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창세기 25장/ 아브라함의 장례식
2024.06.17. 조선일보에 <일본 아사히신문은 94세인 사토 히데씨>의 사례를 소개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그녀를 향해 ‘경이롭다“고 보도했죠.
그녀의 나이는 94세이지만, 혈관 연령은 20세, 사토씨의 평균 체질량 지수(BMI)는 23.9, 체지방률 25%, 근육량은 44.6㎏입니다. 건강한 30대 여성의 신체죠. 보건소 측은 기계 이상을 의심하고 서너번 체크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기자가 혼자 사는 그녀의 임대아파트엔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먼지 하나 없었죠. 사토씨는 “매일 혼자 세 끼 식사를 차리고 설거지하고 청소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한 “가족과 사는 70·80대 노인들을 보면, 가족들이 자꾸 대신 뭔가 해주니 본인은 움직이지 않게 되고 금방 쇠약해진다”면서 “나는 혼자 다 해야 하다 보니 계속 움직여서 덕분에 건강한 게 아닐까”라고 하였죠.
사토씨는 “동일본 대지진 때 10미터 넘는 쓰나미가 동네를 덮쳐 친척 7명이 죽었다”면서 “소녀 시절이던
1945년 2차 세계대전 폭격으로 불에 타 폐허가 된 도쿄를 봤습니다. 큰 냄비에 풀죽을 끓여 그릇에 나눠 먹었죠. ‘산다는 것’의 참담함을 봤고, 산다는 것의 고귀함도 동시에 느꼈습니다.”
기자의 질문1-그녀의 하루 일과는.
“매일 6시에 일어납니다. 방 침구를 정리하고 아침 식사를 미리 준비해 놓곤, 6시 반에 NHK 라디오방송에 맞춰 ‘라디오 체조(우리나라의 국민체조와 유사)’를 하죠. 천천히 아침 먹고, 꼭 NHK 아침 드라마를 봅니다. 9시 30분부턴 인형 만들기를 시작합니다. 집 안 정리는 매일하죠. 2~3일에 한 번 청소기도 돌립니다. 식사는 매일 세 끼를 직접 만들어 먹는데, 꽤 많은 양을 먹는다고 하면서 웃습니다(웃음). 매주 두 번씩 장을 볼 때마다 채소를 무척 많이 사죠. 아침엔 밥·국에 생선·고기를 먹고, 낫토(콩 발효식품)도 먹습니다. 잠은 밤 11시쯤에 잡니다. 자기 직전인 밤 10시쯤 목욕하면서 물속에서 발차기를 500회 정도 한다.”
질문2/별도로 하는 운동은.
“특별한 운동은 하지 않지만 여기가 2층이기 때문에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다. 내과 의사 선생님은 100세까지 살려면 6층 정도의 계단은 올라가야 한다는데, 집은 2층이라서 그건 무리다. 산책은 집 근처를 왔다 갔다 한다. 큰길로도 산책을 가고 싶은데, (그곳엔) 중간에 앉아서 쉴 벤치가 없어서 못 가고 있다. ‘나의 늙음’을 이럴 땐 조금 실감한다.”
질문3/ -병원은 정기적으로 가나.
“매주 금요일 데이 서비스(주간 보호 서비스)에, 70세 때 치매가 온 조카며느리를 데리고 다닙니다.가벼운 체조도 하고, 종이접기 같은 뇌 운동도 하고 많이 배운다고 하죠. 낮엔 자유 시간인데, 다른 노인들은 낮잠 자거나 수다를 떨지만, 난 시간이 아까워서 이 시간엔 옷 리폼을 배웁니다. 88세쯤부터 새롭게 시작한 일이죠.” 그녀는 재밌어서 이렇게 자꾸 새로운 걸 배운다고 하죠. 리폼한 옷은 간혹 팔아서 커피 값 등에 씁니다.”
그녀는 재봉질할 마음이 없을 때, 조금 피곤할 때도 글을 읽습니다. 잡지를 읽는 이유는 지식을 보충해 지인들과 즐겁게 대화하기 위함이죠. 주변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전화도 자주 하죠. 이야기 상대가 10명은 넘습니다.”
