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산책/창세기

주은총목사/ 창세기12/ 바벨탑-좌절당한 인간의 야망

by 주은총목사 2024. 4. 11.

https://youtu.be/MivxGMsIqtY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바벨탑-좌절당한 인간의 야망

 

밤나무

 

어떤 사람이 일을 하다 좀 쉬려고 밤나무 밑에 누웠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왜 하나님은 아름드리 밤나무에는 조그만 밤이 열리게 하고, 가는 호박덩굴에는 큰 호박이 열리게 하신 거지?

 

내가 하나님이라면 호박덩굴에는 밤알만한 호박을 열리게 하고, 밤나무에는 호박만한 밤이 열리게 할 텐데,

 

참 하나님은 감각도 없으셔.”

 

이렇게 투덜거리다 그는 잠이 들었다. 한참 곤하게 잠을 자는데 그의 얼굴에 하고 무엇이 떨어져 놀라 일어나보니 밤이었다.

 

그는 얼른 일어나 ! 하나님, 감사합니다. 만일 밤이 호박만 했더라면 오늘 제 머리는 아마 박살이 났을 겁니다. 밤을 이렇게 작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이해하겠으며, 피라미가 고래의 심정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피조물이 창조주의 지혜를 어찌 깨닫겠으며, 그의 은혜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대홍수 이후 노아의 가정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정을 축복하셔서 셈, , 야벳의 후예들에게 생육과 번성함을 주셨고, 그 후예들이 전 세계 모든 족속들의 조상이 되게 하셨죠.

 

노아의 아들인 야벳이라는 이름은 확장한다, 넓게 한다, 열린다라는 뜻인데 야벳은 일곱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검다, 덥다, 뜨겁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함은 네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첫째 아들 구스는 니므롯을 낳았는데 이름의 뜻이 건장’, ‘배반대적자, 모반자이며 마귀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니므롯은 성경에서도 인정한 힘센 사냥꾼으로 묘사되고 있죠(창세기 10:8~12). 지상 최초의 권력자, 세상 최초의 영걸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는 시날 땅부터 아시리아까지 영토로 삼았기 때문에 아시리아를 니므롯의 땅으로 불렀습니다(미가 5:6).

 

창세기 108-9절을 다 같이 읽어 봅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10:8~9)

 

니므롯은 홍수 후 100년쯤 탄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노아가 600세에 홍수를 맞아 그 이후로 350년을 살다가 950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니 노아는 니므롯과 함께 살면서 적어도 약 250년 정도는 함께 살았을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니므롯은 하나님께 반역할 것을 결심하고 그곳에 하늘을 향하여 탑을 쌓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바벨탑이야기입니다.

 

노아의 홍수 후 그 가족들은 비옥한 땅에서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구도 늘었고 가축도 늘었죠. 맹수의 수도 늘었고 맹수로 인해 가축과 사람의 피해가 심각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크고 용맹하며 강력한 사냥꾼 니므롯(Nimrod)이 이 맹수들을 사냥해 사람들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동안 섬기던 하나님보다 당장 자신들을 지켜주는 니므롯을 따랐고 니므롯은 높은 성벽을 쌓아 도시를 만들었죠. 이 성이 바로 니느웨(Nineveh) 성입니다.

 

고대 국가를 건설하게 된 니므롯은 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니므롯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사람들에서 벗어나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인본주의 사상의 시초입니다.

 

바벨탑을 세우려고 작정하고높이와 넓이와 장식을 광대하고 화려하게 짓는 것도 다 인간들이 욕심들을 채우기 위해서이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광 돌려 드리기 위함은 아닙니다.

 

헨델의 울게 하소서

 

바벨탑 사건은 어떤 사건인가요?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그리고, 이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알아보고,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를 깨닫는 복된 시간 되시길 축복합니다.

 

먼저 성경 창세기 113절과 4을 같이 읽습니다.

 

(3) “서로 말하되, ,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 [미그달], 주로 성경에 망대/망루로 사용됩니다. 성이 있고, 성에는, 망루가 있습니다. 그 높은 망루에 올라가서, 망을 보는 거지요. 멀리 내다보이는 높은 망대는, 적들이 오는지를 볼 수 있는 탑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성을 쌓고, 망대를 건축하는데, 그 망대를 오늘 본문에는, 탑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바벨탑 사건이라고 하면, 단지 탑만 높이 높이 쌓는 사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성을 쌓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거기다 망대를 쌓는 것은 당연한 순서인데, 문제는, 망대의 높이입니다.

 

망대의 높이가 얼마나 높습니까? (4)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하늘까지 닿도록, 높이 쌓자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려고 합니까? 그 이유가 뭘까요?

 

첫째는, “우리 이름을 내고”,

둘째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는 것입니다.

(4) “또 말하되, ,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우리 이름을 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내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누구만큼 높입니까?

