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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빌립보서

주은총목사/ 빌립보서4/ 투기와 분쟁

by 주은총목사 2024. 12. 11.

https://youtu.be/b_Urv5EGgDk?si=hccwuwCBu4rrm6RF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순복음 교회/ 주은총목사

투기와 분쟁(11518)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어느 농부에게 노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새가 어쩌다 그만 마른 우물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불쌍한 노새는 우물 아래쪽에서 벌써 몇 시간째 처량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우물가를 조급하게 이리저리 배회할 뿐 노새를 구해낼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몇 시간이 흐른 후 고심하던 농부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노새는 이미 많이 늙었습니다. 그리고 우물도 한동안 버려져 있던 터라 조만간 메워야 했습니다. 그나마 정든 노새를 오래 고생하지 않고 빨리 죽도록 도와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농부는 이웃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사정을 이야기하고 우물을 함께 매울 것을 청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삽을 들고 마른 우물 속으로 흙을 쏟아 붓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흙이 떨어지자 노새는 공포에 질려 크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소리도 잦아들고 노새는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우물 속의 노새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짐작하게 된 것입니다.

 

흙을 어느 정도 우물 속으로 퍼 넣고 난 후 농부는 궁금해서 우물 속을 한번 들여다보았습니다. 곧 그 속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노새는 등 위로 흙이 한 삽 한 삽 떨어질 때마다 상상 밖의 방법으로 그것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흙을 신속하게 바닥으로 털어내서 발로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노새가 우물에서 뛰어나와 멀리 질주해 달아나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노새 이야기를 우리 인생에 위기가 닥쳤을 때와 비교를 해보면 어떨까요. 엄청난 시련과 역경이 우리의 머리 위에 쏟아져 내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쏟아지는 흙을 그대로 맞으면서 파묻히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밟고 다져가면서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으시겠습니까? 위기는 우리 주위에 늘 상존합니다. 어차피 늘 오게 되어 있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위기를 즐길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노새는 위기를 즐기는 콘서트를 통해서 살아 날 수 있었습니다.

 

1:12절 이하의 말씀 가운데 사도 바울은 인생의 위기의 콘서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환경에서 오는 위기요, 둘째는 인간 관계의 파괴에서 오는 위기의모래 입니다. 마구 마구 쏟아져 내리고 있었죠.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현장은 감옥이었습니다. 그는 주변 환경으로 인하여 충분히 그 기쁨을 빼앗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인간관계가 그의 기쁨을 빼앗지 못했죠.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힌 것으로 인해 염려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위로하며 격려하였습니다.

 

바울이 매임으로 인하여 복음이 전파됨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과는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소망과 기쁨을 주십니다.

 

사단의 세력은 복음을 방해하려고 복음 전파자들을 옥에 갇히게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이용하셔서 오히려 복음이 흥왕하는 중요한 계기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사단에게 멸망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두 가지 유형의 복음 전파자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바울은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오늘 본문은 바울 당시에 일어났던 현상을 묘사한 것으로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밖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두 가지 동기를 보여 줍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을 사랑하여 복음을 위해 세움을 받는 바울을 이해하고 바울이 사역을 돕기 위하여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바울의 사명에 대해서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 반대로 바울을 투기하고 시기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감옥에 갇힌 사건보다 더 괴로운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니 그것으로 나는 만족한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관계보다는 하나님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너무 사람들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전도서 7:21-22)

21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22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오늘 내가 미워한 사람이 있고 오늘 나와 다툰 사람 있으며

오늘 내가 시기한 사람 있으니 난 주님을 사랑 안 한 사람

나를 미워한 사람을 용서 못 했고 내게 화낸 사람을 이해 못 했고

 

나를 시기한 사람을 싫어했으니 난 주님을 사랑 안 한 사람

매일 이렇게 살아가면서 입술론 주님을 사랑한다 하니

난 참으로 행함이 없는 사람 주님을 사랑 안 한 사람

 

오늘 나의 마음은 재물에 있고 오늘 나의 생각은 자녀에 있으며

오늘 나의 발길은 세상 향했으니 난 주님을 사랑 안 한 사람

나의 생각은 항상 주님을 앞섰고 나의 찬양은 항상 빈 마음이었고

나의 생활은 언제나 감사를 잊었으니 난 주님을 사랑 안 한 사람

 

