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산책/창세기

주은총목사/ 창세기11/ 데라와 그의 아들

by 주은총목사 2024. 4. 10.

https://youtu.be/Wnxasyx6F0Y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11: 데라와 그의 아들

 

윤동주 시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중에 한분이죠.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 시인을 기리며 <동주>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흑백 화면으로 만들어졌죠. 윤동주의 일대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이며, 옥중에서의 윤동주와 윤동주가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을 교차적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동주이지만, 또 다른 주인공이 한 명 더 등장합니다. 동주의 사촌인 송몽규입니다.

 

동주와 몽규는 같은 집에서 태어나고, 같이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합니다. 또한 같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하지만 이들이 가는 길은 달랐습니다. 동주는 시를 쓰고, 몽규는 독립을 위해 총을 듭니다. 몽규는 동주가 걱정되고, 동주는 몽규가 걱정됩니다. 동주는 적극적으로 몽규처럼 독립운동에 가담하지도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시를 쓰는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결국 동주와 몽규는 둘 다 후쿠오카 감옥에 잡혀가는데 일본인 경관은 동주와 몽규를 따로 따로 심문하면서 이들을 죽이기 위해 그들이 하지도 않은 진술서에서 사인을 하도록 합니다.

 

이 때 몽규는 일본인 경관이 써놓은 진술서대로 정말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울면서 서류에 서명을 합니다.

 

하지만 동주는 울면서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원하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나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하겠습니다라며 진술서에 서명을 거부하고 종이를 찢어버립니다.

 

결국 둘 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27살에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영화는 동주가 죽기 전 감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과 감옥의 창살을 통해, 수많은 별들이 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동주의 목소리로 서시를 들려줍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영화의 주제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지용 시인이 동주에게 해준 말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인은 동주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지.”

 

그러면서 감독은 덧붙이길, 부끄러움을 인정하기만 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요,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고 하면서, 이것이 부끄러움이 주는 선물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역시, 우리와 똑같이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훌륭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죠. 아브라함에게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믿음을 성장시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을 엄청 부러워합니다. “그런 믿음을 달라고 기도도 엄청 많이 하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일반적인 믿음외에 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이뤄지는 것을 자신이 보게 해주는 은사로서 특별한 믿음을 가지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을 정의할 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1:1)”라고 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문자 그대로 직역을 하면 내 꿈과 비전이 현실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증거는 내가 꿈꾸는 것을 실체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주어질 때 사람은 3가지를 경험하게 되죠. 질병에 걸린 자라도 치유를 경험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 그리고 기도응답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마가복음에서 말씀하셨죠.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16:17-18)

 

주님 어떻게 할까요 벌거 벗은 이 몸

주님 어떻게 할까요 뜨지 못하는 눈

 

나는 주님만 의지 할래요 주님만 바라 볼래요

주님 의의 옷 입혀 주시고 영의 눈 뜨게 하소서

어두 워져 가는 이 세상 빛이 되어 살렵니다

주님 어떻게 할까요 베풀지 못하는 손

주님 어떻게 할까요 걷지 못하는 발

나는 주님만 의지 할래요 주님만 바라 볼래요

주님 주 사랑 베풀게 하시고 생명 길 걷게 하소서

썩어져 가는 이 세상 소금 되어 살렵니다

 

주님 어떻게 할까요 듣지 못하는 귀

주님 어떻게 할까요 말하지 못하는 입

나는 주님만 의지 할래요 주님만 바라 볼래요

주님 주 말씀 듣게 하시고 진리를 말하게 하소서

진리가 메 마른 이 세상 주의 복음 전하렵니다

 

오늘 성경을 읽어보면 그에게 걸림돌은 두 가지가 있었죠. 하나는 가족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제적 궁핍과 기근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의 명령에 자꾸만 지체했을까요? 바로, 가족들 때문이었습니다.

 

가족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가장 우리의 축복을 막을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하죠.

