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
(창25:19-28)
창세기는 1장의 천지창조에 이어서, 하나님이 택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담의 가족이야기’로 시작해서, 노아,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가족 이야기로 창세기는 끝이 나죠.
하나님은 가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도 결국 가정이었죠. 오늘은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을 통해서, <위기에 빠진 가정> <위기에 빠진 나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브두엘의 딸인 리브가를 택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이삭은 리브가가 도착하자 그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어가게 하고,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습니다. 이삭은 어머니 별세 후 마음이 쓸쓸하였는데 그녀로 인하여 위로를 얻었죠.(창 24:67).
하지만,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하자, 이삭은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오랜 시간을 아내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창세기 25장 21절에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였다"고 말하죠. 본문에서 <이삭이 리브가를 위하여 간구했다>는 말은 히브리 말에 있는 기도의 12가지 단어 중에 '아타르'라는 단어입니다. 이 '아타르'라는 단어는 일평생 하나님 앞에 향을 계속해서 피우는 것을 말하죠. 이삭과 리브가의 기도가 얼마나 지속적인 기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바다의 모래알과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삭도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이삭은 “하나님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내 아버지가 가나안 땅에서 왔을 때 바다에 모래를 보여주시면서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바로 그와 같이 아버지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그 약속을 이루소서” 하고 기도하였죠. 20년 동안 리브가를 위해 이삭이 기도하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응답을 받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간구에 응답하셔서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죠.
리브가의 태에서 먼저 나온 아기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고, 후에 나온 아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야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네 명의 가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창 25:19-26).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신앙도 위대했고 그 아버지에 묵묵히 순종하면서 자신의 목을 내밀었던 이삭 역시 대단한 사람이죠. 이렇게 멋진 아브라함과 이삭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삼고 태어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믿음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지만, 마음이 아프게도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의 가장 큰 문제점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모의 편애>입니다.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25:27-28)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였지만, 서로 성격도 직업도 달랐습니다. 에서는 사냥꾼이 직업이었습니다. 고대 사람들의 직업 중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 바로 사냥꾼이었죠. 당시에는 남성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인정받던 시대였습니다. 에서는 남자 중의 남자였죠. 사람들의 칭찬과 부러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였다고 하죠.
창세기 27장 4절에 보면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고기를 참, 좋아했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기른 양, 염소, 소고기만 먹지 들짐승인 사자나 곰, 노루, 토끼, 꿩같은 야생고기는 먹지를 않았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금하신 들짐승을 좋아해서 자식을 편애하는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에서에 비해 사람들의 주목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이런 야곱을 사랑했죠.
두 사람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서로 너무나 대조적인 성격과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격 차이가, 그들의 인생을 가름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그들의 부모였죠.
부모의 편애로 마음에 생채기 나는 자식들
부모의 편애는 자녀를 망치고 형제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부모의 편애는 편애 당하는 아이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이죠.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 대학(UC 데이비스) 연구진이 768명의 형제·자매와 그들의 부모를 조사한 결과 아버지의 70%와 어머니의 65%가 한 자녀를 편애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부모 편애는 일반적으로 한 가정 안에서 함께 양육되는 형제, 자매 사이에서 부모를 포함한 성인 양육자나 보호자에 의해 표현되는 장기적이고 일관적인 애정의 편중 현상을 말합니다.
보통 편애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뉘게 되죠. 제3자가 볼 때 부모의 명백한 편애 행위가 일관적이고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경우를 ‘객관적 편애’, 부모의 의도와 관계 없이 자녀의 입장에서 편애라고 느끼는 경우는 ‘주관적 편애’입니다. 부모가 편애를 부인할지라도 자녀가 다른 형제, 자매와 비교했을 때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애입니다.
편애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한 여자의 글입니다.
“엄마는 나한테 항상 그랬지. “니까짓 게”, “그래 봤자”, “주제에”…. 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엄마의 마음은 아주 잘 알고 있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고, 얼굴도 예쁘잖아. 언니가 해달라는 건 한번도 안 해 준 적이 없지. 과외 시켜 달라면 시켜줬고, 배낭여행을 보내달라면 보내줬어. 나는 왜 안 해주냐니까 ‘그럼 너도 언니처럼 공부를 잘하면 되지 않냐’고 했지?
