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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빌립보서

주은총목사/ 빌5/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by 주은총목사 2024. 12. 11.

https://youtu.be/aRLiIblzolA?si=M_DdSjXI9JdSyTwe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교회/ 주은총목사

 

5/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11921)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39 세 된 두 아이의 엄마가 속초에서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며칠 전에 남편과 다투고 술 병 몇 개를 남겨 둔 채 그녀는 바다에 뛰어 들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녀의 출발이 결코 불행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직장에서 만나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하였죠. 그러나 결혼 생활은 부부싸움의 연속이었고, 결말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으로 만나, , 격렬하게 싸우는 것일까? 그것은 서로의 결혼의 틀다르기 때문입니. 그렇다면 결혼의 틀이 무엇일까?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간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남자는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고 여자도 좋은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만나 결혼을 했죠.

 

그런데 결혼 전에는 잘 몰랐던 부분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국 사회는 남편이 아내를 도와 집안일도 함께 하고 시장도 함께 가는데 도대체 이 사람은 전혀 거들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잠자리도 정리하지 않고, 부엌에서 아내가 땀 흘리면서 일해도 구경만 하고, 밥을 먹고 소파에 앉아 신문보고 TV보면서 아내를 도와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도무지 이런 남편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하고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 때문에 참고 어느 정도 견뎠습니다.

 

그러던 차에 시아버지 회갑에 시댁에 가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아버지가 자기 남편과 똑 같은 것이었습니다.

 

시아버지는 농촌의 유지였기 때문에 몸집이 풍만하고 체구가 좋은 반면에, 시어머니는 왜소하고 허리가 굽었습니다. 그런데 잠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 체구 좋은 시아버지는 밖으로 쏙 빠져나가고 허리가 굽은 시어머니가 이불을 개는 것이습니다.

 

또 시어머니가 부엌에서 일해도 시아버지는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한국의 남존여비가정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신랑이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고치려 해도 싸울 뿐이지 해결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가정 주간에 부부 세미나에 같이 갔다가 거기에서 남편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떠나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서로가 조금씩 더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 부부가 이렇게 싸움이 끊이지 않았을까요? , 사랑으로 만난 결혼이 이런 위기에 이르게 되는 걸까?

 

거기에 관하여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우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요인으로는 남녀의 지위가 서로 다른 가족문화권에서 각각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면 몸만 밖으로 쏙 빠져 나가고 어머니가 부엌에서 일해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버지상과, 어머니로부터는 남편에게 말 한 마디 못하고 무조건 순종하는 아내 상을 갖고 있는 남자라면,

 

결혼해서도 이 남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한 것처럼, 자신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자신의 부인이 자기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순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남자의 결혼생활의 틀이 되죠.

 

또한 남자의 경우와는 달리, 아버지는 말없이 어머니의 주장에 따르고, 어머니는 활동적인 성격인 가정에서 자란 여인은 어머니로부터 남편을 다스리는 아내 상을 모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아내 상은 결혼해서 자연스럽게 남편에게 투영될 것입니다. 또 이 여인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부인에게 순종하는 남편 상을 결혼해서 자기의 남편에게 기대하고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여인의 결혼의 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자주 아내를 위해 설거지를 도와주셨고, 자녀들과도 놀아주시며 배려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늘 둘 사이에 싸움이 반복되었죠.

 

그러면서 너 네 집안은 대체 왜 그러냐.”하면서 서로의 집안에 대한 흠을 잡기가 일쑤였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아니면 갈등을 겪게 될 것인지는 이 두 사람의 결혼의 틀, 즉 사랑의 궁합에 맞추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궁합이 어긋날 경우,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 아버지처럼 독선적으로 나오면서 부인은 절대 순종하기를 기대할 것이요, 부인은 반대로 남편이 자기에게 순종하면서 자기주장에 따라 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간에 양보하지 않으려는 심리적인 전쟁이 시작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처음에는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즉 기가 죽지 않으려는 싸움을 하게 되고, 그 결과에 따라 어느 한 쪽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만남에도 어느 기간 동안 이런 심리적인 기()싸움이 계속되다가, 어느 한 쪽이 포기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화도 어느 정도 사랑의 궁합이 맞아야 이루어지는 것이지, 서로 사랑의 궁합이 지나치게 어긋날 때는 싸움은 치열해지고 걷잡을 수 없는 단계로까지 치닫습니다.”

