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레아의 노래
(창29:16-35)
라반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딸이 있습니다. 첫째 딸 레아는 ‘시력이 약하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눈매가 부드럽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문자 그대로 ‘근시’라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반면 둘째 딸인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는데, 몸매가 아름답고 얼굴도 예뻤다는 뜻입니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6-17절)
여자인데도 아버지의 양을 치던 라헬은 성격도 활달하고, 운동신경도 좋고, 양을 치면서 단련된 아주 건강하고 날씬한 몸매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게다가 얼굴까지 예쁩니다. 이렇게 라헬이 아름답게 묘사된 데 비해, 레아는 그저 시력이 약하다고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레아는 몸매나 얼굴이 동생 라헬보다 한참 떨어졌고, 잘 봐줘서 눈매만 순하게 생겼습니다.
당신은 집안에만 파묻혀 있으면서 인물도 그저 그렇고 게다가 이야기할 때 눈을 찡그리면서 자기 코앞까지 와서 말하는 여자가 좋나요? 아니면 활달한 성격에 날씬한 몸매로 들판에서 사슴과 같이 뛰며 양을 치는 피트니스 모델 같이 생긴 여자가 좋습니까? 야곱은 서로 다른 성격과 외모를 가진 두 자매 중에서 당연히 라헬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죠.(9-10). 하란 근처의 우물가에 있을 때 목자들이 ‘저기 라반의 딸 라헬이 양을 몰고 온다.’라고 했을 때 첫눈에 보고 반해 버렸습니다.
영어속담에 ‘Talent above talent’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의역하면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로 표현됩니다. 성경에서 이 속담을 잘 나타내는 인물로 바로 리브가의 오빠, 야곱의 삼촌인 라반이죠. 타인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마치 도움을 주는 척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 라반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죠. 상대의 약점이나 취약한 점을 잘 이용하는 이는 상대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하고 피해를 보는 당사자는 마치 은인을 만난 것처럼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상대를 이용하는 사람은 자기의 발톱을 드러낼 때까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위장하죠.
라반은 야곱이 자신의 딸인 라헬에게 마음이 있음을 간파하고 야곱을 붙잡아 둘 계략을 짰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최선을 다해 일하며 7년의 세월을 견디었죠. 당시의 근동지방의 풍속은 친척 사이에 결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남자는 결혼할 때 장인에게 결혼 지참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신랑 측은 돈이나 보석, 가축을 선물하거나 노동으로도 지참금을 대신할 수 있었죠.
속아서 결혼하는 야곱 (21~26절)
라헬을 얻기 위해 7년 동안 열심히 일한 야곱은, 그 동안 힘들었어도 라헬과 결혼할 수 있다는 소망과 기쁨 때문에 너끈히 견뎠습니다(20). 그리고 7년이 되자 야곱은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1절)
여기서 “내 기한이 찼으니”라는 그의 말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지난 7년 동안 야곱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매일 날짜를 계산하며 살아왔음을 보여줍니다. 1년이 지난 다음에는 ‘이제 1년이 끝나고 6년 남았다.’ 그러면서 계속 5년, 4년, 3년, 2년, 1년.... ‘드디어 한 달 남았다.’ ‘이제 일주일 남았다.’ 이러면서 카운트다운을 해왔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7년의 시간이 흘러 야곱은 라헬과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야곱은 자신이 결혼한 여인이 라헬의 언니인 레아라는 사실에 혼비백산했죠. 완전히 마른하늘에 날벼락쳤죠. 아니, 라헬과 결혼하고 너무 기뻐서 첫날밤을 보낸 뒤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라헬이 아니라 레아라니! 이때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요? 레아와 라반 둘 다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아니, 이 여자가 어떻게 내 앞에 이렇게 버젓이 있지?’ 하며 또 그렇게 만든 라반에게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레아가 라헬인 것처럼 변장해서 들어왔고, 또 야곱 앞에서 목소리나 행동이 라헬인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게 어디서 많이 들었던 장면아닌가요? 눈이 잘 안 보이는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갈 때 형 에서인 것처럼 옷도 그렇게 입고 털도 붙이고 목소리도 비슷하게 흉내 내면서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권을 빼앗아 온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당한 거죠. 야곱은 자기가 속인 그대로 당했습니다.