명문대 나와 좋은 직장 간 언니가 좋은 신랑 만나 결혼한 게 엄마 인생 최고의 성취라는 거 알아. 그래서 우리 애 말고 언니 애들을 키워주는 거겠지. 언니 집 살 때 나 몰래 돈 보태준 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말이야, 엄마. 우리 애한테까지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친정에 가면 조카들 사진으로 벽이 도배가 돼 있는데, 우리 애 사진은 없어. 엄마 핸드폰을 열어도 온통 조카들 사진뿐이지. 조카들이 침대에서 뛰면 ‘떨어질라, 조심해라’ 팔을 둘러 막아주면서, 우리 애가 뛰면 ‘침대 꺼진다, 그만 뛰어라’ 가시 돋은 소리를 하시데요? 이번 설에 나 봤어. 엄마가 조카들 앞으로 갈비며 전이며 죄다 옮겨 주는 거. 조카들, 참 귀하죠?
그런데 내 마음이, 그런 엄마를 보는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싸늘하게 얼어붙었을까. ‘엄마는 나를 왜 낳았을까?’ 짐 싸며 내내 생각했어. 왜 이렇게 일찍 가냐고 묻는 엄마한테 이런 소릴 하면 또 속 좁게 군다고 하시겠죠. 하지만 내 아이만은 엄마한테 그런 대우 안 받게 하고 싶어. 엄마의 편애로 인해 내가 평생토록 상처를 받았는데, 그걸 또 내 아이까지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 편애가 무서워서 둘째도 안 낳은 거 모르시죠? 편애도 학대예요. 엄마, 나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어요?”(30대 전업주부 강모씨)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탄식치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입은 너를 고치시리
평생의 모든 꿈 허물어져 세상의 친구 다 떠날 때
어둠에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
편애의 이유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자신과 닮은 외모나 기질 때문에 특정 아이를 편애할 수도 있고, 가장 먼저 낳은 아이나 막내를 편애할 수도 있습니다. 성별이 기준이 되기도 하고, 아이의 능력이나 성취가 원인이 되기도 하죠. 반대로 한 아이가 훨씬 문제적이고 병약할 때, 더 많은 주의와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이유로 편애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아이는 낮은 자존감은 물론이거니와 평생토록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기 위해 애정을 갈구하게 됩니다.
차별을 경험하는 아동은 자존감이 낮은 상태이죠. 자존감은 자신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아동의 자존감이 부모로부터 오는 아동에 대한 존재 인정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부모야말로 아동의 자신감을 상승시키고 하락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죠.
결혼과 가정 저널에 발표된 ‘엄마의 차별과 성인기 자녀의 우울증’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엄마로부터 편애를 받았거나 거부당했던 아이 모두 중년기에 우울증을 겪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만일 엄마가 한 아이를 특별히 편애하거나 미워한다면, 그 엄마는 부지불식간에 자식들의 우울증에 기여하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캐나다 브라이엄 영 대학의 알렉스 젠슨 교수팀의 연구에 의하면, 부모에게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아이들이 약물이나 알코올, 담배 등에 중독될 확률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죠. 4배 이상 중독 가능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부모의 편애로 심각한 정서적 손상을 입은 자녀는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한 인격으로 인정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성관계 및 결혼생활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또한, 편애는 대물림됩니다. 이렇게 편애는 아이의 대인관계를 비롯한 일생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의 친모가 아닌 계모에 의해서 자랐는데, 그 계모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면, 그 자녀가 받을 인생의 상처를 생각해 보셨나요? 실제로 다른 형제에 비해 부모로부터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자녀는 자존감에 상처를 받죠. 문제는 차별당한 아이가 타인의 사랑을 계속해서 갈구한다는 점이죠. 이 편애 때문에 이성이 자꾸 바뀌기도 합니다. 이성을 통해 부족했던 부모의 사랑을 대신 채우려고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상대방으로부터 버림받을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부모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강박적인 사고나 행동으로 이어지죠. 그래서 아이가 상대에게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타인에게 모두 맞추는 문제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편애로 상처받은 자녀들은 정서적인 부분에서도 큰 문제를 겪죠. 부모의 거절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울한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데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어’ 등의 비합리적인 신념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편애로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자녀는 과연 행복할까요?
