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창 23장 막벨라 굴을 사라!
<"우리 아버지는 환경미화원이다. …… 오늘도 동이 트기 전에 나가신 우리 아버지, 지금은 어디에서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를 치우고 계실까? 난 한 번도 아버지의 직업을 친구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지만.…… 아버지, 조금만 참고 기다리세요. 얼른 자라서 행복하게 해드릴께요.">
이 글은 어느 초등학생이 쓴 "나의 아버지는 환경미화원." 이라는 작품의 한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흔히들 세상의 기준으로는 판검사, 의사, 정치가, 재벌들을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만이 진정 복 받은 사람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이란? 건물과 돈을 많이 소유한 사람도, 권력을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우거나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 출세한 자식을 둔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죠. 욥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23:11-12)
14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119:14)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가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다가, 주님의 손을 붙잡고 본향에 가는 사람들이죠.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애가 그러하였죠. 사라는 창세기에서 하와 이후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언급되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아내였을 뿐 아니라 역경을 뚫고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유일한 믿음의 동역자요 아내인 사라를 잃고 큰 슬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창 23:1-2)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가 죽으매 ‘슬퍼하며 애통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을 때 이후 한결같이 동행을 하면서 온갖 수모와 환난을 몸으로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 우르의 문화를 버리고, 길고도 긴 모험의 길에 동참하였죠. 그 남편 아브라함의 반려자로서 가나안의 불안정한 나그네 생활을 하며 기쁨과 슬픔의 인생 여정을 함께 하였습니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세시대 때,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이 성으로 들어오면서 행진할 때, 노예들을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는데, 그때, 외치는 소리가 있는데, 바로 [메멘토 모리]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너도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아라. 지금 너는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사람이 최고로 올라갈 때, 마냥 자만하지 말고, 다시 내려갈 것을 생각해서
‘겸손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말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죽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바로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태어나는 날부터, 죽음을 향하여 카운트되고 있고, 삶과 죽음이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여자의 운명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남자를 만나 살면서, 자신이 원컨 원치않건, 마치 운명처럼, 그렇게 따라가야 하지요. 남편이 흥하면 흥한대로, 망하면 망한대로, 여자는 숙명적으로 함께 흥하고, 함께 망하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그렇게, 보내는 것입니다.
남편이 어찌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이사를 많이 하는지, 잠시라도 머물러 있지를 못했습니다. 고생이 참 많았죠. 그러나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마음고생’이었죠. 물질은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지만, 마음고생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무지와 불신앙으로 인해 두 번이나 이방 왕의 아내가 되는 치욕을 겪어야 했습니다.(창 12, 20장). 남편 아브라함은, 자기의 목숨을 지키고자, 무정하게 다른 놈에게 아내를 주고 말았죠. 아내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남편이 판단하고 남편이 결정하는 대로, 사라의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후손에 대해 말씀을 하셨지만, 사라 자신은 불임이었기에 약속에서 한 걸음 물러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죠.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최악이거든요. 불임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남편에게 여종을 첩으로 줘야 했고, 그 여종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로 인해 고통과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른 여자, 다른 년(?) 때문에... 조롱과 무시를 당하면서까지 인생을 힘겹게 버티어 내야 했죠. 천신만고 끝에 자식을 낳았지만, 남편은 그 귀한 독자 아들 이삭을 의논조차 하지 않고 제물로 드리려 했죠. 자기 자식을 불로 번제로 태워버리다니, 어미의 심정은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사라는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산다는 것은 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사라나 영성산책을 듣고 있는 당신과 저 역시, 한평생을 쭉 펼쳐보면, 서로 비슷비슷 할 겁니다. 인생 별거 있나요? 그게 인생이거든요. 그러나 우리 역시 사라의 뒤를 이어, 이 풍진 세상을 떠납니다. 버거운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거죠.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 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의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
구름타고 올라가서 주님 앞에 절하고
온유하신 그 얼굴을 뵈올 때 있을 곳을 예비하신
크신 사랑 고마워 나의 주께 기쁜 찬송 드리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의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
막벨라 굴 구입과 아브라함의 신앙
모리아 산 정상에서 독자 이삭을 바쳤을 때, 아브라함 이야기는 절정에 이릅니다. 그런데, 오늘 보는 막벨라 굴을 구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창세기 23장은 모두 20절로 되어 있죠. 그런데 사라의 죽음과 관련된 첫 두 절과 사라의 장례절차를 보여주는 마지막 두 절을 제외하면 나머지 열여섯 절 모두가 막벨라 굴 구입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23장의 중심 내용은 사라의 죽음과 장례가 아니라 막벨라 굴 구입이라 할 수 있죠.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엄청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불리울만한 스토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빠져서 영적인 시야가 흐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을 믿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 주고자 했죠.