이처럼 분노하는 야곱에게, 라반은 새로운 제안을 하죠.
26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창29:26-27)
창세기 29장 16절에는 레아와 라헬을 묘사할 때 ‘언니’와 ‘아우’라고 했는데, 문자적으로 ‘더 큰 자’와 ‘더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라반이 26절에서 말한 ‘언니’와 ‘아우’는 히브리 원어가 16절에 나온 ‘언니’와 ‘아우’와는 다른 단어들이죠.
그러니까 라반은 여기서 단순히 언니와 아우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25장에서 리브가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 즉,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에서, <에서>에게 쓰인 “큰 자” 즉 <장자>라는 의미의 단어와 야곱에게 쓰인 “어린 자”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어린 자”로서 “큰 자”인 에서를 속이고 여기 하란에 왔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면서 일부러 그런 단어를 쓴 것이죠. ‘너도 그랬는데 나도 그러면 안 되냐?’라며 은근히 야곱의 약점을 파고들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면서, 그것을 통해 라반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려는 아주 치사하고 치졸한 방법을 쓴 것이죠.
야곱은 라반이 사용한 이 비열한 방법을 통해 자기가 한 일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라헬을 죽도록 사랑하였기에 라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일주일에 두 번 결혼한 사상 초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창29:30)
영광의 길 너 걷기전에
영광의 길 너 걷기 전에 갈보리 길 너걸으라
네 모든 것 주께 맡긴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하늘가는 다른 길 없네 오직 예수 오직한 길
갈보리길 걸어가신 주 그 길 따라 너 걸으라
영광의 길 너 걷기 전에 갈보리길 너 걸으라
네 모든 것 주께 맡긴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의 길이있네
죄에빠진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피흘렸네
못박힌 두손 날개 펼치사 나로 그 그늘에 쉬게 하며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 날 오라 부르시네
고난의 길 앞서가신 주 가시관에 머릴 찔렸네
그 십자가 날마다 보네 내 모든 죄 다 씻겼네
하늘가는 다른길 없네 다만 한분 나의 예수
부활의 주 말씀하시네 갈보리 길 너 걸으라
고난의 길 앞서가신 주 가시관에 머릴 찔렸네
그 십자가 날마다 보네 내 모든 죄 다 씻겼네
어느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제 남편은 평소에 착하고 예의 바르고 어딜 가나 인정받는 사람이요, 교회에선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내 남편이 외도했습니다. 아직도 남편은 집으로 들어는 오지만, 그 상간녀와 같이 여행도 하고, 잠자리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일이 제게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끔찍해서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나에게 왜 일어난단 말인가?
“전 정말 제 인생에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껏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남의 일이려니 여겼습니다. 그런데 저한테서 일이 터지고 보니 정말 앞이 캄캄하고 터져 나오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습니다.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살인 충동을 느껴 본 적 없었는데 지금은 저 자신 스스로가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제 자신을 믿을 수가 없어서 무서워 주방에 있는 식칼을 다 치워버리고 끝이 둥근 과도만 남겨 놨습니다. 이제 전 어떻게 해야 하죠?” 결혼 22년 차의 한 성도의 고백입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신앙적으로도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자녀들도 착실하고 남편도 사업체에만 집중하면서 가정적이었거든요. 그녀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씩씩 거리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런 일이 터지고 나니 제가 창세기에 나오는 레아가 된 느낌이에요. 동생한테 밀려서 남편한테 사랑도 못 받고 평생 늘 먼발치에서 있어야 했던 비운의 여인 말이에요.”
레아가 정말 비운의 여인일까요?
야곱은 일주일 사이에 두 자매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상처를 받은 사람을 누구일까요? 야곱도 상처를 받았겠지만,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단연 레아입니다.
