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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창세기

주은총목사/ 창세기22/ 아버지와 아들의 예배

by 주은총목사 2024. 5. 10.

https://youtu.be/v7_atKoIr04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22장 아버지와 아들의 예배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 들어있는, 중요한 장들이 있음을 종종 봅니다. 마태복음 5장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있는 장이요, 마태복음 24장은 종말장입니다.성령장은 로마서 8이요, 믿음장은 히브리서11이요, 사랑장은 고린도전서 13이요,

 

은사나, 교회나, 이단이나, 모든 교리적이고, 핵심적인 가르침이 있는 장들이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창세기 22장도 빼놓을 수 없는 장입니다. 창세기 22장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성경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22장은, 유명한 장입니다. 이 창세기 22장은,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한 절, 한 절이 의미하는 바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지 그 하일라이트가 나와 있습니다. 바로, 신앙의 깊이죠.

 

결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결혼생활은 다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장사도, 사업도 누구나 하지만... 누구나 그 일에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이죠. 믿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겠지만 믿음의 생활 즉 신앙생활에 있어서 누구나 다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성공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은 1) 목적이 뚜렷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느냐? 누구를 믿느냐? 왜 믿느냐?

 

2) 문제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 났느냐?

어떻게 할 것이냐?

 

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확신에 찬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느냐?

그 약속을 믿고 있느냐? 그 약속을 따라 사느냐?

 

오늘 본문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백 살에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명령이 임했죠. 그는 청천벽력같은 이 명령에 주저하거나 반항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순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합니다.

 

먼저, 창세기 221-2절을 읽어 볼까요?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번제란 메시야가 오기전, 구약시대에 동물을 잡아 쪼개어 나무 위에 올려 놓고 불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던 예배행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엔 그 번제물이 바로 짐승이 아닌 그 아들 이삭이었습니다.

 

어떤 이삭인가요? 어떻게 낳은 자식이죠? 100살에 겨우 얻은 사랑하는 아들, 독자였습니다. 이삭 곧 웃음이었죠. 그 아들을 번제물로 태워서 바치라는 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건 75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토착 종교가 삶의 전부였던 그가 차원이 다른 신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 75년동안 갈대아우르 지역에서 다양한 종교적 제사를 보고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어쩌면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낯설게만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인신제사를 요구하는 일은 그 당시 이방 종교에서 종종 일어났던 일이었기 때문이죠. '어느 집 아들이, 뉘집 딸이 그런 일을 당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75년을 살면서 여러 차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있을 법한 일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들을 바쳐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을까요? 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추오의 흔들림이나 번민, 갈등이 없었죠. 과연,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미 수없이 경험했기에, 그는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시를 따랐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을 결코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의 전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로 평생을 살아 왔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그의 조카 롯도 함께 갔다.'(12: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단을 쌓았죠.(12:7-8).

 

그는 어디를 가던지, 언제든지, 누구와 함께 있던지,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피곤해도,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들을 핑계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단을 쌓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났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일가 친척간에 관계마저도 다 끊어지고 말았죠. 많은 어려움과 핍박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처럼 예배자로 살기 위해서는 버릴 것은 버리고 떠날 곳을 떠나야 하죠. 하나님께 헌신하는 첫 번째 단계는 버릴 것을 버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4:22)

 

예배는 나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시간과 정성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행위입니다. 성경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이니라.'(12:1)고 했죠.

 

