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rbUAke_5W-Q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창세기10/ 셈, 함, 야벳
인생은 한 권의 책을 쓰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대필해주지 않는 책, 스스로 저자가 되어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쓰게 되어있습니다. 저 역시,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인생 이야기를 적으려고 합니다.
지난 장에 비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지 못했어도, 돌아보기조차 아프고 힘든 장이었다 해도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은 아직 책에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내용은 반전되게 되어있습니다.
세계적인 명작 역시, 클라이맥스가 있기 전, 더욱 어둡고 힘든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골이 깊어야 산이 높은 것이니 과정에 힘겨워하지 마십시오. 결론이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의 인생의 마지막 장은 ‘후회함이 없다’고 썼고, 예수 그리스도는 ‘다 이루었다’라고 쓰셨죠. 당신에게 지난 장이 힘들고 암울했던 것은 이 새로운 장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습관이 운명을 바꾼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당시 유명 배우였던 에드워드 머독(Edward Mur-doch)이 백악관에서 잠을 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잠을 자던 머독은 무슨 소리엔가 잠을 깼죠. 소리 나는 곳을 따라 가보니 링컨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링컨은 항상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링컨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남과 다른 습관을 지녔기 때문이죠. 바로 기도의 습관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도를 습관화했으며, 그 습관이 배움이 없는 링컨의 운명을 바꿔 백악관의 주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백악관에 근무하는 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 중의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대통령 집무실에 백기가 꽂혀있으면 아무리 초를 다투는 급한 일이라도 절대 문을 노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대통령이 기도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의 습관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지속되어 그는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미국인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가슴에 남아 있죠.
링컨은 기도의 습관이 낳은 인물입니다. 성경에도 기도의 습관을 가진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이죠.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전에 행하던 대로’, 곧 습관입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습관을 가진 자였습니다. 다리오 왕 외에 다른 누구에겐가 무엇을 구하면 안 되는 금령조차도 그의 습관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죠. 하나님은 선하고 좋은 길로 우리를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영성이란 신앙과 삶의 조화를 통해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성훈련이라고 합니다. 즉, 영성이란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자신의 실력을 갖추는 것,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습관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책장을 덮는 날이 옵니다. 오늘 나태하면 미완성의 작품이 되고, 무분별하게 살면 추한 작품이 될 것이니 하루하루를 하나님과 동행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결코 벼랑이 아니다. 지옥을 향한 길은 밋밋한 내리막길이다 사람들은 그 길을 기분 좋게 걸어간다.”
때론,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무디어집니다. 찬송가는 점점 재미없어지고, 복음성가로 눈을 돌렸다가, 또 새로 나온 ccm도 불러 보지만 점점 찬양이 시큰둥해집니다. 점점, 열정이 식어지고 기도의 양이 줄어들고, 전도에 생명을 걸어야 할 사람이 다른 일로 인해 바빠집니다. 점점 하나님이 아닌 환경과 사람들에 의해 끌려다니고 핸들링을 당하고 삽니다.
홍수가 끝이 나고, 노아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인류에 대한 축복을 재차 확인하시고(1-7절)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 증표로 아름다운 무지개를 주셨죠.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사건은 가슴 아프게도 노아의 실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한 것이 장점이었죠. 당대 사람들도 말로는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더 좋아했습니다. 당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말로는 해도 실제로는 여자들을 좋아하고, 여색을 쫓았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좋아하거나, 사랑하지는 않았죠.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을 제일 좋아했고,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
또한, 노아는 고독을 견디어 냈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의 핍박과 수많은 말들을 이겨내며 외로움을 견뎌내며 120년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포도농사’를 짓게 되었죠. 오래간만에 인간다운 생활을 하면서 포도 농사를 짓게 된 노아는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포도가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흐뭇했을 것입니다.
마치, 오래전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구름속의 산책>이 떠오릅니다. 젊은 군인인 키아누 리브스 역의 폴 셔튼은 유학 중 임신한 몸으로 집을 향하는 곤경에 처한 아름다운 빅토리아(Victoria Aragon: 아이타나 산체스 지온)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멕시코계 미국인 부호로 큰 포도 농장의 주인인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성격이 엄격하여 그녀가 집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딱한 사정에 폴은 하루만 남편 노릇을 해주기로 하고 함께 빅토리아의 집으로 향하죠.