야곱이 원한 여인은 레아가 아니라 라헬이었죠. 첫날밤을 지내고 보니까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레아와 결혼하였죠. 부부관계가 이렇게 시작이 되었으니까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였을까요?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그녀와 결혼하길 원했지만, 라반의 계략에 의하여 레아와 사랑 없는 결혼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하며 외롭고 질투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외면당하고 무관심의 대상이 되며 억지로 관계를 유지한 채 불행하게 사는 사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는 평생을 동생 라헬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편 야곱을 지켜보아야 했죠. 레아의 여섯 명의 아들의 이름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창29:31-30:21) 레아는 자신이 낳은 아들들의 이름을 통하여 남편에 대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죠.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얻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레아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여전히 라헬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있음에도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까? 레아는 자신이 아들을 낳으면 남편 야곱이 마음을 돌려 자기를 사랑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레아를 보시고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1절)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2절)
르우벤이라는 이름은 ‘보라, 아들이라’라는 뜻입니다. ‘드디어 내가 아들을 낳았다. 이것 좀 봐라.’ 하는 레아의 자랑스러운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아들을 낳는 것이 여인에게 축복인 동시에 남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내가 아들을 낳으면 남편도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결국 내 불행한 삶도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아들이다’ 하고 낳았는데 사랑을 못 받죠. 그래서 아기를 또 낳았죠. 사랑을 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3절)
시므온은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를 주셨다는 거죠. 그러나 이상하게 아기를 낳으면 낳을수록 레아는 더 깊은 외로움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자신이 가장 갈망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의 품에(그것도 자기 동생)의 품에 늘 안겨 있는 모습을 봐야 하는 하루하루의 삶이 어떠하였을까요? 한마디로, 지옥이었습니다.
레아는 둘째 시므온을 낳았을 때, 이제 남편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여전히 라헬에게 향해 있는 야곱의 마음은 레아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레아는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죠. 오히려 레아는 시간이 갈수록 좌절감만 싹트고 상처와 아픔만 쌓여 갔습니다.
그럼에도, 레아는 아기를 계속 낳음으로써 어떻게든 야곱의 마음이 자기에게 ‘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셋째를 낳을 때 레아는 아들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습니다. 레위는 ‘남편과 나는 연합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남편이 몸으로는 분명 자기 옆에 들어와 있고 잠자리를 함께 했지만 그의 마음은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잘 알았죠. 야곱의 사랑과 헌신은 늘 라헬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4절)
“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 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 연합하겠지.” 지금까지는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서 자기와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 셋째 아들까지 낳아주었으니 이번만은 다르겠지. 조금 더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나와 연합하겠지.’라고 하는 기대를 담고 있었죠. 하지만 여전히 남편 야곱의 마음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라헬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레아가 얼마나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고 싶었으면, 아들들 이름을 모두 남편 야곱과 연관되게 지었을까? 레아 입장에서는 무척 가슴 아픈 현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레아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른 이유는 아들을 주셨기 때문이고, 또 아들을 통해 남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갈망과 집착의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을 때마다 ‘이제는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라는 희망을 나타내죠.
십자가 십자가 그 위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십자가 십자가 그 위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그의 생명 내 속에 그의 능력 내 안에 그의 소망 내 삶에 나의 삶 주의 것 십자가 십자가 그 위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그의 생명 내 속에 그의 능력 내 안에 그의 소망 내 삶에 나의 삶 주의 것 십자가 십자가 그 위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레아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레아와 연합하기를 거부합니다. 별로 레아와 연합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에 따라 레아의 마음은 늘 공허하고 그녀의 삶은 언제나 불행했습니다. 레아의 입장에서 보면, 결혼했는데도 사랑받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항상 남편이 자기를 볼 때마다 차갑고 무관심한 눈길로 볼 때 얼마나 비참할까요? 레아도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서로의 좋은 동반자가 되어 주고,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듣고 실천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을 전달하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즐겁고 기쁜 성생활을 하는 것, 정서적인 지지와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그런 사랑이 있는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죠.
