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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창세기

주은총목사/ 창세기28/ 당신 인생의 가치관은?

by 주은총목사 2024. 7. 30.

https://youtu.be/-k3G-gHNbN4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주은총목사/ 꿈이있는교회

당신 인생의 가치관은?

창세기 25:19~34

 

시편 1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거의가 다 아는 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인생의 앞길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가는 길,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악한 자가 가는 길, 이 두 가지 길이 있죠. . 악인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죠.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가는 길의 방향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우리 예수님을 찾고 만나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해야 하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입학하게 된 어느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학 입학 기념으로 승용차를 한 대 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대학 입학식 날에 성경을 아들에게 주면서 "얘야, 이 성경을 꼭 읽어보거라. 이것이 너의 입학 선물이다."라고 했죠.

 

아들은 아버지에게 섭섭했습니다. 승용차 한 대를 선물로 사달랬더니 승용차는 안 사주고 성경책 한 권을 읽어보라고 주니 얼마나 불만이었겠습니까? 대학 기숙사에 들어온 아들은 성경책을 책꽂이 한구석에 꽂아 두고는 아예 펴보지도 않았습니다.

 

이 아들은 방학 때마다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대답은 늘 성경을 읽어보라는 말뿐이었습니다. 드디어 4년이 지나고 졸업식 날이 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쌓인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는 4년 동안 이 아들의 부탁을 안 들어준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아버지가 입학식날 준 성경책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중얼거리면서 자기 방으로 가서 먼지가 수북히 쌓인 성경책을 가져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성경을 받아서 신약의 한 곳을 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하얀 봉투가 하나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그 봉투를 아들에게 열어보라고 주었습니다. 아들이 그 봉투를 열어보자 그 안에서 수표가 한 장 나왔습니다. 그 돈이면 승용차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이미 4년 전에 자기가 승용차 살 돈을 받았는데도 몰랐던 것이죠. 아버지의 말씀대로 성경을 한번 펼쳐보기만 했더라도 그 아들은 지금쯤 신나게 승용차를 몰고 다닐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적인 예화이구요. 정말 이 세상에서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한지 20년에 쌍둥이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나온 아이는 붉고 전신이 갖옷(hairy garment)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습니다. 뒤에 나온 야곱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있었죠. 그래서 발꿈치를 잡은 자’, ‘빼앗은 자라는 뜻으로 야곱이라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자랐습니다. 자라면서 에서는 사냥꾼으로 들 사람이 되어져 갔습니다. 야성적이고 활동적이었죠. 그는 젊은 날들을 들로, 산으로 다니며 인생을 순간순간 즐기며 살았습니다. 사냥을 하며, 이방 여인들과 즐기며 짜릿한 삶을 살았죠. 그 시대 상황 속의 사회 속에서 그 문화를 즐기며 사느라 육신적이어서 영적인 가치관이 형성되지를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경히 여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야곱은 차남으로 태어남으로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 불만을 가졌던 차에, 영적인 가치를 알지 못한 형 에서에게서 기회를 엿보아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획득하는 사건이 발생하죠. 야곱의 축복의 언약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그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결국, 장자권을 빼앗는 행위는, 천국을 침노하는 행위로 봐야하고, 천국의 문제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인 문제도 초월하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천국의 가치를 아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 야곱의 가치관과 에서의 가치관이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야곱의 형, [에서]가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34)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자]인데, 이 말은, 성경 다른 곳에서는, 가볍게 여겼다라고 해석하기보다, 업신여겼다. /경멸했다. /싫어했다는 의미로 훨씬 더 많이 사용됐습니다. ‘장자권을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것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장자권을 싫어하고, 경멸했다는 것이죠.

 

(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25:32)

 

내가 지금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이까짓 장자명분 때문에 내가 힘들어야 하다니, 이게 뭐라고 내가 이것 때문에 고난을 받겠는가?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이 지금 나에게 아무 쓰잘데기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내 배를 채우는데 있어서 자꾸 시간을 지체시키는, 나를 짜증나게 하는 걸림돌 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에서]의 생각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엄청나게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둘째나 셋째 아들로서는 절대 누릴 수 없는 특권이 장자에게 있습니다. 모든 것의 초태생은, , 모든 것의 처음 난 것은, 하나님의 소유로, 거룩하게 따로 구별되었죠.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13:2)

 

또한, 신명기 21장에 따르면, (21:15~17) 장자는, 아버지의 권한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두 배나 상속받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에서의 하나님은 없죠. 성경에 장자인 [에서]의 이름이 빠지고, 차자인 [야곱]의 이름이 올라갑니다.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소위말해서, ‘천국족보입니다. 천국족보, 그리스도의 족보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요?

