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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창세기

주은총목사/ 창세기 21/ 브엘세바에 있는 당신에게

by 주은총목사 2024. 4. 23.

https://youtu.be/jSfcdBnBN0E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22/ 브엘세바에 있는 당신에게

 

(창세기 2114-21)

4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어느 유품정리사의 기록

 

"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가족에 관한 명언중 하나로 흔히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이기도 하지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입니다.

 

톨스토이는 16살 어린 신부에게 자신의 일기까지 보여주며 열렬한 사랑을 시작했지만, 오랜 불화 끝에 말년엔 가출해 객사했습니다. 가족의 일이란 건 알 수 없는 걸까요?

 

가족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지만, 가족 없이 죽는 사람은 많습니다.

 

특수청소부 김새별 작가가 장기연재 중인 어느 유품 정리사의 기록’(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30)에서 불행한 가정, 분노의 가족들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죽음은 쓸쓸한 것으로 끝날 뿐이지요. 그런데, 가족이랍시고 뒤늦게 나타난 이들이 더 씁쓸한 뒷맛을 남길 때가 있습니다.

 

찌는 듯한 여름의 고독사 현장은 처참합니다. 한겨울 보일러를 가동하거나 전기장판을 사용하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의 상황도 나쁘지만, 여름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찜통더위 속에서 구더기와 파리는 무서운 속도로 불어납니다.

 

그렇게 무덥던 어느 여름, 찾아간 곳은 작은 원룸이었습니다. 살림이라 할 것도 없을 만큼 조촐한 방. 고인의 방에선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습니다. 고인이 생전 겪었을 고통과 시련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습니다. 정리를 의뢰한 유가족들이 전해준 이야기가 유일한 실마리였습니다.

 

고인은 수재였죠. 의대를 졸업하고 동기들과 성형외과를 차려 크게 성공했다고 합니다. 성공은 더 큰 꿈과 야망을 낳았고, 중국에 진출해 병원을 차렸습니다. 거액의 투자를 받아 개원한 중국의 성형외과는 탄탄대로가 열린 듯 순항했죠. 그러나 잠시뿐, 이내 중국 공안과 마찰이 생기면서 병원 운영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투자금 회수는커녕 말 그대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맨몸으로 한국에 들어왔지만, 고인은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그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의학품업체 배달 운수업에 잠시 종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극도의 스트레스와 쇠약해진 몸은 노동을 감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고인이 마지막에 거주했던 골방은 고시원처럼 좁디좁았습니다.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고, 쓰레기통에도 식사를 챙겨 먹은 흔적은 없었습니다. 쉬지 않고 피워댔는지 담뱃갑과 꽁초만이 가득했죠. 아마도 고인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의 삶을 끼니 대신 곱씹었나 봅니다. 한때 새 출발을 꿈꿨던 건지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한 흔적도 눈에 띄긴 했습니다. 그러나 고인은 절망의 늪에서 결국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그의 방에선 주인 잃은 시계만 무심히 돌고 있었습니다.

 

보증금 30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돌연사한 이가 알고 보니 전직 잘나가던 성형외과 의사였다는 사연은 놀라웠죠. 한때의 영화를 잊지 못하고 끝내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죽음 뒤에야 소식이 닿았는지 고인의 친형은 고급 외제차를 몰고 나타났습니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이에게 여유 있는 형제는 마지막 희망이면서 끝까지 고문이었던 걸까.

 

불화의 결과는 혼란과 분열입니다. 근심과 걱정과 고통과 불안입니다. 가정 내에서의 불화는 어느 집단보다도 더욱 심각한 분열상을 보이게 됩니다. 아비와 어미가 싸우면 자식은 누구를 편들까요?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싸우면 부모는 누구를 편들어야 하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다투면 아들은 누구편에 서야 할까요?

 

창세기의 아브라함에게는 사라라는 본처가 있었습니다. 사라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나에게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여종 하갈(Hagar)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수 있기를 바란다고 남편에게 요청했습니다. 본부인이 대를 잇지 못할 때 여종에게서 아들을 낳게 하는 것은 여러 문화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관습이죠.

 

아브라함은 아내의 말을 따라 하갈과 동침해 하갈이 임신해 이스마엘(Ishmael)을 낳았습니다. 성경에는 하갈이 두 번 도망을 가죠.

 

첫 번째는 하갈이 임신을 한 후 사라를 멸시하고 무시하자. 본부인인 사라가 남편의 허락 하에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하갈은 도망쳤고,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돌아가라고 권해 다시 아브라함 곁으로 돌아옵니다.

