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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창세기

주은총목사/ 창33장/ 마침내 이루어진 화해

by 주은총목사 2025. 3. 29.

https://youtu.be/iZVIrVSE6yw?si=I54LD5UDw8R4Bqt4

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마침내 이루어진 화해

창세기 33:1-20

 

1. 드디어 에서와 만나는 야곱

.

야곱의 삶은 오직 신념이란 이름으로 달려온 험난한 인생이었습니다. 자신의 열심과 계략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진정한 삶의 감격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잡으러 오는 형 에서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이 달라졌죠. 하나님을 만나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고 나니 진정한 해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구약성경에서 이름이란 그 사람의 본성과 특별한 관련이 있죠.

 

야곱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의미를 지닌 자신의 이름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 이름은 지금까지 살아온 야곱의 자화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32:28) 라고 하셨죠.

 

야곱은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잡고 경쟁하며 속이고 살아가는 이름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워 이김이라는 승리자의 이름 이스라엘을 얻습니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야곱의 삶에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인간적인 두려움마저 완벽하게 사라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희노애락을 느끼지도 않는, 완전히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아픔은 작게 느끼고 반면에 하늘의 기쁨은 더 크게 느낍니다.

 

20년 만에 형과 동생이 재회합니다. 20년 전, 동생은 형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야반도주를 하였습니다. 형은 동생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죠. 그것이 서로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기억이었습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야곱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형은 그 사건 이후 20년을 어떻게 보냈을까? 내가 형에게 남긴 깊은 상처가 형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야곱이 준 상처가 에서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채색되었을까? 그러니까 가족과 재산을 나누어 편대를 짠 것이죠. 오만가지 생각으로 심란했습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1-2)

 

야곱은 에서를 만날 때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공격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피할 수 있도록 가족들을 배치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그런데 여종과 그들의 자식들은 가장 앞에 두고, 두 번째로 레아와 그 자식들은 그 뒤에 두고,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둡니다(2).

 

야곱은 왜 이렇게 하였을까요? 라헬을 가장 사랑하니까 라헬과 요셉은 살리고 나머지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는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가족 중에 일부라도 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솔직히는 이런 순서로 살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배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나요? 하나님을 만나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지만, 에서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 정도로 컸다는 것입니다. 아직 그의 마음속에서 극복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는 거죠. 에서를 만나는 것은 그 정도로 두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죠. 아무리 큰 아픔도 시간이 흐르면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지는 기억도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분하죠. 나중에는 모든 주변 정황은 사라지고 분노만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이 능사는 아니라는 거죠. 분노와 아픔이 너무나 큽니다. 차라리 이 땅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안 보고 그냥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그렇게도 하구요.

 

화해는 실로 어렵습니다. 진실을 인정하는 용기와 치러야 할 대가를 감당하는 담대함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화해란 정의가 함께 실현되는 거죠. 값싼 화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정의가 해결되지 않아도 할 수 있죠. 문제 해결이 안 되고 감정이 풀리지 않아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찬송가 72

1. 만왕의 왕 앞에 나오라 기쁨과 감사의마음으로

하나님 행하신 일들을 즐거운 노래로 감사 하여라

만왕의왕 앞에 나오라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2. 온 세상 만물을 지으신 위대한 하나님 아버지는

저 깊은 바다와 높은 산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네

만왕의왕 앞에 나오라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3. 드 넓은 육지와 큰 바다 하나님 손으로 지으셨네

사랑과 인자가 넘치니 우리는 그 품의 어린 양이라

만왕의왕 앞에 나오라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4. 하나님 앞으로 다나와 무릎을 꿇고서 경배하자

주 말씀 듣고서 따르면 평안과 즐거움 넘치리로다

만왕의왕 앞에 나오라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5.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영원히 영광을 받으옵소서

만왕의 왕 앞에 나오라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 사는 엘론이라는 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차를 몰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가 차 앞으로 갑자기 뛰어나왔죠. 엘론의 차는 아이를 치고 말았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숨이 멎었죠. 사고가 난 그 곳은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이었습니다. 피해자의 가족과 친구들이 당장 잔인한 보복을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엘론은 그냥 달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이미 숨이 끊긴 아이를 안고 마을 사람들이 이 아이를 거두어 가기를 울면서 기다렸습니다. 마을 전체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죠. 동시에 그들은 유대인 가해자가 멈춰 서서 아이를 안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습니다.

 

그들은 엘론에게 정해진 날짜에 마을에 와서 이슬람 법정에 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누구도 엘론이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풀어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법정에 설 날짜가 다가오자 엘론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죠.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풀어준 것이니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법정에 나가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을로 돌아가 법정에 섰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그가 나타나자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내려진 선고는 살인죄로 인한 유죄가 아니라 죽은 아이의 가정에 가족으로 입양돼야 한다는 판결이었습니다.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아이 가족들을 방문하고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는 선고가 내려졌죠.