 

그러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장자의 명분은 무엇인가요?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분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신분, 하나님의 자녀 된 것으로, 이것이 얼마나 귀한지 우리는 알아야 하죠. 하나님의 자녀가 이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유업을 얻지 못합니다.

 

복음성가 행복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양자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장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양자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8:16-17]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예수 믿기 때문에 천국의 주인공이 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영광의 나라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업을 잇는 자가 되었습니다. 장자의 명분값으로 따질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당장 배고프다고 그 귀한 장자권을 하찮은 팥죽 한 그릇과 바꿔버린 겁니다.

 

창세기 “(25: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면서 팔아넘겼습니다. “우선 먹고 보자. 배가 고픈데 예수님이 무엇이고 주일에 교회 가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선 먹고 잘 살고 보자. 우선 돈을 벌고 보자.”

 

친구들은 주말만 되면 들로 산으로 놀러 가는데 고리타분하게 주일 예배를 드리고, 친구들은 도서관에서 열심히 시험 공부하는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나는 이렇게 교회에 앉아 있는가?’ 이런 인생들이 머지 않아 방성대곡하는 날들이 옵니다. 에서와 같은 생활에 유혹당하지 마시고 끌려가지 마십시오.

 

창세기는 이런 에서를 가리켜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34). 히브리서는 "한 그릇 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판 망령된 자" 라고 했습니다(12:16).

 

창세기 “(27:34)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 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죠.

 

우리는 이미, 아버지는 에서를 사랑하고 어머니는 야곱을 사랑한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가 힘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을 감안할 때, 또 에서가 장자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에서는 아버지의 취향과 맞아 떨어지는 사람이죠. 그렇다면 야곱은 누구의 취향에 맞습니까? 바로, 어머니의 취향이죠. 그는 늘 장막에 거했음으로 어머니와 가까이 지냈습니다. 어머니가 필요로 했을 때 그는 늘 어머니 곁에 있었죠.

 

더군다나,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에서는 아버지의 식성에도 잘 맞아 떨어지는 사람이었죠.

 

그러나,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삭이 야곱을 에서인 줄 잘 못 알고 축복을 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성경은 크게 두려워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죠.

 

그가 이렇게 두려워했던 이유는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에서의 가치관에 관하여 이렇게 말을 합니다. [12:16,17]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에 관하여 성경은 <망령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죠?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것을 위해서 영적인 것을 헌신짝 버리듯 버렸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어보면, 그는 본래 믿음의 어머니를 가진 형편이었지만 세상에 빠져서 어머니의 충고도 듣지 아니하고, 간절한 기도도 아랑곳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살고, 명예와 인기에 목이 말라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육신적인 만족만 준다면 장자의 명분도 헌신짝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난 다음에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의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며 쓴 책이 어거스틴의 참회록입니다. 유명한 책이죠. 그는 세상에서 육신의 향락과 명예를 마음껏 누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문학이나 예술이나 돈이나 권세나 세상 것에서 참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팥죽 한 그릇으로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찾을 때, 참 생명을 얻을 때 거기서 만족을 얻습니다.

 

사실 사람은 세상의 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 얻고 싶고 누리면 누릴수록 더 누리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만족이란 없습니다. 왜요? 사람에겐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이 먹을 음식 없이, 마실 물이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없이 참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에서의 행동은, 이 말씀과 반대이죠.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다고 합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5:34)

 

에서는 먹고 마시면 일어나 가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 전부이니, 그 일 마치면 일어나 가야지요. 이것이 에서의 모습입니다. 에서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어디에 있는가요?

 

에서에게 있어서, 지금 당장 먹고 마시는 일이 가장 큰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가치관은 달랐죠.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인 것입니다.

 

당신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나요? 에서의 사고 방식은 "우선 먹고 보자!"였습니다. 그는 현실주의적, 실리주의적,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직접 섬길 수 있는 장자의 직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가볍게 여겼죠.

 

이런 인생관은 결혼할 때, 가장 잘 나타나죠. 에서는 육신적인 만족과 순간적인 쾌락, 짜릿한 오감을 추구하는 자요, 분명한 철학이 없이 일시적인 유익을 좇아 사는 망령된 자였습니다. 에서는 나이 40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바스맛을 아내로 취했습니다.(26:34,35). 이방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하여 세상의 향락을 쫓아서 살았지만, 부모들이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취했죠. (28:6-9)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물질주의 시대입니다. 물질을 중심으로 모든 가치가 평가됩니다. 대학도 취직이 잘 되는 학과가 인기가 높습니다. 장가를 가려고 해도 돈 많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람이 일등 신랑감으로 평가됩니다. 재혼을 해도 빌딩 몇 개를 가진 남자는 뭐, 거를 것도 없이 만사 OK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죠. 그러니 유명 연예인들 어디에 빌딩 좋은 것 샀다더라하면 바로 뉴스 찌라시에 나오고 검색어 1위가 됩니다. 엄청, 부럽죠. 저 양반, 무슨 복이 있어 어떻게 돈 걱정없이 살아 갈 수가 있다냐?’ 빚 좋은 개살구입니다.