매일 이렇게 살아가면서 입술론 주님을 사랑한다 하니

난 참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 주님을 사랑 안 한 사람

오늘 하루의 시작은 기도로 하고 오늘 말씀의 은혜로 하루를 살고

오늘 내 입이 하나님 찬양을 하면 난 주님의 사랑받을 사람

나의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고 나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의 자녀를 위하여 기도를 하면 난 주님의 사랑받을 사람

매일 이렇게 살아간다면 주님의 신실한 청지기 될 것이니

주여 내 삶을 인도하소서 주님의 제자 되렵니다

 

고난 중에 참 기쁨

 

'메기 효과'란 용어가 있습니다. 정체된 생태계에 메기 같은 강력한 포식자(경쟁자)가 나타나면 개체들이 생존을 위해 활력을 띄게 되는 현상을 말하며 주로 경영학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됩니다. '메기 효과'는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적절한 위협요인과 자극이 필요하다는 경영이론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청어는 영국 뿐만 아니라 유럽 식탁에 가장 많이 오르는 생선이었습니다. 육류위주의 식단을 갖는 부유층에 비해 서민들은 굴,청어,가자미 같은 값싼 어패류를 많이 먹었죠.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북해 바다를 중심으로 유럽사람들이 청어잡이를 하였습니다. 이때, 싱싱한 청어의 운반은 주요한 이슈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모티브로 나온게 바로, 토인비의 청어이야기이죠.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도시까지 살아있는 상태로 이송하기 위해 수조에 천적인 물메기를 넣었다는 것이죠.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청어는 운반 내내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 도착지까지 산채로 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을 비롯하여 모든 사회 활동에서 풀어내야하는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 갈망이

새로운 계기를 열어가는 원동력이라는 생존에 대한 긴장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죠.

 

많은 부부들이 가정불화로 몇 십 년씩 속병을 앓다 보면 얼굴에 표정이 없어집니다. 기쁘고 즐거운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분노와 좌절의 표정조차 사라지죠. 한 마디로 잘 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요셉 역시, 험악한 세월을 살았지만, 그의 얼굴은 어둡지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험한 세월을 산 사람은 얼굴에 표가 납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험한 세월을 지나면서도 밝았고, 마음의 평강을 유지했죠. 그는 잘 참았습니다.

 

가끔씩 크리스챤 부부들도, 서로 다투다가, 남편이 , 이 사탄아!” 라고 말해서 아내가 씩씩 거리며, 남편이 자기에게 사탄이라고말했다고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경우도 여러 번 봤습니다. 더군다나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식들에게 까지 희생을 강요당하는 구나싶어 어쩔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뭐, 그러면 좀 어떤가. 지금 까지 부딪히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이제 좀 단련이 되지 않았는가요. 그렇다면 이제 맷집 좋은 샌드백이 한번 되어 보십시오.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 사탄아, 너는 왜 나를 넘어지게 하려고 해하며 화를 냈고,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바울도 마가 요한의 일로 바나바와 다툰 적이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평생토록 갈등을 끌어안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된 채로 살 수는 없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우리가 사랑을 품을 때 고통의 칼도 함께 품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갈등을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갈등을 통해 성숙의 기회로 삼아 보십시오.

 

누구나 좋은 사람과는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성격이 사나운 사람과는 함께 지내기를 한사코 싫어합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참아야 할 일이 있고. 남에게 시달리는 일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인내의 덕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나의 일을 가로막는 사람 없이 어떻게 용서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나에게 부당한 명령을 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자기 부정의 연단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고, 나에게 빈번히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 없이 어떻게 남에게 자비를 베풀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겸손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괴로움과 시달림을 받으면서 다듬어져 나오는 보석 같은 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27:17) 말하고 있습니다.

