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미디어교회/ 주은총목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빌1장 2절~11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러시아어: Чем люди живы)는 1885년 저술된 톨스토이의 단편소설로 기독교 신앙이 돋보이는 종교문학입니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가 1885년 출판한 단편소설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다른 얘기들》 중 한 편의 이야기이다. 이 단편소설집에는 《세 가지 질문》, 《수라트의 커피하우스》,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같이 들어있습니다.
구두장인인 시몬이 하나님에게 벌을 받고 세상에 온 천사 미카일을 돌보는 사건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 톨스토이의 러시아 정교회 신앙이 담긴 작품입니다. 또한 미카일이 교회 앞에서 얼어죽을 뻔했다는 설정을 통해, 민중들과 멀어진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식도 담겨 있죠.
러시아 작은 마을에 살며 아내와 아이들을 둔 평범한 구둣방 주인인 시몬. 그는 가난하지만 그럭저럭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허나 자신의 노력과 달리 세상살이는 팍팍하게 돌아갔고, 외출용 털외투를 돌려입던 부부는 빌린 돈과 외상값을 받아 아내의 털외투를 맞추려고 하나 손님과 이웃들은 온갖 변명 아닌 변명을 들거나 도리어 겁박하면서 주지 않는다. 그나마 준다 해도 푼돈에 고쳐달라는 망가진 구두 뿐이다.
게다가 옷가게 주인도 외상을 해주지 않았다. 이렇게 상황이 나쁘기만 하니 결국 화가 잔뜩 나서 받은 돈으로 독한 보드카를 사 마시고 투덜대며 집으로 돌아오던 세묜은 교회 옆에서 알몸뚱이 남자를 발견한다. 그는 남을 도와줄 형편이 안된다고 생각해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어쩐지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를 집으로 데려온다.
이를 본 세묜의 아내 마트료나는 돈은 커녕 노숙자나 데려온 세묜에게 화를 내며 욕을 하면서 남편이건 그 알몸뚱이 남자건 내쫓으려고 했다가 세묜의 "당신의 마음 속엔 하느님도 없소?"라는 말에 마음이 누그러졌고, 어째서인지 그가 가엾게 여겨지고 사정이 궁금했기에 그를 집으로 들이고 식사도 제공한다.
그러자 그 남자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자신의 이름이 미카일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와 사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세묜은 같이 살려면 일을 해야 한다며 그에게 구두 수선 일을 가르쳐준다. 미카일은 가르쳐주는데로 잘 따라해서 곧장 능숙한 일꾼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덩치가 큰 부자가 시종을 거느리고 와서는 고급 가죽을 보여주며 이 가죽으로 1년이 지나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실밥이 터지지 않는 장화를 만들라고 오만하게 주문하면서 성공하면 10루블을 주겠지만 실패하면 감옥에 가두겠다고 한다. 세묜은 자기 솜씨로 이걸 만들 수 있을지 걱정하지만, 미카일은 무슨 이유에선지 부자를 보고 웃었다.
결국 부자는 미카일에게도 시비를 걸더니 그에게 신발을 만들라고 시켰다. 이후 부자가 떠나자 셰몬은 미카일의 솜씨를 믿고 작업에 착수하는데. 미카일이 장화가 아니라 장례식 때 시신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완성한걸 알게 된다.
세묜은 이를 보고 대경실색했는데 놀랍게도 이 때 부자의 시종이 다급하게 돌아와서는 "정말 죄송합니다. 급히 주문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망자에게 신기는 슬리퍼로 주문을 바꿔 주십시오. 실은 나리께서 집으로 가시다가 마차에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며 주인마님의 요청으로 장화 대신 슬리퍼를 달라고 요구했다.
세묜이 깜짝 놀란 사이 이에 미카일은 미리 만들어 둔 슬리퍼를 건네줬고 하인은 고맙다고 인사한 뒤 슬리퍼를 들고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갔다. 세묜은 미카일이 어떻게 그 일이 있는 줄 알았는지 놀라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그 일 이후 6년의 세월이 흘렀고 세묜 일가는 미카일의 뛰어난 솜씨 덕분에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어 그를 몹시 아끼게 된다. 그리고 다시 어느 날, 창문 밖을 보던 세묜네 아이들이 미카일에게 얘기를 하는데, 한 부인이 두 여자아이를 데리고 아이들의 신발을 만들러 찾아왔다고 한다.