하나님만큼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바벨탑이 이렇게도 엄청나게 평가된 것은 인간의 교만, 즉 교만의 산물인 욕심과 시기 질투하는 본성이 한량없이 크기에 그렇게 묘사되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성과 대를 쌓으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와 허망한 인간의 명예욕을 드러내 는 것이었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내 마음속의 동기를 먼저 보십니다.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목적이 무엇이냐? 를 먼저 감찰을 하십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생각하고 추진하는 일들이 왠지 뜻대로 잘 안 풀리고 있나요? 그래서 그것이 걱정이 되고 고민이 되십니까? 뜻대로 해결이 되지 않고 성취되지 않아서 낙심이 되나요? 불안과 염려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나요? 그렇다면, 먼저 '내가 왜 그 일을 하려고 하는지 마음의 동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일이 나의 이기적인 소원과 욕망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과 그 영광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나에게 있는지. 기도의 시간을 가지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소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사람들이 계획하는 일에는 반드시 그 동기가 있습니다. 아무 목적이나 동기없이 하는일은 없습니다. 사람이 겹겹이 싸고 위장을 하고 있어도 하나님은 인간의 근본 동기를 꿰뚤어 보십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깊은 동기까지도 파악하시고 통찰하고 계시죠.

 

그들은 성을 세워 성의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도록 쌓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것일까요? 바로 자신들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온 땅에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이름을 높이는 것보다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추구하였습니다. 시날 평지에 정착하여 편안히 안주하고 집을 짓고 포도원을 만들고 부락과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 '흩어지지 말자'고 하였죠.

 

당신이 계획하는 그 일이 혹시 바벨탑을 쌓는 헛된 야망이 아닌가요?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시날 평지에 안주하여 나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좋은 일을 나쁜 동기로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굳히고 사람들로 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기 위한 정치적인 동기도 작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헤롯왕은 성전을 바로, 그러한 동기로 지었죠.

 

그러나 다윗은 그런 동기가 아니고 다만 '나는 백향목 궁궐에 살면서 하나님의 궤는 장막에 있구나'하는, 하나님께 대한 심히 송구한 마음으로 그것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는 순수한 동기였죠. 그 때에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시면서 다윗에게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삼하 7:9-)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일신상의 안락과 행복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대로의 계획과 목적대로 그 인생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고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또 내가 거기에 빗나가고 어그러졌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가 일하시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우리 모인 이곳에 주님 함께 계시네 누리네 아버지 은혜

적은 떡과 물고기 내 모든 걸 드릴 때 모두 고백해 여호와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의 토지와 재물을 크게 자랑하고 다니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제자를 불러 놓고 지도를 보여 준 다음 "여보게 ! 그리스가 어디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물음에 제자는 조그만 반도를 가리키며 "여기입니다" 하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아테네는 어디인가" 하고 소크라테스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는 겨우 점 하나로 표시된 아테네를 가리키며 "이곳" 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자네 토지는 어디 있는가 ?"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제자는 고개를 떨구며,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부터는 그는 땅 자랑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을 소유하였다고 생각이 들 때에는 그것을 자랑합니다.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고, 재능을 자랑합니다. 자신이 가진 부동산과 건물, 돈 때문에 의기양양거립니다. 은행에 가면 많은 돈을 가진 VVIP라는 거에요. 많은 물질을 자랑하죠.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자랑 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지 않습니다. 불과 몇 년도 되지를 않아, 자식에게 털리고 털어간 그 자녀는 더 이상 부모를 찾아 오지를 않습니다. 이리 저리 탈탈탈 털리고 닭 쫓던 개꼴이 나는 것입니다.

 

이번주에 박희자 전도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시어머니가 세상에나 자신의 아들을 못 알아 보는 치매에 걸리셨다는 거에요.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자신과 시어머니의 사이가 그렇게 썩 좋은 것은 아니었고, 예수를 믿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치매에 걸리고 나니 모든 기억을 다 잃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예수님을 전하면 어린 아기가 되어서 아멘’‘아멘하고 받아먹는데 깜짝 놀랐답니다. 그래서 요양원에 가서 성극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지난 주에 성극을 하며 예수님을 전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난다 긴다하는 이름난 천재들, 훌륭한 학자가 치매에 걸려 가지고 바보가 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나이를 물어보면 “14이라고 대답을 하고, 자신의 배우자는 물론 자녀들도 못 알아 봅니다. 딸은 울고 있는데 늙은 부모는 자녀를 못 알아보니 이별의 뜻을 모릅니다.