 

아버지 [데라]이 나이에 내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가나안으로 가겠느냐?” 했겠지요.

 

아버지 데라로 인해 아브라함은 과감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자꾸만 지체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였지만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계속 머물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장가들 때까지는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 본토에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하란]까지 왔습니다.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가고자 아버지를 따라 함께 나왔으나, [하란]에서 아버지가 눌러앉은 바람에, 아브라함도 거기에 그만 함께 머물러버린 겁니다. 아브라함이 장가를 몇 살에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통상 30에 갔다 하더라도, [하란]에서 75세에 나왔으니, 40여 년은, [하란]에서 머문 겁니다.

 

하란이란 이름의 뜻은 메마르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지체하면 점점 메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잘 되는 것 같아도 나중에 생수가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메마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도 잘 가다가, 잘 하다가도, 가끔 어물쩡거립니다. 심지어는 어떤 곳에 머물러버립니다. /아버지 때문에, /가족 때문에, /직장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잘 가다가도, 멈춰 설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를 보십시오. 하란 땅에서 메마른 땅에서 못 나오고 거기서 죽고 맙니다. 거기서 나와야 하는데, 끝내 나오지를 못합니다.

 

데라의 이름의 뜻은 연기하다’ ‘지체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아버지 데라가 인간적으로 지연시켰다고 볼 수 있죠. 또한 데라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여정에서 중도에 그만둔 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27절 이후에 나온 데라의 족보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데라의 가족이 일찍 죽은 하란을 제외하고 모두 7 명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데라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출발한 사람은 데라, 아브라함, 사라, 롯 등 총 네 명이었죠.

 

그러나 데라는 가나안까지 가는 여정의 중간지점인 하란까지만 갔고 그곳에서 죽었죠. 그는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여정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하나님이 명령하신 목적지를 향해 잘 가고 있나요? 아니면 데라처럼 하란에서 지체하고 있나요? 그 머무른 세월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길 잃은 청지기

1절 내가 너를 믿고 맡긴사명 너는 왜 잊어버렸나 나만 따르리라 하던 약속 왜 잊어버렷나 후럼: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십자가만 면류관만 바라보며 의의 길 간다더니 위로하기 보다는 위로받고 사랑받기 원하네 2절 내가 너를 믿고 맡긴재물 왜 너의 배만 채우나 나를위해 다시 바치리라 그 약속 잊어버렷나

 

[11: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거류라는 말은 잠깐 머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목적지인 가나안을 향하여 갈 때 피곤하니까 힘드니까 잠깐 머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를 그곳에 주저 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데라의 불행이 있었습니다.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정착해 버렸습니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삼일이 되고, 그렇게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 지나다보니 데라는 그곳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11: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중도에 포기한 사람으로서 데라는 이 후에 더 이상 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하란에서 죽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병이 들었거나 늙어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이와 관련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나지 않은 데라

 

창세기 124절을 말씀을 보면 하란에서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1126절을 보면 데라가 아브람을 낳은 때가 70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데라의 나이는 145세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132 말씀을 보면 데라는 205에 하란에서 죽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근거로 생각을 해보면, 아브라함은 아버지인 데라를 하란에 남겨두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갔다는 이야기이고, 데라는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으로 떠나간 뒤에 하란에서 60년을 더 생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째서 데라는 아브람과 함께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째서 아브람은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간 것일까요?

 

데라의 입장에 보더라도, 만일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의 그 열정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그 뒤에라도 가나안을 향해 아브람을 뒤쫓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데라는 하란까지는 왔지만 더는 가기를 싫어하고 하란에 주저앉고 만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 이런 말씀이 등장합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7:2-4)”.

