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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요한복음

주은총목사/ 요한복음3/ 짧고 굵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by 주은총목사 2023. 4. 10.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네이버 오디오로 들어보세요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8845/clips/130

 

 

주은총이야기

1-주은총이야기-서막

2-아달랴

3-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출간예정)

 

서점에서 전자책으로 절찬리 판매중입니다

 

꿈이있는순복음교회/ 주은총목사

 

짧고 굵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1:6~13

 

지난 시간에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 대해서 나눠봤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제자였고, 열두 사도중에 가장 사랑받았고,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이삼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만, 요한은 단순히 뭔가를 전해들은 내용을 기록한 기록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3년을 동행하며,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잘 순종했던, 목격자로서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이 얼마나 컸으면, 주님을 처음 만난 그 시간까지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겠습니까.

 

어부로 평생을 살다가, 한생을 마감했을 요한이, 자신을 통째로 변화시키신 주님을 향한 사랑을 보면서, 우리도 그런 사랑, 그런 목격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공교롭게도, ‘사도 요한이 아니라,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제 의도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의 배열순서가 그렇다보니, 불가피하게 그렇게 된 겁니다.

 

세례 요한의 출생(1:57~59)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제사장 사가랴가 성전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습니다. 가브리엘은(19) 10:21에 언급된 미가엘과 함께 천사장으로서 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자입니다 (8:16).

 

사가랴에게 나타난 가브리엘은 "무서워 말라 너희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13)고 하였다. 그런데 사가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18)라고 하며 의심하므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짓기까지 9개월 동안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된 자요 성경의 인물 중 기적 중에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의 출생을 이웃과 친척들이 기뻐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로 부르려 하였으나, 벙어리였던 사가랴가 서판에 "요한"이라고 쓰고 난 후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며 하나님께 찬송하였죠.

 

세례 요한의 사역(3:2~9)

요한은 태어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1:59). 그의 아버지인 제사장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을 하였죠. (68~79). 그 후 요한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 나타날 때까지 빈들에 있었습니다(1:80).

 

"때가 되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습니다(3;2). 요한은 예언자의 소리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에 400년간이란 긴 세월 동안 예언자의 소리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조치였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바사의 지배 하에, 다음은 바사에서 헬라의 지배 하에, 그리고 로마의 지배 하에서의 수난의 연속이었죠. 그런데, 성경의 예언대로 400여 년간의 침묵을 깨고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요한이 등장하였습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경제적으로는, 각종 세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백성들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야를 기대하게 했습니다. 요즘말로 어벤져스같은 히어로가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누군가 나타나서 속 시원하게 세상을 뒤집어 주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바라던 그런 시대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해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그의 외침은 그 당시 타락한 유대 사회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제,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모든 일을 버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는, 시대의 각성을 촉구하였던 /선지자였습니다. 종교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던 /개혁자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했죠. 사람들은 그의 외침에 동요되었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세례요한 앞으로 다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한사람도 빠짐없이, ‘온 사람이 다 나왔다는 말은, 옛날, 모세 때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출애굽하는 것과도 같은 사건이 지금 세례 요한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외침과 세례운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출애굽, /새로운 요단강 도하 작전을 알리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의 푸른 가슴속에 십자가의 흔적 있다면

주위해 이제 일어나 너의 믿음 주께 보이라

너의 뛰는 가슴속에 하늘의 불 타고 있다면

그나라 그영광 위해 너의 삶을 주께 드려라

오랫동안 꿈꿔왔던 그 나라 이제 곧 오도록

우리 주의 은혜의 강 이땅 휩쓸며 흐르도록

하나님의 눈물을 가진자 일어나 주님을 따르라

너의 십자가지고 주님을 따르면 온세상 주 영광 보겠네

 

너의 삶을 불태워 주를 섬겨라 주의 영광 나타나겠네

오래 황폐한 이땅 꽃을 피워라 주의 향기 가득하겠네

 

세례 요한의 설교는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죠. 그의 설교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이야기를 말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직선적이고 도전적이었습니다.

 

광야의 이글거리는 태양과 모래바람을 벗 삼아 살던 그는 때가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온 사람들 중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도 있었는데, 요한은 그들을 보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3:7~12)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에게 두려움 같은 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가감 없이 회개를 외치는 것만이 그의 사명이었죠. 그는 진실로 예수님이 말씀한대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말해서 증거하는 데 있습니다. 증거의 대상은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빛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1:6-7)

 

세례요한은 예수가 흥하기 위하여 쇠하여야(3:30)하는 사람이다. 그는 신랑이 아니라 그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는 신랑의 친구일 뿐이다(3:29).라고 말을 합니다.