이 때 여자아이 한 명이 다리를 저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에 좀처럼 한눈을 안 팔던 미카일은 깜짝 놀라 서둘러 창문가로 가서 창밖의 모녀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미카일은 평소와는 달리 두 아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광경을 조용히 보고 있던 마트료나가 차를 끓여오며 여인의 사정을 묻자, 그 여인은 사정을 털어놓는데 자신은 두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고 한다.
사실 그 여인은 두 아이의 친어머니의 이웃이었는데, 6년 전 두 아이의 친아버지는 혼자 숲에서 나무를 베다가 쓰러지는 나무에 압사당했고, 친어머니는 혼자서 두 아기를 낳고 나서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세묜과 미카일이 구두를 다 만들 무렵, 그 여인이 이야기를 마치고 세묜과 미카일이 만든 구두를 받은 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떠나자, 미카일은 다시금 미소를 지었고 그의 몸에서는 빛이 났다. 놀란 세묜이 그 이유를 묻자 그제서야 미카일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원래 미카일은 천상에서 하느님을 모시던 대천사 미카엘이었다.[4]
미카엘이 밝혀주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된 6년 전의 그날이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한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 여인이 바로 앞서 아이들의 양어머니에게 언급되었던 두 여자아이의 친엄마였다. 그 여인은 미카엘에게 자신은 벌목 사고로 남편[5]을 잃고 갓 태어난 아이들만 남았으며 '이 아기들은 부모 없이 살 수 없으니 제발 제대로 클 때까지만 기다려 주소서'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말에 안타까워진 미카엘은 아이들에게 젖을 물려주고는 하늘나라로 돌아가서 "저는 차마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자, 그래도 그 여인을 데려오거라. 그러면 세 가지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 가지를 알게 되면 하늘나라로 돌아오게 되리라."라고 말했다. 결국 미카엘은 여인의 영혼을 빼앗았고, 이 과정에서 여인의 시체에 깔린 한 아기는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리고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던 미카엘은 폭풍에 휘말려 추락했고, 여인의 영혼만 하늘나라로 가게 됐다. 그리고 미카엘 자신은 날개가 부러진 채 교회 옆의 길에 누워 있다가 세묜에게 발견된 것이다.
처음에 미카엘은 세묜의 첫인상을 보고 '저런 사람이 날 어떻게 도와줄까'라고 낙심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세묜은 돌아와서 자신을 구해줬고, 그의 아내 마트료나도 무작정 화를 냈지만 세묜의 말을 듣고 화를 풀었다. 그리고 이때 미카엘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웃는다. 이후 일을 하던 중 부자가 와서 장화 타령을 했을 때, 미카엘은 세묜이나 마트료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천계 시절 동료인 죽음의 천사가 부자 옆에 붙어 있는 걸 보았다.
즉, 이 부자는 자기가 오늘 죽는 걸 모르니, 사람에겐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동료였던 천사를 만난 것도 반가워서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늘, 6년 전에 자신이 죽을 거라고 걱정했던 두 여자아이가 마음씨 좋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과 아이들의 양부모인 이웃 부부의 손에서 잘 자란 것을 보고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고 웃었던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를 알게 되었기에 그는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세묜과 마트료나,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진리를 설파한 뒤 찬송을 드리면서 하늘로 승천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불평 불만과 환멸 가득찬 이세상에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참된 자유와 평화 너는 맛 보았는가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참된 자유 참된 평화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불평 불만과 환멸 가득찬 이세상에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괴로운 인생길을 헤매는 나그네여 어디서 안식을 얻겠나.
어둠이 에워싸고 찬바람 부는 이밤 어디서 안식을 얻겠나.
참된 자유 참된 평화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괴로운 인생길을 헤매는 나그네여 어디서 안식을 얻겠나.