 

이처럼 문제의 원인이 이러한 서로 다른 결혼을 바라보는 틀에서 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극단적인 데까지 나아가는데 문제가 있죠.

 

어떤 남자들은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부인한테 이 정신병자야”, “미친년아라고 몰아붙이는 것을 저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신혼 초부터 마음고생을 하다 정신과 치료를 받았습니다. 결국은 저한테 까지 와서, 병원에서 남편과 같이 오라는 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힘들어 하며 상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꽤 괜찮은 직업의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참 험악하게 싸웠죠. 이처럼 결혼의 틀이 어긋난다고 해서 그 인격 자체가 병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라면서 자기도 모르게 부모의 태도를 모방하게 되어서 그렇게 된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태도가 자기도 모르게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습득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태도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상대방 편에서 바라보고, 상대방의 행동을 용납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기게 됩니다.

 

내 이름 아시죠.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을 그에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에 소유 내가 어딜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빠라 부를때 그가 들으시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빠라 부를때 그가 들으시죠

그가 들으시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기쁨과 삶의 소망을 주시죠. 그러나 사탄은 쓸데없는 것에 우리의 마음을 집착하게 만듭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우리를 괴롭히며, 과거에 매여 살게 하죠.

 

그래서 결국은 삶을 무기력하고, 밤에는 잠을 못 이루고, 우울함이 충만하고, 게으르고,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 이제 실패했던 것, 슬펐던 것, 억울했던 것은 저 깊은 바다 속으로 흘러 보내십시오.

 

우리가 잘 아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의 흑인 빈민가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죠. 아홉 살 때 사촌 오빠에게 강간을 당했으며, 열네 살 때 미혼모가 되었고, 2주 후에 아이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마약을 복용하여 감옥을 드나들었습니다. 외모 역시 100 킬로그램이 넘는, 좀 뚱뚱한 편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타임지>가 선정한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 중 1위로 뽑혔습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오프라 윈프리 (Oprah Gail Winfrey)입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토크쇼 진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진행하는 오프라 윈프리 쇼는 어림잡아 1,400만 명이 시청을 합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미국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녀가 보육원을 방문하여 그곳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10초만 이야기하면 다음 날 수 십 억 원의 기부금이 들어옵니다. 그녀가 어느 책을 읽었다고 한마디만 하면 다음날 그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윈프리의 이런 마법 같은 영향력이 어디서 왔을까요? 가난한 흑인 슬럼가에서 사생아로 자란 이 여인이 어떻게 그런 놀라운 위치에 서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여인이 자신의 문제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벗어나 사명 (Mission)'을 붙잡았기 때문입니.

 

윈프리는 과거는 미래를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없다라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삶을 극복해야 할 사명으로 보았습니다. 그녀는 그리고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자서전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내가 겪은 아픔과 눈물이 곧 사명(使命)이다라고.

 

이제는 혼자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니, 태어나서 줄 곧 불행하게 살았는가? 그런 생각을 아예 지워 버리십시오. 과거는 우리가 머물 곳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도록 끊임없이 노력 하십시오. 단언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John Henry Newman이 바울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아아 천신만고 대담한 전우여! 그대가 사랑하던 노동의 지역으로부터 죄수로 쇠사슬에 매이어 봉사할 때 그대의 고난이 얼마나 심했으랴. 하늘이 준 쇠사슬에 매이어서 자유를 달라고 구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고통을 사랑하며, 형극의 길을 걸어간 바울이여!