 

두 번째는 본부인 사라가 하나님의 뜻으로 임신을 해 이삭(Isaac)을 낳게 되자, 또다시 본부인과 첩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죠. 하갈과 형 이스마엘이 동생 이삭을 놀린 게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사라가 격분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자고 아브라함에게 건의하죠. 축출의 이유는 재산분배죠. 돈때문입니다. 사라는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수 없다고 잘라 말하죠. 유목민족이든, 농경민족이든 첩의 아들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고민을 하다가 사라의 말을 따르게 되죠.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냅니다.

 

오늘도 하룻길 나그네 길을 나 혼자 가야해

멀고도 험한길 나그네 길을 나 혼자 가야해

 

나 혼자 가야해 아~~~

 

갈래 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갈래 갈래 갈린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내 집은 갈릴리 해변 푸른 풀밭 쉬이 갈 수 있는데

내 사명 다하기까지 갈 수 없네 그리운 내 본향 집

 

그리운 내 본향 집 아~~~

 

갈래 갈래 갈림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갈래 갈래 갈린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가려오

 

성경에는 다음날 아침 일찍 아브라함이 먹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어주고, 아이와 함께 보냈습니다. 하갈은 길을 나서 브엘세바(Beersheba) 빈 들에서 정처 없이 헤맸죠. 브엘세바라는 지명을 이야기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요?

 

브엘세바는 사라의 여종 하갈과 그의 소생 이스마엘이 쫓겨나 사막으로 향하면서 잠시 들렀던 곳이며이삭이 야곱을 에서로 잘못 알고 복을 내려준 곳이기도 합니다또 요셉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 아버지 야곱을 모셔 갈 때 야곱이 마지막 잠을 잔 곳도 바로 브엘세바죠

 

하나님에 이끌려 가나안에 온 이브라함은 이곳에서 숨을 거둔 뒤 헤브론에 묻혔습니다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히브리민족의 조상이 되었으며열국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의 하갈의 일을 자세하게 살펴볼까요? 청천벽력같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갑자기 쫓겨 나는 두 모자는 눈물만이 흐르고 천지가 캄캄하여 갈 일이 막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갈은 어린 아들을 이끌고 가죽부대와 떡뭉치가 들어 있는 보자기를 메고 광야의 길을 떠나가야만 했죠. 가냘프고 나약한 이 여인은 아브라함과 눈물로 이별하고 길을 가려니 설움에 가득찬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고 두 다리는 무거워지고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하갈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의 길을 외로히 걸어가야만 하였습니다. 태양열이 작열하는 불모의 땅 사막이죠. 시냇물도 없고 불뱀이 나오고 전갈이 가득한 곳입니다. 생명을 이을 아무런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죽음의 땅이죠.

 

이러한 곳으로 하갈과 어린 이스마엘은 추방된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는 동안 먹을 음식물도 다 떨어지고 가죽 부대의 물도 한방울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죠.

 

죽음에 이른 하갈은 최후의 방법으로 어린 아들을 떨기나무 그늘 아래에 두고 자기 아들의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마주 앉아 아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방성대곡을 하였습니다.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21:6)

 

아들을 위하여 자기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기에, 차마 자식의 죽어가는 모습을 쳐다 볼 수가 없어서 나온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녀가 광야에 내 동댕이 쳐졌을 때에,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갈은 세상이 무너질 듯이 울며 미친년처럼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이 모자의 죄가 무엇일까요?

 

죄가 있다면 하나는 둘째 부인이라는 사실이요, 서자인 것입니다. 떡과 물 한가죽부대를 메고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는 손을 잡고 피곤한 다리를 끌며 브엘세바 황막한 벌판을 헤메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영적인 양식을 주시는 것을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주시는 것으로 표현했죠.

 

떡과 물 한 가죽부대는 각 사람에게 필요한 양입니다. 육체적으로는 먹을 양식과 물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죠. 성령이 소멸되지 않고 성령이 충만하게 흘러가야지만, 영을 가진 우리의 삶도 활기 있고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물은 한정된 음료였죠. 먹다 마시다 보면 빈 광주리와 빈 부대만 남습니다. 하갈은 그 동안 준비된 음식을 먹었으나 이제는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더이상 생명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되기까지 말라버린 거죠.