 

이 땅에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성공하기 윈한다면 불신자들이 호화 주택에서 사는 것, 멋있게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잘 살고 그 모든 것 누리면서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팥죽 한 그릇, 그거,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먹고 입는 것이 있는 줄 족한 줄로 알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야곱이 쟁취한 것은 당장 유익이 되는 물질적인 것이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한 것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야곱으로 살 것인가, 에서의 가치관으로 살 것인가? 부디, 팥죽 한 그릇으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을 망쳐 버린 사람이 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닭 울음소리하면, 누가 생각이 나나요? 바로, 베드로죠.

 

베드로의 고백

사랑하는 주님 내게 다가와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네가 나를 버리리라 하실 때 왜 그리 섭섭하던지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배반하지는 않겠다 했던 믿음 없는 나의 헛된 맹세 주님 마음 울렸었네

 

(후렴)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부인하고 돌아서서 한없이 울었네

 

내가 주를 잃고 방황했듯 주도 나를 잃고 슬퍼했네 하지만 나의 눈물보다 주님의 눈물 더 뜨거웠네

 

멀리서 들리는 닭 울음소리 나의 영혼 잠깨웠네 잊어버렸던 지난 슬픈 고백 왜 그리 부끄러운지

 

이 세상 어디 숨을 곳 있나 닭울음소리 들릴 때마다 사랑하는 주님 나의 주님 모습 스치고 또 스쳐가네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부인하고 돌아서서 한없이 울었네

 

주님 오실 기약 어찌 잊고 맡긴 사명 모두 잊었던가 지금도 새벽닭 울 때면 참회의 눈물로 회개하네

 

복음성가 베드로의 고백처럼...이제, 팥죽하면 에돔이라는 별명을 가진 에서가 생각이 나도록 하신 하나님의 유머죠.

 

우리 선조들도 고대로부터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왜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먹었을까요? 그것은 귀신들이 붉은 빛을 두려워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죠. 혼례 예식을 행할 때 신부의 볼과 이마에 연지 곤지를 찍는 것도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었고 집 둘레에 민드레미나 봉선화를 심는 것도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들의 옷 안쪽에 붉은 천을 붙여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죠. 이렇게 우리네 선조들은 귀신들이 붉은 색을 싫어한다는 믿음 때문에 때로는 붉은 꽃으로 때로는 붉은 천으로 때로는 팥죽으로 귀신들에게 공갈을 치며 위협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팥죽을 먹고 그만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이 바로, <에서>입니다.

에서는 팥죽을 먹은 것에 얼마나 원한에 맺혔으면, 그것을 성경에서 단적으로 표현해놨죠. 바로 창세기 2530절입니다.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25:30)

 

에서가 에돔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이죠. 하나는, 그의 피부가 붉고 털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가 그의 별명이 에돔이라고 붙여진 이유가 바로 이 붉은 팥죽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에서가 붉은 사람이라고 불려진 이유는 그의 피부가 붉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팥죽에 얽힌 기구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만큼 이 팥죽의 사건은 에서에게 치명적인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별명을 에돔이라 불리게 할만큼 이 사건은 그에게 뼈아픈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패배를 승리로!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 마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 적은 없나요?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그런 죄를 저질렀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이며 예수님의 나를 따라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한 마디에 모든 걸 다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 단순하고 열정적이며 성격이 급한 사람이죠.

 

예수님은 시몬에게 반석을 의미하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반석스럽지 못했죠.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멋진 고백 이후 사탄의 계락에 빠지기도 하며, 결국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한 사람이죠. 베드로는 배신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26:70,72,74).

 

물론 베드로의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면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진짜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바로 그 성전 뜰에 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과거에 패배했던 장소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패배했던 장소는 어디인가요? 당신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당신의 신앙을 팔아 버린, 장소는 어디 인가요?

 

눈물의 참회록

지금껏 내가 한일이 주를 위한 일이었는지

지나간 세월 돌이켜 주님 앞에 아룁니다

이 한몸 주를 위하여 목숨 버린다 했으나

주의 영광 뒤로하고 나의 자랑 앞세웠으니

 

내가 가는 이길이 주를 위한 것보다

예수 이름을 파는 가롯 유다와 같습니다

한평생 주를 위하여 변함없이 살겠다던

베드로 같은 믿음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맘속엔 허영과 교만만 있고

주님지신 십자가는 짐이된다 벗었습니다

내가 가는 이길이 주를 위한 것보다

율법을 앞세우는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오늘도 복음을 들고 쉼없이 다녔지만

성령의 불 같은 인도 믿음 없이 전했습니다

육신의 곤고함 더하여 복음의 사명 약해지니

아버지여 연약한 종 어찌해야 하오리까

내가 가는 이길이 영광의 길이라면

바울과 같은 믿음을 내게도 허락 하소서

 