 

물론,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누구인지를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1:31, 33). 그러나 그는 성령이 그에게 내리고 머무는 것을 보았고(1:32이하), 그렇게 해서 그는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1:33), 하나님의 아들”(1:3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인식을 기초로 하여 그는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죠(1:34).

 

그러면서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다. 나는 그 분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감당할 수 없는 자다" 라고 선포합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1:15)

 

다소 해석하기가 어려운 말이죠. 어느 면에서는 나보다 먼저 계신 자요, 어느

느 면에서는 나보다 뒤에 계신 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먼저 "내 뒤에 오시는 이"라는 뜻에서는 흔히 나이를 생각하게 되는데, 요한은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시간적으로 예수님보다 먼저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나와야 하는 운명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자이고 그 준비된 길로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일을 기준 하거나 일을 시작한 순서 등으로, 즉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보다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는 나보다 먼저 계시다"라고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나보다 뒤에 있는 분이지만 본래적인 의미로는 나보다 그가 먼저 계시다고 선재적 성격을 말해주고 있죠. 예수님은 그의 출생부터 시작하는 분이 아니고 그는 본래 하나님이요 말씀이신데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다는 그의 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요한은 장차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심으로 죄를 구속하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예수가 등장할 것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5~12).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죠. 자신에게 세례를 자청 하셨을 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고 이에 요한이 응하였습니다.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1617)

 

사랑하는 내 아들아(복음성가)

억새풀 우거지고 어둠 내린 험한 산길에 방황하며 헤메일 때 주님 음성을 들었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쉴 곳 없는 나그네 두 손을 마주 잡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비바람 천둥소리 들려오는 텅 빈 들판에 세상 노래 부르다가 주님 음성을 들었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검은 파도 설렐 때 나를 품에 안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메마른 빈들 지나 주님 따라 동산 오를 때 손 내밀어 내 손잡은 주님 나를 구원하셨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가시밭길 지날 때 나를 등에 업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세례 요한의 인생과 사역은 헤롯 왕의 손에 갑자기 끝이 났습니다. 분봉왕 헤롯이 자신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했을 때,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한 사람답게 독설을 날렸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헤롯이 그를 잡아 감옥에 가뒀죠.

 

헤로디아는 잔인하고 무서운 여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죠. 늘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헤롯의 생일을 맞아 잔치가 열렸는데, 최고의 음식과 빼어난 미모의 여인들이 즐비한 가운데 술잔이 돌기 시작하면서 거나하게 취기가 올랐습니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아름다운 춤사위를 펼치자 헤롯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최고 권력자 로서의 특유의 호기를 부렸습니다.

 

살로메야, 네 소원을 말해보아라. 내가 다 들어주마.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며 거침없이 약속해버렸죠. 술에 취했는데, 뭔 말인들 못할까요? 살로메는 즉각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순간 헤로디아의 머릿속에는 번개처럼 떠오르는 게 있었죠.

 

바로 세례 요한의 목이었습니다. 요한의 목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짐승처럼 알아채고는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날렸습니다. 그리고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말했죠.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 하라.”

 

살로메는 어머니가 시킨 대로 헤롯왕에게 돌아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구했죠.

 

세례 요한은 이렇게 허망하게 죽었습니다. 술에 취한 한 왕의 호기어린 호언장담에, 한을 품은 한 여인의 앙심에 희생양이 되어 죽었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안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했던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비참하고 어이없이 죽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헌신과 금욕적인 삶, 하나님의 뜻을 향한 오롯한 신앙의 절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었죠. 하나님이 한 인간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면 그것도 세례 요한일 것입니다.

 

이런 그가 지금 권력의 노리개가 되어 우습지도 않게 짓밟히고 술에 취해 뱉어낸 한마디 말에 이끌려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신단 말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죽어도 된단 말인가? 불의한 권력에 붙들려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는데 하나님은 왜 두 손 놓고 있는 것인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지금 이때야말로 발 벗고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사람들은 하나님을 끝없이 조종하려 듭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려고 이렇게 했는데. 왜 나를 내버려 두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남은 생애를 드리려고 이사를 왔는데. 하나님, ... 나한테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게 아니라 당장이라도 세례 요한에게 달려가 이런 상황을 미리 막았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요? 예수님을 위해 길을 닦은 사람을 이리 팽개쳐도 괜찮은 것인가?

 

부모를 모시는 1 차적인 돌봄의 책임은 자녀에게 있습니다. 자녀로 책임을 지고, 교회로 그 짐을 지우지 말라고 하셨죠. 그러나 가끔씩 부모세대가 자녀와의 소통이 안되고 관계가 단절이 되어 전화 통화조차 드물어 극도의 외로움에 지치고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이 그리워서 하루종일 TV를 틀어놓고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애환을 달래죠.