부모로부터 배타적이고도 각별한 사랑을 받는 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자산이 높은 자존감과 자신감이죠. 아이는 편애를 통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하는 자신감과 권능감을 갖게 되죠.
일반적으로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녀는 자존감이 무너지고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자녀도 성장하면서 많은 문제를 나타내죠.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데 익숙한 아이는 아무래도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좌절하기 쉽습니다. 선생님은 부모님처럼 일방적인 사랑을 퍼부어주지 않기 때문이죠. 거기에서 오는 좌절로 단체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인성 발달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을 독차지한 아이는 부모만큼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면 친밀한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유독 사랑을 많이 받아온 자녀는 집중 받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가정을 벗어났을 때 본인이 주목받지 못하면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거죠.
사람들은 종종 편애 받는 아이들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편애로 자란 아이들은 사회부적응자로 자랄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더 심각하죠.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편애하면서 가정을 갈등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부모의 이기심에서 생겨난 비뚤어진 자식 사랑법입니다.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쌍둥이라도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죠. 길바닥에 널려 있는 돌멩이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죠. 그만큼 소중하고 존귀합니다. 부모는 아이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성격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하죠.
아이가 어떤 잘못을 저지려면 그 잘못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고 꾸짖는 것이 올바른 양육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형제들과 비교하며 꾸짖는 것은 올바른 양육이 아니고 편애가 시작되는 나쁜 양육이죠.
“형은 그렇지 않은데 너는 왜 그러냐”
“동생은 공부도 잘하는데 너는 형이 되어서 그 모양이냐”
이런 식의 훈계는 아무런 효과도 없을 뿐만 아나라 형제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부모가 형제 사이를 원수로 만드는 것이죠. 형제의 우애를 갈라놓는 것은 바로 부모의 편애입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좋을 리 만무하죠. 편애를 경험한 아이는 부모가 편애하는 아이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두 아들을 서로 편애했죠. 그 결과 형이 동생을 죽이겠다고 결심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됩니다. 창세기 27장 41절에 보면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야곱 역시, 요셉에게만 예쁜 채색옷을 입힙니다. 똑같이 다른 형제들에게도 채색옷을 입히지. 야곱의 편애로 인해 형제들은 채색옷을 입은 요셉을 죽이기로 결심을 합니다.
부모의 마음속에 자식을 편애하는 마음을 발견하였다면, 자식에게 상처를 줄일 방법을 찾아야 하죠. 가장 간단한 방법이 감추기입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교과서에 나온 ‘황희 정승’의 에피소드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소 두 마리를 끄는 농부에게 황희 정승이 물었습니다. “흠, 소들이 힘이 좋네. 그런데 어떤 소가 더 힘이 센가?” 농부는 갑자기 일손을 놓더니 황희 정승 가까이로 다가왔죠. “대감님, 저쪽 놈이 조금 더 낫습니다요.” 그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조그맣게 말했습니다.
황희 정승은 의아해하며 물었죠. “아니, 그 말이 뭐 그리 중하다고 이렇게 귓속말을 하는가?” 그러자 농부가 공손히 대답했습니다. “힘이 약한 녀석이 듣고 기분이 상할까 그랬습니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요?
편애의 해악을 절감했다면, 어떻게 자식들을 공평하게 대할지 고민해야 하죠. 자녀가 부모에게 “오빠와 나 중에서 누가 제일 좋아요?”라는 질문에
“엄마는 오빠와 너를 똑같이 사랑해”라고 말하기보다는 “이 넓은 세상에 너는 딱 한 명밖에 없잖아. 너처럼 생각하고, 너처럼 느끼고, 너처럼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엄마는 네가 내 딸인 게 너무 좋아”라고 말해서 아이들 각자가 부모에게 특별한 존재로서 사랑 받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죠.
