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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있는 순복음교회/ 주은총목사
요한복음1/ 말씀, 빛 그리고 생명
요한복음 1:1~5
사도행전을 먼저 보려고 하였는데, 요한복음을 먼저 보기로 하였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요한복음이야말로 신약성경 가운데서도 가장 귀중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마음의 양식을 얻게 되고 영혼의 안식을 얻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사복음서라고 합니다. 이 중에, 요한복음을 제외한, 나머지 3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이라는 말은, 같은 동일한 관점에서 기록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속하지 않느냐? 관점이 다소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흔한 비유의 말씀이 없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있는, /씨 뿌리는 비유, /열처녀의 비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이런 비유들이 없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에는, 동방박사 이야기도 없고, 천사나 목자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초대교회에서는,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과 다르다는 이유로, 정경에서 제외될 뻔 하기도 했죠.
그러나, 중세교회에서는, 가장 심오한 내용을 담은 복음서라는 점에서, 요한복음은 /‘복음서의 왕’, /‘경전안의 경전’으로 가장 사랑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과 에스겔에 보면(계 4:7) 네 가지 생물이 나오죠. 보통, 신학자들이, (겔1:5~10/계4:6~7)를 통해서, 4복음서를 4가지 생물을 예로 들어 표현할 때, /(마태복음)을, /사자, /(마가복음)을, /소, /(누가복음)을, /사람, /그런데, (요한복음)은, /독수리로 표현합니다.
마태복음을 사자로 표현한 이유는 마태복음이 특별히 예수를 메시야로, 특히 유대 족속의 사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얼굴이 사람 같은 생물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간결하고, 솔직하며, 인간적인 마가복음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송아지는 누가복음을 상징한 것이라고 하죠. 본래 소는 봉사와 희생의 동물인데 누가는 예수님을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종으로, 그리고 모든 인류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독수리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모든 생물 가운데서 독수리만이 태양을 직시하면서도 눈부셔하지 않는 짐승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모든 신약성경의 저자들 가운데서 영원한 신비와 영원한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예리하고 바르게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점은 다른 모든 생물들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 생물이지만, 독수리는 땅이 아니라, 하늘을 날 수 있는 생물이라는 점입니다.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요한복음은, 땅에 속한 3차원적인 복음서가 아닌, 하늘에 속한 4
차원적인 복음서입니다.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바로 [요한]입니다. 요한일이삼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그 요한입니다.
보통, 베드로를 수제자라고 하지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오늘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 ‘요한’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 많이들 궁금하시죠? 사도 요한에 관한 기록은 신약성경이나 외경에, 또는 전설에 비교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는 많은 삯꾼을 가진 비교적 부유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살로메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자매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형 야고보와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는 아버지를 도와 어부 노릇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다음 요한은 가장 유명한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의 별명을 좋게 지어주지 않고, 이상하게 지어줍니다. 별명을 뭐라고 지어줬느냐? 우리가 다 알다시피 바로 “우뢰의 아들”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막3:17)
누가복음 9장 54절을 참조해 보면 그들의 열심과 정력적인 성격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천둥번개처럼, 벼락을 치는 것처럼, 성격도 대단하고, 아주 아쌀하고, 화통한 인물임을 제대로 반영한 별명입니다. 예수님이 지어주신, “우뢰의 아들” 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오늘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의 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첫 말씀부터가 엄청난 선포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요한]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격과 성품을 얼마나 시기적절하게 사용하시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요한은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의 품에 의지해 있었고 ‘사랑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심문 받으실 때 제사장의 문 안까지 갔었고 십자가 언덕까지 주를 따라갔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운명하시기 전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라는 위탁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는 베드로와 더불어 무덤에 달려갔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요한은 베드로와 더불어 초대교회 설립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총회 때 요한이 거기에 있었고, 바울은 요한을 가리켜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 요한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하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 때(A.D. 95년), 밧모섬으로 유배갔던 일도 우리가 기억합니다.
나 약해 있을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시고
나 소망 잃을 때에도 주님은 내게 오시네
나 시험 당할 때에도 주님이 지켜 주시네
나 실망 당할 때에도 주님이 위로 하시네
주님만이 내 힘이시며 오 주님만이 날 도우시네
오 나의 주님 내 아버지여 오 나의 주님 내 사랑이여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20장 31절에 보면 목적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의 서두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심장합니다. 이 말씀 사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우레와 같은 말씀이죠. 조금도 타협하거나 흔들림이 없습니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앞선 그 무언가를 말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창세기에서 말하는 “태초에”라는 단어로, 화두를 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태초에”라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근본이고, /모든 것의 원리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사람들은, “태초에”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을 떠올리지 않고, 보통은 (창세기)를 떠올립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복음은 신령한 의미에서 창세기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구속의 역사로서 재창조의 역사를 말하고 있죠. 즉,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생명을 얻게 되는 창조로서, 이 창조에 의해 공동체가 이루어지면 점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신령한 의미에서의 재창조인것입니다.