질문4/ 94세인 당신에게 인생이란.
“81세에 동일본대지진을 만났습니다. 이때 삶을 찬찬히 다시 생각했죠. 당시 (쓰나미로) 친척만 7명이 죽었습니다. 조카딸도 죽었는데 뭔가 하고 싶었습니다. 헝겊을 꿰매 인형을 만들어 죽은 조카의 엄마에게 건넸더니, 펑펑 웁니다. 인형을 딸로 본 것이죠. 이후엔 줄곧 인형을 만들어 주변에 나눠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 그 자체가 인생입니다. 즐겁습니다. 주변 사람들과도 항상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나 죽어도, 제발 고독사(孤獨死)라고 쓰지 마라. 왜 그게 고독사냐.
창세기 23장 첫머리에 아브라함이 슬픈 사건을 당한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세상을 떠납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던 아내도, 아내의 사랑을 받던 남편도 세상을 떠납니다. 100년이 넘게 장수한 사람도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함께 있을 때는 서로의 소중함을 잊은 채, 공기와 같은 존재처럼 여기며 항상 내 옆에 지겹도록 붙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늘 같이 지내며, 매일 보고 교제하고 살던 사라가 12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23장 2절에 보니까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며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해서 슬퍼하며 애통했다.”고 했죠.
그동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그네로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했죠. 아브라함이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이방 사람에게 수치스러운 일도 당했고, 망신도 여러번 당했었습니다.
자식이 생기지 않아 고민하다가 사라의 제안으로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로인해 가정의 평화가 깨졌죠. 이제 사라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칠 줄 모르는 눈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퍼하고 애통해 했습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많은 일들 중에 가족의 죽음, 특히 배우자의 죽음은 큰 충격적입니다. 사소한 일에 다투게 되기고 하고, 생각이 달라 빈번하게 갈등을 겪다가도 정말 어려운 상황이 생겼을 때는 서로에게 의지가 되기도 하는 관계가 부부이죠.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배우자를 잃게 되는 상황이 되면, 이루 말 할 수 없는 충격을 받습니다. 함께 한 시간이 긴 부부이거나, 금슬이 좋았던 부부사이에서 겪게 되는 배우자 사별 후의 슬픔이란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상실감이 크죠. 또한 슬픔이 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커서, 감정과 연관이 있는 뇌 영역의 활성화가 떨어지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일에 대한 의욕이 저하되면서 업무능력도 떨어집니다.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배우자가 있던 자리, 여기저기 베어 있는 배우자의 흔적들로 인해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과 그리움 때문에 허전함과 공허함이 쉽게 사라지지 않게 되기도 하지요. 사라가 쓰던 물건, 사라의 손길이 다았던 집안 곳곳을 보며 아브라함은 찬양을 부릅니다.
우리 이 땅에 몸으로 태어나 무슨 일 하다가 무엇을 남기랴
우리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나
너와 내가 남남으로 주 앞에 설 때에
우리 무엇으로 주님께 드리랴
혹은 긴 인생 어떤 인 짧은 인생 그러나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네
천국이 없다면 인생이란 허무한 것
너와 내가 영혼으로 만날 수 없다면
우리 이별을 어떻게 견디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 얻어 언젠가 또다시 만날 수 있기에
우리 헤어져도 슬프지 않을 수 있어
너와 내가 영혼으로 또다시 만나세
주님 우리 위해 함께 계시리라
인생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이다.
배우자의 죽음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충격과 아픔으로 다가오는 사건입니다.
