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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빌립보서

주은총목사/ 빌립보서6/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by 주은총목사 2024. 12. 13.

https://youtu.be/DESx82T5Zk0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교회/ 주은총목사

 

요즘 당신의 생활은 어떤가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1273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숲속에 한 작은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앞에는 아주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는데, 마침 한 사람이 그 집에 볼일이 있어 호수를 건너가야만 했습니다. 때는 겨울이어서 호수가 꽁꽁 얼어 있는 듯 했습니다.

 

, 이 정도면 달려가도 끄떡 없겠는걸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힘차게 호수 위를 가로 질러 갔습니다. 이 사람은 과거에도 이 정도로 보이는 호수를 충분히 건너갔던 기억을 되살리며 전혀 의심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그는 호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호수는 그가 확신한 것과는 달리 살 얼음이 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며칠이 지나 위와 동일한 호수 앞에 또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위와 다르게 호수가 잘 얼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호수가 잘 얼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위험하지는 않을까?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고 험하니 일단 건너봐야 겠다라며 매우 조심해서 호수를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20분이면 족히 건널 수 있는 호수를 그는 무려 1시간이나 걸려 지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빠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호수가 매우 견고히 잘 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두 이야기는 매우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호수를 건너는 사람이 빠지고 안 빠지고는 건너는 사람의 확신이나 열심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은 호수가 잘 얼어 있다고 100% 확신했지만 빠졌고, 다른 한 사람은 의심을 했지만 빠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호수의 상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호수가 잘 얼어 있으면 사는 것이고, 호수가 살얼음이면 죽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동일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우리는 처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혹은 새로운 마음으로 뭔가를 다짐하려 할 때 어떻게, 얼마나?. 열심히!”의 문제에 먼저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를 믿으려 하는가?“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난 나를 믿고 열심히 살 겁니다.“

사실 좀 헷갈려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믿기로 했어요.“

저는 절에 가면 마음이 가장 편해서 불교를 믿습니다.“너무 힘들면 교회에 가지만 예수님은 안 믿어집니다.“

 

이 말들 안에는 여러 종류의 믿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를 믿는 믿음, 아무것도 안 믿는 믿음, 불교를 선택한 믿음, 힘들면 교회에 가는 믿음그러나 이 믿음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 있을 뿐 실제로 복음이 없습니다.

 

오늘 바울은 <복음과 더불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요? 먼저, 자기 주관적 의미에서의 정의가 있습니다.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내가 평안해지는 것이다, 내가 잘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소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자기를 기준으로 복음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가 바로 복음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곧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능력이죠. 복음은 지식도 아니요, 철학도 아니요, 단순한 진리가 아닙니다.

 

특별히 고린도서에서 그는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좀 더 좁은 의미로 바울에게 복음이란 곧 십자가 사건이요.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 바로 이 사건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그 자체가 복음입니다.

 

찬송가 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 그의 사랑 지극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 나의 친구-. 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 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없는 나의 친구-.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구원하셨으니 기쁨으로 경배하며 찬양하리 나의 친구-. 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 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없는 나의 친구-. - ♪ ♬ ♪ - 내 맘속에 늘 계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네. 가지된 자 하나되리. 포도나무 나의 친구-. 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 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없는 나의 친구-. 그날이 와 황금길에 그의 영광 바라보며 그의 팔로 날 안을 때 만나보리 나의 친구-. 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 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없는 나의 친구-. 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 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없는 나의 친구-.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1] 복음에 협력하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천국 시민이 된 성도들은 이제 천국의 법이라고 할 수가 있는 복음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믿는 자들이 복음에 따라 살지 않고 이 세상의 악한 법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들의 신앙과 삶에 모순되는 것으로 온전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에 따라 한 목적을 위해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사로서 아주 귀중한 말씀을 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은 바로 복음 사업에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선교가 더욱 어려웠습니다. 복음이 전혀 전해지지 않아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협력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협력자를 잘 만나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면 도중에 쫓겨나거나 매 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때로는 간첩으로 몰리기도 하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비밀한 심부름을 해 줄 많은 협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14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4-16)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우리는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협력하는 것: 이 말은 함께라는 것과 투쟁하다라는 <아들레오>가 결합된 같이 싸워 나가다. 함께 투쟁하다.라는 <쉬나들레오>의 분사형인데 이 말은 경쟁이나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과 희생과 훈련이 필요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꽃을 핀다는 것은, 그 곳에 누군가의 눈물과, 헌신과 피가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척의 길을 걷는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서, 가난과 더불어 열악한 환경을 견디어 내며 목회자의 곁을 지킨 소수의 성도들의 기도, 그들의 충성과 끊임없는 노력은 눈물겹도록 애절하죠.

 

오랫동안 길이 열리지 않으니, 마음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고. 세월만 축내다 썩혀진 인생이 아닌가? 하고, 점점 용기를 잃어갈 때도 있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만 가죠. 때론, 마음이 무너져, 이제 그만 하고 싶다라는 마음밖에 없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이기고, 또 이기고, 그 힘든 마음을 하나님께 매일같이 내려놓죠.