참된 자유 참된 평화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불평 불만과 환멸 가득찬 이세상에 너는 무엇 위해 사는가.
이번주는 구성전을 월세로 내어주신 건물주 할머니에게 맛있는 고기를 사서 인사를 갔습니다. 지하에서 마음껏 부르짖을 수 있는 그 시간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보증금 500만원중에서, 사랑하는 우재에게 200만원을 선교여행비로 드렸습니다. 드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였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갈 때는 ‘오병이어’로 풍성하게 드리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기도가 간절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 시민답게 살아가는 법
하나님의 부르심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삽니다. 누군가는 불굴의 의지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학문적, 종교적, 예술적 성취를 이루거나 권력을 얻어 세상을 바꿉니다. 누군가는 술이나 담배, 게임, 도박, 폭력, 섹스, 기름진 음식을 탐닉하며 인생을 낭비하죠. 이것은 사람마다 쾌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행위가 다른 탓입니다. 쾌감은 우리 인생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늘 시민권자로서 긍지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법도를 드러내면서 살아야 할 책무를 가진 영광스러운 존재들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기 원하십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자세와 생활 자세, 그리고 일하는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죠.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승리로 살아가는 놀라운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빌립보서 1장은 바울은 자신을 시기하는 자들의 훼방으로 인하여 복음 전파가 더욱 진전되는 결과를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처지는 복음전파에 대해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몰고 왔죠. 이는 바울 자신의 생활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존귀만을 지향하는 삶이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확고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각각 어떤 마크(상징, 심벌)이 있습니다. 각 기독교 교단마다 합동, 통합, 순복음 다 마크가 있습니다. 운동 선수들 역시 그들의 소속 팀을 나타내는 마크가 있고 학생들에게는 학교 배지라는 표지가 있듯이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표지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가리킬까요?
그 근거는 첫째가 감사요, 둘째가 선교요, 셋째가 기도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세 가지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선한 일을 하도록 하셨다는 점과 복음 안에서 바울 자신이 항시 빌립보의 성도들과 교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빌립보 교회는 바울로부터 전도를 받아 세워진 교회였으나 점차 성장하여 오히려 바울의 사역을 돕고 그의 전도활동에 동참한 성숙한 신앙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점을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이 감사는 또한 환난 중에 처해 있는 바울 자신을 역경중에서도 기쁨으로 일관케 하였죠.
먼저 감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인가'할 때 남달리 청렴(淸廉) 진실하게 사는 사람, 구제와 봉사에 열심인 사람 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모두 겉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있습니다. 기쁨 없이 하는 일은 아무리 귀한 일이라도 무의미합니다. 선교헌금을 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을 한다 해도 기쁨이 없으면 허망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 된 표지는 바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소유욕의 성취로 얻어진 기쁨이 아닙니다.
신령한 기쁨, 질적으로 높은 차원의 기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 3절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은 생각을 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하게 된다고 고백합니다.(4절)
원래 '감사'라는 뜻의 헬라어 카라와 '기쁨'이라는 뜻의 헬라어 유카리스티아는 그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함께 감사한다는 것은 곧 기도와 함께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합니다.
사랑은 행복한 훈련이다.
부부에게는 책임감이 막중하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도 어렵고, 가정에 대한 책임, 자녀양육에 대한 책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다. 세상에 나가면 경쟁이 심하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존 경쟁의 현장에서 씨름하다 보면 피곤함을 느낀다. 결혼 후에 가정이 안식을 줄 줄 알았는데 집에 들어가면 신경전만 벌여야 한다.
부부싸움을 하고 며칠씩 긴장 속에 살다보면 허탈감과 좌절감이 엄습해 오기가 일쑤다. 언제부턴가 쉼과 안식을 얻어야 할 가정이 싸움터로 바뀌었다. 아, 괴롭고 미치겠다.
