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창20/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본문: 창19:30~38
신앙의 유산
위기를 극복한 부부
탈무드에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혼한 지 십 년이 지난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슬이 좋은 부부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남편이 랍비를 찾아와 이혼을 허가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왜 이혼을 원하게 되었는지 남편에게 조용히 물어 보았죠. 알고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해 남편의 가족들이 이혼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결혼하고 십 년이 넘도록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남자는 이혼을 해 달라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남자는 랍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사실은 이혼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를 위하여 성대한 파티를 열도록 하세요. 그리고 초청한 사람들에게 아내가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자랑스럽게 말하세요.”
랍비의 말을 들은 남편은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싫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꼭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죠.
랍비는 이번엔 남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내와 헤어질 때 어떤 선물을 주고 싶나요?”
남편은 아내가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것을 선물로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아내를 불러 남편이 선물을 주고 싶어 한다는 걸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꼭 갖고 싶은 선물 한 가지를 생각해 두라고 일러주었죠.
마침내 파티가 열렸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물었죠.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당신이 가장 갖고 싶은 것을 하나만 말하시오. 그것이 무엇이든 선물로 주겠소.”
아내는 그 자리에서 가장 갖고 싶은 것 한 가지는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남편은 물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감동이 되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혼을 취소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들에게 아기가 둘이나 태어났다고 합니다.
참된 자유
불평불만과 환멸 모두 사라져 없고 보람된 생활이 오겠네. /구주 예수 믿어 그의 뒤 따라가면 참된 자유 평화 얻겠네. /참된 자유 참된 평화 나는 이것 위해 살겠네. /구주 예수를 믿어 그의 뒤 따라가면 참된 자유 평화 얻겠네.//
롯의 처를 생각하라.
오늘 성경 본문에도 어느 한 부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롯과 그의 처죠. 오죽하면, 예수님이 누가복음 17:32에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대체, 왜????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에 마음 빼앗긴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하여 경고하셨죠.
롯의 아내는 하나님이 버린 것, 유황불로 태울 것 즉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무의미한 것에 마음이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소돔성은 너무나 튼튼하고 아름다운 도성이었습니다. 멸망당할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죠. 어제와 똑같이 향락과 영화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천사가 일러준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에 반신반의하였죠. 그녀의 눈은 영적으로는 완전 장님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성이 망할까?" 하고 의심하면서 뒤를 돌아본 것이죠.
롯의 처는 말씀의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뒤를 바라보는 행위는, 그녀의 영혼이 잘못된 감정으로, 그녀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소돔성의 음란한 사람들과 함께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러한 마음과 함께 영원히 붙박이가 되어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소금기둥이 되어.
당신은 세상사람들이 멸망할 때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를 원하십니까?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바로 되돌아 가는 것이고, 옛 생활로 되돌아 가는 것은 결국 멸망을 초래하고야 맙니다.
또한 그녀는 두고 온 재산 걱정, 자기의 포도밭과 집과 애써 모은 살림들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고자 뒤돌아 보았죠. 그녀는 썩어질 세상 것들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으며, 온 마음이 거기에 메여 있었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죠.
예수님은 (눅9: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유익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롯이 사랑했던 소돔과 같은 성이 있습니다. 못내 떠나기 아쉬운 옛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로부터 떠나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마음이 온통 물질에 빼앗기고 불륜과 이성에 복잡한 인간관계에 얽혀 뒤돌아보며 뒤돌아 가는 자는 멸망할 것입니다. 지금도 그릇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경고 하십니다.
여성들은 뱀을 싫어하죠. 근데 창세기에서 뱀이 하와에게 접근을 했을 때, 하와는 뱀을 거부를 안하였습니다. 아마도 겉은 거부감이 없을 정도로 잘 생겼으니까요. 그러나 속은 야비하고 비열했죠. 겉은 아름다운 배우를 뺨치게 닮은 호감형의 사람이지만, 그 속은 여자들을 건들며 돈을 뜯어 내는 뱀도 있고.
또. 꽃처럼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로 남자를 홀리고, 뱀처럼 교활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여성을 묘사하는 표현의 꽃뱀도 있습니다. 달콤한 말과 애교, 적절한 신체적 접촉 등을 통해 남성의 호감을 얻고, 자신의 의도대로 조종하죠. 꽃뱀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활하고 거짓말에 능숙합니다.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꾸며내거나, 남성의 연민을 자극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남성을 속이죠.