 

이스마엘은 멀리 떨어진 엄마를 눈으로 찾으며 배고픔에서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울고, 어머니는 멀리서 죽어가는 어린 아이를 바라보면서 사막의 땅을 치며 하늘을 향하여 대성톡곡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두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셨죠.

 

하갈과 이스마엘의 통곡은 오늘 날 인류가 몸부림치는 갈등의 소리요, 저들 모자의 소리는 오늘 날 방방곡곡에서 버림받은 무수한 소외자들의 눈물과 연결되는 통곡입니다.

 

새번역에는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고 나와 있죠. 이스마엘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름의 뜻과 같이 하갈과 이스마엘이 버림받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할 때 그 기도가 사라지지 않고 눈물이 떨어진 사막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소망의 손길을 펼쳐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본 공식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를 통곡의 자리로 몰고 가십니다. 통곡의 자리로 몰고 가신 후에, 그래서, 자신을 철저히 보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등장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통곡의 자리로 몰아가셨습니다. 베드로도, 통곡의 자리로 몰아가셨습니다.

그래야 자기를 봅니다. 자기를 봐야 하나님이 제대로 보입니다. 이것이 공식입니다.

내 눈이 떠지는 순간은, 내가 통곡한 후, 하나님을 보는 그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의 호소를 들으시고 찾으셨습니다.

17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21:17-18)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하갈은 이제 새로워졌습니다. 진짜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죠. 하나님의 말씀 하나 하나가 얼마나 무섭고 정확하게 이루시는 가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동조상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사라와 그의 아들 이삭으로 이어지는 후손을 유대인으로 보고 있고, 이슬람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랍인으로 파악하죠. 하나님은 하갈-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는 상태, 곧 깨우침을 받는 순간입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육신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깨우침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서 흐르는 흐름을 받아드리는 순간입니다. 이 때에 비로소 무엇을 보느냐 하면, 하갈이 샘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샘물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영안을 열어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로보게 될때 그 안에 보고가 있습니다. 이세상 모든것을 소유할수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고로 급선무는 영적 눈을 떠서 샘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어두운 눈 밝히사

1.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

 

2.막혀진 내 귀 여시사 주님의 귀한 음성을

이 귀로 밝히 들을때에 내 기쁨 한량 없겠네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귀를 열어 주소서 성령이여

 

3.봉해진 내 입 여시사 복음을 널리 전하고

차가운 내 맘 녹여주사 사랑을 하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입을 열어 주소서 성령이여

 

같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회복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신체적으로 더 건강하거나 더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떠한 사람에게는 집도, 반겨줄 가족도 없는 이도 있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만 하루하루를 날품팔이로 연명해야 하는 고달픈 현실뿐이죠. 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얻을 지지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죽는 게 이것보다는 낫겠구나라는 생각에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년의 나이에, 모든 것을 다 잃고, 누구 하나 전화하는 이 없이, 누구하나 찾아오는 이 없이, 지독한 우울증과 고독과 절망에 시달리며 아픔을 달래야만 하죠.

 

삶이란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비로소 완성됩니다.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어야 하고 나누어야 할 상대가 있어야 하며 의지해야 할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불이 꺼진 영혼의 빈방, 전갈과 불뱀들이 휙휙 날아다니는 삭막한 광야를 지날 때 주님은 나의 등불을 켜시고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혀 주십니다.(시편 18:28)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편 18:29)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보여야 하죠. 예수가 보여야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생의 위기 상황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 예수가 보이면 비로소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 새소리도 아름답고, 꽃도 아름답고, 세상도 아름답고, 고생도 아름답고, 위기도 아름답고, 죽음도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문제를 결코 영구한 것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에게는 일시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30:5)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이라” (29:11)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21:19)

 

하갈은 사막의 뙤약볕에서 더 이상 고독하거나 절망만 하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이제 새로워졌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죠.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인 것입니다. 그는 샘에서 물을 길어 가죽부대에 채우고 울고 있는 어린 생명에게 마시게 하여 그를 살렸습니다.

 

우리의 회복능력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하는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절망으로 반응할지 또는 믿음으로 반응할지는 삶의 환경, 우리 자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이제 영의 눈을 떠서 삶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은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들은 절망을 향하여, 원수를 향하여, 가난을 향하여, 분노와 좌절과 질병을 향하여 활을 쏘았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다윗도 활을 당겼죠.