미국 정신의학자인 토마스 홈즈 박사가 개발한 스트레스 측정 척도(Holmes and Rahe Stress Scale)에 따르면, 배우자 사망은 ‘100’, 배우자와의 이혼은 ‘73’으로 상실의 슬픔을 통해 겪는 충격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죽음 이후 남겨진 배우자는 큰 절망감과 슬픔에 빠지기도 하며, 배우자가 살아있을 때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홀로 남겨둔 채 죽은 배우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들을 가질 수도 있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의 아픔은 우울증이나 불면 등 각종 심리적·신체적 증상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사별 직후에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고, 주변의 관심과 위로가 많아 사별을 체감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사별의 아픔은 3~6개월 후부터 강렬하게 다가오기 시작하죠. 하지만 배우자 사별 이후 짧게는 1년 후 늦게는 3년 안에 대부분 상실의 감정을 극복하게 됩니다.
인생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죠. 사랑을 할 때 생의 의욕이 솟구치고, 사랑 받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존재 이유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곡중에 사랑에 관한 노래가 가장 많습니다. 사랑 때문에 살고 있는 거죠.
인생을 살면서 의욕을 상실할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의욕이 없다는 것은 가슴에 열정을 상실했다는 거죠. 의욕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랑’에서 오죠. 생명이 태어나고, 문명이 탄생되고, 위대한 과업이 성취되는 것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이처럼 삶이란 사랑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사랑에 의해 불타는 것이죠. 그 사랑이 주님께 향한 것이든, 자식에게 향한 것이든, 남편과 아내에게 향한 것이든 사랑은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거대한 힘입니다.
차마, 나이 드신 노인들도, 인생을 살아갈 힘을 ‘사랑’에서 얻습니다. 요즘은 60, 70이 넘어 재혼한 후에 마치 청춘처럼 사는 노인들도 많이 있죠.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사라’하고 평생 잉꼬부부처럼 살았던 아브라함도, ‘사라’가 죽자 100살이 훨씬 넘은 노인 임에도 불구하고, ‘그두라’하는 여인과 재혼해서 6명이 넘는 자식들을 낳고 잘 살았습니다.(창 25:1-2)
우리의 사랑이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생애로 아름답게 승화되어야 하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불태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또한 남은 생애를, 주님과 뜨거운 사랑을 하면서 복음을 위해 드려지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통해 다양한 민족이 등장했음을 알려주죠.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 실질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여섯 아들 중에는 미디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안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모세 당시 미디안 사람과의 관련성 때문이죠. 모세의 장인은 미디안 사람이었으며, 출애굽기에서 그는 입술로 하나님을 고백한 최초의 이방인으로 인정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재산을 이삭에게 주고 서자(庶子)들, 곧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과 그두라의 소생 6명, 도합 7명에게 적당한 재산을 분배해서는 이삭을 떠나 동방 땅으로 가서 살게 했습니다. 자기가 죽고 나서 재산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고 옹졸한 줄 알기에, 자녀들 간의 분쟁을 미리 예방했죠. 이는 이삭을 보호하기 위해서요, 또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뜻을 성취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창세기 25장에 들어와서, 아브라함이 이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한을 다 마치고, 하나님의 품으로 갑니다.
(7)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8)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창25:7-8)
아브라함의 나이, 175세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친척 아비의 집을 나올 때가 75세였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산 시간이 100년입니다. 태어난 고향보다, 가나안에서 보낸 시간이 더 깁니다. 멋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75년이고, 하나님을 알고 산 세월이 100년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38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녀의 나이가, 127세였죠. 아내가 죽고, 약 40여년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해서, 쌍둥이 손주 [야곱과 에서]를 낳는거 다 보았고, 그 손주 녀석들 재롱부리는거 보면서, 15년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손자 [야곱과 에서]가 15살이 됐을 때 아브라함이 죽었죠.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가 못다 이룬 노년의 행복까지도 다 누리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천수를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복된 사람이지요.
