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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빌립보서

주은총목사/ 빌립보서3/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

by 주은총목사 2024. 12. 10.

https://youtu.be/E0-sNWJObmk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순복음교회/ 주은총목사

 

빌립보서3/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

(11214)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이른 아침, 가판대 문 앞에 배달온 신문 뭉치를 안으로 들여놓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림책 키오스크(아테네 멜레세 글그림, 김서정 옮김, 미래아이)의 주인공 올가의 이야기이죠.

 

올가는 신문이나 잡지, 복권을 파는 가판대, 키오스크를 지키며 삽니다. 친절하고 일에 능숙한 올가는 단골손님들 취향도 다 꿰고 있습니다. 낚시와 고양이와 정치에 관심이 많은 아주머니에게는 시사 잡지를, 아이에게는 막대 사탕을, 아침 1035분마다 달리기를 하는 남자에게는 물을 척척 건넵니다.

 

그런데, 사방이 막힌 키오스크를 지키는 올가에게 인생은 갑갑하지 않을까요?

 

당신의 삶은 열린 인생입니까? 아니면 사방이 닫혀 있는 인생인가요? 더 이상 특별함도 희망도 좋을 일도 없을 것만 같은 갇혀 있는 인생인가요?

 

오랫동안 연단을 받으면, 자신감이 없어진 집니다. 눈빛도 흐려지고, 어깨에도 힘이 없으며, 사람들 만나는 것에도 주저하죠. 공허하죠. 무기력하면서 하루를 살아야 할 이유조차도 없어집니다. 자괴감이 듭니다. 한마디로 인생이 재미가 없습니다. 갑갑하죠.

 

그러나 올가는 키오스크에서 보내는 시간에 충실합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물건을 팔고 나르고 정리하고, 관광객들에게 미술관 가는 길도 일러 주면서 성심껏 일을 합니다. 저녁이 되면 기진맥진하죠. 그러면 키오스크 안 소파에 기대어 여행 잡지를 읽습니다. 석양이 황홀한 먼바다 사진을 평화롭게 바라보며, 언젠가 그곳에 가 볼 것을 꿈꾸기도 하면서 잠이 듭니다.

 

그렇게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올가에게 큰 사고가 터지고 맙니다. 키오스크가 뒤집힌 것이죠. 평소보다 가판대 문밖 멀찍이 떨어진 곳에 신문 뭉치가 놓여있어서, 올가가 그걸 힘겹게 안으로 옮기는 중이었죠. 그때 좀도둑이 가판대 위에 있는 과자를 훔치려고 했고, 그 모습을 본 올가가 도둑을 막으려다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 키오스크가 뒤집혔습니다! 헝클어지고 망가진 키오스크처럼 그야말로 올가의 세상도 뒤집혀 버립니다.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은 각자의 이유로 삶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경험을 하는 게 인생인 가 봅니다. 잘못된 투자로 전 재산을 잃고 큰 빚을 졌을 때 덩달아 크게 휘청거리기도 하고, 건강을 잃은 가족구성원을 돌보기 위해 돈과 에너지를 써야 할 때가 있고. 남편의 외도나 폭력으로 말미암아 가족 구성원이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정작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휘청였던 문제도 문제이지만 한번 휘청이기 시작한 것들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균형을 잃고 자꾸 고꾸라진다는 점이죠.

 

올가는 키오스크가 뒤집히는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만납니다. 예기치 않은 모험을 시작하게 되죠.

 

강물은 올가를 태운 채 흐르고 흘러서.”

바다까지 데리고 갔어요.”

올가는 사흘 밤낮을 떠다니다가 큰 파도를 만나 바닷가로 밀려왔답니다.”

 

키오스크를 쓴 채로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올가의 모습과 그 강을 둘러싼 세상의 풍경 장면들이 그림책에서는 인상적입니다.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면 잠시 이렇게 세상에 기대어 가만히 흘러도 괜찮지 않을까요?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입니다. 넘어지면 아프고 힘이 듭니다. 일단 몸에도 고통이 오지만 마음에도 고통이 옵니다. 이대로 주저앉고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오죠. 한 번 넘어지면 다시 만회하기 어렵습니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발목이 삐면 참 아픕니다. 그 때는 교회와 기도원, 선교지를 찾아서 주님과 교제를 하며 좀 쉬는 것도 좋습니다.