아이를 낳아서 기쁘긴 하지만 아이를 키우고 돌본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아이를 낳을 때는 피를 흘리지만, 아이를 키울 때는 피를 말려야 한다고 했던가. 갓 태어난 아이는 낮도, 밤도 없다. 오히려 밤에 깨어있고, 낮에 잠이 든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방은 어지러워져 있고, 아이는 보채며,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
남편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는 항상 아이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 어쩌면 한시도 한눈을 팔수가 없다. 아이에게 시달리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다가 ‘이러다 내 인생 이게 뭔가’ 하며 갑자기 우울감이 몰려오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렇듯 사랑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수많은 세월과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함께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 상대방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노력하는 것, 바로 이것이 사랑을 만드는 것이다.
마음의 감기에 걸린 사람들
한국 심리학회지에서 “가족생활 주기에 따른 기혼자의 결혼 만족도”라는 주제 아래 “우리나라 부부는 젊을수록, 그리고 남성이 더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 따르면 40대, 50대, 60대가 20대 부부보다 전반적 불만족이 더 높다. 그리고 여성은 신혼에 속하는 결혼적응기에 전반적 불만이 가장 적고, 자녀 청소년기와 자녀 결혼기에 전반적 불만이 더 높다.
그러나 남성은 이와 같은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자녀 양육이나 친인척의 문제의 부정적 효과가 여성에게만 나타난다’고 보고 하였다.
과연, 여성들에게만 부정적 효과가 높고, 남성들은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40대 남성의 사망률이 세계 1위이다. 세계 2위도 아니고 1위이며 여성 사망률이 3배나 된다고 한다. 특히 자살률이 가장 높은 층도 40대 중반의 남성들이다.
결혼해서 집사고 자녀 교육시키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앞만 보고 일해 온 40대 남성들.
목숨을 바쳐 새끼를 지키다가 홀로 죽어가는 가시 물고기처럼 아버지들은 자식의 인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줬다.
노후 자금까지 내어 주었고 심지어 가족과 떨어져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해 지내기도 하였다. ‘참자! 내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다 끝장이야! 자식들과 마누라를 위해서라도 참아야 하느니라!’
하지만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아내대로 무능력하다고 스트레스를 주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다 컸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직장에서 쫓겨나면 쫓겨났다는 말도 못하고 소주하나 사들고 북한산이라도 올라간다.
몇 해 전 대중에게 크게 어필 된 <나는 아내와 결혼한 것을 후회 한다>라는 책에서 심리학자인 저자는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날 부터인가 김 혜수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와 같은 철없는 중년들의 김혜수의 가슴에 대한 열광은 소통 부재의 불안과 재미없는 삶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퇴행적 현상이다.” 라고 말이다.
우리가 가정을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품의 특징은 모든 것이 다 용납된다는 것이다.
아플수록, 연약할수록, 그리고 단점까지도 더욱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이 어머니의 품인 것이다. 그런데 김 혜수하면 생각나는 것이 여자의 큰 가슴인데, 남성들은 사랑으로 완벽하게 소통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오르면서 어머니의 상징인 여자의 큰 가슴에 빠진다는 것이다. 조금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남자들이 가정에 들어와서 제일 원하는 것은 안식이다.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리고 들어 올 때 제일 원하는 것은 따뜻한 품에 안겨서 쉬는 것이다.
가정을 찾아오는 것은 그 안식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 안식을 어디서 찾을까? 바로 아내에게서 찾는 것이다. 집안에 들어왔을 때 아내가 없으면 남자들은 허전해 한다. 왜냐하면 여인에게는 품어주는 넓은 가슴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밖에서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하고 위대한 성취를 하고 사회에 기여를 한다 해도 집에 들어오면 품을 동경하는 것이다. 그 품에서 안식하며 내일 다시 인생의 전쟁터로 나갈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
영국의 대처 수상은 밖에서는 수상이었지만, 집에 들어오면 남편을 위해 손수 차를 끊이고 식사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현대의 비극은 여인들이 품이 되기를 거절하는 데 있다.