창세기 창조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의 역사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 있었던 것처럼, 요한복음의 창조 역사에도 먼저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의 역사가 있습니다.
창세기 1:3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라는 말씀에서 빛이 있는 것이 시작이 아니고 빛이 있으라고 하신 말씀이 먼저 있었습니다.
우리는 ‘빛이 있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안에서는 빛이 있는 것 보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먼저인 것이죠.
이것이 요한복음의 첫 부분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로고스로서 천지보다 먼저 계셨고 먼저 계신 그가 곧 창조주이시며 또 그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before Abraham was born, I am)
"내가 있었느니라"가 아닌,
"내가 있느니라"입니다.
즉, 과거시제가 아닌 현재시제입니다. 이 말씀은 피조물 중에 하나가 아니라 창세 이전에 있었던 분이라는 것이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간 속의 일부가 <시간과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은 어떠한 처지에 처하든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함없이 지금 현재도 함께 하시는 <현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빛을 주시는 말씀이며, 예수가 바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요, 세계를 유지하시는 능력으로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오신 분이라는 것이 요한의 위대한 사상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일 많이 나타나는 단어는 <생명, 빛,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단어가 곧 요한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서에서만 생명이란 말은 54회, 빛은 23회, 사랑은 60회나 기록되어 있음은 그 중요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였습니다. 이 ‘빛’이라는 낱말이 요한복음에 23번 나옵니다. 예수는 사람들의 빛이십니다. 8장 12절, 9장 5절에 예수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빛은 사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서, <반복>해서 같은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 아물지 않는 오래된 상처를 만지는 것처럼,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죠.
사람은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죠. 그러나 시작도 나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에 끝도 나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내가 끝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있으라고 하신 이는 영원하죠. 생명의 빛이신 주님이 사망의 고통에 있는 당신에게 찾아가 주시기를 이 시간에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빛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혼돈과 어둠, 죽음을 물러가게 하는 빛입니다. 정욕과 욕망과 공포와 불안의 혼돈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창 1:3 참조-“빛이 있으라”).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1:79)
예수님의 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구원의 빛입니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항로를 잃어버린 배가 저 멀리 비치는 등대의 불빛을 보고 항구를 찾아오듯이 인생의 밤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헤매이며 한강에 떨어져 투신 자살하고 죽음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줄기 빛을 보며 생명을 얻고 구원의 항구에 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섯 남자의 품을 전전하면서도 삶의 기쁨과 만족이 없이 살아가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웅크리고 숨어 살던 삶에서 집집마다, 마을마다 다니며 빛을 증거하는 광명의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로, 이 생명의 빛이 당신에게도 환히 비추이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3-4)
요한복음에서 생명과 빛은 두 가지 큰 주제입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이란 말로 시작하여 생명이란 말로 끝나죠. (요 20:30 참조-복음서 기록의 목적).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도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생명’(ζωή)이란 말이 35회 이상 나오며, ‘산다,’ ‘생명을 얻는다’(ζάω)라는 동사가 50회 이상 나옵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에 ‘생명’이 흐르기를 축복합니다. 생명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길’(the way)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장 6절 )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여
어두운 세상을 밝히러 오신 예수여
나의 어두운 맘속에 들어 오셔서
나의 어두운 맘 밝혀 주소서
빛으로 오신 예수여 빛으로 오신 예수여
빛으로 오신 예수여 나의 어두운 맘 밝혀 주소서
죄악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여
죄악된 세상을 밝히러 오신 예수여
나의 더러운 맘속에 들어 오셔서
나의 더러운 맘 씻겨 주소서
빛으로 오신 예수여 빛으로 오신 예수여
빛으로 오신 예수여 나의 더러운 맘 씻겨 주소서
빛으로 오신 예수여 빛으로 오신 예수여
빛으로 오신 예수여 나의 어두운 맘 밝혀 주소서
예수님은 오셔서 그 삶 전체를 말씀으로 사셨듯이 그는 걸어 다니는 말씀이셨습니다.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말씀이라는 거죠. 그게 다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바로 그렇게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빛을 비춰야 하죠. 헬라어로,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란, /말, /언어, 또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하이데거라는 학자는,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규정합니다. 말은, 형체가 없는데, 실제하고,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말은 비수보다 더 날카롭게 나를 찌르고, 어떤 바위보다 더 무거운 무게로 나를 짓누릅니다. 형체가 없는 그 말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말, 말씀으로 표현되는 로고스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와의 인격적 교제가 없는 신앙생활은 생명력이 없는, 단순한 종교적 극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말씀이신 하나님은, 끊임없이 나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죠. 창세기와 로마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창 6;2-3)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4)
언제 성령의 사람들이 육체가 될까요? 다윗이 끊임없이 여호와께 여쭈었듯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령님께 물어보며 교제를 합니다. 나보다 앞서가시는 그분을 따라가죠.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성령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아닌 자신의 고집과 주관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밀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체가 왕노릇 하는 거죠.