 

인생을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주변 경치도 보고, 내 주변에서 응원해 주던 사람들도 돌아보면서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넘어져서 그 김에 쉬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내가 그 동안 뛰어온 길을 되살펴 봅니다. 문득 눈물이 날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뛰어왔을까 서글퍼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실컷 우세요. 눈물은 인간의 특권입니다. 주변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할 겁니다.

 

그러고 보면 넘어진 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좌절이라든가 절망이라는 단어로만 표현되는 상황도 아닙니다. 오히려 고마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위로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상황이 힘들지만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도 하게 될 겁니다.

 

힘들다면, 넘어졌다면 그 김에 예수님의 품에서 위로를 받으며 쉬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문득 바라본 하늘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지. 아니면 손을 내밀어 주는 고마운 사람을 만나게 될지.

 

내가 걷는 이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둔밤 어둠이 깊어 밤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내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없고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바울의 사역은 실로 대단히 위대한 사역이었습니다. 그의 사역을 빼놓고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연약했고 언제나 고난 가운데 있었죠. 그는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많이 당하였습니다. 린치를 당하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억울하게 고소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고난은 계속 되었죠.

 

그는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갖혀 있습니다. 그는 그가 지금까지 당한 고난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를 빼앗겼고 그의 선교사역은 이제 중지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한시도 로마를 향한 복음의 열정을 잊어본 적이 없었던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복음 전파를 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115, 16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시기 위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 ‘창세 전부터 택정하셨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태어난 팔자다' 하는 뜻이죠.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살 필요조차 없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 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벤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내 사랑 나의 십자가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면 그것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 푯대를 보고 달려가며 어떤 고난도 좋다, 무엇이든지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을 위해 어떤 손해가 있어도 좋다는 마음의 소유자는 위대하고 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 올 때부터 죄인의 신분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쇠사슬에 묶이어서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가 되어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편과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의 꿈이 모두 물거품이 될 그러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통해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2)

 

여기서 '나의 당한 일'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란 곧 바울 자신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살이가 싫어서가 아니요 갇히게 되면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유로운 몸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광장에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 속에 전도의 문이 크게 열리기를 위하여 기도하죠.

 

사도행전 24장에서 27장까지 한눈에 읽어보면 바울이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감옥에 들어가는 일만은 면해 보려고 인간적인 수단도 써 봤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서 재판도 없이 2년간 갇혀 있었습니다. 하루가 바쁘고 한 시간이 급한데 감옥에 2년씩 갇혀 있으려니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요? 감옥에서 나오기는 해야겠는데, 나오려고 하니 또 밖에는 그를 죽이겠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올 수도 없고, 그대로 있자니 아까운 세월만 흐르고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내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니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묶인 채 로마로 호송되죠.

 

그가 탄 배는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배에는 죄수들을 총 관장하는 로마 백부장, 선주, 그리고 선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항이라는 곳에 머물렀다가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기로 하고 계속 항해를 하는 중에 그만 유라굴로 큰 광풍을 만납니다. 배가 파선되려 하자 군인들도 죄수들도 짐을 다 버리고 가까운 섬으로 헤엄쳐 가 겨우 목숨만을 건집니다.

 

그 섬에서 3개월 동안 겨울을 나고 고생 끝에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2, 3년은 후다닥 지나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답답함은 얼마나 컸을까요? 예루살렘에 갇혀서 고생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2년이 지나갔습니다. 배가 파선됨으로 섬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또 이곳 로마에서 2, 3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한 5년 동안 전도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어째서 이 문을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사업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 많은 세월이 허무하게 흘러갑니다. 언제 감옥 문이 열릴는지, 아니면 여기서 죽을는지, 아무 기약도 없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 흘러갑니다. 이러한 마당에 무슨 희망이고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문은 닫히고 부자유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된 지가 벌써 5년이 넘습니다. 내 행복을 찾아 살겠다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복음전도가 목표이지만, 그 길이 꽉 막힌지가 5년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사도바울은 엄청난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신앙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승리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옥에 갖혀 있지만 옥에 갖혀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에게 갖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사슬에 매여 있지만 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매여 있습니다.