“우리가 배에 타고 있다가 한꺼번에 다 물에 빠지면 아빠는 누구를 구해줄 거예요?”라고 묻는다면 “제일 어린 사람”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 식으로 대답하지 말고 “그거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구나. 아빠한테는 너희 모두 다 특별하거든. 한 명 한 명이 다 다르니까”라고 대답하는 게 현명합니다.
칭찬할 때도 마찬가지죠. “넌 참 숙제를 빨리 마쳤구나. 오빠는 한 시간이나 걸리는데” 같은 말은 오빠 안 듣는 데서라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비교우위에 입각한 칭찬은 한 아이에게 다른 형제를 무시하게 만드는 특권을 줄 수 있죠. ‘아빠는 오빠를 별로라고 생각하는구나’라고 여기게 될 뿐 아니라 자기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다음 번에 잘하지 못하면 남몰래 비난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아이들과 대화할 때는 언제나 일대 일의 관계로만 하는 게 좋죠. “동생은 피아노를 잘 치는데, 저는 피아노에 재능이 없나 봐요”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대신 넌 운동을 잘하잖니” 같은 칭찬은 답이 아니죠.
“동생과는 상관 없어. 네가 피아노를 칠 때 느끼는 너의 즐거움이 중요한 거야”라고 말해 일대 일의 단독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넌 착하잖니” “넌 대신 다른 걸 잘하잖니”처럼 아이를 고정된 역할의 틀 안에 집어넣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죠.
부모는 “마음에 쏙 드는 한 자식에게 쏠리는 자신의 열정으로부터 다른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15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16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17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신21:15-17)
“아이들의 성장에는 부모와 함께하는 개인적인 순간이 가져다 주는 따스함과 친밀감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 아이와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는 다른 형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게 좋죠. ‘여동생은 여기 없는데도 엄마의 마음을 빼앗아가는군’이라고 생각하게 해선 안 됩니다.
나 약해 있을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시고
나 소망 잃을때에도 주님은 내게 오시네
나 시험 당할때에도 주님이 지켜 주시고
나 실망 당할때에도 주님이 위로 하시네
주님만이 내 힘이시며 오 주님만이 날 도우시네
오 나의주님 내 아버지여 오 나의주님 내사랑이여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고아 아닌 고아의 신세가 되어버린 자녀는 자연히 그의 형제를 원수로 여기면서 질시와 반목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합니다. 이것은 한 가정을 망치게 하는 사단의 전략이죠. 그래서 동생 야곱은 도망하여 밧단 아람에서 20년 동안 가족과 관계를 끊고 살았습니다.
에서는 에서대로 축복을 빼앗기고 마음이 불편해 남쪽으로 가서 부모와 관계를 끊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가족과 헤어진 채 외롭게 살다가 리브가는 자신이 그토록 편애하며 사랑하던 야곱의 얼굴도 못 보고 죽고 이삭도 눈이 먼 채로 185세에 죽고 말았습니다.
어떤 부모는 재산을 가지고 자녀를 조정합니다. 소위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정도에 따라 재산을 차별해서 나누어 주는데 이 같은 잘못된 자녀 조정법은 부모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거짓 사랑, 그리고 형제 사이의 반목과 갈등만을 낳게 되겠지요.
혈연(血緣)의 해체가 급증하고 있죠. 바로, 부모·자식 간, 형제자매 간 벌어지는 소송 때문입니다. 지난해 하루 7건꼴로 혈연이 해체되었다고 하죠. 서울가정법원 정용신 공보판사는 “이혼으로 인한 가족 해체에 이어 소송으로 인한 혈연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다. 주로 부모의 상속재산을 두고 벌어지는 분쟁이 많다. 소송 과정에서 혈연관계는 남보다 못하게 돼버린다. 사회·경제적 분쟁 방지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편애를 하는 많은 부모들이 자신이 편애하는 이유를 합리화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콩 심은 데 콩 나고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죠. 편애의 피해를 받고 자란 아이가 나중에 자신이 학대받았음을 절감하면 늙은 부모에게 연락도 먼저 하지 않고, 아파도 병문안도 오지 않고, 생활비 한 푼 안 보내 주거나 심지어 부모가 죽어도 장례식조차 찾지 않습니다.