(24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라고 하셨고 이 축복의 말씀이 다 고스란히 지켜지고 있음을, 우리가 두 눈으로 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야심차게 시작했던, 파란만장했던 아브라함의 생애도, 25장을 끝으로 마감이 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아브라함의 생애도,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끝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세월 앞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말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9)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 하였으니”(창25;9)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함께 아브라함의 장례를 치뤘습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쫒아낸 자식이거든요. 첩의 자식입니다. 이스마엘은 광야로 쫒겨난 자식입니다. 우리 같으면, 평생 원망하고, 저주하면서 살았을 텐데. 어쩌면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었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올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스마엘을 돌봐 주시고, 가정과 안정, 경제적 힘과 더불어 상처를 잊을 정도로 번성을 허락하셨습니다.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비결은, 먼저 자신의 인생이 따뜻해지는 것이죠. 그러면 여유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넉넉함이 와집니다. 자신이 먼저 힘이 있고, 경제력이 있고, 가정이 안정을 찾으면, 인생은 절로 따뜻해집니다.
요셉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인생에서 생각할 수도 없는 심한 상처를 받았습니다. 바로, 형들이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렸던 것이죠. 요셉은 살아남기 위해 별별 일을 다 겪었습니다. 강간범으로 오인 받기도 하고, 그것으로 감옥까지 갔다 왔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기가 막힌 반전이 찾아왔죠. 바로 요셉이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된 것은 물론이요, 예쁜 아내와 자식까지 거느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으로 오랜 세월을 보낸 설움들을, 한 순간에 잊어버릴 수 있는 기가 막힌 ‘로또’였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행복한지, 요셉은 자식을 낳으며 이름을 이렇게 짓습니다.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 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창41:51-52)
자신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정도로 어려운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할 여유가 있을까?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 ‘전과자’에, 가정도 없이, 떠돌아다녔다면, 그가 형제들을 볼 면목이라도 있었을까요? 잠언에서는 ‘그가 가난한 즉, 형제라도 멀리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과연 가난한 요셉을 보고, 형들이 좋다고 했을까요? 어쩌면,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에 잘해 주었을지도 모르겠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가겠는가?
이스마엘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장례식에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죽음앞에 만감이 교착하였습니다. 자신의 어머니 하갈과 아브라함. 이삭이 태어났을 때 느낀 자신의 질투. 큰어머니 사라의 표독한 학대와 분노, 그리고 시기.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해서 광야에 내어쫓기고 그 속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아남기 위한 지난 날의 세월들. 그속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강인하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몇 십 년만에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르며 차가운 시신이 되어 만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무덤앞에서 흐느꼈습니다. 마구 눈물이 흘러내렸죠. 또 다른 아브라함의 본처의 아들인 이삭과 더불어 묵묵히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죠. 이스마엘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장례를 치러 드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삭이 낳은 아들은 ‘에서와 야곱’이죠.
훗날, 이삭의 아들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에서는 40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결혼은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죠(창 26:34-35). 이삭의 아들 <에서>는 다시 결혼을 하죠. 자신의 큰아버지 <이스마엘>의 딸이며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삼았습니다(창 28:8-9).
이렇게 이스마엘과 이삭은 사돈지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기 위해서라도, 따뜻한 인생이 되십시오. 평안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힘이 있는 인생이 되십시오. 솔직히, 힘이 없어 봐라. 얼마나 무시를 당하는지. 당해본 자가 그 서러움을 알고, 피눈물을 이해하는 법입니다. 힘이 있어야 할 말을 하고, 지탄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고 줏대를 지키게 되는 것이죠.
1. 세월이 흘러 가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괴로운 세월 가는 것 금할 길 아주 없네
2. 저 뵈는 하늘 집으로 띠띠고 어서 가세
주 계실 때에 하는 말 들에 비하라셨네
3. 어두운 그 날 닥쳐도 찬송을 쉬지 마세
금고문고를 타면서 나 안식 누리겠네
4. 큰 풍파 일어 나는 것 세상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고향 찾아 가리
후렴
요단강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 가네
저 건너 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희미하다
열왕기상 2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길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한번 이 세상에 왔다가 한번 가는 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고, 마치 이 세상에서 평생을 살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상처를 주고 받고, 서로 사랑해도 부족할 부부가 원수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큰 불행이죠.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가요? 야고보서에서 말한 대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이 얼마나 허무한가요?