우리 몸을 우리 자신의 뜻에 따라 사용하게 되면, 죄의 지배를 받아 죄를 짓게 됩니다.그러나, 우리 몸을 하나님께 맡겨 그 뜻을 따르게 되면, ()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요, 대화요, 축복의 길이요, 또한 나를 드리는 하나님께 헌신과 봉헌의 길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귀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예배가 중단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말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를 목숨처럼 생각하죠. 어떤 때는 적군이 안식일에 쳐들어 왔습니다. 적이 공격하는데도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고 몰살되기까지 예배는 계속되었죠. 이스라엘은 특별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인정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성수를 한다고 하면,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그 시간들을 침범하고 방해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배를 목숨 걸고 하였죠. 박해 시에 신자들은 경찰이 예배 장소를 알고 있으며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를 중단하지 않고 약속한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이제 이 예배는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죠. 이렇게 그들은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호흡을 하는 그 죽음이 임박한 임종의 순간이...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드릴 마지막 빛나고 찬란한 예배이기를 간절히 축복을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곧 나의 죄성의 죽음을 의미하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곧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죄악 된 인간의 모든 것은 거기서 끝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죠.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다시 한번, 창세기 221절을 읽어 볼까요?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 일이 어떠한 일인가요? 평상시에 아브라함이 하던 것이 무엇인가요? 바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2133절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고달픈 나그네로 살던 아브라함의 생애 중에 참으로 조용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순간을 지냈던 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곳 브엘세바는 헤브론 서남 45Km 지점 예루살렘 서남 7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도 빌 에스 세바(Bir-es-seba)란 옛 이름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은 아브라함이 블레셋 사람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맹세를 하고, 우물을 안전하게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브엘세바 곧 맹세의 우물혹은 일곱 우물이란 뜻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두, 아브라함이 예배를 드리니까, 하나님의 힘이 함께 하시니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와서 이렇게 말하였죠.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1:22)

 

지금도 그 일곱 우물 중에 다섯 우물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고 보면, 정말 사막에서 솟은 우물()의 역사는 대단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거기 브엘세바의 맑은 샘물 곁에 에셀 나무’(아프리카의 흔한 석류)를 심고, 그 그늘 아래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100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의 성장을 즐겼습니다. 그가 75세 때 고향과 아비와 친척을 떠났고, 25년간의 파란의 여로를 지나, 100세 때 하나님의 불변하신 약속대로 이삭을 받은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로 인한 가정의 불화도 조용해졌고, 우물로 인하여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웃 부족간의 불화도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과 브엘세바의 맹세를 통하여 잔잔하여졌을 때였습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웃음이 찾아오고 평안하여졌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의 우물가에 에셀나무의 짙은 그늘 아래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의 성장을 만끽하면서 부자가 함께 영생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행복의 나날을 꽃피웠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명령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소중한 아들을 얻었죠. 그러니 그 아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이삭이 눈에 더 아른거렸죠. 아브라함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는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온갖 정성을 아들에게만 바치게 되었죠.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대해서는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어쩌다 생각이 나면 드리는 형식적으로 예배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제일로 섬길 것인지, 아니면 이삭만 의지하고 살 것인지? 만일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였죠.

 

그러나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너무나 황당한 명령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말같지도 않은 그 명령에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과 둘이서 걸어 가면서, 나무를 아들 등에 딱 지워주죠. 곧 태워 죽일 아들에게, 장작을 메게 한다는 것은, 애비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담담하게 말을 합니다.

 

이 나무는 니가 져라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순종의 꽃

믿음으로 피어나는 꽃 헌신으로 피어나는 꽃

주의 향기 입술에 담고 겸손하게 피어나리라

주의 말씀따라 피어나는 꽃

주를 바라보며 피어나는 꽃

주의 사랑 가슴에 담고 겸손하게 피어나리라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주님과 함께 나는 가리라

목말라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생명수 통로가 되리라

때로는 힘들고 괴로울때면

십자가를 바라보며 가리라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으로

주의 향기 전하게 하소서

 

모리아 땅에 있는 하나님의 산으로 가고 있을 때에, 이삭은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칼과 불씨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은, 자기가 제물이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자기가 제물이 되리라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묻는 아들을 보니,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마음속 깊이 저며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을 합니다.

 

8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

 

아브라함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들을 나무위에 올려놓고, 손과 발을 결박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섬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주의 명령이나 지시가, 자신에게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일일지라도, 그 지시를 따를 수 있는 믿음으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9/10)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22:9-10)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것은 하나님 계시에 의한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17절로 19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제물이 된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아들 이삭의 행동입니다. 그 아들 이삭을 보십시오. 죽기까지 순종한 믿음입니다. 그는 아비에게 반항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 오릅니다.

 

기도하는 주의 종들은 흔히 보죠. 담임 목회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가 거북해서 동네방네, 다른 교회 목사님께 전화를 하고 찾아가서 상담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미쳤다고. 나이가 들더니 노망이 났다고. 아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냐교?” 씩씩 거립니다. 그리고는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잘못되었고 심지어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난리죠.

 

그리고는 다른 목사님들께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맞짱구를 받은 성도는 목사님께 전화를 드리죠. “목사님께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상당히 영적인 사람입니다. 목사님만 영적인 것이 아니에요하면서 교회를 나가 버리죠.