 

우리는 이 시인과 같이 바울을 생각할 때는 사슬에 매어 끌려다니던 바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은 종종 사슬에 매인 자기 자신을 사슬에 매인 사신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에도 그는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어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의 걸어온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말하고 있죠. 그러면 바울이 자기의 과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과거는 잊어버린다고 했고 미래는 내다본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 화려했던 추억이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추했던 기억들이 현재의 나를 더 이상 추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하여 우리는 잊어버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하였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 그밖의 화재, 분실, 치욕, 모든 괴롬도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시인은 하루만의 위로라고 하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잊어버려야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 한다. 오고가는 먼 길에서 인사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인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 한다. 온 생명은 흘러가는데 있고 흘러가는 한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노이로제』 『정신착란등은 왜 생기게 됩니까? 잊어야 할 것을 잊지 않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잠자는 시간을 주셨는데 잠자리에 들 때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불면증에 걸렸다고 한다면 이것은 잊어야 할 일을 잊지 않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잊어버렸나요?

1. 자기의 죄를 잊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를 향하여 달려들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커다란 돌을 마구 내던질지라도 사도바울은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에 가던 일, 바나바와 마가와 다투고 헤어졌던 괴로웠던 일, 아덴에서 철학적 설교를 시도했으나 성과가 없었던 실패를 바울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 과거의 괴로운 추억들을 잊어버리라고 합니다. 앞으로 뛰기 위해서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잊어버리지 않고, 그냥 기억하고 과거를 캐내려고 하나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원수를 맺었다 하더라도 술 한잔이면 다 푸는데 교인들은 사랑을 제일 많이 말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주기도를 외우면서도 몇 십 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20 년전, 10 년전것부터 끄집어 내서 다툽니다. 왜 남편이 지난날에 괴로왔던 일을 잊어버리자고 하는데 왜 잊지 않고 끄집어 내나요?

 

인간의 마음이 한 곳에 집중이 되면 다른 곳에 방심되고 일을 그르칠 염려가 없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마음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섭섭함과 원망으로 차 있으면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부당한 추억을 잊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인간관계도 잊어버리고 적극적으로 앞에 있는 희망을 향하여 달려 나아가야 합니다.

 

(2) 사도바울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무엇을 바라본다고 하였습니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43: 18-19) 사도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붙잡기 위해서, 복음전파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의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갔습니다.

 

13-14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주님은 당신에게도 물어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21:15)

 

네가 너의 아픔과 좌절, 실패, 고통과 역경, 우울하고 죽고 싶은 마음, 그리고 너를 힘들게 한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나의 아픔이 곧 사명입니다. 아픈 자만이 아픈 자의 고통을 알죠. 자신이 아파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안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고통스러웠던 과거가 곧 나의 비전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기서 끝나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치유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아픔을 겪은 자들에게 가서 감싸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인생으로 변화되어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지금이 순간에 당신에게 물어 보십니다.

 

너의 아픔이 무엇이니?”

무엇에 너의 목숨 걸기를 원하니?”

무엇에 너의 인생을 투자하기를 원하니?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하였음이니라.”(60:1)

 

가난 속에 버려졌던 오프라 윈프리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바로 사명이었습니다. 왜 이 땅에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서 인생을 살고, 인생의 종착역에 어디에 설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 우리도 일어나자!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그 사명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흥망과 성쇠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만남입니다. 한 번의 좋은 만남이 인생 전체를 변화시키죠.

 

한 번의 잘못된 만남이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일곱 귀신이 들어가 고생했던 막달라 마리아의 인생을,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을, 살인자요 핍박 자 이었던 바울의 인생을 변화시킨 것 역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리라"(21) 여기서 유익(kerdos,gain)은 이익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사업을 해서 이윤을 남기는 것 처럼 좋다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손해가 아닌 이득이라는 게 신앙인들의 고백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땅의 몸을 벗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수고와 고난이 더 이상 없고, 더 이상 유한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하죠.

 

"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3-24)

 

그러니 사는 것과 죽는 것 둘 다 유익하고 좋아서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좋은 신랑감이 둘이라서 어떤 사람을 선택할지 몰라 고민에 빠진 행복한 처녀 처럼 말이지요. 서울대 공대와 연세대 의대합격을 놓고 선택의 고민을 하는 행복한 수험생 처럼 말이지요.

 

바울은 삶과 죽음의 둘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합니다. 삶과 죽음이 똑같은 비중이죠.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몸을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입니다. ‘죽는 것도 이득이다.’ 라는 거죠.