장자권이라는 명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모르고 주의 이름으로 구속받은 은혜를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이 남았나요? 바로, 방성 대곡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에 조차 내가 인생을 이렇게 산 것을 후회한다라는 뼈아픈 후회가, 천국에 가서도 내가 정말 이럴 줄 몰랐다. 내가 정말 이럴 줄 몰랐다.”라고 가슴을 치며 울고 후회하게 되죠. 지옥 간 후에도 영원히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면서 뜨거운 불에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에서는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망령된 자였습니다. 뒤에는 후회하고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여도 영영 얻지를 못하였습니다.

 

당신에게 패배의 장소가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 장소가 승리의 장소가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형편을 낱낱이 주님께 아뢰시고 그분의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셨던 주님은 당신에게도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개척의 밑바닥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게 됩니다. 그중에 예전과 달리 많이 접하게 되는 사람들이 조선족입니다.

 

저의 친할머니와 아버지는 <북한 신의주>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이 용문산 기도원으로 들어가서 사셨죠. 저와 친할머니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 땔감을 구하러 온 산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집은 다 허물어져 가는...지붕은 새고 가끔씩 부엌에서 뱀은 출몰하고, 심지어 방천장에는 지네가 기어다니는 것이 눈에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북한 사투리를 쓰셨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이 쓰는 말투에 참 친근합니다. 그때, 당시에 탈북민으로 피난을 오셔서 참 고생을 많이 하셨죠. 근데, 요즘 탈북자들은 다릅니다.

 

일단은 탈북을 하게 되면, 대한민국에서 국가정보원과 하나원을 거쳐서 기본적으로 <집과 생활 안정 정착금>을 받게 됩니다. 일단은 조선족보다는 한국에서 살아가기에 수월하죠.

 

근데, 제가 만난 조선족들은 북한 탈북자보다 한국에서 자리를 잡기에 더 힘든 구조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단은 안정적이지가 않죠. 집도 보증금 300만원, 500만원에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들의 직업으로는 노가다가 가장 많았고, 식당, 간병인으로 일을 하였죠. 아파도 제대로 쉴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간병을 하면서 조선족 교회를 섬기시는 일흔 살의 여자 목사님의 사진을 이기쁨 전도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이유가 다름 아닌, 일흔의 나이에 재혼 상대를 찾아달라고. ‘일흔의 나이에 재혼 상대라니 처음에는 의아해 하거나 고개를 갸우뚱 거릴 것 같습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 일흔이 넘은 여자 조선족 목사님의 자녀가 제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자녀가 한국에 와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였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신실하게 청년들을 섬겼는지. 그분의 인격과 됨됨이가 얼마나 훌륭한지. 매일 그분을 위한 기도의 세월을 보낸 지가 3년이 넘었습니다.

 

그 자녀분이 중국으로 돌아가면, 자신은 다시는 한국에 오고 싶지 않다는 그 한마디의 고백은 그만큼 한국에 와서 오지게고생만 하다가 한국에 관한 별로 좋지 않은 기억과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상처로 수많은 시간들을 보냈다는 반증이죠.

 

내게 여유만 조금만 있었다면, 방이라도 얻어서 좀 배려해 드리고 섬겨 드릴 수 있을 텐데. 라는 마음의 아픔이 남달랐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일흔이 넘은 어머니께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거에요.

 

조선족으로 살아가며 집도 없고, 심지어 자기 방이 없거든요. 간병인으로 상주하며, 안정도 없고, 한국인이 아닌 조선족으로서 간병을 하니... 제대로 된 월급도 받지를 못하고. ....

 

그날 밤에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일흔이 훨씬 넘은 그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안정입니다. 쉼과 재충전이죠. 교회에서 재정이 풍성하면, 방이라도 구해서 있게 하였으면, 우리 교회에서 있게 하실까? 아니면 내가 있는 자그만 방에서 함께 생활을 하게 하여야 할까? 등등등. 많은 생각과 기도들이 오가는 밤들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거죠. 그리고는 나의 진짜 본향인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머물면서, 내게 붙여 주신... 내곁을 지나가게 하시는 영혼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그들에게 따뜻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줄 수 있는 온기가 있었으면 합니다.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후에 축복을 기업(基業)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悔改)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브리서 12:16-17)

 

주님, 세상의 것을 좋아하고 잠시 있을 세상 것을 취하려다 영원한 것을 잊어버리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팔지 말게 하소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삼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천국의 주인공이 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영광의 나라의 후사가 되게 하옵소서. 또한 복음의 빚 진자로서 최선을 다하며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아멘.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의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