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창세기 13장 아브람과 롯의 선택
당신의 선택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예전에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었죠.
옛날에 매우 의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아우가 금 덩어리 두 개를 주웠습니다. 마음씨 좋은 아우는 그 중 하나를 형에게 주었죠. 그런데 막상 주고 보니 만약 형이 없었더라면 나 혼자 금 덩어리를 다 차지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회의 마음은 급기야 형을 미워하는 데까지 이르렀죠.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문득 형을 물속에 떠다밀고 금 덩어리를 다시 빼앗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금 덩어리 없이 지낼 때에는 의가 좋았는데 금덩어리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고 심지어 죽이려는 마음까지 들었던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우는 자기의 금 덩어리를 물속에 던져버렸습니다. 의아해 하는 형에게 그 사연을 설명하자 형도 미련 없이 자신의 금덩이를 물에 던졌습니다. 실은 형도 아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금 덩어리도 갖고 형제우애도 살리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사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죠. 물질 때문에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경우를 우리는 허다하게 보게 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는 말씀하죠.
돈 때문에, 가족관에 ‘의’가 상하고, ‘욕심’ 때문에 ‘부모나 형제’가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픈 줄 아는가요?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 가슴 한쪽이 얼마나 아려 오는 지, 그 아픔은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었던들 아브람은 애굽에서 자기 아내와 헤어지는 슬픔을 맛보았거나 아니면 애굽땅에 주저앉아 땅에 속한 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향하신 선택과 구원의 계획은 실패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일은 중대한 위기를 만났던 것이죠.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개입이 있었기에 아브람은 위기 속에서 구출되었고 오히려(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애굽 왕 바로로 부터 많은 은금과 재산을 선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애굽 왕의 통치 영역이 미치는 곳에서는 그 어디서나 아브람은 참으로 두려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는 아브람의 위엄과 안정이 다져져 가는 시기에 오늘 창세기 13장에서는 늘어난 재산문제로 인한 조카와 큰아버지 사이에 내부적인 갈등과 다툼이 발생하였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람과 롯 사이의 분쟁은 슬픈 일이었습니다. 전에 재산이 별로 많지 않았을 때는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유지하고 지키려다 보니까 불화가 생긴 것입니다.
아브람과 롯의 주산업은 목축인데 여기에는 풍부한 초장과 쉴 수 있는 그늘과 물(오아시스)이 확보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육축이 풍부하므로(포화상태) 그들이 거할 곳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더 이상 조카 롯과 동거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죠. 이제 짐승들을 기르는 일에 종종 마찰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마침 가축문제로 아브람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싸운 일이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아브람은 가족회의를 열었고 분가를 건의하게 됩니다.
아브람과 롯의 분쟁은 아브람 개인에게도 큰 위기였지만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도 중대한 위기였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그들의 부요함 가운데 심은 욕심 때문이었죠. 창세기 13장은, 바로 아브람과 롯의 선택입니다.
라이트온워십 찬송가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
진리 위해 억압 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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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빛을 따라 주의 뒤를 좇아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만 향해 가리라
새 시대는 새 의무를 우리에게 주나니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전진 하리 언제나
어떤 부자가 많은 돈을 두고 갈 생각을 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이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다만 ‘얼마라도 가지고 가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죽은 다음에 관 속에 누가 돈을 넣어줄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하다가 세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바로, 목사, 의사, 변호사죠. 이 사람들은 미국 사회의 신망받는 대표적 사람들입니다. 세 사람 중의 하나는 제대로 해주겠지, 하고 세 사람을 불러서 백만 불씩 현금을 주고 “내가 죽은 다음에 장례식날 관에다가 이거 좀 넣어주구려” 했습니다. “그러지요.” 세 사람이 약속을 했습니다.
장례식날 마지막 헌화 후에 정말 세 사람은 거기다가 돈을 넣었습니다.
미국 에서는 관이 반은 열려있고 상체가 나와있거든요. 뚜껑을 닫아서 장례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목사님이 좀 마음이 괴롭다고 참회를 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십일조를 뗐거든요...”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는 말하기를 “나는 지금 병원을 짓다가 돈이 모자라서 고인이 기왕에 좋은 일 하시라고 50만 불을 뗐습니다.”