34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7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가리니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하리이다

 

38내가 그들을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리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거친 벌판이 희망이 없는 죽음의 벌판이 아니요, 오히려 그들의 삶을 억세고 씩씩하게 만들어 주는 삶의 도장이 된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김을 받았던 바로 그곳, 고독과 슬픔과 역경과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던 거친 들판이 사막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버림받은 땅에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씩씩하게 살았습니다. 활을 쏘고 말을 달리며 광야를 정복하는 하나님의 젊은 용사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하나의 큰 민족을 이루었죠. 매우 억세고 강력한 활력을 지닌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들 혈관 속에는 투쟁, 자활, 강인, 용감, 정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를 거쳐 그들은 이삭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의 두려운 적수로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 것은 결코 역사의 우연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기도에 대하여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17), 하갈아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시고(17),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8),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시고(19)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20) 활쏘는 자가 되게 하리라(20)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축복해 주셨던 것입니다.

 

천지를 지은 주님께서 내 필요를 채워주시니

이세상 살아 가는동안 늘 풍성한 삶을 살겠네

내게주신 주의 약속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니

이세상 어려움 이기리라 늘 승리 하며 살리라

 

천지를 지은 주님께서 내 필요를 채워 주시니

이세상 살아 가는 동안 늘 풍성한 삶을 살겠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어린양 구세주 보혈이

내 모든 죄에서 구원했네 그 은혜 증거하리라

그 은혜 증거하리라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기쁨

18세기의 유럽에 예배의 생명력은 잃게 되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되어 고민을 가졌던 진젠도르프 백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는 한 번도 체험할 수가 없구나.’라고 고민하며

 

그때 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나이 27세에 성령의 능력을 받고 또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모라비안 교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라비안 교파는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중시했고, 그림이 아니라 실체를 중시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모라비안 교파가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존 웨슬리 때문이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를 창시한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죠. 존 웨슬리가 대서양을 건너 여행을 할 때, 목사였는데도 성령의 체험이 없었고,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머리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기도와 금식은 철저하게 하는데, 그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도 체험하지도 못하였습니다. , 물론 방언도 할 줄 몰랐습니다. 방언을 하는 엄마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였죠. 이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자신의 신분이 목사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가 대서양을 지나가는데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배 갑판 한 구석에서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을 합니다. 폭풍우 속에서도 그들의 얼굴에 평안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도대체 저들과 나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이렇게 불안에 떨고 있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저들은 어떻게 찬송할 수 있는가? 저들은 누구인가?’ 하고 알아보았더니 이 사람들이 바로 모라비안 교도였습니다.

 

웨슬리가 충격을 받고 1738524일에 영국으로 돌아와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라비안 교파의 예배처소에 찾아가서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거기서 그는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사학자들은 모라비안 교파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라비안이라는 작은 교파가 20년 동안 해외로 보낸 선교사가 천 여 명이 된다. 다른 보수적인 교단이 200년 동안에 보낸 선교사들보다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낸 것이다.”

 

모라비안 교단은 2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천여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아마도 전 세계의 복음주의 교회역사상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 교회일 것입니다. 다른 유명한 정통 교단들이 200년 동안 보냈던 선교사가 500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라비안 교단이 다른 교단보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이 변화되고, 우리 안에 예수께서 살아계신다는 확신과 우리 속에 주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7:37)

 

말만 들어도 흐뭇하고 아름답습니다. 시원하고 상쾌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면 복이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납니다. 자신만 해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심령의 갈증까지 해갈시켜줍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멋진 선물입니까? 그분께서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물이 무엇입니까?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입니다. 그런데 이 생수의 강을 성령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7:39)

 

우리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는데,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때론 인생사에 지치고 힘들 때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풍요로움이 생깁니다. 힘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강이 흐르는 곳마다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곡식을 무르익게 만듭니다.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력이 공급됩니다. 마찬가지로 속에 성령이 있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47:9)

 

또한, 이렇게 성령이 넘쳐 흐르면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지 기쁨으로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541절을 보니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들은 핍박당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이 있으니까, 생수의 강이 흐르니까 어떻게 변화되었나요?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피곤하,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갈이 떡과 물 한 가죽부대가 바닥이 났듯이, 내 영혼의 영적 에너지가 다 바닥이 나서 생수의 강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줄기만 남아있고 그 외 물은 다 말라서 강바닥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삶에 개입해 주시고, 생명의 강물을 만들어 주시고, 그 안에 우리가 들어가 열매를 맺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찬양을 두 개 올려 드립니다. 임하소서 임하소서

 

나에게 생수 부으시니

나에게 생수 부으시니

나에게 생수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메마른 사막 거친 광야도

꽃피고 즐거워하네

이 세상 모두 주를 알리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번주는 장례예배가 있었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을 1년동안 k사모가 돌보았죠. 17여년간 일하던 <어린이집 원장직>도 내려놓았습니다. 남편이 침을 삼키지 못해서, 목을 뚫고 호수를 이어 생명을 연명하였습니다. 그분을 보며, ‘침을 삼킬 수 있는 것도 큰 감사이구나생각을 하였습니다.