뭐, 이 정도면 약과이죠. 특히 편애가 차별받는 아이에 대한 학대로 이어졌을 경우에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성인이 되자마자 멀리 가버리고 연락을 끊으려는 빠른 의절로도 이어지죠.
사실 그게 아동 학대 피해자에게는 더 좋은 선택이죠. 실제로도 가족과 친척간의 관계를 아예 끊고 나서야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서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례까지 존재할 정도이니까요. 하지만 의절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것이 살인으로 돌아온다면 상황은 매우 끔찍해집니다.
그러나, 편애를 일삼은 늙은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을 부양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거나 법원에다 소송을 걸겠다며 멱살을 잡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자신이 한 행동은 생각도 안 하고 상처를 받은 자녀에게 찾아가서 부모가 늙을 때 받아주지 않는다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하면서 패륜이라며 몰아가기에 싫어도 강제로 착취당해야 하는 자녀의 아픔이죠..
보건복지부 아동권리보장원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 동안 191명의 아동이 부모의 가정폭력으로 숨졌습니다. 사망까지 이르지 않은 아동학대는 부지기수이죠.
조선시대 대표적 비극 서사인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하시죠. 영조는 목숨을 건 정치투쟁 끝에 왕좌에 앉았으나,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구설수에 평생 시달렸습니다. 친모마저 천민 출신 나인이었죠. 본능적으로 왕의 권위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만큼은 흠결 없이 성장하기를 원했습니다. 첫 세자를 잃고 후사가 없던 차에 마침내 아들이 태어났으니, 바로 사도세자였죠.
아들에 대한 영조의 애정은 극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도를 넘은 집착이었습니다. 아이의 자연적 성장 단계를 무시한 채 자기 기준으로 다그쳤죠. 아이로서는 24시간 감옥도 그런 감옥이 없었습니다.
열 살쯤부터 아이는 빗나가기 시작했죠. 그럴수록 아버지의 분노와 질책 강도도 세졌습니다. 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도, 아버지 눈을 피해 일탈하는 요령도 터득해 갔습니다. 10대 후반에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이 하루에도 몇 차례.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살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애꿎은 내관과 궁녀가 수도 없이 죽임을 당했죠.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언동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조는 28세 아들을 뒤주에 넣어 죽여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콤플렉스를 물려주지 않으려다가 그만 집착에 빠져 아들을 망쳐버렸죠.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엄혹한 교관이었습니다. 아들을 아들로 보기보다는 마치 훈련병처럼 굴리기만 했죠.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기막힌 광경을 목격한 손자 정조는 어려서부터 이미 눈치가 100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면의 트라우마도 강해졌죠. 그는 아무도 믿지 못했습니다. 하급 관리들이 처리할 문서까지 밤새워 스스로 결재해야 안심이었죠.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과로사로 죽고 말았습니다. 원인 제공자는 당연히 할아버지 영조였습니다. 영조는 부모로서는 빵점이었던 거죠.
“아버지가 무서워”
어느 아들이 고백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무섭습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매우 권위적이고 권력이 강했죠.
어렸을 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집에 들어오시더니 내게 매를 마구 때렸습니다. 알고 보니 텔레비전 보느라고 동생이 밖에서 놀다가 다친 것을 몰랐는데, 다친 동생을 발견한 아버지는 화가 나서 다짜고짜 나를 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고도 없이 매를 맞는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문소리만 나면 무서워서 문에 대한 공포증이 생길 정도였죠. 친구들의 아버지는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준다면서 자랑도 하곤 했는데, 나는 늘 친구들에게 ‘아버지는 무서워!’ 이 한 마디만 했습니다.
권위적인 부모는 모든 것을 부모 뜻대로 하려 합니다. 순종이 아닌 복종을 요구하죠. 권위적인 부모는 그 자녀에게 자신도 모르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죠. “너는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너는 지시를 그대로 따라야 해.”