그랬더니 변호사가 펄쩍뛰면서 “아니, 그게 어떤 유언이고 어떤 돈인데 그걸 뗍니까. 나는 전액을 다 관에다 넣었소. 현금은 내가 가지고 자기앞수표를 써서 딱 넣었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를 못합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이냐? vs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vs 돈이냐? 하나님이냐? vs 육적인 것이냐를 선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이란 어쨌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게 인간의 특징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내 운명을 내가 선택합니다. 거기에 중요한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사느냐,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사느냐, 그에 따른 운명을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정해야 하죠. 인간관계가 소중한지 물질이 더 소중한지. 함께 머나 먼 이국땅까지 왔고 애굽에서 함께 고생도 겪었습니다. 문제는 재산이 늘어나면서 생겼죠. 이 위기에서 아브람은 인간관계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롯에게 독립을 허락하며 좋은 땅을 양보하였죠.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아브람은 선택권을 롯에게 넘기자 롯은 요단 들을 바라보니 소알까지 온 땅이 기름지고 풍부한 것을 보았습니다. 롯이 그 땅을 보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얼마나 기름진 땅이었으면 그렇게 표현을 하였을까요?
이 땅의 것에 미련을 둔 사람 롯은 물질의 풍부한 때문에 삼촌 아브람의 하나님을 향한 경건함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물질의 풍요를 위하여 죄악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도 개의치 않고(13절)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롯이 미처 계산치 못한 것을 볼 수가 있죠. 그것은 바로 아브람과 헤어지는 것은 아브람의 하나님과 헤어지는 위험한 사실을 몰랐던 것이죠.
롯의 선택이 가시적이고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택에 앞서 중요한 기도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아브람(4)과는 대조적으로 롯은 중대한 결정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보거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롯의 생애에 없는 세 가지 단어들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 / 기도 / 순종입니다.
미래의 방향이 잡힐 수 있는 그 중요한 순간에 이상하게도 롯은 기도하지 않았죠. 그냥 선택해 버립니다. 어쩌면 자신의 지혜나 지식, 삶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 유혹하는 바벨론 음녀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했는지도 모릅니다.
천사들은 롯에게 도망치라고 경고합니다. 롯은 그의 친척들에게 경고합니다.
이 세상은 언젠가는 불에 타 없어질 것이며, 오직 이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그가 축적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두 천사가 소돔성을 멸망시키는 순간에도 롯은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천사들은 분명히 속히 도망하라고 하는데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속히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는데도 산이 아니라 가까운 성으로 일단 피하겠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롯의 일생에 기도도, 순종도, 믿음의 흔적도 보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롯은 소돔 사람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써 그의 의로운 심령이 상해갔습니다. 8(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
롯이 진정으로 자신과 가족들의 영적 상태를 염려했다면 진작에 소돔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고통을 당하면서도, 심령이 상해가면서도 계속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신앙인이 어떻게 다른지 결단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의 가족도 믿음의 길을 가지 않았죠. 그의 두 사위는 천사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소돔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겁니다. 소돔이라는 환경에서 그녀의 영혼 또한 완전히 시들어 버렸고, 완전히 세속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그는 그의 재산이 연기와 재 가운데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게 되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는 두 딸과의 사이의 근친상간에서 모암, 암몬 이라는 두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게 되죠.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신23:3-6). 롯은 아브람과 믿음의 길을 함께 출발했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의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이슬 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사랑의 빛 잃어가면 주님 만날 수 없어
헛된 영화 바라보면 사랑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큰 물결이 뛰놀아도 주를 더 찬양하는가
큰 환난이 닥쳐와도 주를 더 찬양하는가
깊은 잠에 빠진 영혼 주님 만날 수 없어
근심 걱정 많은 자는 찬양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찬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언제 다시 주 오실지 아는 이가 있는가
신랑으로 오실 주님 맞을 준비 되었는가
기름 없는 등불 들면 주님 만날 수 없어
재림 나팔 소리 나면 예비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맞을 준비함이 금보다도 귀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통하여 롯을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게 하시려는데 왜 롯은 끝까지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불행의 구덩이에 빠졌을까요?