성적인 유혹과 타락에는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무절제한 쾌락은 인간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죄악의 늪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합니다. 타락과 쾌락의 시대, 어쩌면 당신이 서 있는 환경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너만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나라!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명령하시죠.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죄악된 생활을 그리워하며 뒤돌아 보는 이에게는 죽음이 따릅니다. 주저하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죠.
롯의 아내는 화려하게 살았던 그 도시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달아나던 여자는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봤죠. 당신은 소돔과 고모라에 무엇이 남아 있기에 뒤를 돌아보고, 미련을 두고 마음 아파하고 아쉬워 하나요?
“롯의 처를 생각하라” '믿음이 없는자여 왜 주저하느냐" “세상 재물 불 탈때에 너도 타겠구나”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 오시나요?
1.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 값으로 지옥 형벌 너도 받겠구나
2. 웬일인가 내 형제여 마귀만 좇다가
저 마귀들 지옥갈 때 너도 가겠구나
3. 웬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건 불 탈때에 너도 타겠구나
4.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죄악에 매여서
한없이 고생하는 것 참 못 보겠구나
5. 여보시오 내 동포여 주께로 오시오
십자가에 못박힌 주 너를 사랑하네
세상의 향락을 사랑한 롯.(30-38)
롯은 하나님의 은혜로 소알에 거하게 되었지만 소알에 사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두 딸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동굴 속에서 살았습니다. 좋던 도시 문화생활의 꿈은 다 깨어지고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자연인‘이 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산 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죠. 충격때문이었습니다.
롯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죠. 신앙보다 풍요로운 물질과 육신적인 즐거움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애써 모은 집과 재산이 삽시간에 불탔죠. 사위들도 불탔습니다.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딸은 청산 과부가 되었습니다. 동굴 신세가 되었습니다.
정신적 충격이 매우 커서 소알에서는 살지도 못하고 산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롯은 동굴 생활을 하면서 술을 많이 마신 것을 보면 그 심령이 너무 괴롭고 비참하였기 때문입니다. 대개, 아내가 먼저 떠난 경우 남자들은 신앙이 없는 경우에는 술에 쪄들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옆에서 누가 술을 절제하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없고, 술에 의해 삼켜지면서 건강도 육체도 희망도 잃고 죽음의 수렁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죠.
롯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롯은 깨달아야 할 것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움도 알지 못했고, 그 재앙이 '죄' 때문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악한 것에 미련을 버려야 함을 알지 못했죠.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 나올때도, 롯은 지체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누구보다도, 결단력이 있어야 할 가장이, 리더자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체하고 있습니까??
왜 미적거리고만 있냐는 것입니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이 죽고, 교회가 죽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습니다. 오죽했으면, 천사들이 강제로 잡아 끌어냈을까요?(16)
롯은 천사들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두 딸을 소돔 성 사람들에게 내어 주며 보기 좋은 대로 마음껏 성적 죄를 짓도록 허락한 것은 롯이 그 환경에 물들고 자녀들도 물들어 있음을 보여 주죠. 그렇게 천사가 계속 재촉하는데도 머뭇거리고 지체하는 것도 자녀들이 보았습니다.
소돔에 살게 된 롯도 고민이 많이 있었겠죠. 어릴 적부터 배웠고, 알아왔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는 싶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죄의 개념부터 달라진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브라함을 따라오며 배워온 하나님을 포기할 수도 없고, 반대로 세상을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 재미와 편안함과 짜릿함을 놓치고 싶지도 않았죠. 고민하며 양다리 걸치는 롯!
사위 앞에서도, 딸 앞에서도, 아내 앞에서도 무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을 지배하지는, 죄를 놓치는 못합니다.
늘 마음에는 고민을 하지만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경건함과 거룩함도 알고, 헌신과 봉사, 사명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추구하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자신 역시 놓치고 싶지도 않았죠.
가장의 신앙이 바로 서 있지 못하니, 롯의 사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창19;14) 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요? 그 사위들이 워낙 악한 사람들이라서... 아닙니다. 비록 사위들이 악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평소에 롯이 거룩함과 권위를 잃지 않았다면 움찔 했을 것입니다. 롯은 가정을 신앙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롯과 두 딸은 하나님의 심판을 엉뚱한 방향으로 받아들이죠.