그러면 성령의 사람들은 육체의 사람들에게 말이 안 통하니까, 입을 다물게 됩니다. 특히, 가까운 가족들, 남편들을 더 전도하기가 힘들죠. 아들과 딸이 주의 종인데도 불구하고, 부모로써 ‘내 뱃속으로 난 내꺼니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생각이 흘러가기가 만무하죠. 육체들의 고집들이 흘러갑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그냥 육체로 대합니다.
개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때는 더 이상 ‘주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한낱 ‘나이가 어린 연소한 사람’ ‘가진 것이 나보다 없는 사람.’ ‘여자가 주의 종인 경우 그냥 여자’ 로 대하는 육신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인생을 살아온 경험과 고집들이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성령의 교제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과 고집대로 끌고 가려는 사람들을 그냥 연약한 육체로 보고 자신의 할 도리만 하게 됩니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열 번 만날 것을 한 번 만나고, 지혜롭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먹을 것을 가져다 드리고...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필요들을 충족시켜 드리려고 하죠.
육신대로 살고 육체로 하는 말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싫어하는 것임을 성령의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육신이 되지 않으려고 하나님께 물어보고 또 물어보면서 그분과 영적인 교제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없으면, 영이 죽으니까요. 하지만 진심으로 대하려고 합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10년 동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밤늦게 술에 취해서 들어오면서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또 술상을 차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밉겠습니까? 부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꼴입니다. 그런데도 이 부인은 아무소리하지 않고 술상을 차렸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의 친구들이 의아해합니다. 자기의 부인들은 그 정도면 난리가 날 일인데 아무 소리하지 않고 순순히 대접을 잘 해주니 궁금해서 물었답니다. 그러자 이 부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제 남편에게 10년을 전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제 포기하고 보니 나는 천당에 갈 것이고 저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살 동안만이라도 편안하게 대접을 잘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시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행하던 자를 데리고 가시고 영원히 동행하시기를 원하시죠.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보다 어떻게 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형통할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신 곳이 십자가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당신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면 당신은 발악을 하실 건가요? 외로움과 멸시, 고통을 견디다 못해 뛰쳐나갈 건가요? 십자가에서 뛰어내리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따라 오라’ 하는 곳은 좋은 곳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지만 나의 신랑,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이 가신 곳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으로 돌아갔던 것이죠. 막달라 마리아와 나사로등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작은 교회는 그렇게 기도하고 전도하고 몸부림을 치는데도 교회가 잘 커지지 않는데 큰 교회는 작은 교회의 수고에 비해 더 빨리 커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도들이 숨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직분을 맡지 않아도 되고 구역에는 안 모여도 별 문제가 안되니 얼마나 좋으냐는 것입니다.
또한, 헌금을 냈는지 안 내었는지 누가 압니까? 4,000명 5,000명이 모이면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로 인해서 큰 교회는 자꾸만 커져가고 있는 것이죠. 100명 미만 모이는데 가면 누가 왔는지 누가 안 왔는지 금방 압니다. 그래서 큰 교회로 숨어 들어가는 거죠.
예수님이 계셨던 곳이 어디 일까요? 호기심과 일신상의 축복만을 추구하는 군중들, 외식과 교만으로 병든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이 아닌... 중풍병자, 귀신 들린자, 소경, 앉은뱅이, 창녀들과 세리 속에 계셨습니다. 그들 속에 어디 온전한 사람들이 있었는가요?
개척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경험이나 고집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작아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상처를 많이 받아야 하죠. 나를 크게 만들고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하려던 욕심을 버리고, 이제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낮추고 작게 만들며 그래서 가난한 삶으로 돌아가 적게 쓰고, 최소한의 삶을 이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자세여야 하죠. 우리가 이 땅에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잘 살려고 왔나요?
물론, 많이 지칩니다. 포기하고 싶죠.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울면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죠.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치게 해 달라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해 달라고.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라고 하였죠. `청결한 마음이란 우리의 의지가 오직 하나의 대상으로만 향해 있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모두 드린다면 우리는 청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과 인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기도의 채널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변함없이 맞추어 놓을 때 우리의 마음은 청결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자주 찾아오는 불결한 생각, 불평, 짜증, 견디기 힘듬들을 기꺼이 이겨 낼 수 있는 ‘은혜위의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주님, 제가 이 땅에서 가장 잘 한 것은 “예수를 믿고 영접”한 것입니다. 저의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당신께 여쭈어 보고 생활을 하는 ‘영적인 교제’를 놓치지 말게 하소서. 당신이 내게 주신 십자가를 끝까지 지게 하시고 은혜위에 은혜가 넘쳐 흘러가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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