이런 부모에게서 자라는 아이는 자발성과 창의성이 없습니다. 스스로 뭔가를 하려 하지 않죠. 권위적인 부모는 자주 잔인함과 비융통성 그리고 화를 잘 내는 형태로 아이들을 다루죠. 그의 기분은 광범위하게 그리고 예측불허하게 움직이며 가족성원 모두가 그에게 복종하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제적인 부모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죠. 그의 필요가 적절하게 채워지지 않아 가족성원들을 교란시키는 것으로 보상을 받으려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불신과 두려움의 감정을 가지고 성장하죠.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부모에 대한 적개심을 쌓습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거나 대학에 들어가서 일탈적인 행동을 하게 되죠. 입시 시험을 본 다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밤새도록 클럽이나 댄스 장에서 춤에 매달립니다. 한편으로 고등학교까지 자식에게 목매달았던 어머니 역시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고 허탈감에 시달리죠.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 아주 심각한 후유증을 앓습니다.
자녀에 올인 했던 부모는 할 일이 없어지고, 자녀는 계속 부모에게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떤 부모는 자녀의 대학 수강 신청까지 대신해주고, 취업 시험장까지 따라다니게 됩니다.
권위적인 부모도 문제지만, 권위 없는 부모도 문제죠. 권위 없는 부모는 한 마디로 해서 부모의 말발이 서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요구해도 자녀가 전혀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부모가 그렇게 만든 것이죠. 이것은 대게 부모가 원칙이나 약속이 자주 바뀌거나 말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모든 것을 들어주는 경우에 발생합니다.
자녀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했을 때 한두 번 안 된다고 했다가 아이가 떼를 쓰거나 조르면 결국은 사주는 경우가 이에 해당하죠.
지금도 많은 부모들이 집단 히스테리에 걸린 듯이 자식을 옭아맵니다. 자식에게 집착하는 순간 부자 관계는 깨지죠. 부모가 자신의 욕망을 자식에게 투영하면, 그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립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여러 모습이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교사로, 인생 선배로, 상담자로, 친구로 자식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하죠.
억새풀 우거지고 어둠 내린 험한 산길에 방황하며 헤메일 때 주님 음성을 들었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쉴 곳 없는 나그네 두 손을 마주 잡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비바람 천둥소리 들려오는 텅 빈 들판에 세상 노래 부르다가 주님 음성을 들었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검은 파도 설렐 때 나를 품에 안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메마른 빈들 지나 주님 따라 동산 오를 때 손 내밀어 내 손잡은 주님 나를 구원하셨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내 것이라
가시밭길 지날 때 나를 등에 업고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편애는 다른 역기능적 요소처럼 대를 이어 반복되는 경향이 있죠. 부모로부터 편애를 경험했던 자녀들은 그로 인해 정서적인 고통을 받았음에도 어느새 편애에 대해 익숙해질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어린시절 경험했던 편애에 대한 정서적인 상처는 대물림되고 반복되죠.
부모의 편애를 경험한 야곱역시, 자신의 자녀에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야곱의 편애의 대상은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요셉>이죠.
야곱의 편애라는 빗나간 사랑, 형제들 간의 시기와 반목이라는 괴로운 체험, 그래서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분노하는 뼈아픈 현실을 요셉은 그대로 당하고야 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 또한, 받은 상처와 분노가 큰 사람입니다. 마음속에 수 십 번도 더 칼을 갈며,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형제의 질시를 받아 인생을 꼬일대로 꼬였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그의 발은 차꼬에 상하며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여 처절한 고통 속에 몸부림을 쳤습니다. (시 105:18) 여기에서 몸은 히브리어로 혼(魂)을 뜻한다. 요셉은 그의 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이 아니라 혼이 쇠사슬에 매인 것이죠. 혼이 나갈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한마디로,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를 반복하며 <공황장애와 정신병>으로 고통을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요셉 역시, 한두 번 터진 게 아니죠. 발악도 하고 몸부림을 쳤지만, 10년 이상을 감당할 수 없는 길을 돌아서 드디어 그의 혼이 하나님 손에 의하여 완전히 붙잡혀 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창 41:38)
고난은 힘든 것입니다. 고난은 무서운 것이죠. 저는 고난 때문에 인성이 깨지고, 넘어지고, 인격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떠나는 배교자도 보았습니다.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고난을 가벼운 것이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러한 상황과 환경에 오히려 고난으로 인하여 단련되어 정금같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이 주어졌을 때, 전혀 다른 결과가 빚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핵심적인 차이는 그 사람의 중심에 말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품은 사람은 고난이 와도 정금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고난이 오면 타 죽죠.