롯은 영적인 눈이 아닌 육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고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철저히 돈으로 평가하였죠. 경제적으로 조금 더 나은 이득을 추구하기 위하여 믿음의 길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영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잇속만 생각했죠. 그의 소망을 하늘에 두기보다 땅의 소망에 두었습니다.
10절에 보면 “바라본즉...” 이라고 했습니다. 보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본다는 것,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롯은 화려함을 보는 것, 외형을, 겉을 바라보았죠. 신앙도 마음 밖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 위에 믿음을 두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시 실수 할 수 있는 인간이었죠. 하지만 롯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롯과 같이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은 예배가 없이도 세상을 잘 살아갑니다. 그래서 롯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에 대한 순종보다도 이기적 욕망을 성취하고자 세상 물질을 더 추구하였습니다.
당시 아브람이 살던 땅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경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불신자들과 항상 구별된 표를 나타내 보이며 살았습니다. 사실은 이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불신자들 가운데서 신자인 것을 드러내며 산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위기를 겪으며 아브람의 신앙과 인격은 더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은 시간 속에 살면서도, 마음으로는 영원한 가치에 따라 성공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롯은 마치 시간이 전부이며 영원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시간 속에서만 살았던 사람입니다.
시간이란 영원 속의 하나의 간격에 불과합니다. 영원이란 시간이 있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시간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끝이 난다 하더라도 영원은 계속될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롯의 실패의 근원은 물질적인 가치에 대한 사랑과 집착에서 발견될 수가 있습니다. 롯은 마치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았죠.
어떤 사람에게서 삶의 실패는 알콜중독, 성중독, 관계중독에 있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게으름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실패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현재를 위해서만 살기 때문에 일어나죠.
그러기에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얻을 수 있는 ‘평안과 만족’을 잃어버렸죠.
롯이 선택한 것의 결과는 참된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격은 나약하게 되었고, 들에서 거하다가 성읍으로 옮겨 가 소돔 사람들과 동거하게 되었죠. 심령은 계속해서 상하며 사악한 환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택을 잘못했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돌이키지를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자신이 오히려 그쪽으로 변화되고 있었습니다. 죄악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더러운 이 그릇을 주님 쓰시려고
내 이름 불러 주시니
이 여인 은혜인가 되지 못하고
된 줄 알다가 쓰러진 이 몸은
빈 손들고 십자가 앞에 무릎꿇었사오니
오 내 주님 이 마음에 좌정하여 주소서
더럽고 추한 그룻이 깨끗함을 입어서
성전의 기물이 되니 이 여인 은혜인가
세상을 따라 방황하다가 실패한 이 몸은
두 손 들고 주님 우러러 못자욱을 만지오니
오 내 주님 나 죽도록 충성하게 하소서
나 무엇 주님 드려야 기뻐하시리까
나 무엇 주께 드려서 이 은혜 갚으리오
넘쳐나도록 복을 주시고 사랑하신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 것으로 살아가겠사오니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내 이름도 부르소서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내 이름도 부르소서
탈무드에 이런 속담이 있죠. 물질보다 영원한 것은 우정이요 사랑이요 인간관계이다. 유태인들은 물질은 장례식장까지만 함께하고, 인간관계는 천국 문 앞에까지 이르고, 선행은 하나님 앞에까지 이른다.
롯은 현실과 장래의 문제에 직면하여 선뜻 자신의 욕심을 앞세운 선택을 하였지만 아브람은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약속을 믿었기에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환경과는 관계없이 그의 은혜 안에 ‘감사’하였습니다.