부모의 승낙없이 결혼한 딸이 돌아오자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얼음처럼 냉정했고 하루만 남편 노릇을 하려던 폴은 가여운 빅토리아를 두고 떠날 수 없어 출발을 하루하루 미루게 됩니다. 포도원을 배경으로 동네 사람들이 포도를 수확하며 포도를 밟으며 신명 나게 춤을 추는 모습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두 남녀 주인공이 구름 속을 산책하듯 포도 농장을 데이트하는 모습은 참 많이 설레었죠. 그때 알았습니다. 포도원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본문 20절에 보면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하고 나와 있습니다. 노아는 120 년만에 달콤함을 맛보았습니다. 노아를 비방하거나 수군수군하는 사람도 없었죠. 포도를 항아리에 담아 두니까 발효가 되고, 시간이 지나니까 냄새가 좋고, 맛도 좋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노아는 긴장이 풀리면서 ‘와인’에 심취하였습니다. 결국 노아는 술을 많이 마시고는 실수를 하게 되죠. 제법 취기가 올라와서 알딸딸하니 옷을 하나둘 벗기 시작하더니 아예 벌거벗고 잠이 들었습니다.
마치, 팬티가 보일똥 말똥한 예쁜 아가씨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게 되면 안 보려고 해도 속이 보여 민망해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의 두 아들 셈과 야벳 역시, 그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옷을 메고 뒷걸음을 쳐서 들어가서 그 아버지의 하체를 가리웠습니다.(창9:23). 이것은 그에게 큰 실수였죠.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 대로 보면 사람이 벌거벗어 하체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0:26에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드러날까 함이라" 했죠.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세가 번제단에 올라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금하셨습니다. 그가 번제단의 층계를 오를 때에 사람들이 그 아래서 그의 하체를 볼까봐 그랬습니다. 레위기 20:17에도 "누구든지 하체를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했죠.
노아는 성공했다고 생각할 때 실수 하였습니다. 영적인 긴장을 풀고 해이해져 있다가 실수를 하였죠. 노아는 노년에 음주 문제로 실수를 하였지만 인간인 우리 역시, 욕심으로 실수 할 수도 있고, 한순간의 불륜으로도 실수 할 수도 있고, 말로서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 역시, 젊은 날에는 사울에게 쫓기며 믿음의 중심을 잘 지켰습니다. 끊임없이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를 얻었죠. 그러나 이스라엘을 통일한 후에 긴장을 풀고 오후 늦게까지 침상에서 뒹굴다가 유부녀에게 빠져서 인생 후반전이 몰골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그 쓸쓸함에 관하여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창9:18-19)
세상에는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 세 종류의 인종이 있습니다. 우리는 황인종에 속합니다. 이같이 세 가지 종류의 인종이 나타나게 된 것은 노아의 아들들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는 아담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노아 홍수 때 모두 멸망해 버렸죠.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모든 인류는 아무리 종족이 많고, 국가가 많더라도 결국은 노아의 후손들입니다. 노아의 맏아들이 ‘셈’, 둘째 아들이 ‘함’ 그리고 셋째 아들이 ‘야벳’이죠.
노아는 술에서 깨어 이러나 그 자식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자손들의 장래 일을 예언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인터넷에 이러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런거 물어봐도 되나 모르겠는데... 총신에서 시험을 봤는데 노아의 저주를 받은 사람을 묻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답을 가나안이라고 하려다가, 결국 아들이 저주를 받은 것은 아버지인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함을 답변으로 선택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가나안이란 표기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함의 자손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요.(주석을 보니까 칼빈도 이렇게 해석한 거 같은데….). 왜 이런 문제를 냈는지 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네요…
거기에 딸린 답변은 Answer
1. (창 9:25)은 구약 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 구절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아의 수치를 드러낸 사람은 함인데, 왜 노아가 함이 아닌 가나안을 저주했는가? 하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상 함에게 있어서 자기로 인해 아들이 저주받은 것은 자신이 저주 받은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이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아들에게 그것을 넘겨주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마 이 문제를 내신 분은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은 알지만, 정작 저주가 선포된 것은 그의 아들 가나안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 문제를 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약간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라고 답변을 하셨습니다.
홍수가 끝나고, 천신만고 끝에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너무 기분이 들떴을까요? 아니면 이제 방심했을까요? 완전한 자로서,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하고 맙니다. 술에 취해서, 옷을 다 벗고 잠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이 들어와서 옷을 덮어주고, 시끄럽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죠.