 

1)내게로 오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나와서 내몸과 맘을 주께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내 뜻과 정성 모두 어 주 예수 따라 가오니 내 갈길 인도하여 주소서 오 나의 주시여

 

(2)내맘에 주의 성령 오서서 정결케 하여주시고 주님의 귀한 성전 삼으사 항상 계시 옵소서 나 주님 힘써 섬기며 늘 충성하며 살리니 내 갈길 인도하여 주소서 오 나의 주시여

 

(3)내 참된 친구되신 구주여 나에게 임재 하시사 이세상 끝날되어 숨질때 주여 함께 하소서 나 주님품에 안기어 참 안식 영생 누리리 내 갈길 인도하여 주소서 오 나의 주시여

 

세상을 살다보면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할 때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떨어져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육체적으로 함께 있고 떨어져 있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체적으로 함께 동거할지라도 같은 자리에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으면 그 사람들은 서로 먼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하나가 되고, 관심이 일치하면 가까운 사람입니다.

같이 있고 떨어져 있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기도 하지만 혼자 있어도 사랑의 충만감 속에 기쁨을 만끽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이요,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인생을 예수님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죠. 모든 일들을 주님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나 자신의 생각과 관심에 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추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1.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제자와 가깝게 있는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을 12제자에게 집중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3:13-15)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그런데 제자들은 이따금 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르심의 목적에서 빗나간 언행들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원했으나 빌립은 계산에 빨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뒤따르기를 원하셨지만 요한 야고보는 자리 다툼을 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주의 좌우편에 앉기만을 원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3년을 함께 지내며 몸은 항상 같이 있었지만 주님의 의도로부터는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주님은 내가 너희를 향하여 얼마나 참으리요답답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제자들 모두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다가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과는 달리 주님으로부터 육신적으로는 가장 가깝게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가장 멀리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돈을 맡아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당신은 아무에게나 돈을 맡기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가롯 유다는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던 자였습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서 돈을 관리했었습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과 함께 밥을 먹고 그릇에 손을 넣던 사람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얼굴에 입을 맞추던 분이었죠. 그러나 영적으로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던 자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밥을 먹고, 예수님의 신임을 얻으며 예수님의 얼굴에 입을 맞추던 사람이지만, 그는 예수님이 가륫유다에 대한 그분의 뜻이 아닌, 삶속에서 돈, , .... 매일 돈에 이끌려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고난과 십자가의 길보다는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음으로 철저하게 마귀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은 30에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해 버렸습니다. 목매었던 줄이 끊어져 육신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배가 터져 죽고 말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을 베드로가 저주하며 부인한 것이나 유다가 팔아 버린 것이나 다 같은 잘못입니다. 잘못의 크고 작음은 있을지언정 다 같은 잘못이죠.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언장담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버려도 자신만은 절대로 예수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계집아이 앞에서조차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죠.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 예수를 저주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닭이 우는 소리에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며 통곡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려고 복음전파에 최선을 다하여 수제자가 되었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위대한 작품을 남겼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회개를 하였지만, 가륫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회개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못 이겨 자살해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의 하는 일을 잘 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합니다. 범죄 후에는 죄책감으로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영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영혼을 지옥으로 끌어가는 악한 존재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육신을 죽이고 영혼도 죽입니다.

 

남편이 외도로 인하여 가정이 흔들리고 경제적으로 파탄을 하였다고 자녀가 또는 아내가 남편을, 아버지를 정죄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정죄는 마귀가 하는 것이요, 용서와 따뜻한 말 한마디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마귀에게 사로 잡혀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손가락질을 하고, 빨리 죽기를 바라고 병들기를 바라면서 정죄를 하고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하나님께 사로잡혀 용서와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하는 사람인가요? 당신의 기도로 괴수 중에 괴수인 그 사람은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가 된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당신은 신앙의 사람이 아닌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당신 옆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당신의 내면이 하나님으로 인해 바뀌었다는 것을 가장 민감하게 잘 알아채죠. 그리고 죄책감의 쇠사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품으로 안기게 되죠.