 

바울 역시,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후욕과 핍박을 당하고 만물의 찌끼 같은 삶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이를 매일처럼 견디어 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가 어디 쉬울까? 개척교회에 사람이 없으니까, 텅빈 교회에서 빨리 도망가고 싶죠. 대개는 조금만 힘들어도,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조금 손해만 와도 손 털고 뒤도 안 돌아보고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제가 한세대학교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 미국 베데스다 대학교에 어학연수를 갔습니다. 그때, 한방을 같이 쓰신 분이 모 전직 장관부인이자 권사님이셨습니다. 그 분의 여권을 보면 얼마나 많은 스탬프가 찍혔는지.. 해외를 한 40번 정도 돌아다닌 것 같습니다.

 

그분이 제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불쌍해! 안그래요. 해외도 안 돌아다녀보고. 근데, 사도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며 해외를 많이 돌아다녔잖아.”

 

저는 그분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공짜는 없습니다. 무엇이든 반드시 대가가 있기 마련인데, 승리자가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오래 견디는 것입니다. 피와 눈물, 아픔과 십자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산리에 능력있는 김0이 목사가 왔으니까 거기 가서 성령의 바람을 쐐고 오자” “많은 사역자들도 온다.”라고 저에게 조차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김0이 목사님이 누군지 조차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에너지를 그곳에다 가져다가 낭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에게는 개척교회가 얼마나 힘들지 잘 알기에, 저에게 붙여준 권순영 목사님, 정향진 목사님, 김수대 목사님과 이기쁨 전도사님, 요양원을 위해서 수고를 하시는 민집사님. 그 소중한 한 분 한분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며 에너지를 쓰는 것이, 제 자신이 죽어도 좋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이나 이방민족이 아니라, 오로지 이스라엘의 길잃어 버린 민족들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해외가 아니라, 오로지 이스라엘 민족에게 집중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로보니아게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딸을 살려달라고 할 적에도 내 자녀가 먼저 먹여야 한다. 개들은 아니다!”라고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7:25-29(쉬운 성경)

25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어떤 여자가 얼른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더러운 귀신이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26그녀는 그리스 사람으로, 수로보니게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자기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27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을 먼저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서 개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

 

28그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옳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그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습니다."

 

29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떠났다."

 

교회를 떠나고 싶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도 뿌리가 있어야 거목이 되는 것이죠.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오늘은 이 땅이 좋으니 여기에 심고, 내일은 저 곳이 옥토니 저 곳에 심어보십시오. 뿌리가 없으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 땅에 집이 많다고 다 내 집이 아니고, 모든 여자가 다 내 여자가 아니듯, 목자도 아무리 허름한 개척교회의 목자라도 내 목자가 있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 박영선목사님, 이찬수 목사님, 옥한흠목사님은 아니더라도 내게 붙여 주신 허름한 개척교회의 그 목사님이 당신의 목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리저리 마구 돌아다니는 사람은 사람구경, 성령구경을 하는 구경꾼이지 미안하지만 한 교회의 일꾼은 아닙니다. 그저 기분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사람을 가지고는, 교회는 물론 그 어떤 사역도 하지를 못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평생에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쫓아서 떠돌아 다니며 산 사람입니다.

 

저는 어디에 성령사역을 크게 한다. 대개 이름이 있는 목회자다. 능력이 있다이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리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큰 기도원에 가서 사람구경, 나름대로의 성령춤과 화끈함이 아니라 개척교회에 가서 이름없이 수고하는 그 사람을 위해 협력하는 것,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는 것, 꾸준히 그 사람과 같이 헌신과 희생하는 것! 이것이 제게는 더 소중합니다.

 

이젠 힘들 때 일수록,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리를 제발 좀, 견디어내십시오. 지금 뛰쳐나가면 살 것 같겠지만 아닙니다. 견디어 내십시오. 환난의 터널 속에 들어가면 적어도 10년 동안은 잘 참고 고비를 넘겨야 하는 법입니다.

 

겨울에는 잎이 다 떨어져서 앙상하게 가지만 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것 같던 나무도 봄이 되면 다시 잎이 돋아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죽음이 없는 부활은 없는 것이죠. 개척교회에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험한 십자가 굳게 붙잡으십시오.