고대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았죠. 부득불 고향을 떠난다 하더라고 죽을 때에는 고향 땅에 묻히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를 가나안 땅에 묻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 후손들에게 주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기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동안 그들을 섬기다가, 그후에야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이곳으로 다시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 15:13-16).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40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의 후손들이 자기가 머물고 있는 그곳에 와서 살 것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죠.
이처럼, 땅 매입의 기회는 사라의 죽음이라는 슬픈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라의 죽음을 계기로 땅의 언약을 성취하게 되었죠. 나그네처럼 지냈던 아브라함은 여기 막벨라 굴을 사서 매장합니다. 막벨라 굴은 장차 들어가 정복하게 될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될 것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9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창23:9)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마므레 앞에 있는 막벨라 굴을 샀을까요?
성경은 약속의 땅을 강조하기 위해 가나안이라 표현했으며, 또한 마므레 앞에 있는 장소라고 언급해서 성경을 읽는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떠오르게 하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창13:18).
바로, 이곳은 하나님을 대면하며 열국의 아비가 될 것과 1년 후에 이삭이 출생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역사적인 장소였죠(창 18:1, 10). 막벨라 굴이 마므레 앞에 있다고 말해, 아브라함이 단순히 매장지를 찾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눈물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리. 그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을 사고 싶었던 거죠. 이제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을 넘어, 이후 족장들의 삶 속에서도 단순한 매장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에서 나그네 삶을 계속하겠지만, 그들이 돌아갈 본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닌 가나안 땅이 되었죠. 막벨라 굴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소망하는 믿음의 고백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확증의 표시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62년을 살았지만, 아브라함은 한 치의 땅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의 사회적 신분은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마저 없는 '나그네'(게르)요 '우거하는 자'(토샤브),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매장지를 위한 땅 구입 기회가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나안 땅에서 최초로 개인 소유지 땅을 마련하였습니다. 막벨라 굴 구입 과정은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신실성과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잘 보여주죠.
먼저, 아브라함은 자신이 법적으로 땅을 소유할 수 없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의 신분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나서 법적인 선처를 요청하죠. 각 도시의 최고 의결기관인 원로모임은 성문에서 회의를 열어 행정 및 사법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들 원로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호의적이었죠. 그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방백' 곧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세운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축복을 받고 있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좋은 묘실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무상으로 사용하라고 허락하였죠. 그러나 아브라함이 바라는 것은 묘실의 무상사용이 아니라 땅을 정식으로 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헤브론의 원로회의는 아브라함의 첫 번째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한 셈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 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헤브론에서 땅을 구하려는 아브라함의 노력은 세 번에 걸친 대화 속에 잘 묻어 나죠.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땅을 소유할 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땅을 소유하기 위해 최대한 자신을 낮춰서 절하며 요청합니다.
아브라함의 땅 매입에 대한 집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죠.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매장지가 헷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는 막벨라 굴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면서 그 땅 구입을 거듭 요청하였습니다.(창 23:7-9)
7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8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9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창23:7-0)
헷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장례를 치를 장소의 제공 의사를 분명히 하지만, 땅 소유권을 넘겨 주길 원하지 않음도 명백하였습니다. 땅 주인인 에브론조차 그 땅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하였지만(창 23:10-11) 아브라함은 무상 제의를 거절하고 정당한 값을 지불하겠다고 고집합니다.
에브론은 헷 족속들 앞에서 은 사백 세겔이라는 값을 불러 땅을 팔지 않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전달합니다. 만일 거래가 성사된다면 엄청난 재산상의 유익을 얻게 된다는 측면도 있죠.