롯은 끝까지 아브라함에게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두 딸과 함께 산에 있는 굴로 갑니다. 롯의 어리석은 선택은 딸들까지도 어리석게 만든 원인을 제공하죠. 롯의 딸들은 아버지와 굴에 살면서 "온 세상의 도리(관습)를 따라" 자신들과 결혼할 남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짓게 됩니다. 롯의 두 딸들은 어려서부터 결국 하나님도 경악한 음란과 죄악의 땅 소돔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렘2:24)
처음에는 낯설어 거부하던 것들이 자꾸 보고 듣게 되면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지게 마련이죠. 인간은 외부의 압력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타인의 영향을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받게 됩니다.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행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생각 없이 남들의 행동을 모방하거나 비슷해집니다. 롯의 딸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적인 음란성에 물들어 있었던 거죠. 죄악의 환경에서 살면서 영혼이 병들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아버지 롯에게 술을 먹이고 근친상간을 하게 됩니다.
너무 멀리 왔나요 주님께 돌아가기엔
사랑의 주님 그 품을 떠나
내 영혼 잃어버린 지금
너무 늦은 건가요 내 영혼 회복 하기엔
수 많은 죄악 속에 갇혀서
주님을 잃어버린 지금
하지만 내 영혼 주님 기다려요
변함 없는 주님의 사랑을
내 모습 이대로 주께 돌아가요
나의 손을 잡아 주소서
다시 주님의 얼굴 내 영혼 볼 수 있도록
나를 구원 하소서
다시 주의 임재 가운데 내 영혼 살 수 있도록
아브라함의 태도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하늘에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쏟아 그 온 성과 들에 사는 모든 사람과 땅에 자라는 모든 것을 완전히 멸하셨죠. 더러운 정욕의 노예가 된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경(經)히 여기고 농담으로 여기던 사위들까지도 다 엎어 멸하셨습니다.
싯딤 골짜기는 농업이 발달한 기름진 땅을 말합니다. 싯딤이라는 말은 “cultivated fields” 기름진 땅, 농경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기름진 땅을 다 엎으시고 지금의 사해(Dead Sea)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기름진 땅은 온대 간대 없고 사해(死海)- 죽음의 바다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사해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수심이 낮은 곳이요 풀 하나, 물고기 한 마리 살 수 없는 저주스런 곳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의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창19:27-28)
‘그 아침’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다고 약속된 그 날 아침입니다.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섰던 곳으로 달려갑니다. 천사들을 전송하려고 갔던 곳입니다. 그곳은 사해바다와 요단들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관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확실하게 목도하였습니다. 부지런한 아브라함.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오늘은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이루어질지, 가슴을 두근거리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묻혀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롯의 사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농담으로 여겼으나, 롯과 그의 처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으나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묵상하고, 하나님이 이루어나가시는 일들에 대해, /기대하고, /확인하고, /소망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자기 방언이 마귀 방언인지 하나님의 방언이 맞는지’물어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 것을 들어보면,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 맞거든요.
저 역시 오래 전에, 동기 목사님이 ‘지식’으로만 하나님을 만난 터라, 저를 툭툭치며 “주목사, 그런 이상한 말을 하면 안돼. 하나님이 귀가 먹었나. 그렇게 기도를 하지마.”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라도 방언을 경험하지 못하였으면, 능히 그러고도 남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오래전에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님이 쓰신 책가운데 이러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장로교쪽이라 방언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자기 와이프가 대천덕 신부에게 기도를 받는 그 순간에, 그녀의 입에서 ‘방언’이 튀어 나와서 자기가 ‘성령의 방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저희 교회 쪽으로 이사를 와서 같이 있었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남편은 늦게 회심을 하여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을 하셨는데, 지방회 목사님들이 그분을 불러서 “방언을 하지 말라”라고 대놓고 주문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늦게 만난 주님이 좋아서 길을 걸어가도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잠을 자도 예수를 놓지 않았죠. 그 목사님은 자기는 방언을 안하면 영혼이 곤비하여서 살 수가 없다고 하면서, 침례교쪽으로 가서 다시 신학을 하고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저는 놀래서 “아니, 침례교도 방언해도 된데요?”하고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큰 아들도 침신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죠. 가서 보니, 침례교가 한국에서만 작았지, 미국에서는 제일 큰 교단이라고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성령에 취하죠. 성령에 취하면 전능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고 담대해 집니다. 나의 언어, 나의 말이 아니라, 성령에 사로 잡히면 자기 생각은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의 생각에 가득하게 되죠.