 

어떻게 그렇게 바보가 되었는 지. 그것도 하루 아침에.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죠. 인간의 자본이나, 능력이나, 지식, 지혜, 시간, 건강할 것 없이 그 무엇도 인간은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탑을 쌓는 목적은 무엇인가? 당신의 자녀가 학문을 하는 목적이 1등을 해서 이름을 남기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돈벌이 잘되는 회사에 취직을 하기 위하여서인가요?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기 위해서 인가요?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많은 고생을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돈을 버는가요? 자녀를 위해선가요? 당신의 노후를 위해 선가요?

 

예수님은 재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형제끼리 부모의 유산을 나누는 문제 때문에 소송을 벌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돈 때문에, 빌딩 때문에, 부동산 때문에 형제끼리 소송이 벌어졌죠. 돈 문제로 인하여 형제끼리 웬수 아닌 웬수가 되었습니다.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있었죠.(5:17)

 

그 형제들은 유산상속 문제에 관하여 예수님께 와서 판결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풍년으로 소출이 많아지자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자 한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해 주셨죠.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12:20)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공부를 하고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았다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곧 바벨탑입니다.

 

세월이 가면 사람들은 모든 기억을 서서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잘난 사람도 잊어버리고 못난 사람도 잊어버립니다. 부한 사람도 잊어버리고 가난한 사람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수 세대에 걸쳐서 점처럼 계속해서 나타나는 인간들을 이사야 40장에서 뭐라고 부른 줄 아십니까? 바로 입니다. 인간들은 이라는 거에요.

 

풀은 마르고 꽃도 시들어 버린다. 부귀도 영화도 권세도 모두 다 사라져 버린다. 그 후에 남는 것, 참으로 남는 것은 무엇인줄 아느냐?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이사야 40:6-8)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젼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구스의 아들 니므롯은 세상의 첫 용사”(8)였고 속담으로 회자될 만큼 용감한 사냥꾼이었습니다(9). 그는 시날 땅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공식적으로 최초의 강력한 제국을 세운 자이기도 하죠.

 

그 나라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벨, 앗수르, 니느웨 등의 지명이 거론되고 큰 성읍을 세웠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1012). 그는 하나님을 대적해 큰 성읍과 높은 탑을 쌓는 일을 주도했습니다(11:34). 함의 아들 구스의 후손들은 물리력, 기술력이 뛰어났습니다. 창세기 1013절에는 구스의 형제인 미스라임의 후손에는 블레셋이란 호전적인 족속의 이름도 보입니다(1314).

 

1520절에는 함의 아들 가나안의 족보가 나옵니다. 가나안은 노아의 저주에 직접 등장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9:25). 여기 등장하는 자들은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진 자들이죠. 이들은 유명한 시돈, , 여부스, 아모리, 기르가스, 히위 족속 등 가나안에 사는 부족들로 이스라엘의 대적들이기도 합니다(1518).

 

가나안의 후손들은 그랄, 소돔, 고모라 등에 몰려 살았습니다(19). 이들이 가나안에 살고 있는 힘이 센 자들임을 성경은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노아의 저주를 받은 함의 후손 가운데 이렇게 힘센 자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자기들 힘으로 살아야 했기에 스스로를 지킬 힘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따라서 힘이 세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멸하신 아낙 자손이 거인들이었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던 골리앗 역시 엄청난 덩치에 막강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술력이나 물리력에서 이들보다 더 약했습니다. 블레셋은 이미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을 때에 사울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은 칼도 하나 제대로 없었던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힘이기에 인간의 힘을 키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병거나 마병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힘으로 삼는 백성들은 물리적 힘이 막강한 자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칼 하나도 손에 없던 다윗이(삼상 17:50) 칼과 창과 단창으로 무장한 골리앗을(삼상 17:45)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힘이 센 것이 복도 아니고 승패를 결정짓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니므롯은 자신의 욕망의 바벨탑을 쌓았지만 동시대인인 아브라함은 너무나 초라한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니므롯의 바벨탑은 무너뜨리고 아브라함의 초라한 제단을 통해 하나님의 도성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나라이며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죠.

 

어느 시골교회의 할머니의 사연입니다. 이 분은 성경을 읽는데 너무 나이가 들어서 성경을 전체 다 읽기가 어려워지자 할머니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만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번은 그 교회에 온 부흥사가 하도 신기해서 할머니께 여쭤보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일어야 하는데 이제 시간도 없고 늙어서 하나님 나라에 갈 때가 가까왔으니 성경에 있는 사람들 이름이라도 열심히 외워야 하늘나라에 가서 금방 알아볼거 아니냐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 할머니 역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를 위해 예비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되어 언제라도 주님이 부르시며 아멘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원전 605년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은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의 길을 걷고 있던 예루살렘을 공격해 다니엘을 비롯한 왕족 소년들을 잡아갔고 기원전 579년에는 다시 수만명의 포로를 끌어갔으며 이때에 선지자 에스겔도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애굽의 세력을 업고 모반하려 하자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고 성전을 불태웠죠.