 

자신이 약할 그 때가 가장 강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는 모든 것에 만족하며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고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옥에 갖혀 있는 죄수의 몸으로서도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

이 처한 환경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자유하였죠.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 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벤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내 사랑 나의 십자가

 

지금 당신은 어떠한 고난과 어떠한 사슬에 매여 있습니까? 지금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매고 있는 사슬은 무엇입니까? 지금 당신의 연약함은 무엇인가요?

 

사도바울이 매여 있던 상황은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꼼짝 못하게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슬에 매인 것보다 더 강하게 매인 것이 있었습니다. 사슬보다, 옥보다 바울을 더 강하게 맨 것은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죽음의 속박을 깨고 죽음의 사슬을 끊고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복음속에서 사도바울은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3:55-58)

 

'진보'라는 말을 프로코페 라는 찍어 가면서 전진한다는 뜻입니다.

 

군인들이 싸움터에 나가 싸울 때 나무가 빽빽한 밀림 지대를 지나게 되면 길을 만들기 위해 벌목을 합니다. 나무를 베어내고 찍어 버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을 진보라고 하죠.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진보'란 결국 복음이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방해되는 장애물들을 전부 제거하고 전진한다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감옥 생활이라는 것은 선교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서는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전하지 못하고 끝날 것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도리어 이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합니다.

 

12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12)

 

바울은 놀라운 진리를 깨닫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문을 닫는 사건이 아니요, 오히려 그 문을 더욱 활짝 여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더 귀하고 더 크게, 더 신비롭고 더 놀랍게, 하나님의 역사가 이 사건 나의 당한 일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복음의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은 한 가지도 헛되이 버리시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디모데후서 29절에서는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나는 감옥에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전파된다고 말합니다.

 

복음에 매여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반드시 참된 가치로 빛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고난과 절망의 상황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는 삶, 가치 있는 삶,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두 가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숨어있던 그리스도인들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겁먹고 두려워 떨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갖혀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담대히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죠. 그 결과 로마가 뒤바뀌는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복음은 로마를 정복하였던 것이죠.

 

나를 지으신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빌리 그래함의 부모는 둘 다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빌리 그래함의 아버지는 사업가였지만 한 때 설교를 하고픈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그에게 전혀 열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깨어서 기도했습니다.

 

빌리 그래함이 사역을 시작한 후 그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 길이 열리기를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격려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요, 저의 심장은 불타올랐고 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지 의아했습니다. 이제 그 응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저의 역할은 아들을 설교자가 되도록 키우는 것이었다고 믿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하는 것과 다르게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거창한 일을 행하는 것과 같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삶을 계획해 놓으셨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원래 계획보다 훨씬 더 중요한 그런 삶을 말입니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일상생활에 복잡하게 관여하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발걸음을 아시고 그분의 나라에서 당신을 위한 특별한 역할을 갖고 계십니다. 오늘 이 진리 안에서 위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께 당신의 계획을 넘겨 드리십시오. 당신의 모든 날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이 당신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연단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이 바로, 환난과 궁핍,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축복이죠. 어떤 사람을 보면, 많은 것을 갖추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겸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항상 자신을 낮추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고귀한 인격이 되었을까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환난과 궁핍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붙잡는 훈련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죠. 세상에 취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예수의 것으로만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서도 오직 예수만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0)“

 

그 복음을 들은 간수들은 가정에 가서 이야기하고, 친구에게 전하고…… 이렇게 해서 시위대 속에 전파된 복음이 온 나라 전체로 퍼져나가는 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감옥에서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6:27)

 

이렇게 고관에게 복음을 전한 결과,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네로 측근에서는 이미 그의 삼촌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그 어머니와 딸들이 예수님을 믿고 많은 고관들도 믿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일 때인데도 그 안에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후 불과 300년도 안 되어 대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로 선포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됨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유럽 여러 나라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고 한국으로 와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는 바울이 고관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감옥 밖에서는 바울을 보며 감동 받은 빌립보 교인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의 당한 일' 내가 당하는 고난과 실패, 내가 당하는 질병, 여기에 하나님의 선교 전략이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진보' 닫힌 문 같으나 열리고, 끝난 것 같으나 시작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내가 당한 사건 속에서 지금 이루어짐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거룩한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나의 당한 고통, 억울함, 환난 이 모든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되게 하옵소서. 세상에 취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온전히 사로잡히게 하시어 나의 매임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하게 말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내 삶의 위로와 참 평안 주시는 주님을 의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