 

이삭 역시, 이놈의 노인네가 100살이 넘더니, 미쳐서 자식도 보이지 않고 칼을 들이대다니. 제대로 미쳤구나. 하고 아버지께 대들지도, 아버지의 칼을 든 손을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죽었죠.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완전 믿음, 완전 순종으로 제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아브라함, 그런 이삭과 같은 성도를 가진 교회는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어 드립니다.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게 되죠. 그때야 비로소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예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의 제물 행위를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자식을 말씀과 성경의 끈으로 결박을 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붉은 구속의 줄로 영적인 자식의 인격과 영혼을 결박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이 있어야 하죠. 그 결박한 자식을 제단 위에, 곧 십자가 위에, 교회 안에 올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자식을 하나님 앞에 말씀의 검으로 쪼갤 줄 알아야 합니다.그런 힘이 있어야 합니다.그런 부모가 바른 신앙인입니다. 부모가 믿음으로 자식을 결박하지 못하고 단에 올려 놓지 못하고 검을 가지고 쪼개지 못할 때는 벌써 부모일 수 없고, 그 자식은 사단에게 묶여 끌려 가고 마는 것입니다. 부권 상실의 비극입니다. 영권상실의 비극이죠.

 

자식은 말씀과 성령의 줄에 결박을 당할 줄 알아야 되고, 제단에 올려놓음이 되어야 하고, 말씀의 검에 쪼개어 질 줄 알아야 진정한 웃음, 곧 이삭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 산 제사,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유월절

지극히 높은 주님의-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세상의 신을 벗고서-주 보좌앞에 엎드리리

내 주를 향한 사랑과-그 신뢰 가사 그러져 갈때

하늘로부터 이곳에-장막이 덮이네-

*

이곳을 덮으소서-이곳을 비추소서-

내 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이곳을 지나소서-이곳을 만지소서-

내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어거스틴의 자서전 고백록은 예수님을 향한 그의 길고 험했던 여정을 담고 있죠.

 

한 번은 황제에게 아첨하는 연설을 하기 위해 말을 타고 왕궁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준비한 가식적인 칭송의 문구들을 가지고 고심하던 그는 한 술 취한 거지가 농담을 지껄이며 웃어대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를 바라보며 자신이 이런 떳떳치 못한 일을 해서라도 얻으려 했던 것이 덧 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세상적인 성공을 위한 노력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욕망의 노예였습니다. 자신이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는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음행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에게 순결을 주십시오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정욕에 넘어짐을 반복하는 어느 날, 그는 로마서 13:13-14을 폈습니다.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을 사용하셔서 어거스틴의 정욕의 사슬을 끊고 그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게”(골로새서 1:13-14) 하셨죠. 주교가 된 어거스틴에게 명성과 정욕의 유혹이 여전히 따라다녔지만,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엇이 당신의 삶을 예수님께 돌이키는 것을 방해하고 있나요?

 

오늘 양찬희 권사님께서 찬송을 올려드리는 시간에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를 불렀습니다. 그중에 찬송가 가사 3절이 마음에 유독 와닿았습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한량없이 자비하신 측량할길 없도다

천사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구속하신 그사랑을 항상 찬송합니다

 

주의 크신 도움받아 이때까지 왔으니 이와 같이 천국에도 이르기를 바라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에 빠진 우리를 예수 구원하시려고 보혈흘려주셨네

 

주의 귀한 은혜받고 일생 빚진자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

 

나에게 있는 육적인 쾌락, 육신의 정욕들이 과연 묶이웠는가? 나의 인간적인 생각들이 살아있고, 혈기가 살아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마음들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좋아하고 끌리는 마음을 십자가에 단단히 묶어 버렸는가? 하나님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 자기를 완전히 결박하였는가?

 

연약한 육신을 하나님께 맡겨라!