 

갈보리 산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 최후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멸시함을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양이 영광 다버리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최후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주가 예비하신 나의 본향집에 나를 부르실 그날까지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내가 죽도록 총성하리 최후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최후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교회는 마음을 하나로 합하는 일에 모범을 보인 교회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기도에 힘쓰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은혜를 받고나서 부유한 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모든 교회들이 이처럼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자가 될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2] 대적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삶(28).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권면하면서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28여러분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증거이며, 그들이 멸망할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복음에 대한 어떠한 대적에게도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14장에,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17장에는 바울이 복음 전하는데, 끝까지 따라와서 죽일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갖은 위협과 환란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에는 복음에 대한 대적자들이 많았습니다. 이교도들의 박해도 심했죠. 또한 여러 가지 이단 사설도 많이 횡행하여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이 모든 대적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바울이 중요한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메 프튀로메노이>라는 말은 본문에서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용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겁먹은 말처럼, 놀란 새처럼, 조마조마해하면서 비겁하게 사는 것이요, 일종의 패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신앙적 담력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면 대적하는 자들에게 담대합니다.

 

그것은 복음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의 모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10:28).‘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적어도 복음의 협력자로 사는 사람은 죽음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자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가 사업에 실패할까봐 두려워하고, 혹시나 건강검진을 할 때 암이 발견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선교의 역사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좌절이 없습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니까 담력이 생깁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한 일이라면 마지막은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라는 특별히 중요한 말씀이 이죠.

 

지금 나에게 괴로움을 끼치고, 핍박하는 자가 있습니까? 복음으로 인하여 가족관계가 단절이 되었나요? 우리는 그 다음의 일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흥분하고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저 사람이 내게 얼마나 미안한 생각이 들까, 저 사람이 나를 이처럼 오해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라진 다음에 내게 사과하려면 얼마나 곤란할까?' 왜 이런 생각을 못하시나요? 오해받았다고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다 판가름날 것이고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11: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사도바울이 말을 합니다.

"내가 빌립보에서 당한 것을 너희는 보지 않았느냐, 대적이 있으면 오히려 잘되는 것이다. 복음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요 저들에게는 멸망의 빙거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 그것은 바로 대적 앞에서 담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자녀인 우리는 어떠한 사단의 도전에도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담대하게 싸워 나가면 되는 거입니다.

 

1).다 같이 일어나 용감히 싸워라 저 마귀 물리친 옛 성도들 같이 그 어떤 고난 당해도 주 영광 드러내리라

 

2)옛 성도 걸어간 그 길을 따라서 이 거룩한 싸움 늘 싸워이기며 이 세상 유혹 물리쳐 내 주만 따라 가리라

 

3).힘차게 나가자 큰 싸움할 때에 주님의 강한 손 내 능력 되시면 저 마귀 능히 물리쳐 늘 승리하게 도리라

 

4).주님만 의지해 힘차게 나가자 이 거룩한 싸움 곧 끝이나리니 저 승리의 면류관을 내 주가 주시리로다 아멘

 

[3]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밝힘으로 고난에 대한 성도의 바른 이해를 의도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은 저주이고 평안하고 만사형통이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아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세상 속에서의 평안함이 화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받아들였다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며 예수님을 따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상은 우리를 핍박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음은 곧 우리의 신앙의 당연한 결과요 비로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불가분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난속에서 성도들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죄와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더욱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죠.

 

1: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포장하는 인생, 행복인 삶인냥... 위장하며, 허위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겉 사람만 꾸미게 됩니다. 그러나 그 끝에는 헛된 인생임을 고백하게 되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1:2~3)

 

내 뜻대로 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뜻대로 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돈을 원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치부합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사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몇 가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힘듦과 허무와 악하다는 인생 최후의 변론을 하게 되죠. 자기 뜻대로 대학을 간 사람은 몇 명이 됩니까. 자기 뜻대로 직장을 간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밀려서 간신히 가지 않았나요?

 

태어나면서 부유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부모님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뜻대로 이상적인 남자와 이상적인 여자 만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참된 신앙은 내 뜻대로 되고 안 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죠. 현재의 나쁜 것이 최후의 나쁜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고난에는 여러가지 유익과 축복이 숨겨져 있죠. 1)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119:71절에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고난의 골짜기를 걸어 가면서 자신의 교만함과 무서운 죄악을 발견하게 되죠. 자신의 의를 자랑하던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는가를 보게 됩니다.

 

2)고난당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당하는 다른 자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됩니다.

고후1:4절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자식을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자식이 죽은 부모의 슬픈 심정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 빌립보서를 쓸때에 로마 감옥에 감금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 재판의 결과가 생사를 좌우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좋다라고 죽음을 초월합니다. 바울은 그가 배고픔의 고난, 매맞음의 고난, 동족의 저주를 받는 등의 고난을 당함으로써 고난 중에 있는성도들과 교회들을 능히 위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구원 받은 성도는 언제나 무지개 빛 약속만이 있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죠. 오히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십자가의 길이며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곧 실망하여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개척교회를 떠나,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소명의 자리를 떠나 자신이 있었던 옛날의 그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사람이 됩니다.

 

고후1:9절에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주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사람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감사하며 감옥에서 홀로된 고통과 외로움속에서 끝까지 십자가를 붙들고 있었던 사도바울처럼 대적앞에서도 담대하고 고난을 기뻐하며 예수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나의 몸에 온전히 채우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고난이 유익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