14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5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창23:14-15)
막벨라 굴 구입을 위한 마지막 단계는 구입 협상을 마무리 짓고 에브론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하는 것이죠.(창 23:16-18) 이 과정에서 주목할 부분은 아브라함이 땅값을 흥정하지 않고 부르는 대로 지불했다는 점입니다.
에브론은 은 사백 세겔을 요구했죠. 아브라함이 지불한 은 400세겔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상당히 큰 액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충분한 대가'(창 23:9)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는 '케세프 말레' 곧 파는 자가 부르는 '가득 찬 값'을 의미합니다.
은 사백 세겔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값이죠. 당시 노동자의 연봉이 은 10세겔 정도였다고 볼 경우, 은 사백은 노동자가 40년간 노동해야 하는 액수입니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밭을 은 17세겔에 구입하였습니다. 다윗이 성전의 터가 될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역시 은 50세겔에 구입하였습니다.(삼하 24:24) 그에 비하면, 아브라함이 지불한 은 400세겔은 상당히 큰 액수였죠.
에브론은 지나치게 높은 값을 부르며 팔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뜻밖에도 아브라함은 에브론이 부른 값대로 땅을 사겠노라 선언하였습니다. 전혀 깍지를 않았죠.
손해가 되는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큰 액수의 돈을 아낌없이 지불하고 막벨라 굴을 구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대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땅의 약속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성취의 그날을 기다려왔습니다. 언제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실 것을 확신하였죠.
그는 약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약속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그의 신분이나 주변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땅을 구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라의 죽음을 계기로 매장지를 구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가나안에서 최초의 땅을 소유하였습니다.
그것은 전체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일부분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 실현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첫 출발입니다. 땅의 약속을 마음에 안고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는 아브라함의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16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창23:16-18)
창세기 12장에서 언급한 땅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기 시작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함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실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을 재확인했습니다. 창세기 22장이 후손에 대한 약속을 새롭게 한 것이라면, 23장은 땅에 대한 약속을 새롭게 한다는 뜻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은 죽을 때까지 가나안 땅을 끝까지 소유하지 못했던 나그네요, 우거자였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생각하고, 미래를 위하여 믿음으로 행동하였습니다. 다음 세대를 걸어올 후손들에게 이 땅에 대한 동경심과 애착심과 열망심을 심어 주고 갔죠.
사라가 이곳에 묻히고, 나중에 아브라함 자신이 여기에 묻혔습니다(창 25:7-10). 그 아들 이삭이 여기에 묻히고(창 35:27-29) 이삭의 아내 리브가와 야곱의 아내 레아도 여기 묻혔습니다(창 49:31).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그의 임종을 앞두고 자기의 장지를 이곳으로 정할 것을 자식들에게 유언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게 장사할 이유를 설명해 주기를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 돈주고 사서 우리의 소유지로 삼은 곳이기 때문이라고까지 설명했습니다(창 43:32, 54:12-13). 그래서 그의 아들들은 그의 시신을 애굽에서 가나안 막벨라 굴에까지 옮겨와서 안장했습니다.
놀랍게도 후에 또 많은 세월이 흘러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도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 애굽을 떠날 때,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유언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유언을 쫓아 가나안 땅으로 그의 유골을 매고 나옵니다(창 54:24-25).
아브라함은 슬픔에 사로 잡혀 마비되지 않았습니다. 슬퍼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슬픔이 지나쳐서도 안되죠. 우리에겐 과거도 있지만 장래라고 하는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미래를 사(買)놓고 갔습니다.
우리는 세월이 갈수록 과거에 매여있고, 늙으면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고향을 떠난다 하더라고 죽을 때에는 고향 땅에 묻히고자 하죠. 그러나 아브라함은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미래를 보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거죠.
창세기 23장에서 사라는 죽었지만, 사라의 죽은 이야기는 겨우 첫 두절과 마지막 두절이 전부입니다. 열여섯 절 전부가 모두 막벨라 굴 구입과정이죠. 아브라함은 그곳에 사라를 묻었습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에. 바로 그곳이 선민 부활 소망의 고향이 되고 말았죠.