저는 이 상황을 들여다보면서, 어떤 실망감 보다는, 오히려 감사함이 몰려왔습니다.
“아. 사람이란 실수하는 존재구나” “그리고 실수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일하시는구나”
왜냐하면, 이 사건으로 셈과 함과 야벳의 운명이 갈리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또 새롭게 전개됩니다. 분명히 노아의 실수였지만, 하나님은 그 실수마저도, 하나님의 일에 결부시키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수하는 존재입니다. 완전한 사람 노아도 실수합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오히려 그 실수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이죠. 하나님이 문제 삼지 않은 것을, 우리는 문제를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 실수를 문제 삼고, 그 실수를 덮어주지 못한다면, 함과 같은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체를 본 함이 조용히 덮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셈이 받을 복을, 함이 받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장 먼저 본 함에게는 오히려 절호의 찬스였다는 거죠. 하나님은 함에게 가장 먼저 기회를 줬습니다.
함을 저주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을 주시려고 기회를 일순위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함은 그 기회를 그만, 놓쳐버렸습니다. 덮어주기는커녕, 형제들에게 다 까발려버렸지요. 덮어줬어야 하는데, 덮어주지 못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였죠. 덮어주면 되는 거였습니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실수를 하지 말고 덮어 주라는 거였죠.
하나님은 노아의 실수를 보여주시고, 우리더러 이런 실수 하지 말라는 말씀보다는, 그 실수를 봤어도, 오히려 덮어주고 못 본척해서, 복 받는 자가 되라는 그 말씀을 더욱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22)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에서 ‘보다’는 말의 원어 ‘와야르’는 ‘그리고 그가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지나다가 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주목하여 보았다는 의미이죠.
함의 아들인 가나안은 “천한 자, 낮은 자” 라는 뜻입니다. 함은 자신의 부모의 실수를, 지도자의 실수를 집에 가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불평을 했던 것이죠. 이것은 함의 평소의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은 함의 평소 생활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함이 평소에 그 아버지 노아에게 대한 불평을 자기 집에 가서 털어놓으니까 함의 자녀들이 듣고 할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 약하였습니다. 남편에 대한 실수를 덮어주지 못하고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자녀들이 듣고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 약해집니다.
교회에 작고 큰 허물들을 가정으로 끌고 가서 자식들 앞에서 불평이나, 교역자들의 허물과 실수를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실수를 덮지는 못할 망정 그것을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교회에 대한 경외심도 없어지고 자식들에게 좋은 이미지가 되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올바른 좋은 신앙을 할 수 없죠. 그게 바로 저주가 아닐까요?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고, 신앙을 떠나는 것.
분명히 함이 잘못했는데도 성경은 그 손자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하셨습니다.
함의 편에서 볼 때,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할 것 입니다. 왜요? “당연히 본 것을 보았다고 했지 못 본 것을 보았다고 했느냐? 벗고 있는 것을 벗고 있다고 했는데 뭐가 나쁘냐? 안 본 것을 봤다고 했느냐?”고 하겠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자녀가 신앙에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은 혹시 당신의 입이 아닌가요?
이에 반해,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23절). 셈과 야벳은 아버지가 벗어던진 그 옷들을 어깨에 메고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이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가요? 아버지의 인격과 권위를 얼마나 존중하였는가? 셈과 야벳은 노아의 실수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 덮어드렸습니다.
날 고쳐주소서 주님의 손으로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5-27)
과연, 노아의 예언은 어떻게 성취가 되었을까요? 먼저 창세기 9장 26절에 보면,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했습니다. 셈은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셈의 다섯 후손(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 가운데 아브라함은 아르박삿의 후손이죠. 셈의 후손은 여호와를 잘 섬기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셈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내 온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죠.
또, 창세기 9장 27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셨죠. 셈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복음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죠. 예루살렘에서 일어나 복음이 먼저 유럽으로 전파가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벳은 심히 창대케 된다, 즉, 경제적인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가 증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부를 누가 다 쥐고 흔들고 있죠?
바로 야벳의 후손들이 다 쥐고 있습니다. (영국 사람들, 조그마한 나라, 허구헌 날 흐린 나라가 세계 경제를 다 쥐고 흔들지 않는가요? 미국 사람들도 세계 경제를 쥐고 흔듭니다.)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시고 셈에 장막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함의 이름의 뜻은 “뜨거움”이란 뜻입니다.