 

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가 데라가 죽은 이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연대기 계산대로라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데라의 나이 145세였고 그 후 60년을 더 하란에서 생존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 말씀을 보면 이미 데라의 죽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성경의 오류일까요?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신앙 안에서의 죽음에 대한 성경의 이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로 산 데라

 

성경을 보면, 사데교회를 향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

 

예수님은 사데교회 사자를 향해 살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죽은 자라고 말씀하시죠. 이 말씀을 비추어보면 육체적인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영적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라가 아직 하란에 살아있으나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브람과 함께 떠나기를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는 것 자체를 이미 죽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죠. 그의 육체적 생명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미 신앙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60년을 더 생존하였습니다. 60년이 얼마나 편하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왕과 같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60년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60년은 가장 영광스러운 은혜를 상실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더불어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기념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은 사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이제 사명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소명을 받고, 요단강 동편에서 사명을 마치고 느보산에서 죽었죠.

 

그의 나이 120, 눈은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습니다.(34:7) 모세는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사명을 마쳤기에 하나님께 간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상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19:30)고 말씀하신 예수님 같이.

 

사도바울은 3차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중,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것이 '환영과 환대'가 아니라 '결박과 환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4)고 했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도 불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살아야 될 이유와 죽어야 될 이유가 동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 앞에 섰을 때 비겁해 지고, 살았던 삶에 대해서 후회하게 되죠.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7-8)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살아갑니다. 부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이제 가야할 그 길은.

우리 이제 가야 할 그 길은 천국 가기 위하여 가는 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구원 얻기 위하여 가는 길

날마다 죽어라 날마다 죽어라 죽어라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죽고자 하는자 살리라

 

우리 이제 가야 할 그 길은 은혜 받기 위하여 가는 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고 가는 길

날마다 전하라 날마다 전하라 전하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때문에 날마다 전하라 전하라

 

우리 이제 가야 할 그 길은 진리를 위하여 가는 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

날마다 외쳐라 날마다 외쳐라 외쳐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때문에 날마다 외쳐라 외쳐라

 

우리 이제 가야 할 그 길은 영혼을 위하여 가는 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생명을 위하여 가는 길

나팔을 불어라 나팔을 불어라 힘차게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때문에 나팔을 불어라 불어라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북쪽인 하란으로 오는 도중 점점 더 생활하기에 나쁜 자연적인 환경이 펼쳐짐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명의 길을 걸어갈 때 스스로 이 길을 포기하게 하는 요인이 있습니다. 사명의 길을 떠나 올 때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죠.

 

그 어려움이 어떤 어려움이었든지, 그 신앙의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하고 도중에 주저앉아 버렸을 때 그것은 그대로 영적인 사망으로 이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가나안으로 들어섭니다.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12;5)

 

가나안에 도착하면, 이제 복 받을 일만 남은 것 같지요? 이제는 고생이 다 끝나고, 편안할 것만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착하여 너무나 감사하여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평온한 광경인가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흉년이 들어서, 점점 기근이 심해지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가면, 당장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 일이데유? 대단한 일은 고사하고,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바닥이 났을 겁니다.

 

개척교회도 섬기고 목사님도 살뜰히 보살피고,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하고, /헌금도 하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복은 고사하고, 이게 웬 흉년이고 웬 기근이란 말인가요? 회사가 망하기 직전이고 온 집안에 흉년이 들고, 기근이 심해집니다. 그럴 때, 심정이 어떻겠냐는 겁니다. 입에서 욕이 안 나오면 다행입니다.

 

전도하려고 할 때, 무슨 말을 많이 듣는가요? 별의 별말을 다 듣죠.

나도 다 해봤어. 나도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나도 다 해봤어

새벽에 차량 운행도 해봤어믿음이 떨어질 때로 떨어지고 지칠대로 지친 그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너나 잘 믿어

 

신뢰와 믿음이 바닥이 났다는 겁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믿음이 떨어지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바닥이 났다는 증거가 바로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 오는 것이죠. 망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움이 몰려왔죠.

 

그런데 그 두려움이 몰려오는 과정중에도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 뻔히 알고 있는데도 말이죠.