아버지 라반이 미웠습니다.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이 상처만 남긴 결혼이 되었죠. 정욕과 상처와 수치와 분노와 미움과 질투와 갈등 같은 것으로만 가득하였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두 명의 자매가 서로 원수가 되고, 그 둘 사이에 낀 한 남편이 있고, 또 철저히 자기 이익만 챙기며 남을 속이는 장인이자 아버지인 한 인간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어떻게 믿음의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복잡한 관계와 미움과 속임수와 이기적인 욕심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이 전혀 안 계신 것 같이 보였어도, 하나님의 계획은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죠. 하나님은 이 상황 속에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일하고 계셨죠. 놀랍게도 레아가 하나님 안에서의 영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아는 사색하는 시간들이 많아졌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아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오직 야곱만 바라보며 야곱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살게 됩니다. 야곱, 야곱, 야곱 바로 이것이 바로 레아에게 있어서 문제의 핵심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잊은 채 눈앞의 것만을 보고 그것을 붙잡게 된다면, 그것이 당장은 좋아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내가 그것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사로 잡아 버리죠. 내가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지배해버립니다. 바로 그게 우상이죠.
그런데 레아에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레아는 마음속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제는 남편이나 아들에게 두기를 그만두고 내려놓으며 ‘오직 제가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라고 한 겁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하죠.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35절)
유다는 ‘찬송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유다의 이름을 통해, 레아에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아의 시선은 항상 남편 야곱을 향해 있었죠. 하지만 이제 레아의 시선은 남편 야곱이 아닌 하나님께로 향해 있습니다. 레아는 알게 되었죠. 내가 의지해야 할 분은 남편 야곱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레아는 야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였죠. 그러나 늘 비참하고 외롭고 공허하였습니다. 야곱이 레아의 마음을 채워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은거죠.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것으로부터 텅 빈 마음을 채워 넣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텅 빈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 넣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만날 때, 그들 안에 있는 텅 빈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와 평안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레아의 노래 - (김복유)
야곱은 날 외면하여도
주님은 날 보아주신다.
야곱은 날 무시하여도
주님은 날 들어주신다.
야곱은 날 떠나갔지만
주님은 다만 안으신다
야곱은 날 인정 안해도
주님은 나만 인정하네
야곱은 날 외면하여도
주님은 날 보아주신다.
야곱은 날 무시하여도
주님은 날 들어주신다.
야곱은 날 떠나갔지만
주님은 다만 안으신다
야곱은 날 인정 안해도
주님은 나만 인정하네
shout of the 유다
내게 행복을 주신 분께
shout of the 유다
나를 사랑한다는 분께
shout of the 유다
나를 좋아하시는 분께
shout of the 유다 유다 유다
너는 아주 특별해
아주 많이 특별해
사람들이 뭐래도
너는 아주 내게 아주 특별해
세상은 널 외면하여도
주님은 널 보아주신다
세상은 널 무시하여도
주님은 널 듣고 안고 껴안아
세상은 널 떠나갔지만
주님은 다만 안으신다
세상은 널 인정안해도
주님은 너만 너만 너만
shout of the 유다
내게 행복을 주신 분께
shout of the 유다
나를 사랑한다는 분께
shout of the 유다
나를 좋아하시는 분께
shout of the 유다 유다 유다
야곱은 날 외면하여도
주님은 날 보아주신다.
야곱은 날 무시하여도
주님은 날 들어주신다.
“이런 일이 터지고 나니 제가 창세기에 나오는 레아가 된 느낌이에요. 동생한테 밀려서 남편한테 사랑도 못 받고 평생 늘 먼발치에서 있어야 했던 비운의 여인 말이에요.” 라고 말한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편은 평소에 착하고 예의 바르고 어딜 가나 인정받는 사람이었는데, 바람이 난 그 남자의 부인말이에요. 그 여자 역시, 깊은 묵상가운데 남편의 외도는 단지 쾌락의 문제가 아니 라 ‘결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즉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남편은 도리어 사랑을 주는 주체가 되는 것, 누구에겐가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는 주체가 되기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정신 분석에서는 이것을 ‘반동형성(反動形成, Reaction Formation)’이라고 하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남편이 불쌍해 보였고 그동안 자신의 사랑이 의지나 의무였지 불쌍히 여기는 사랑은 아니었다는 통찰(Insight)에 이르렀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긍휼’의 개념까지도 충분히 알게 되었죠. 다행히 남편도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아내가 무슨 처분을 내리든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깊이와 사랑도 새롭게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은 ‘불평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과 관계를 끝내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또는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쪽은 상대방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죠. 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거나 오히려 당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갈등이 해소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두려움이나 분노, 수치심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에게 다가가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죠. 그 사람 앞에 서는 일조차 거북하고 두렵고 떨립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 (혹은 자녀들에게) 문제를 이야기해서 자기편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문제가 커지고 갈등의 골만 더 깊어질 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성격이나 성숙한 정도가 다르거든요.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건한 특성을 나타내는 법을 더 배워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배우자를 또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답답하고 ‘왜 저 사람은 저럴까?’ 하며 실망과 분노가 일어나지 않나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악에게 지지 말고, 계속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예수의 마음을 품고, 계속해서 관용과 섬김을 드리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잠언 25:9-10)
레아도 그랬습니다. 지금 자신의 삶에 벌어지는 일들을 볼 때 절망하거나 괴로웠습니다.