성령의 방언을 받아야만, 기도도 오래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의 자리를 지키지도 못하고 기껏해야 5분 기도하면 끝입니다. 물론 어쩌다가... 아주 어쩌다가... 마음을 잡고 30분은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하는 기도는 다른 사람들... 다 기도를 할 적에 자기는 ‘꾸벅꾸벅’ 졸고 기도하는 시간들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방언을 하는 것을 막으면, 그 사람은 영혼이 곤고하게 되어... 성령이 운행하고 성령이 살아 있는 곳을 찾아 방황하게 되죠. 그러나 성령으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의 장작개비가 되어 활활 타오르게 되죠. 성령에 취하면 그냥 눈물이 솟고 모든 것이 감사하고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오래참고 인내를 할 수가 있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한 이유는, 아브라함이 자식들과 집안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좇아” 가르치게 하는 것입니다.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런데, 롯을 보면, 롯이 자기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훤히 보입니다. 롯이 사위들에게 말할 때, 이놈들이,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롯의 말에, 권위가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롯의 딸들은 어떠한가요? 아브람함의 자손들은 “여호와의 도를 좇아” 모든 생각과 행실을 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당연히 알고 살았습니다만, 롯의 자식들은 다르죠.
(31)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세상의 도리를 좇아”, 세상의 도를 좇아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여호와의 도를 좇아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소돔과 고모라의 습관과 문화만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식을 낳고, 후손을 번식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아버지를 상대로 자식을 얻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 생각과 판단의 근본적인 자리에, 여호와의 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도를 좇아 판단하고 행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고 답습된 유산이었습니다.
이미 아버지인 롯이 천사들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상관하려고 하는 부랑자들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내 딸들이 있으니 너희들 하기에 좋을 대로 하라”라는 패괴망측한 롯의 태도가 있었습니다.
두 딸들은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일을 두 딸이 먼저 서로 작당하여 아버지와 잠자리를 하고 아이를 낳게 되죠.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는 것이라며 부끄러움 없이 행동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일상적으로 소돔성에서 본 것이었기에 서슴없이 이런 짓을 하는 거죠. 이렇게 하여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큰딸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큰딸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습니다. 모압이라는 말은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이 모압은 후에 모압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습니다. 이 벤암미(내 백성의 아들)는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출발선상은 같았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인생을 시작하고, 하란을 떠날 때부터 나그네의 길, 순례자의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결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끝이 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이 끝날 때까지 등장합니다만, 롯에 관하여는, 여기 말고는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운명을 이렇게 엇갈리게 했을까요?
다른 건 몰라도, 분명한 사실은, 서로 방향이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롯은 ‘보이는 것’을 붙잡고 살려는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에 치중했죠. 보기에 좋은 것만 탐했습니다. 보기에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처럼 풍성한 곳을 택했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만 구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롯의 정체성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지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미련하게 보임입니다.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하지도 못하죠.”(고전2:14)
아브라함을 보면, 참 실수도 많이 하고, 어리석기도 한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가만히 보면, 그가 잊지 않고 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입니다. 항상 어디를 가나, 도착하는 곳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습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브라함은 자신감이 있습니다.“네가 좌하면, 나는 우할 것이요,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할 것이다”남에게 선택권을 먼저 주는 여유가 돋보입니다. 자신감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굶어 죽더라도,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내 노후준비는 안되어 있을지라도, 있는 힘을 다해, 죽을 힘을 다해, ‘개척교회를 돕고, 선교를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기에’ 하나님이 내 노후를 준비하신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좋은 곳을 찾아 간다지만, 하나님은 결국,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지키실 것을 알기에,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는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 하나님은 지금 너만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나라!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는 명령이 들려옴을 느끼게 됩니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 “뒤를 돌아보지 말라” 옛날을 그리워하거나 뒤돌아 보지 말게 하옵소서.
과거에 미련을 두고 마음 아파하고 아쉬워 하지 않게 하옵소서. 자연인으로 산속으로 가서 나만의 동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을 돌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허락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박종호
오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박히신 십자가 앞에그 크신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울며 돌아 옵니다주님 손과 발 못 박혔고 머리엔 가시관 박히셨네내 모든 죄와 허물 위해 말 없이 피 흘려 주셨네오 예수님 나의 손 잡고 이제 부터 영원 까지내 구주가 되옵소서이제 부터 영원 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영성산책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은총목사/ 창세기22/ 아버지와 아들의 예배 (0) | 2024.05.10 |
---|---|
주은총목사/ 창세기 21/ 브엘세바에 있는 당신에게 (0) | 2024.04.23 |
주은총목사/ 창세기 19/ 드디어 하나님의 친구가 된 아브라함 (0) | 2024.04.21 |
주은총목사/ 창세기 18/ 당신은 최후에 웃는 사람! (0) | 2024.04.21 |
주은총목사의 창세기17/ 아둘람굴 그리고 (0) | 2024.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