 

여기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순교적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축복이요, 죽는 것은 저주라면 삶과 죽음은 하나가 될 수 없겠지요. 사는 것은 행복한 일이요, 죽는 것은 불행이라면 절대 삶과 죽음을 동일시 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죽는 것은 더욱 나에게 유익하리라고 하는 신앙은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과 세속적인 사람은 삶의 자세에서 차이가 납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죽음에서 세속의 사람과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삶을 결단할 뿐 더러 죽음을 결단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삶을 마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삶의 종결 즉 죽음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하는 한 방식일 뿐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21)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내일 밤 12시에 죽는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웨슬레는 서슴치 않고 대답했습니다. "! 저는 그 남은 시간을 작정한 대로 보내겠습니다.

 

오늘 밤과 내일 아침은 글로체스테에서 설교하고, 오후에는 툭스버리로 차를 타고 가서 설교할 것이고, 밤에는 회의를 진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친구 마틴 집을 방문하여 즐길 것입니다. 그런후 10시엔 잠자리에 들 것이고 12시엔 영광중에 깰 것입니다.”

 

삶은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늘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죽음을 결단한 믿음의 사람은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죽음을 결단한 사람답게 이 땅의 삶을 살아 간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결단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언제나 주를 맞을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열처녀의 비유에 보면 기름을 준비하는 것으로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분류하고 있습니다. 먼저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기름 모두를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등은 기름을 담는 그릇입니다. 밝은 날에는 기름이 있으나 없으나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밤에는 등뿐만 아니라 기름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기름이 무엇일까요? 신랑이 오실 것에 대한 완벽한 준비입니다. 기름은 영적 상태입니다. 기도와 성령으로 영적 상태가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기름을 준비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부르시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사람은 종말에도 꺼리 낄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입니다.

 

의사 한 분이 이러한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한 목사님이 게셨습니다. 그분은 주님의 사업에 헌신코자 교회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설교하고 심방하고 전도하던 중 몸이 왠지 좋지 못함을 느꼈습니다. 제 환자로 와서 검사를 했을 때 결과는 간암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많이 망설여야 했습니다. 비록 목사님이시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는

왠지 어려운 대목들이 있었습니다. 고민하다 어느 날 아침 결국 거짓말로 목사님께 간염이었다고 이야기했을때 그 목사님은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이구!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암으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분은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고 그대로 하늘나라에 가시기에는 가족들의 문제가 너무나 컸습니다. 차마 본향으로 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는 의사생활 중 보고 놀란 것은 생각보다 죽음이 준비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이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에게서라도 의연한 임종을 보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실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도리어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때 추하게 느껴질 때까지 있었습니다. 본향에 별로 마음이 없어 서였을까요? 세상에서 너무 좋은 일이 많이 있어서였을까요? 예수님앞에 가면 별로 내놓을게 없어서 더 준비하고 가고 싶어서였을까요?"

 

죽음에 대한 준비는 재수가 없는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를 잘 해야 삶이 풍성해집니다. 죽음에 대한 결단을 잘 해야 삶의 초점이 분명해 집니다. 중심이 섭니다. 삶의 질서가 바로 잡힙니다. 이것은 내 몸에 죽음을 초월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사는 삶입니다.

 

그런 까닭에 죽음을 결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을 결단한 사람은 참다운 청지기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내 삶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 삶의 임대권과 사용권을 잘 알아 씁니다. 그러기에 이생을 자랑하거나 지배하거나 낭비하지 않습니다. 또한 진정한 관용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섭섭하고 괘씸한 일도, 관용과 기쁨으로 감싸 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또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이렇게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증오심에 휩싸이지도 않았습니다. 차원이 한 차원 높아졌지요. 땅만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는 자의 믿음의 태도입니다.

 

 

주님, 지난 날의 지독한 나의 아픔과 상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인간관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소서. 인생의 좌우로 눈을 돌리지 말게 하시고 오로지 하늘의 부름의 상을 쫓아 푯대만 바라보고 나아가게 하소서.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게 하시고 인생 보다 더 큰 하나님의 꿈과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어 드리게 하옵소서. 죽음을 결단케 하시고 이제는 내 몸에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