남편인 야곱에게 “야, 이 개새끼야, 소새끼야!” 하면서 감정을 폭발하고 분노하면 해결이 되나요? 그래서 해결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뭔가를 집어던져서 깬다고 해결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결이 되나요? 그 바닥난 마음, 고갈된 상태, 파산한 마음의 상태 그대로 주님 앞에 그냥 나아가는 겁니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이게 접니다.’ 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나에게서 지금 주님의 은혜가 고갈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며 예수님께서 채워주시도록, 뒤집어져 있던 컵을 바로 놓는 것이죠.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성령께서 치유와 은혜의 단비로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윤리적으로 실수하는 사람도 있고,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 자녀문제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비록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자녀 된 우리의 생활을 지키시고 간섭하십니다.
겉으로 볼 때는 별 변화가 없어도 영적인 세계에서는 엄청난 대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죠. 무엇보다 내 자신이 지금 변화되고 있습니다. 지금 새로워지고 있죠. 회복되고 있습니다.
레아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오직 남편 야곱에게만 집중하며, CCTV로도 남편 야곱이 뭐하는 지를 ‘몰래 몰래’ 지켜 보던 레아. 야곱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 허망함과 뻥뚫린 가슴과 공허함, 차가운 슬픔속에... 쓰디쓴 눈물을 흘렸죠. 매일, 야곱, 야곱, 야곱하며 주야로 남편 야곱만 묵상하던 레아가 드디어 유다를 낳고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레아의 넷째 아들 유다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계보를 이어가셨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마음이 텅비고 외롭고 쓸쓸한 레아였지만, 놀랍게도 레아가 믿음의 고백을 하며 낳은 이 아들 유다를 통해 그 후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 세상을 보면 아주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잡한 가정환경 속에서 고아와 같이 성장한 사람도 있고, 실제 고아도 있고, 깨어진 가정 속에서 상처를 받으며 자란 사람도 있고, 특히 요즘에는 갑작스런 이혼으로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바뀌는 환경에서 성장한 자녀들도 많죠.
야곱의 집안 역시, 어떻게 이런 가정이 정녕... 믿음의 가정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정말 형편없는 모습입니다. 도무지, 이 집안은 아이들이 자라기에 정말 좋지 않은 환경입니다. 온갖 갈등과 시기와 미움과 다툼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죠.
야곱의 집과 같이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열두 아들에 관련된 이야기 속에서, 상처받고 얼룩진 결혼과 가정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 때문에 오히려 더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에게 찾아온 고통스러운 환경에 대한 반응,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의해서 결정되죠. 하나님께서 쓰신 인물들은 모두 어려운 환경에 긍정적으로,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 인생에서 중요한 결혼을 잘못 시작하여 행복해야 될 결혼이 불행한 결혼생활이 되고, 상처받고 얼룩진 부모와 방황하는 자녀들을 봅니다. 남편은 다른데 신경을 팔고 있고, 사랑받지 못하고 외로운 공허한 마음을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고백한 레아처럼, 이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께 고정시키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기도
예수 감사하리 광대하신주
예수 감사하리 주의 보혈
축복 속에 우린 자유를 노래해
예수 감사하리 주의 승리
승리 안에 우린 구원을 노래해
구원을 노래해
새롭고 산 길이 되신 예수
길과 진리 생명 되셨네
우릴 주의 자녀 삼으셨네
자유를 노래 할 때
예수 감사하리 주의 보혈
축복 속에 우린 자유를 노래해
예수 감사하리 주의 승리
승리 안에 우린 구원을 노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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