여인의 가장 소중한 존재 이유는 넓은 품이 되어 주는 것이다. 안식할 수 있는 풍성한 품이 되어 주는 것이다. 남편과 자녀들이 집에 돌아오면 품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세계 보건 기구는 2020년이 되면 전 세계의 질병과 사망의 첫 번째 원인이 심장 질환이며, 두 번째 원인은 급성 우울증이라고 발표했다. 남성들의 스트레스는 심장질환이나 급성 우울증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남성우울증은 정상적인 남성들의 행동과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그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를 못한다.
남성들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야기하는 대신,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과 도박, 음란물, 일에 몰두한다. 남성의 우울증은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남성 자신에 의해 포장된다. 은밀하게 진행되는 이 병은 치명적이다. 감정은 마비되고 우울한 상태는 계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남자들은 전형적인 우울증 증상을 자신이 스스로 느끼더라도 술친구를 찾아 기분을 풀거나, 잠이 안 오면 인터넷을 켜면 된다. 누적된 피로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사우나에 가는 것이 고작이다. 그리고 슬픈 생각이 들면 그 감정 자체가 당황스러워서, 성이나 일로 풀려하는 것이 보통의 남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여인이 가정에서 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그 순간에, 가정은 품이 없고 안식이 없는 곳이 되어 버린다.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한 남편들은, 일부러 귀가시간을 늦춘 채, 밖에서 밤거리를 헤 메게 된다.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 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음음음음)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 주시는(음음)
주 예수(음)나의 당신이여(음음음)
당신이 있으므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묾므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음)꽃 처럼 향기(음)나는
나의 생활이(음)아니어도(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우리가 알다시피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평안하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황에서 이 기쁨의 편지를 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 안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하늘의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환난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인생이 재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믿음의 승리를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얘기하려면 우리 안에 그런 삶의 근거가 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비록 감옥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그 마음속에는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기쁨, 부당한 대우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넘쳐나는 하늘의 기쁨 때문에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었던 기쁨은 어떠한 기쁨이었을까요?
1. 기도의 기쁨입니다.
본문 1장 4절에 「간구할 때 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간구'는 '간청적'인 소원을 뜻함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마다 감사가 나오고(빌1:3), 간구 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할 마음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민족을 위해서는 근심 중에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롬9:3).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는 마음에 눌림과 근심과 걱정으로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갈1:6, 고후2:4). 그러나 빌립보 교회(무리)를 향하여 간구 할 때는 기쁨이 일어난다고 하였죠.
기도 중에서 가장 능력 있는 기도가 기쁨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몸소 체험하였죠. 빌립보 감옥에서 매맞고 죽게 되었으나 기쁨으로 감사하고 찬송했을 때에 옥문이 열렸던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기쁨으로 간구할 때에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었죠.
바울의 지금 처지는 인간적으로 볼 때 암담하고 답답합니다. 복음을 전하러 돌아다녀야 할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은 정말 원망스러운 상황이죠. 그러나 바울은 그 상황으로 인하여 시위대 안의 사람들이 예수를 알게 되었고, 사람의 몸은 상황에 따라 제한을 받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매이지 않음(딤후2:9)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간구하고, 감사하고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아울러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내가 감옥에서 나가야 기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 내 맘 속에 참된 평화 있네 주 예수가 주신 평화 시험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아 아 귀하다 이 평안함 주가 항상 계셔 내 맘 속에 주가 항상 계셔 아 기쁘다 주 나의 맘에 계서 위로하시네 어찌 내가 주를 떠나 살까 이 귀한 평화 내가 받고 보니 모든 슬픔 사라지고 맘에 기쁨 넘쳐 주를 찬양하네 아 평화의 임금 예수 주가 항상 계셔 내 맘 속에 주가 항상 계셔 아 기쁘다 주 나의 맘에 계서 위로하시네 어찌 내가 주를 떠나 살까 주 날개 아래 내가 사는 동안 이 보배를 빛내리라 기쁜 그날이 와 주를 만나뵐 때 아 그 평화 영원하리 주가 항상 계셔 내 맘속에 주가 항상 계셔 아 기쁘다 주 나의 맘에 계서 위로하시네 어찌 내가 주를 떠나 살까
그가 이렇게 기도의 기쁨으로 나아갔을 때 어떠한 것을 누렸을 까요?
