌓인게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을 키우는 일념으로 남편과 아내는 동지가 됩니다. 똑같은 아내, 똑같은 회사의 일의 반복, 똑같은 일상. 점점 삶이 재미가 없어집니다. 눈이 밖으로 돌아가기 시작을 하는 거죠. 남편은 아내 몰래 밖에다가 오피스와이프를 둡니다. 외도가 시작이 된 것이죠. 벌써 수년째입니다.
삶이 무미건조해 지고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 기쁨을 얻을까요? 사람들은 술취함에서, 마약에서, 음란방탕에서, 혹은 돈과 권력에서 기쁨을 얻으려 합니다.
이것들은 일시적으로 콧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술이 취하면 소심한 사람이 담대해져서 가슴을 펴고 고함도 칩니다. 밖에서 다른 여자와 재미를 좀 보았습니다. 몰래 먹는 떡이 겁나게 맛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재미는 잠깐은 느낄 수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골치가 아프고 돈도 낭비하고 또한 도덕적인 방탕으로 자신은 물론 가정, 자녀 관계의 파괴를 초래케 합니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주님 앞에 가 나를 맡겼네 진정 기쁜 날이네
삶은 의미 없고 안식 없었네
그러나 이제는 달라 새 삶이 내게 임했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잿빛 생활에 지쳤음을
세상 쾌락을 찾아봤으나 고통뿐이었다네
삶은 의미 없고 안식 없었네
그러나 이제는 달라 새 삶이 내게 임했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그가 내게 와 나를 구했네 진정 기쁜 날이네
예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야곱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또다시 목이 마릅니다. 갈증을 느낀 사람에게 물을 조금 주면 그 갈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과 같이 세상의 재물, 명예, 권력, 지식, 이런 것이 인간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더 큰 불만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는 물, 생수는 믿는 이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솟아나고 그 결과는 영생에 이릅니다.
이때 여자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처음에 “물 좀 달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는 같은 요구를 여자가 예수님께 하게 되었습니다. 큰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의 모든 은사를 의미하고, “생수”는 고여있는 물이 아니라 솟아나는 물을 가리키죠. 그것은 마르지 않은 근원에서 나오는, 언제나 새로운 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즉 성령입니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사 44: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하였고, 요한계시록 7장 17절에 “어린양이… 그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들어와 성령의 생수,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젓을 마시게 되면 영적인 세계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서 깨달아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지혜가 마음속에 들어와 삶의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하게 되죠.
이전에는 돈과, 명예, 부귀, 영화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있었는데 생수를 마시자 마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 나의 삶의 목표로 되는 가치관의 변화를 맛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즐거워하고 그리스도를 인한 조롱과 핍박에 오히려 기쁨이 넘칩니다.
그뿐 아니라 매일 하나님과 함께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 샘물을 마신 사람마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봅니다. 다윗이 항상 하나님께 물어보듯이.
"이 사업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업일까?" "이 사람과 만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일까?" 매일 매일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과 연관시키고 자기의 삶 가운데 일어난 사건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해석하려고 합니다.
"내게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을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하기 위함인가? 하나님이 나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고 지시하시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바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내 속에 들어오면 나타나는 변화이죠.
이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고는 즉시로 예수님을 심령 속에 영생토록 솟아오르는 샘물이 들어가자 그 자리에서 변화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 길로 줄달음쳐 사마리아 동리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 만나기를 그토록 싫어하던 그녀가 사람들 가운데서 외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고 좌절했던 그 여인의 가슴 속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솟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삶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것이죠. 그녀는 그 즉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떼를 지어 이 여인의 뒤를 따라 예수님께 나아왔고 예수님을 믿게 된 그 사람들의 청으로 이틀이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며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앓이니라"(요 4:42)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게 되었죠.
예수 그리스도는 철학이 아닙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학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십니다.