 

주님이, ‘어여 그분께 가보아라.’라고 말씀을 하셔서 그분이 살아있을 때 마지막을 뵈러 갔습니다. 그 마지막의 순간이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지,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주님, 나의 마지막 순간조차 성령이 강하게 흘러 가게 하시어 영안을 열어서 예수님을 보게 하소서.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 것처럼, 종에게도 그러한 은혜를 주옵소서.(7:56)

 

K사모는 시간이 날 때... 오셔서 저와 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이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없는 개척교회를 차마 떠날 수가 없어서, 그곳에서 부교역자로 17년을 있었습니다.”

 

그분의 담임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님은 저보다 2살이 더 많아 제가 늘 형님으로 불렀습니다. 비록 연장자이지만, 형님은 한번도 목회에 관하여 터치를 하지 않았고 늘 그림자처럼 묵묵히 섬겨 주셨습니다.”

 

장례식에 갔을 때, 입구에서부터 마주한 <교회 화관과 영정사진의 국화>, 교회 성도들의 섬김과 함께 슬픔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그리스도인의 위로와 돌봄이 얼마나 가치 있고 필요한 것인지를 다시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의 터키에 있는 초대 교회들이 서로 회람할 수 있도록 <베드로 전서>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에서 그는, 그의 친구 바울이 로마서 1213절에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썼던 것과 같이, 그의 글을 읽는 신자들에게 그와 같은 일을 하라고 강권했죠.

 

베드로는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서로 대접하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서로 봉사하라고 말했습니다(베드로전서 4:8-10).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큰 감화를 줍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너무나도 솔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위인들의 위대한 점만을 확대하여 기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인물을 기록함에 누구에게도 치우침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기록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생의 거울이라고 하죠. 거울은 솔직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그대로 보여주고, 추한 것은 추한 그대로 보여 줍니다. 성경은 아브람의 불행하고 힘들었던 순간의 가정의 이야기도 낱낱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볼트윈이라는 사람이 성경 말씀을 읽어보니, 이해가 잘되지 않아서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볼트윈은 나중에 자살하여 죽었습니다. 성경을 우습게 여기다가 오히려 자기 자신이 우습게 되고 말았습니다.

 

볼테르라는 아주 유명한 철학자는 성경을 읽어보고 하는 말이 앞뒤 말이 맞지 않으므로 100년 안에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책이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까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생명력을 부어 주고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40:8)고 하셨죠. 내가 잘 이해되지 않아도 영원한 말씀입니다. 한 시대만 이해되는 말이 아니고, 영원한 것입니다.

 

스코트라는 학자는 죽을 때에 자녀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이제 생의 마지막이 왔는데, 책을 가지고 오너라!’며 자녀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무슨 책을 가져 올까요? 장서에는 3만권이 넘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이때 스코트는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데 과학책이 왜? 필요하겠느냐? 수학책이 왜? 필요하겠느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 와야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3:16)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19:105)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20:32)

 

주님, 가족에게 버림받고,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환경에 좌절하고 가진 것이 모두다 말라 버렸을지라도 샘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게 하소서. 문제에 좌절하지 않고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문제를 보게 하소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오니, 활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절망을 향하여, 어둠의 권세를 잡은 원수를 향하여, 가난을 향하여, 분노와 좌절과 질병을 향하여 활을 쏘게 하소서.

 

버림받은 땅에서, 고독과 슬픔과 역경과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던 거친 들판에서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서 활을 쏘고 말을 달리며 광야를 정복하는 하나님의 씩씩한 용사로 성장하여 그 땅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세상바다 물속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한줄기 밝은 빛이 나에게 비치었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나를 택하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주님 사랑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 솟구치네

이 못난 나를 이 못난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나요

이 못난 나를 이 못난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나요

 

천만번도 죽어야 할 죄인괴수 나였건만

십자가 은총으로 구원의 길 여시었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악한 죄악들을

 

모두 모두 벗기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주님 사랑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 솟구치네

이 못난 나를 이 죄인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나요

이 못난 나를 이 죄인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