요셉은 수십년의 세월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 주신 꿈과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해와 달과 열두 별이 절하는 꿈과 볏단들이 절하는 꿈”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진주라고 하는 보석은 고통의 산물이죠. 조개가 입을 열어 먹이를 먹으려고 할 때 플랑크톤과 함께 거친 모래 따위가 조개의 몸속으로 들어옵니다. 들어온 모래는 부드러운 조갯살에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면 조개는 그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몸에서 진액을 내놓습니다. 그 진액은 상처를 깨끗하게 아물게 하면서 이물질인 모래를 감싸는데 그것의 결정체가 진주라고 하는 보석입니다. 고통과 상처 없는 조개는 진주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미워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이라고 원통한 마음과 분노가 없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죠. 어떻게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요셉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 드리워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는 용서를 베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마침내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대로 자신의 형제들이 찾아와서 양식을 구하며 절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45:1-2)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편애, 아들 야곱에 의해 되물림 된 편애로 인한 비극 그리고 손자 요셉이 안고 살아야 했던 여러 가지 가정적 문제들... 모든 것들은 오늘날 우리 가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떤가요? 남의 집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종류만 다를 뿐이지 가정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가정이라도 갈등이 있고 다툼이 있기 마련이며, 그에 따른 아픔이 있고 애환과 슬픔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이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가정이었다면, 당신의 가정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담대함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환경이 상관없습니다. 환경을 초월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죠. 환경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초월하며 사는 인생,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시는 놀라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온몸에 난 상처로 고민하고 아파하던 독수리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낭떠러지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독수리는 여태껏 입은 자신의 상처 때문에 더 이상은 높이 날 수가 없다는 시름에 빠졌고 마지막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대장 독수리가 재빠르게 날아와 상처 난 독수리에게 물었습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하려고 하느냐?"
그러자 아파하던 독수리가 말했습니다.
"난 늘 상처만 입고 살아요.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대장 독수리는 갑자기 자신의 날개를 펼치더니 이야기했습니다. 그 날개에는 오래돼 보이는 많은 상처가 흉터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의 몸을 한 번 보렴. 지금은 내가 대장 독수리지만, 나 또한 수많은 상처를 입고 살아왔지. 여기는 사람들의 총에 맞은 상처, 여기는 다른 독수리에게 습격받은 상처, 또 여기는 나뭇가지에 찢긴 상처란다."
그 외에도 수 없는 상처 자국이 있는 대장 독수리의 날개를 보자 아파하던 독수리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대장 독수리는 단호한 말투로 다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몸에 새겨진 상처일 뿐이다. 나의 마음엔 더 수많은 상처 자국이 새겨져 있단다. 그런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었지. 상처 없는 독수리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독수리일 뿐이다."
주님, 부모의 잘못된 편애로 인하여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어하며 우울감으로 상처입고 사랑을 구걸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면 이 시간에 치료하여 주옵소서. 부모와 형제간의 반목과 질시, 단절을 뛰어 넘게 하시고, 꼬일대로 꼬인 인생 밑바닥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하여 꿋꿋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나의 상처로 인하여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줄 수 있는 승리의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일평생 주만 바라면
너 어려울 때 힘주시고 언제나 지켜주시리
주 크신 사랑 믿는 자 그 반석 위에 서리라
너 설레는 맘 가다듬고 희망 중 기다리면서
그 은혜로신 주의 뜻과 사랑에 만족하여라
우리를 불러 주신 주 마음의 소원 아신다
주 찬양하고 기도하며 네 본분 힘써 다하라
주 약속하신 모든 은혜 네게서 이뤄지리라
참되고 의지하는 자 주께서 기억하시리
참되고 의지하는 자 주께서 기억하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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