 

더군다나, 개척교회는 무릎으로 기도를 하면서 험난한 인고의 시간들을 보냅니다. 안나처럼 주야로 기도하며 감사의 눈으로 보지 않는 다면, 사방이 불평이고 불만족입니다. 지뢰밭이죠.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선진들이 불평과 불만으로 죽어가던 것처럼, 똑같은 전철을 반복하며 사람을 붙들고 하나님 원망, 모세 원망, 교회 불만을 하게 되죠. 염병이 퍼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개척교회에서 1년을 버티기도 힘듭니다. 기쁨이 사라진지도 오래죠. 마음의 문도 닫혔습니다. 자녀들과의 단절로 인해 그 외로움의 화살은 목회자에게로 날아갑니다. 자신의 외로움을 풀어달라고. 목회자의 마음도 짠합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매일 기도를 합니다. 주님, 주위에 친구 다섯 분을 주시어서 코드에 맞는 사람들과 집으로 초대하여 밥도 먹고 허기진 외로움을 달래게 하소서. 노인들을 돌볼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지게 하소서. 주님, 진심을 다해 섬기게 해달라고 매일 새힘을 주소서. 하고 기도를 합니다.

 

세례 요한 역시, 예수의 선구자로서 활동 기간은 1년도 채 못 되어 옥에 갇히고 죽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 오실 그분이 당신이냐?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죠(7:19~20).

 

그때 예수님이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고 전하라하시면서 매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7:23).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니 도대체 이 말씀은 무슨 말인가요?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했는데,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했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서운하게 하시지. 왜 축복을 안 주시고, 물권을 안 주시지? 전도는 안하고, 기도도 안 하면서 교회에 사람이 없는 것만 보입니다. 자신이 불행한 것만 눈에 보이고 감사보다는 불평을 하기가 쉽죠.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대하는 대로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기대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죠. 그래서 주님은 내가 기대하는 바를 하나도 행하지 않는 하나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목숨을 걸고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헤롯왕에 의해서 투옥되어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옥중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하며 예수님이 메시야가 틀림없으신지 확인하고 오라고 했죠. 예수께서도 요한의 제자들을 맞이하신 후 요한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해주셨습니다.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 먹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라고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35:5-6)을 인용하시며 가서 메시야가 확실하다는 사실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11:5).

 

그리고는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다음에 요한을 높이 평가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요단강 계곡에는 갈대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24)고 물으셨죠. 너희들이 세례 요한을 따라다닌 목적이 무엇이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갔느냐? 세례 요한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인줄 알았느냐?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고 따라다녔다면 잘못하였다는 점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따라다니다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 흔들리고 실망하든지 아니면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요한을 따라 다닌 사람들은 분명히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의 무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보러나간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흔들리는 갈대란 변하기 쉬운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기에 사람들은 변덕이 심하고 흔들리는 생각을 가진 인물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부드럽고 여자와 같은 사람, 비단 옷을 입은 왕궁의 궁인들과 같은 사람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들이 보러 건 사람은 바로 심지가 굳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이 세례 요한을 예수님은 칭찬하시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28)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는(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더 크다.”(28)

 

어째서 그럴까요? 세례 요한은 그에 앞서 태어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태어났지만,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더 이상 여인의 자식으로 불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요한 1,12)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여인의 자식의 차이이죠.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습니다. 여기에 인간세계의 비극이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죄 때문이죠.

 

그러므로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ώσκω)와 히브리어 야다’(ע󰕈󰖷)와 관계되는 말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전에는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를 믿는 사람이 생겼으나 민족 전체로는 그를 거역하여 십자가상에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요, 세상의 죄입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민족적으로는 참빛 그리스도를 거역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환영하였습니다. 즉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여인의 자녀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당신은 내가 기대하는 바를 하나도 행하지 않아도 주님께 걸려 넘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부디, 환경과 자신의 감정에 기복에 의해서 변하며 갈지자를 그리는 갈대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는 그날 까지 잘 박힌 못처럼 심지가 굳은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나의 처한 환경과는 관계없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서 열정적이고 뜨겁고 신실하게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전하게 하옵소서. 뜻대로 풀리지 않는 다고 할지라도 심지가 굳은 사람으로 잘했다, 충성된 종아하고 주님께 인정을 받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아멘.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길은 영광의 길 이길은 승리의길

 

험한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길은 고난의 길 이길은 생명의 길

 

(후렴)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