1. 환경을 초월하게 되어버립니다(빌4:13) - 3절
바울은 감옥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기쁨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환경도 조건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2. 기쁨으로 기도로 나아갈 때 그리스도가 함께 있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후4장에 보면,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은, 내 속에 이 질그릇이지만, 보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3. 흑암의 권세가 무너집니다 - 12절
(빌1:12)"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무슨 말인가요? 비록 바울이 감옥에 갇혔지만, 그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에는 더 큰 진보와 부흥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바울로 하여금 복음 전하지 못하도록 감옥에 묶었으나, 오히려 복음의 역사는 더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전 지역에서 사단의 흑암 권세는 더 크게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구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2. 주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기뻐하는 마음
경제난이 가중된 요즈음은 실직과 파산으로 인하여 자살을 하여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기
초가 파괴되는 현상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습니다. 죽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방법으
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 모든 일들이 알고보면 너도 나도 모두 살고자 하는 일인데 질투와 욕심으로 죽여야 살고, 살기 위해서 죽여야 하는 무서운 세상입니다.
세계에서 청소년층의 자살이 제일 많은 나라는 미국입니다. 1년이면 오천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떠나갑니다. 그들이 목숨을 끊고 난 다음에 그 의미를 과연 발견했을까요? 남은 것은 가족들의 비애와 슬픔뿐입니다.
사실,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땅에 묻히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이죠. 성경에 사람의 년수는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건강하게 아름다운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할 수 있는 생활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장가도 가지 아니하고, 혼자 떠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죠. 예수 이후의 최고의 복음 전도사, 천하의 대사도였던 바울도 엄청난 고민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바울의 말년은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가정의 따스한 재미도 없었고, 사랑받고 줄 수 있는
아내도 없었습니다. 이제 몸을 기댈 자식도 없었습니다. 오직 일생을 예수에 미쳐서 복음만 전하여 살아왔습니다.
사람은 고생이 너무 심하면 죽고 싶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하면 삶을 포기하고 싶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힘을 잃어버립니다. "살아야 한다"는 이유가 없을 때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죠. 당신과 제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의 고민은 바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생의 절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심정은 1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두 갈래 길에서 죽음을 선택하던지, 삶을 선택하던지 한쪽에 결단을 하여야 하는 인간 바울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죠.
바울은 고백하죠. 죽음의 가능성이 있는 감옥 속에서도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가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가 더 중요했습니다(1:19-26). 그것은 죽음을 초월한 신앙과 성도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간증입니다.
당신과 나와의 만남. 주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감사하는 마음 --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성도의 교제란 십자가로 맺어진 영원한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이 교제는 그리스도께서 맺어 주신 것이죠.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돈이나 명예나 이권 때문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는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그 동기가 아주 순수한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의 교제는 그리 순수하지 못합니다. 불순한 조건이나 동기가 많이 파고듭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믿음으로, 그리스도 때문에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교제입니다.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분이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1:5-6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선한 일, 즉 구원 사역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인간에 의한 것이라면 변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므로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신앙의 길을 달려가야 하죠.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므로 아무런 염려와 걱정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주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는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구원 역사를 시작하시고 지금도 인도하시는 성령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항상 그분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빌립보서 2장 17-18절 중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관제물'이란 제물 위에 마지막으로 붓는 술을 뜻합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뿌릴 피의 순교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신은 빌립보 교우들의 그 제물(사랑의 봉사)위에 피를 쏟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재림의 날까지, 종말이 이를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들의 교제를 지속시켜 주시리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나 친척보다 성도의 교제가 가장 깊고 가장 의미 있고 영원한 것이요, 가장 순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형제나 친척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대화가 통하지 않고, 벽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늘 가족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말과 마음이 통합니다.