 

지금도 바벨론의 모습은 남아 있습니다. 비록 성벽과 벽돌의 화려한 에나멜칠은 벗겨졌으나 그 웅장한 규모는 보는 이를 압도하죠. 지금 현시대도 이렇게 대단한데, 지난날 쇠사슬에 묶여 끌려왔을 유다의 포로들은 어떠하였을까요? 예루살렘만 최고의 도성인 줄로 알았던 사람들이 그 엄청난 규모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바벨론에 들어가는 그 대로에는 2600년전에도 아스팔트가 깔려있었고 거대한 이슈타르 성문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라크의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자신을 지난날 예루살렘을 불살랐던 느부갓네살에 견주었죠. 그러나 성경은 오늘날의 타락한 인본주의 문명을 바벨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버린 바벨론 문명이 멸망할 것을 예고하고 있죠.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사람들이 하늘을 도전하는 바벨탑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모두 한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한 언어란 한 뜻 혹은 한 생각으로 환언될 수 있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반역하는 데 한 뜻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바벨탑을 완성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인류의 언어를 나누셨기 때문입니다.

 

바벨의 뜻은 "신의 문 또는 혼란케 하다"인데니므롯이 바벨 성읍에 '하나님의 문'에 닿을 탑을 쌓아 하나님과 대적 하려 하기에 하나님이 언어를 '혼란케 하여' 그 일을 중단시킨 것입니다. 결국은 완성되지 못하고 버려졌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다양한 언어 민족으로 나누고 세계로 흩으셨을 때, 인류는 더 이상 신에 도전하는 악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내 다양성과 구분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의 크기에 제한됨을 보여주죠.

 

그들은 '흩어짐을 면하자' 그랬죠. 죄를 짓는 일에 집단화가 되다 보니 죄의식이 하나같이 없었습니다. ‘똘똘 뭉쳐서 흩어지지 말자고 그랬습니다. 근데, 여기서 하나님의 유머를 볼 수가 있습니다. 심판의 방법이 아주 고차적이거든요. 보통으로는 성경에 보면 유황불로 멸하시든지 지진과 재난을 내리시든지 전쟁, 혹은 기근, 혹은 질병, 이렇게 심판을 내립니다만 오늘 본문을 보면 문화적 심판이죠.

 

언어를 혼잡케 하고 생각을 혼미하게 해서 스스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언어의 혼잡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멀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말은 무슨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가슴으로 하는 거죠. 서로 사랑하면 아무 말도 없이도 말이 됩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 말을 못해서 이해를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고 배려가 없어서 고성이 오가죠. 손지검이 오갑니다. 물건이 부서지고 평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게 되죠.

 

어느 외국인 박사가 한국인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한국인 여자는 고등학교밖에 못 나왔습니다. 그런데, 미국사람 아주 지식이 많은 교수님과 삽니다. 어떻게 살까?하고 어느 목사님이 본인에게 물어 봤습니다.

 

"너 영어 잘 못하지?"

"헬로우, -케이 밖에 못해요."

"그럼 어떻게 무슨 재미로 사냐?"

"목사님, 사랑을 말로 하는 겁니까!"

 

그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뭐 눈높이, 뭐 학력 높이 웃기는 말하지 마세요. 눈 높이 맞췄다가 끝나고 맙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그런데 하나님께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니까 그만 끝나고 말아 버리고 맙니다.

 

시날땅에서 잃어버린 언어, 잃어버린 축복을 되찾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는 삶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지상 명령을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했죠. 니므롯과 그 무리들은 언약에 불신하여 시날에서 바벨탑을 세우다가 언어가 혼란케 되었으나 베드로와 일백이십 문도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혼란된 언어를 방언으로 통일시켰습니다. (사도행전 2:4). 오직 우리는 성령으로만이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이해하면, 다양한 민족들의 구분이 생긴 후 하나님이 그 중 한 민족을 선택하는것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이죠. 그 선택된 민족을 통해 다른 민족들이 빛과 희망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죄 지은 인류-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그분의 구원을 경험한 자-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파트너가 될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주님, 인생을 되돌아봅니다. 내가 너무나 상처와 아픔에 골몰해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길을 제대로 못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삶의 동기가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과 당신의 영광을 위한 일인지. 주님, 이 시간에 나의 바벨탑을 내려 놓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피흘리기 까지 싸우며 주신 소명을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일세.

기쁘고 반가운 말씀 중에 날 사랑한단 말 참 좋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어긋난 딴길로 가다가도

예수의 사랑만 생각하면 곧 다시 예수께 돌아오리.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구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예수의 사랑을 찬양하리.

영원히 찬양할 나의 노래 예수의 사랑이 귀하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내가 또 예수를 사랑하네.

날 구해주시려 내려오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마귀가 놀라서 물러가네.

주 예수 이렇게 사랑하니 우리는 어떻게 보답할까.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