그것은 아브라함이 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의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자손들의 기업지를 확신하는 하나님께 받은 미래였죠. 바로 그 땅이 하나님이 전개하시는 구속역사 경륜의 중심지가 되었고, 마침내 인류의 구세주 예수께서 죄인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땅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세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지가 되고, 한번쯤 가고 싶은 ‘이스라엘 성지 순례’가 되었습니다.
흘러내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제 난 알수 있겠소
죽어가는 영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
이제 더이상 바라볼수 없어 그들에게 난 달려가겠소
영원한 생명 그 십자가 나 따라가오
세상 날 버려도 지쳐 쓰러져도
나 놓을수 없는 십자가
생명을 구할수만 있다면 그들 주를 볼수 있다면
나의 생명이라도 두고 가겠소
주님 가신 그 길처럼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위해 아낌없이 드릴테요..
나의 가슴속에서 흐르는 눈물
내 아버지 사랑이죠 이제 울지 말아요
세상 모두다 주의 이름 부를테요.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이 기업은 너와 네 자식에게 주리라”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시작한 사람도 있습니다.
기업체를 운영하려면, 대부분 은행에서 수십억의 빚을 깔아놓고 시작을 합니다. 빚없는 회사가 어디 있나요? 대출금을 갚으면서,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주셨기에,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배우자와 사별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배우자가 딴데 정신이 팔려서 어문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분별을 잃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을 붙드십시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3:6)
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3: 14)
땅값이 올라서, 삼성이 들어온다고 하여도... 삼성의 할애비가 들어온다고 하여서 땅값이 올랐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곳을 내게 주신 <레마>가 확실하다면, 에브론처럼 그 순간의 일만 보고 땅값을 엄청나게 크게 불러 이득을 많이 보았다고 히히 거리며 좋아하지 말고, 은 400세겔이라는 터무니없는 값을 손해를 보더라도 마땅히 막벨라 굴을 구입하십시오! 당신의 미래를 사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에게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그곳에 당신의 진액과 뼈를 묻으십시오. 당신의 자녀들 역시, 당신의 믿음을 물려받고 당신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명과 진액과 뼈를 그곳에 묻을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비전과 미래, 뜨거운 마음을 상속하십시오! 당신의 입으로 어떠한 부정적인 말들을 심었고 그것을 어떻게 거두고 있는지.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갈6:7)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그것이 자기와는 관계없는 남의 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아브라함 당대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의 아내 사라는 늙어 죽었고 아브라함도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그는 가나안에 이민 온 지 6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시민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개척 동역자 사라가 죽음으로 사실상 아브라함의 개척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과 사라사이의 독자인 이삭의 나이는 37살, 아직 가정도 꾸리지 못한 미혼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죽음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으며, 슬픔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적 분별력이 약해지거나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가지 일을 처리하였죠. 은 400세겔이 아까워서 공짜로 주겠다는 땅에다 무덤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 주기 위해서 거금을 투자하여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400세겔을 주고 그 밭을 사서 자기의 소유지로 확증하는 아브라함의 행위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신앙고백의 행위이고 표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축복을 물려 주고자 할 때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이 이삭의 결혼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결혼만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는 여자와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가정을 이루도록 도와서 하나님의 축복을 물려 줄 준비를 시켰습니다. 이 두 사건을 치르는 과정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잘 나타나 있죠.
믿음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들과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될 것은 아브라함은 미리 바라보았습니다.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히브리서 11장 12절),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히브리서 11장 13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브리서 11장 16절).
주님, 아브라함이 발붙일 땅 한 평이 없이도 62년을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살았을지라도 믿음으로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서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자식이 나이가 들어도 미혼이고, 배우자가 죽어도 마음이 약해지고 영적 분별력이 흐려지지 않게 하옵소서. 오히려 ‘죽음’을 계기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한 아브라함처럼 막벨라 굴을 사는 사람, 믿음으로 미래를 매수하는 사람, 미래를 준비하는 신앙의 용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항해자<시와 그림>
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 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 주시는 그분은 나의 주님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의 항해의 끝이 되시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합니다
날 포기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하여도
내 삶의 항해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 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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