제가 어릴 때 주일학교 친구들과 더불어 ‘땅 따먹기’라는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한 뼘을 먹어도 조금이라도 더 먹어 보려고 손가락 마디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손가락이 찢어질 정도로 눌러서 그 점을 그리고.
그래서 소꼽 친구보다 땅을 한 뼘만 더 먹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재미가 있었죠.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들어갑니다. 아까 그렇게 신나게 넓힌 땅도 내려놓고 들어가죠. 친구도 친척도 다 소용 없고, 의리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그저 눈이 벌개서 돈, 돈, 돈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라 하시면 내려 놓고 가는 게 인생입니다. 갈 때는 다 놓고 가죠.
잠깐이면 다 지나갑니다.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창25:8)
열조에게도 돌아갔습니다. 8절에 보면 “열조에게 돌아가매”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 조상들의 공동묘지에 묻힘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혈육적인 조상은 메소포타미아에 장사되었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묻혔죠. 여기에서 “열조”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결합하다”에서 유래하여 동질성을 갖는 “무리”를 의미합니다.
즉, “열조”는 동일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이는 죽어 천사에 받들려 간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으며, 부자는 자신과 유사한 악한 사람이 머무는 음부에 떨어졌다는 비유에서도 확인되죠.
사람이 죽으면 모든 현생의 혈족은 변하여 오직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기억됩니다. 그곳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있는 곳이요 모든 앞서간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있는 곳입니다. “열조에게 돌아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세계에 들어감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디 혈통이고 어디 가문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인 것,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사건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가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사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제 압니다. 진정한 나의 신랑은,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신랑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창조주 신과, 그를 영접하는, 피조물로서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또한 남편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는 아느냐 너는 아느냐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아느냐 너는 아느냐
너는 아느냐
내가 너를 살리려
나의 생명을 주었고
내가 너의 수치를 씻으며
나의 영광을 버린 것을
너는 아느냐
내가 너를 살리려
나의 생명을 주었고
내가 너의 수치를 씻으며
나의 영광을 버린 것을
너는 아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너는 아느냐 너는 아느냐
창세기 25장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과 그의 서자 이스마엘의 죽음도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아브라함의 장례식을 치룬 이스마엘의 죽음 역시, 같은 장에 기록이 되어 있죠. 참, 인생이 덧 없습니다. 영국의 작가 프란시스 콸스는 “죽음은 어디에서나 그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느니라, 그러므로 그대도 슬기롭게 어디에서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예고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입니다.
역사 이래 무수한 사람이 태어났으나 이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본장에서는 죽음을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죠. “돌아가다”란 말은 “모으다” “거두다”, “소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을 부여받았고 하나님에 의하여 거두어들임을 당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삶과 분리된 이별, 공포, 불안, 무력함과 같은 실존적인 위기죠. 사랑하는 사람과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픔, 육체적·정신적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절망 등으로 죽음은 부정적인 감정들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아울러 의학에서 말하는 심장 정지에 의한 죽음, 뇌사, 세포사 등을 기준으로 모든 것이 끝남을 의미하죠.
■ 성경 속 죽음
구약성경은 죽음을 아담의 범죄 후 인간에게 주어진 죄의 결과, 즉 하나님의 벌로 이해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죽음을 모르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인간이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때문이며, 아담이 범한 죄의 결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죠.
반면 구약성경은 죽음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노년기 죽음이 여기에 속하죠. 하나님은 계명을 따르는 사람에게 장수를 허락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로서 만나야 할 죽음이지,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죽음이 아닌 것이죠.
신약성경에서 죽음은 그리스도로 인해 죽음이 종결됐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 삶의 완결을 이룰 수 있게 됐습니다. 이로써 새로운 삶으로 옮아간다는 의미로 죽음을 이해하게 되죠.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왔다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감(요한 16,28)이며,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호흡을 하는 그 죽음이 임박한 임종의 순간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드릴 마지막 빛나고 찬란한 예배이기를 간절히 축복을 드립니다.