그는 가나안과 아프리카와 흑인들의 조상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함의 후손들이 나일강 유역에서 살다가 점차로 아프리카, 가나안, 인도 등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셈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결국은 가나안 족속은 여호수아 시대에 셈족인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정복 당했죠(수 9:23), 나머지는 솔로몬 시대에 완전히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왕상 9:20,21). 그리고 그 후에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 즉 카르타고인나 애굽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페르시아인, 마게도니아인(헬라), 로마인 등과 같은 야벳 족속들에게 계속해서 정복을 당했습니다.
함의 후손들은 땅에서 풍요로움을 차지하였습니다.
함의 후손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기름진 땅과 나일강 유역의 땅을 차지하였죠.
또 함은 인간적인 면들을 통하여 세계의 인류들에게 큰공을 세웠습니다. 인류학자 커스탄트는 “함과 그의 후손들은 물질적 발전으로 볼 때 인류에게 엄청난 공헌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초기의 문명들이 함족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으며, 고도의 기술적인 수준을 발휘하였습니다.
오늘날 이집트의 문명은 현대의 과학이나 기술로도 풀 수 없는 정교하고도 고도의 높은 수준으로 문명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요함을 이룬 함의 후손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부요함을 이루지 못하였죠. 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관심밖에 있었던 것입니다.
함은 많은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함의 후손 중 구스는 에티오피아의 조상이 되었고 미스라임은 애굽, 붓은 동쪽과 아라비아 남쪽에 거주하였습니다. 함의 후손들은 동양의 문명의 발달지인 황하가 지역을 빼고 세계 주요 문명지를 모두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사실 수메르, 앗수르, 바벨론, 메데바사 등 주요 문명국이 모두 함의 자손들이었죠.
2) 결국 정복당한 민족이 되었다.
많은 영토를 차지한 함의 후손 가운데는 니므롯과 같은 용맹한 장수도 나왔으며, 함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땅을 정복하여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말죠.
함의 후손들은 세계의 정복자로 나섰지만 결국 하나님의 선민 앞에서는 역사의 주도권을 내어 주고 일개의 주변 국가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힘과 능력이 어떻든 간에 결국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있는 셈의 후손들에게 빼앗기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결국은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역사적으로 참으로 어려웠죠.
<레 미제라블>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장발장이라는 사람이 배고파서 빵 하나를 훔쳤는데, 이 죄 때문에 그는 19년 동안 감옥생활을 합니다. 19 년 동안, 인간의 복수본능이 그를 사로잡았죠. 그러면서 그는 차츰 사나운 사람이 되어갑니다. 복수심을 불태우며 19년을 지내고 감옥에서 나오죠. 자기를 감옥에 쳐넣은 그 형사를 꼭 죽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나왔지만, 당장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룻밤 쉴 곳도 없었죠.
그러다 어느 신부가 그를 영접해주었는데, 그곳 방에서 자다가 은잔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생활밑천을 삼으려고 훔쳐서 나옵니다. 하지만 바로 들켜 경찰에 체포되어서 신부 앞에 나타났을 때 신부는 따뜻하게 웃으면서 경찰에게 말합니다.
“내가 준 선물입니다. 저 사람 도둑질 한 것이 아닙니다.”
하고 장발장을 보고
“아니, 이 은촛대도 주었는데 왜 이것은 안 가지고 갔습니까? 그것은 팔면 은이라서 아마 200프랑은 족히 받을 것입니다. 그럴 건데 왜 안가지고 갔습니까?”
이 무조건적인 뜨거운 사랑이 장발장의 마음을 감동시켰죠. 이 용서와 자비가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놓습니다. 장발장은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내 한 평생을 살리라.’ 맹세하죠. 그러면서 예전에 자기를 체포했던 형사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돈을 벌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부디,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노아의 노년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사건은 그의 ‘음주사건’이죠.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같은 경우는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을 것입니다. 완전한 의인 노아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해 음주 문제를 일으키다!
당신은 노아의 문제를 함처럼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안주거리’를 삼을 것인가요? 아니면 셈과 야벳처럼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어주실 건가요?
주님, 오늘은 이제 축복을 받고 무지개를 볼 때 긴장이 풀린 노아가 실수하는 과정을 통해 함의 태도와 나 자신을 돌아 보게 하시고, 셈과 야벳처럼 실수와 연약함을 모른체하고 덮어 줄 수 있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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