나에게 생수 부으시니
나에게 생수 부으시니
나에게 생수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메마른 사막 거친 광야도
꽃피고 즐거워하네
이 세상 모두 주를알리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에게 생수 부으시니
나에게 생수 부으시니
나에게 생수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잔이 넘치나이다
저넓은 벌판 많은 곡식들
조금씩 늘어간다네
만백성 모두 기뻐 춤추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예수님의 일생은 막힌 담을 허시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유한 집에 태어나지 않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는 가난한 목수이었고, 그의 환경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은 절망적인 환경이었죠. 예수님은 ‘거기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무시를 받던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저기, 그 유명한 강남이 아니구요. 더군다나,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유대 지방이 아니라 갈릴리 시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가 아닌 흙수저이었고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셨죠. 예수님은 죄인들과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친구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비천한 말구유에서 시작하여 해골 (요19:17)이라고 불리던 십자가 위에서 삶을 마치셨죠. 예수님은 소외된 곳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것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교제가 금지된 사람들과 만나시고, 상종해서 안 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고, 넘어서는 안 될 경계선들을 깨뜨리시며 그 곳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나라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그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도, 그 어떤 죄인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동일하심을 알게 하기 위한 사실이라는 거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그녀에게 들어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이 그녀에게 들어왔죠. 예수님과 그녀의 만남은 단순한 인간들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이 그녀의 인생에 흘러들어 왔죠. 그녀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을 피하여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저주가 끝이 나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그 속에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과거의 일을 숨기고 두려워 하였지만... 이제는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29절)고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더러운 과거가 자기를 괴롭히고 쏘는 가시로 남아 있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는 도구로 변화되었던 것이죠.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기적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당신에게 ‘작은 예수’가 되어 사마리아로 내려갈 것을 촉구하십니다. 물론, 작은 예수가 되어 그곳으로 가는 나의 육체의 몰골이 험할 수가 있습니다. 운영하는 기업체가 잘 안돌아 갈 수도 있고, 나의 경제적인 상황이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역시, 본래, “말씀”이지만, 말씀이, 말씀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나와 똑같은 처지가 되셔서, /나와 똑같은 처절한 삶의 한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약, 내가 육체를 입지 않았다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쉬울까요?
육체를 입지 않았으니, /무슨 옷이 필요하고, /밥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하고, /무슨 병원이 필요하겠습니까??
/돈, 질병, 자존심, 이런 것 때문에, 울 일이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신앙생활 하는데, 무슨 걸리는 것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육체가 있다는 것이 문젭니다.
우리가 신앙을 논할 때, 육체를 벗어나서는, 신앙을 논할 수도 없고, 논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러 [사마리아]로 들어오셨을 때, ‘긴 행로에 곤하여, 그만, 우물가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수를 주시는 것이죠.
(3)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곤하여”는, /피곤했다, /지쳤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먼 길을 걸어오시느라,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우물에 그대로 주저앉으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었습니다.
예수님 혼자만 거기에 계셨죠.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서 얘기할 때, 하필, 제자들은 없고, /예수님 한 분만 계셨다는 것은, 단순히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당신의 인생을 되돌아 보세요. 기독교는 나의 인생이 실패라는 것을 자각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가정은 깨어지고, 자녀는 엉망이고 경제는 파탄나고 육체는 아파서 암으로 수술을 할 때, 그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정신은 공황장애와 우울로 힘들어하고 물론 육체는 망가져 갈 때, 그리고 하나 남은 자존심인 경제적 상황마저 허물어져 가는 바로 그 숨막히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낸 ‘작은 예수’를 기억하나요?
행색이 남루하고 초라한 작은 예수! 예수 인줄 못 알아보고 유대인에게 ‘정신병자’,‘이단아’취급을 받던 그 사람. 그 작은 예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당신은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이셨죠. 그리고 고백하였습니다.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아가6:10)
하나님은 당신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사마리아’로 가서 ‘작은 예수’가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십니다. 당신의 남은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귀한 인생이 되기를 낙타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아무도 상종하지 않은 [사마리아인]을 만나는 것 자체만도, / 문제가 될 수 있고, /구설수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직접 찾아가셨고, 그것도, 남자가 아닌, /이름도 없는, /여자를 만나신 겁니다. /가장 비루하고, /비천하고, /낮은 자를 만나셨습니다. 그 만남으로 인하여 사마리아 여인은 성경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사랑을 받는 여인이 되었죠. 그녀가 비록 저주와 상처의 여인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축복과 치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험악함으로 인하여 죽고 싶어서 몸부림칠 때, 처절하게 외롭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렵고 삶의 소망이 잃어버렸을 때.... 주님 나를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는 내가 당한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을 드러내는 전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생명의 강물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난 죽어도 내가 가야할 배를 탄다
두려움 내 앞에 서서 해낼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사명 흔들림 없다
난 실패한다 해도 주 음성 듣고 간다
이길 수 없는 저 바다 나를 기다린다 해도
나의 노를 저으리
힘써 나의 바다를 저어 나가리
나의 힘을 여기다 모두 쏟으리
비록 지쳐 돌아갈 수 없다 해도
결코 나는 이 노를 놓지 않으리
깊은 바다 두려워 않고 나가리
거친 바다 싸워서 뚫고 나가리
나의 항해 여기서 끝난다 해도
결코 나는 방향을 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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