인간의 죽음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때론, 숭고하고 평온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죽음이란 현실은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나죠. 특히 악성 질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경우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에 빠져 죽거나 시신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은 순교자 역시 그들의 현실은 목 베임을 당하거나(계 20:4) 돌에 맞고 톱으로 켜임을 당하는(히 11:37) 저주스러운 모습이죠. 그러나 그의 죽음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면, 인생은 비참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겐 사람들의 눈에 감춰진 ‘하늘의 광경(a view of heaven)’이 있죠. 영의 눈으로 볼 수가 있는. 운명하는 순간 ‘그의 영혼의 하늘(the heaven of his soul)’에선 그를 위한 ‘찬란한 낙원 입성식(入城式)’이 펼쳐지죠. 땅에선 ‘이별과 종식(終熄)’이지만 하늘에선 ‘환영과 새로운 출발의 시작’입니다.
◈땅에선 고독사 하늘에선 환대
평생 가난과 질병 속에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던 나사로는 그가 평소 엎드려 있던 부잣집 대문 앞에서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한마디로, 객사(客死)요 고독사(孤獨死)죠.
그러나 구원받은 그의 영혼은 죽는 순간 천사의 손에 받들려 낙원의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눅 16:22). 누구도 예상 못할 극적인 반전이죠. 그가 세상에서 아무의 시선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갈 때, 하늘의 천부께서 그의 주검을 마중 나와 감싸 안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겐 결코 고독사란 있을 수 없죠. 그가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든, 죽는 순간 하늘에선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간 성도들의 영접을 받는 환영 리셉션(a welcome reception)이 떠들썩하게 펼쳐집니다.
“이 세상을 일찍 떠난 사랑하는 성도들 내가 올 줄 고대하고 있겠네 저희들과 한소리로 찬송 부르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주를 뵈오리(찬 231)”라는 찬송가사 그대로입니다.
억울하고 존중받지 못한 채 땅과 바다에서 죽어간 모든 주검들 역시 그리스도 재림 때 일으킴을 받아 오른편 의인(義人)의 반열에 귀속되고(마 25:32), 어떤 주검도 소외된 채로 방치되지 않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3).”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계 14:13)”,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죽음의 실상이 무엇인가요? 죽음의 실상은 하나님과 영원한 분리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죽음의 실상이 영원히 폐해졌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겐 ‘죽음의 실상(하나님과 영원한 분리)’이 영원히 폐해졌습니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에게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11) 이는 아브라함의 후사로서 구속의 계보를 이어나가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걸어왔던 믿음의 길을 이제 아들 이삭이 걸어가게 되는 거죠. 본문 11절은 아브라함의 죽음 이후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 이삭에게 이어짐을 명확히 하죠.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창25:11)
기도
주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하며 최선을 다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불러들이실 때,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최고의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고독사가 아닌, 하늘에서 나를 맞이하는 주의 천사들과 하늘나라 가족들을 눈으로 그려 보게 하시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죽음의 실상(하나님과 영원한 분리)’이 영원히 폐해졌음을 알고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함을 알고 기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아멘.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이 천지 만물 모두 변하나 변찮는 주여 함께 하소서
주 홀로 마귀 물리 치시니 언제나 나와 함께 하소서
주같이 누가 보호하리까 사랑의 주여 함께 하소서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십자가 밝히 보여주소서
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
이스마엘의 자손들(12-18)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 이스마엘은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열두 아들은 12종족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들의 이름은 그들의 마을과 부락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습니다.
이스마엘은 137세의 향년으로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자손들은 동으로는 하윌라(10:29), 서로는 이집트 가까운 술 광야에 걸쳐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 모든 형제의 맞은 편”에 거하였다는 것은 서로 간에 대립하며 적대적인 입장에서 생활했다는 의미인데 이것 역시 하갈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창 16:12에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이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런 모든 성경의 성취를 보면서 성경을 이루어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또 이삭은 180년을 살고 이스마엘은 137세를 살다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죽음이 나오고 한 장(章)에서 이스마엘의 죽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몇 해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다가
어디에 장사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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