 

목사님

한해 고생많으셨어요

새해엔 주님께 맡기고 다만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하셨으니 주님께 더 나아가요~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맘과 생각을 지켜주신 답니다~

 

저는 오늘 새해 신년 11일에... 이 톡을 읽으며 새벽 3시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분은, 진짜 멋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지금의 현실에서 이렇게 멋진 고백을 하나님께 올릴 수 있다니. , 내게 성경상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을 만났구나.

 

아버지를 떠나고, 고향을 떠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생면부지로 왔건만, 이게 뭡니까?? 모든 것이 두렵고,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애굽사람들에게 구라를 치죠. 사라를 보고 아내가 아니라고. 하면서 아내도 팔아 넘기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것 저것 다 팔아넘기고 별별 거짓말을 다 해버리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바닥입니다.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복을 받기는커녕, 기근에도 돈도 사랑하는 아내마저 잃었습니다. 목사님도 밉고, 이러한 상황에 처한 하나님 마저 미웠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일련의 이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시고는 슬슬 하나님이 움직이셨죠. 애굽왕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고, [사래]를 아브라함에게 다시 돌려 보내줍니다. 아내뿐만 아니라, 재물도 얻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흉년을 주시는 걸까요??? 하는 것입니다. 퀘스천 마크가 하나 붙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흉년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은 가나안에 도착하고, 회사와 교회에 복을 주시기도 모자랄망정 대체 왜?? ? 무엇 때문에 흉년을 주셨을까요? 죄를 지었을 때라면 몰라도, 신앙생활도 잘하고 있는데 왜 흉년을 주실까요?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시험과 시련을 이길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숙하게 하셨죠. 하나님이 흉년을 주신 것은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왔다지만, 막상 흉년이 들고, 환경이 바뀌니, 자신의 신앙이 가뭄과 경제적 궁핍, 돈이러한 것들에 좌우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제 1순위가 아니라 돈 걱정이 1순위였다는 것을

 

자신의 신앙이 형편이 없었다는 것을...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애굽왕 [바로] 앞에서 했던, 자신의 언행들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목숨뿐만 아니라, 아내와 모든 소유와, 금과 은까지도, 더 풍요롭게 채워 주심을 보고, 아브라함은 다시금, 하나님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1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2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13:1-2)

 

당신은 아직도 최고의 믿음을 달라고 기도를 하시나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조용기 목사님 같은 1등 가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를 하시나요? 그렇다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만난 흉년은, 겉으로 보기엔 흉년이지만, 실상은 흉년이 아닙니다. 그 흉년을 통해, 나를 성숙하게 하시고, 나에게 믿음의 풍요로움을 크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느 정도의 믿음의 경지에 올랐는지 로마서 4장에 기록되어 있죠.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4:17-22)

 

부디, 이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여유를 가지고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하. 하나님은 나에게 최고의 믿음의 은사를 주시려고 하는 구나. 어려울 적에 오히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현실로 내 눈앞에 펼쳐지겠구나 하는 믿음의 배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주님, 창세전에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어 사명의 길을 걷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나에게 믿음의 풍성함을 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어서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믿음이 현실이 되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눈 앞에 펼쳐지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올려 드릴 곡은 꽃들도입니다.

믿음생활하기 정말 힘든 나라가 일본.. 그리스도인이 전체 인구의 1%남짓밖에 안되는 일본에서 꽃들도라는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를 가진 찬양이 나왔다는게 정말 놀랍고 은혜롭습니다. 일본어와 한국어로 된 이 곡을 올려 드립니다.

 

눈물 골짝 지나갈 때에 머잖아 열매 맺히고

웃음 소리 넘쳐나리라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하늘을 울리며 노래해

나의 영혼아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은혜의 주

 

그날에 하늘이 열리고 모든 이가 보게 되리라

마침내 꽃들이 피고 영광의 주가 오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