위기를 겪으며 아브람의 신앙과 인격은 더 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관계나 신앙보다는 물질을 택하였습니다. 롯은 욕심을 따라 좋은 땅을 택하였지만, 아브람을 떠난 것은 신앙을 떠난 것을 의미하였고 절대적인 지지자 하나님을 뺀 알맹이가 쏙 빠진 쭉정이를 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개척교회를 위해 물질을 보내고 선교지에 선교헌금을 보낸다는 것은 당신의 삶속에 하나님을 1순위로 둔다는 의미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수고와 헌신을 마다하지 않고 힘들게 돈을 벌어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흘려 보내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하여 세상 구속을 이루실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재산이 없이는 도무지 생명을 부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시대 상황에 부합하도록 그에게 많은 재산을 허락하시고 아브람의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또한 조카 롯과의 불화로부터 건져내시고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늘에 소망을 두게 하시고 참된 경건으로 조카에게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게 하셨죠. 조카 롯과의 불화로부터 건져내시고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늘에 소망을 두게 하시고 참된 경건으로 조카에게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게 하셨죠.
아브람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예화처럼 금덩어리를 버렸습니다. 재산문제를 버렸죠. 그리고 우애를 택하였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4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25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26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28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욥22:24-28)
그러나 이제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의지할 만한 모든 것을 거둬가신 거죠.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면서 데려온 마지막 혈육마저 떠나가게 하시므로 아브람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존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모든 것(생명과 재산 등)을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했죠.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설 수 있도록 하시려고 계속적인 훈련을 하고 계셨던 것이죠.
롯은 그렇게 좋은 땅을 차지하고 떠나갔습니다. 떠나가는 롯을 바라보면서 아브람은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머나먼 타향에서 단 하나 함께 있던 골육친척을 떠나보내는 그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인생에 의지할 무엇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깊은 고독이 그를 사로잡았죠.
인생의 의지할 만한 모든 것을 끊어내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시려고 훈련하시는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아브람을 격려하기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창13:14-17)
1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아직 아브람의 형편은 그렇게 밝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아브람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그 땅에서 정착도 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아무것도 소망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아브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붙드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죠. 믿음이란 것은 자기가 내세운 욕망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11:1)이라고 하였죠. 이것은 그에게 믿음의 행동이 되었고 결국 믿음의 조상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약속된 후손은 단순하게 아브람의 자식만이 아니라 온 땅을 구속할 구세주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아담에게서 시작하여(창3:15) 셋을 통해서 그리고 노아를 통하여, 계속해서 셈의 후손을 통하여, 에벨을 통하여 이어져 왔고 이제 이 약속이 아브람에게로 연결된 것입니다. 이 약속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계시를 통하여 이와 같이 세상에 나타날 구속주가 자기의 몸을 통해서 난 씨로부터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을 때 크게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 아들 하나 얻는 것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보내심을 받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더욱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롯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대하여 소홀히 생각하여 떠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약속된 기업은 아브람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졌고 롯은 거기서 제외되었습니다. 일체의 인간의 개입은 제거되었고 하나님 홀로 구원을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당신에게도 물질로 인해서 인간관계의 시련이 찾아왔나요? 물질과 인간 관계문제로 인한 다툼으로 인하여 통장 잔고에는 돈이 없나요? 대출금은 많고 부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습니까?
잘못된 욕구로 인하여 부부사이가 틀어지고, 부모와 자녀관계가 어긋나고, 형제들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져서 왕래가 없나요?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선택의 기로에 서서 당신은 롯의 육적인 선택인가요? 아니면 아브람처럼 영적인 선택을 하였나요?
롯들은 떠나가고 홀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예배하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홀로 처한 그 처지.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고 홀로 있는 그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오기를 간절히 축복을 드립니다.
주님, 하나님을 선택하였기에 고독하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 자리에 ‘예배와 기도’가 살아 있게 하시어서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 용기를 얻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장래의 멀리 내다보는 눈을 가졌던 아브람처럼 하나님이 하실 그 일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나 주와 함께 걷기원해요 주님 곁에 날 품어 주세요
언제나 주의 진리 난 감동해 내영혼 오직 주님만 닮아가네
나의 사랑이 더욱 커져가네 주를 향한 내사랑 더욱 깊어져만가네
나의 사랑이 더욱 커져가네 주를 향한 내사랑 더욱 깊어져만가네
주님 내곁에 머물러 주세요 주 얼굴 볼 때 커지는 사랑
주 앞에 나의 모든것 버리고 내사랑 주님 따르길 갈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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