 

전쟁의 기운이 맴도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예수님의 가정에 입양된 유대인이 이제 무슬림 가정에도 입양된 것이죠. 이 사건 안에서 정의와 용서와 화해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화해의 사건에서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변화를 요구하시죠.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기 이전에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키셨듯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변화를 기대하십니다. 우리에게 화해란 가장 어려운 숙제입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3)

 

이제 자신이 있는 곳에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온 것을 본 야곱은, 자기가 가장 먼저 용감하게 맨 앞으로 나갑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자기가 가장 마지막에 나갔을 텐데. 야곱이 변화가 되었습니다. 많이 바뀌었죠.

에서와 그가 데리고 온 사람들 앞에 혼자 나가서 무려 일곱 번이나 몸을 땅에 굽히며 절을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야곱이 에서 앞에서 일곱 번이나 절한 것은 아부하는 행동이다라고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부하거나 비열하거나 모면하려는 행동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굉장한 행동이죠. 당시 왕에게 절하던 관습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형제 사이입니다. 그것도 10, 20년 차이가 나는 형제가 아니라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형제입니다.

 

그런데 일곱 번이나 절을 했다는 것, 이런 것은 에서가 아무리 형이라도 형제 사이에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하가 왕에게 하는 자세이지 형제 사이에 할 일이 아닙니다. 최대한의 예의와 존경을 표한 것입니다. 뒤에 보면 에서를 향해 내 주라고 부르는데, 굉장히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교만한 본성이 있죠. 다른 사람 밑에 굴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웬만해서는 남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야곱은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일곱 번이나 절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럴 정도로 낮출 필요까지는 없는데, 에서 앞에서 이토록 자신을 낮추었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치유해주신 것입니다. 천사와의 싸움 후 자신 안에 있던 굶주림의 상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겼던 상처, 장자가 아니었던 것에서 온 상처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처음 경험했을 때의 일을 추억해 보십시오. 상담학이나 정신병원에서 치유가 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상처들이 성령의 힘으로 상쾌하고 말씀하게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잖아요. 영이 화하고, 환해집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일곱 번을 절한 것은, 단순히 에서라는 인간에게 무릎을 꿇은 굴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에 순종하며 나아간 것뿐입니다.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님을 이겼는데 사람이 두려울까요?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해서 내려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천한 인간으로 오셨죠. 그리고 참혹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화해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내 눈에 독기가 빠지고 내 혀에서 독기가 빠지고 내 몸에서 적대감이 사라지는 것이 화해의 시작입니다. 그는 이제 형의 굴복을 얻고자 했던 욕망에서 풀려났습니다. 이제 축복을 돌려주어도 상관 없습니다. 비굴한 절이 아닌 화해의 요청입니다.

 

새찬송가 269

 

1.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샘물같이 늘 흘러서 죄 씻어 주시네

값없어도 다 나와서 내 죄를 고하면

흰 눈보다 더 희도록 참 성결 얻으리

나 믿노라 나 믿노라 그 보혈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하셨네

 

2. 저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 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내 지은 죄 흉악하나 주 예수 믿으면

용서받은 강도같이 곧 구원받으리

나 믿노라 나 믿노라 그 보혈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하셨네

 

2. 에서의 변화된 태도

운동을 좋아하는 분들 계시죠? 특히 자기가 좋아하는 팀이 게임을 할 때 그렇습니다. 결승전을 할 때 보십시오. 경기에서 아주 치열한 접전을 펼치면서, 축구, 야구, 풋볼, 농구 등에서 비슷하게 하며 아슬아슬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얼마나 손에 땀을 쥐며 긴장감이 있습니까?

 

관중들이나 TV로 시청하는 팬들을 물론이고, 직접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아주 긴장감 속에서 경기를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점으로 승부가 갈리는 순간에 점수를 내는 선수들이 바로, 슈퍼스타입니다.

 

그렇게 전혀 예측할 수 없이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되는 마음, 아주 애가 타는 마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4절을 자세히 잘 보십시오. 야곱이 아니라 에서가 달려왔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맞이했습니다. 에서가 안았습니다. 에서가 목을 어긋 맞추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울었습니다. 에서가 주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 (4)

 

마음을 졸이며 자기 쪽을 두 떼로 나누고, 엄청난 예물들도 미리 보내고, 대비한 야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기 전에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안 믿는 사람이라도 기도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때,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악한 상태에서 만나지 않도록, 마음이 부드럽고 풀린 상태에서 만날 수 있도록, 나에 대해 호의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만나야하죠.

 

또 믿지 않는 사람과 사업상 이야기를 할 때 정직하게 대화가 잘 이뤄지도록, 학교를 가거나 직장을 잡아서 면접을 할 때 상대방이 나의 가치를 알아봐 줄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요청하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화해란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 돌아서는 여정입니다. 기도 중에 야곱뿐 아니라 에서의 고통도 헤아립니다. 굴욕적인 경험과 훼손된 존엄성, 상실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한 에서처럼 상처받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연민이 화해의 출발점입니다.