혹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하여 외롭고 고통스럽습니까? 이 세상에 나 혼자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다른 이유 하나 없어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6절)고 고백합니다. 신령한 기쁨, 신령한 감사, 그리고 종말론적인 성도의 교제를 소중히 여기면서 늘 감사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된 첫째 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계획해 놓셨네 우린 하나되어 어디든 가리라 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리라 당신과 함께 우리는 하나되어 함께 걷네 하늘 아버지 사랑 안에서 우리는 기다리며 기도하네 우리의 삶에 사랑 넘치도록 또 우리 모임은 주님만 따르리 환란이 올지라도 주함께 하시니 또 우리마음에 시험이 닥칠때 어둠은 지나가고 새 아침 주시리 우리는 하나되어 함께 걷네 하늘 아버지 사랑 안에서 우리는 기다리며 기도하네 우리의 삶에 사랑 넘치도록 우리는 하나되어 함께 걷네 하늘 아버지 사랑 안에서 우리는 기다리며 기도하네 우리의 삶에 사랑 넘치도록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천군마마를 얻은 장사처럼 든든한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아픈 겨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었던 사람이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때입니다. 아들 딸 3남매를 애지중지 키워 온 어느 노부부가 아들 며느리들이 모여 서로 부모를 모시지 않겠다고 싸우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이 부부의 마음속에는 차가운 한겨울의 눈보라가 몰아쳤습니다. 그로부터 삼일 후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습니다. 아내까지 잃어버린 아버지는 더욱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어 버렸죠.
그 후로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아버지마저 심장마비로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이렇게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받은 배신은 인간의 마음에 혹독한 위기를 몰고 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모든 것- 그의 지식, 능력, 재산, 열정, 청춘-을 몽땅 주님께 바쳤습니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목숨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닌, 인생의 겨울을 눈앞에 둔 ‘늙은이’였죠.
예수님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온 바울에게, 겨울을 지낼 외투 하나 없이 감옥에서 있었지만, 그는 결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식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 대체 왜 그러십니까? 평생을 주님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게 뭡니까?’라고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면에서 혹독한 겨울을 맞이했지만, 그러나 바울은 그 인생의 매서운 추위를 멋지게 극복하였습니다. 아니, 죽음조차 사도바울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의 겨울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울에게는 빌립보 성도들이 있었고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그가 믿음으로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와 디모데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교감을 나누고 있었죠. 그들에게는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만은 무엇이든 그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추운 겨울을 이겨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미약한 개척교회를 뒷바라지 하는 “민스 시스터” 자매들과 한국프르트의 장로님 부부, 왕복 5시간을 교회로 2년간 달려오시다가 아예 성전 옆으로 이사오신 김희숙 목사님, 매주 왕복3시간을 걸려 개척의 전에 기도와 따뜻함을 전해주러 오시는 정만숙 권사님. 오랜시간을 묵묵히 마음을 주고 계시는 이재숙 권사님과 손철호 집사님.
용인에서 매주 주일예배에 참석하시며 교회에 온기를 넣어주는 사랑하는 김은정 권사님, 한번 뜻을 정하면 꾸준한 성실함을 보여 주시는 박창성목사님, 주일예배 한 번 빠뜨려 먹지 않고 매일 성경을 읽는 우리 우재. 교회가 이전을 할 때 아, 그 늦은 시간에 약밥을 해가지고 오시고 교회를 꾸미시는 목사님들을 위해 밥값을 내주시며 성전에서 철야를 하시는 방성자 권사님
그리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수고하시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며 바울은 고백합니다.
빌1:7-8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 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떠올리며 순교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도끼로 목 베임을 당한 바울. 로마에 가면 사도 바울을 목 베어 죽일 때에 사용했던 도구를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앉혀놓고 칼로 친 것이 아니라, 커다란 절구통같이 생긴 나무토막을 가져다 놓고 그 위에 목을 걸치게 해서 도끼질을 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죽음이었으나, 바울은 이것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주님, 그리스도인의 표지로써 기쁨과 감사와 기도와 선교가 있게 하옵소서. 기쁨으로 기도를 하게 하시고, 기쁨으로 그리스도로 인해 맺어진 성도의 교제를 감사하게 하소서. 빌립보 성도들과의 그 사랑 때문에 기꺼이 순교를 감사함으로 받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주님이 홀로가신 그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길을 나도 가오
험한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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