 

바울은, 살아 생전에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는 가장 가까이 늘 있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후 바울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악의 사슬에서 괴로움의 눈물 흘릴 때 말씀으로 찾아오신 주님 영생을 약속하네

주님의 은혜 사모하는 곳에 주의 응답 임하니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주여 내게 자유 주소서

첫사랑의 뜨거움이 식어져서 눈물 흘릴 때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 평안을 약속하네

 

주님의 사랑 사모하는 곳에 주의 응답 임하니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주여 내게 승리 주소서

광야의 세상에서 외로움에 눈물 흘릴 때 골고다로 걸어가신 주님 천국을 약속하네

주님의 재림 사모하는 곳에 주의 응답 임하니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주여 내게 오시옵소서

 

기독교 역사상 바울만큼 확실하게 복음을 이해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가장 깊게 보혈의 공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가장 뜨겁게 주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되어도 관계없습니다. 어떤 비난을 받아도 예수 그리스도만 전파되면 바울은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그는 자기 신앙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만 존귀히 여김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자들에게 돌을 맞아 거반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밖에 갖다 버렸습니다. 그 밤에 바울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성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았으므로 일어나 다시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에게는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살았으니 죽을 각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죽으면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가겠다고 했죠.

 

바울이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냥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은 바울은 기뻐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옥에 갇혀 있는 어려움에 처해 있고 내부적으로는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들로 인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기뻐할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뻐할 수 있는 조건, 아니 그가 기뻐할 수 밖에 없었던 한 가지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의 조건, 그의 기쁨의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자기자신에게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고난이나 억울함, 슬픔, 외로움, 역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도 자기자신에게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도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그의 최고의 가치는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내 고난의 열매가, 희생의 열매가 당장에 거두어지기를 바라는 조급한 마음으로 서두를 때에는 우리가 결코 기뻐할 수 없습니다.

 

또 너무 자기 방법만 고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길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를 보며 기뻐합니다. 또한 원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에까지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녀를 통해 이루어지고, 제자를 통해 이루어지고, 친구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전매특허 받아 가지고 있는 줄 아는 사람, 꼭 내가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답답한 사람은 그 동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17)."

 

'다툼'이란 헬라어로 <에리데이아>는 라이벌 의식, 시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대가를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것은 복음 전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달리 바라는 것이 있어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명성 높은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복음 해석의 권위자였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하였을 때는 이미 로마에 교회가 있었고 어떤 전도자들은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여 큰 변화가 일어나고 그 사실이 온 교우들에게 퍼져 나가자 이미 로마에 있던 전도자들과 지도자들의 지위가 흔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바울에 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에 그들은 바울보다 더욱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죠. 그들은 순전히 시기심과 질투, 그리고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그리고 바울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질투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특히 믿는 자에게는 마귀 시험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질투로 복음 전하는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극복하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노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문제를 깨끗이 잊은 질투 없는 사람이기에 오해를 받든 무시를 당하든 오직 그 결과만 보면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왜 고통이 있습니까? 그 고통의 상당 부분은 질투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로 꽉차서 부글부글 끓고 있으니 총명도 인내도 겸손도 없고 자기를 극복하는 능력도 없습니다.

 

아주 고상한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 성자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죠. 동생 역시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귀들은 성자들을 유혹해서 넘어뜨리려고 모든 수단들을 다 동원했습니다.

 

. 권력, 명예, 여자등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성자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마귀의 거센 공격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마귀들의 대장이 성자에게 살며시 다가와 그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이걸 어쩌나. 네 동생이 주교가 되었어.”

 

그 말을 들은 성자의 낯빛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교만은 질투로 질투는 분노로 이어집니다. 분노는 죄를 짓게 하죠.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의 한사람으로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말리엘의 문화생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어디에 내어놓아도 뒤지지 않는 모두가 부러워 하는 조건과 가치들을 가졌습니다. 서울대, 연고대, 하버드대, 예일대 등 학벌과 출신 배경들이 아주 좋았죠.

 

그런데 바울에게 놀라운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정말 무엇이 더욱 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고백하고 있으며 이전의 모든 가치를 배설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그는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비록 좋은 학벌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비록 실패하였다고 하더라도 비록 바울 처럼 감옥에 갖혀서 모든 소망을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좌절하거나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고 부흥될 수만 있다면 내가 멸시받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하시고 나의 일들은 작게 여기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된다면 기뻐하고 기뻐하게 하소서. 이것이 전도자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언제나 기도 들으사

오 예수 나의 손 잡아 주시는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예수 찬양하기 원하네 예수 처음과 나중 되시는

오 예수 날 위해 고통 당하신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예수 왕의 왕이 되신 주 예수 당신의 끝없는 사랑

오 예수 목소리 높여 찬양해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