 

나 자신을 믿은 나머지 내 뜻에 따라 내 몸을 사용하려 할 경우, 죄의 유혹을 받아 죄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죠. 주의 품을 벗어난 영혼은 언제든지 우는 사자 돌아다니는 사탄의 밥이 될 위험이 놓여 있죠. 죄의 지배를 받아, 점점 의 명령은 점점 듣기 거북하고 싫어집니다. 주의 명령과 그 지시를 따르기보다는, 죄의 지시에 순종합니다. ‘,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몸이 망가져서 쓸 수 없을 때까지,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우리 자신의 뜻에 따라 사용하게 되면, 죄의 지배를 받아 죄를 짓게 됩니다. 나중에는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게 됨은 물론, 그 인생이 완전히 파멸될 때까지, 악의 도구가 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죠. 그러나, 우리 몸을 하나님께 맡겨 그 뜻을 따르게 되면, ()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잠시 동안 하나님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기다리지 않고, 애굽으로 도망감은 물론, 자신의 고집대로 밀어 붙였던 적도 있습니다. 그 결과, 가정불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나중에는 민족간의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 때에, 그토록 무서운 결과가 나타날 줄은, 아브라함도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로마서 616절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섬길 주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은 죄를 주인으로 섬겨 죽음을 부를 수도 있고,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바치는, 바로 그 대상이 여러분의 주인이고, 여러분은 그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21절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니, 주님의 은혜로 거룩해지고 영생을 얻게 되었노라, 바울은 고백하죠.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말은, 그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은 그 주인의 지시를 결코 거스르지 못합니다.

 

이 제사(예배)는 장소가 <하나님에 의하여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죠. 그 산은 모리아땅에 있는 산이라고 하였습니다(22:2 = 역대하3:1). 이렇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이 지시한 장소, 하나님이 구별시킨 장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죠.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은 아무데나 가서 번제로 헌신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이 먼저 가고, 하나님은 뒤따라 오라 하는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앞서 가셔서 먼저 장막을 치신 곳을 따라가나요?

 

아브라함은 히브리 사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점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살았더니, 복이 되더라!’하는 경험이, 확신으로 굳어졌습니다.

 

지금 당장에는 아들을 잡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지극히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인도하시고 모든 일에 유익을 주시던 하나님이 결코 자신에게 손해를 주시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그는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생각하였습니다.”

 

대단한 믿음이었던 것이죠. 아브라함의 결단에, 하나님도 얼마나 놀랬는지 6천년이 지나도 잊지를 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대하 716절에서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라고 하셨죠. 그만큼 하나님 자신도 충격적이었죠. 인간이...그것도 아버지가 아들을 번제로 받칠 수가 있다니.

 

하나님은 너무나 놀래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헌신과 결단을 그토록 오랜 세월을 기억하셨죠. 세월이 한참 흘러서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권력과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행하였습니다.

 

죄의 대가는 참혹했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역에 전염병을 내려 백성 7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윗은 회개를 했고, 여호와의 사자가 멈추어 섰던 곳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던 그 자리 모리아산이었습니다.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서 그 자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되어 있었던 곳이죠. 또한, 바로 이 자리에서...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였습니다.(역대하 31)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나무를 어깨에 매게 하였습니다. 이삭은 자기가 짊어진 그 나무 위에 쪼개어져서 불태움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예수께서 자기가 달려 돌아가실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시던 최후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니 이삭의 이 모습은 바로 세상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올라가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거룩한 예언의 그림자입니다.

 

인간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조차 기꺼이 바치시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금, 당신의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1순위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인가요? 아니면, 돈 걱정인가요? 자식의 시중을 드는 건가요? 아니면 정욕에 끌려다니는 육체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서 주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내려놓고 주의 일을 하겠다고 찾아다니고 있나요?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1순위가 아니고 다른 것이 당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번제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십시오. 그제서야 하나님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세기 22:12)

 

그리고는 축복을 하셨습니다.

 

“16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하나님, 당신이 아닌 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있다면 번제로, 희생의 제사로 불태워 올려 드리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네가 참으로 큰 희생을 하였구나. 큰 헌신을 하였구나. 큰 결단을 하였구나하는 하나님의 감동이 있게 하시어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다라는 하나님의 고백을 듣게 하소서. 여호와 이레로 준비되게 하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아멘

 

벙어리가 되어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지난날의 잘못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지난날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주여 나의 죄를 위하여

주여 주여 십자가를 지셨네.

주님 가신 그 길을 나도 걸어야 하네.

주님 가신 그 길을 나도 걸어야 하네.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지난날의 잘못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지난날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주여 나의 죄를 위하여

주여 주여 십자가를 지셨네.

나의 생명 다하여 주를 위해 살리라.

벙어리가 되어도 찬양하며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