 

에서에 대한 두려움에 떨던 야곱은 그날 밤 세 개의 만남을 가졌죠. ‘자기 자신’ ‘상대방’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에서의 미움과 분노는 쉽게 가라앉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죠. 그런데 에서는 지금 이상하게 야곱을 향한 마음이 좋아집니다. 야곱을 만난 것이 너무 반갑고 기쁜 마음이 마구 일어났죠.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만나기 전에는 20년 동안 이를 갈면서 야곱 자식, 만나기만 해봐라. 그냥 두지 않겠어.’ 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면서 400명의 장정들을 데려온 것입니다. 뭐 하러 400명의 장정들을 데려옵니까? 정말 인사하고 싶으면 자기도 자기 자식들을 데려와야지, 왜 장정들을... 군인들을 데려오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야곱의 삶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은혜를 얻을 때 하나님은 에서의 마음도 만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의 마음>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시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의 근원이 되십니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함께 울었습니다.”(33:4)

그 입맞춤은 진실과 자비의 만남, 정의와 평화의 입맞춤이었죠.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85:10-12)

 

마침내 이루어진 화해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는 것이죠.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을 만나 환도뼈가 위골되는 경험을 한 후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 사이에 화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야곱이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인 형 에서에게 한 고백이죠.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33:10) 참된 화해는 사람끼리의 화해가 아니라 그 화해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화해입니다. 그냥 잘해보자고 악수하는 것은 화해가 아니죠.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야 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길이 있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화해는 이렇게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죠.

 

야곱은 에서의 변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에서의 난폭한 본성을 누르시고 야곱에게 부드럽게 대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죠. “진정한 평화이며,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하나님께서는 왜 불편한 관계, 부담스러운 사람을 내 주변에 두십니까? 좋은 사람들만 주시면 좋은데 왜 내 주변에는 꼭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아직 교만한 우리를 훈련하시고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그들을 마치 육체의 가시처럼 우리를 단련시키시고 성장시키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을 두시는 거죠.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라반을 다룰 수 있는 지혜와 굳센 힘, 영권과 물권을 받을지어다!

 

이제 하나님은 라반의 문제를 뛰어 넘어 또 다른 에서의 문제를 <에서와의 화합의 현장>으로 이끄셨습니다.

 

무엇이 에서로 하여금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야곱과 화해하게 했을까요? 자기 가족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그가 어떻게 남의 가족까지 챙기게 되었을까요? 세상 재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인데 어떻게 선물을 다 마다하게 되었을까요? 그토록 자기만 알고 안하무인 이며 짐승 같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살면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고 복잡합니다. 서로 마음이 부딪혀 원수 되는 일이 다반사로 있습니다. 고독과 대결을 가져오고 살인과 전쟁도 가져옵니다.

 

얼마나 그 사람한테 험악한 상처를 받았는지, ”, 이제 더 이상 내 아버지가 아니야“ ”내 남편이 아니라고!“ ”내 동생이 아니야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내가 네가 죽을 때 조차 장례식에 가는 가 봐라! “라고 단절의 시간들을 수 십 년간 보냈습니다. 내 인생에 그 사람이 없는 것으로 오는 평안함.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 자신의 손아귀에 쥔 채로 밟고 누르는 것은 기본이요, 심한 언어 폭력으로 인하여 내 영혼마저 말살되었습니다. 가슴은 뻥 뚫린 채 피를 흘리며 살아 왔습니다.

 

야곱도 형 에서와의 장자권 다툼으로 인해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고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몇 날 동안 잠시만 피신해 있으면 될 거라는 생각으로 떠난 길이 20년 세월의 길이 되고 말았죠. 20여년만에 에서를 만나야 하는 현실. 얼마나 착잡하고 두렵고 힘들었을까요? , 그런데. 세상에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에서의 마음이 풀렸습니다.

 

창세기 339절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죠. 에서가 뭐라고 합니까? ‘, 이놈아!’ ‘, 이 새끼야! 넌 내 동생이 아니야!”라고 하지 않고, “내 동생아(My brother)”라고 합니다.

 

동생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내가 만나기 두려워하고 죽어도 안 봤으면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순한 모습으로 나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할 때,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때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야곱은 두려움으로 준비했던 많은 가축과 예물을 정말 진심으로 형님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33:10-11)

 

주님, 내게 라반을 다룰 수 있는 지혜와 굳센 힘, 영권과 물권을 허락하옵소서. 얍복강의 축복을 통하여 하나님이 마련하신 <화해의 장>을 누리게 하소서. 에서의 두려움과 맞설 용기와 담대함을 허락하소서. 마침내,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뵙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생명수 흐르는 강변 나의 임금 예수께서 계신 곳

정금 빛 찬란한 보좌 만왕의 왕 예수 계시니

내 가는 길 내 가는 길 험하고 곤해도 나는 꼭 가네

생명수 흐르는 강변 동산으로 나는 가리라

 

황금 보석 찬란한 보좌 나의 임금 예수께서 계신 곳

가시 벗고 면류관 쓰신 만왕의 왕 예수 계시니

내 가는 길 내 가는 길 험하고 곤해도 나는 꼭 가네

생명수 흐르는 강변 동산으로 나는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