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교회/ 주은총목사
청년들의 결혼문제와 노아
본문: 창세기 6장(6:1~2)
내 백성이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하리라"(호 4:7)
"번성하다"[라바]는 수적으로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할수록, 다시 말해서 무언가가 수적으로 많아질수록 하나님께 범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의 번성함은 그들에게 "욕"이 되고 부끄러움이 됐습니다. 수적으로 많아져 "영화"를 누리는듯하나, 그 영화는 머지않아 "욕"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물질이 많아지고 풍성하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교만으로 인하여 "욕"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양적성장원리의 [라바]주의는 반드시 자기수치가 됩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이 많아지고 있습니까?
6장 1절에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죠. (창세기 1장 28절)에
그런데 인간의 타락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너무 남용하고 왜곡시켜서 그 축복이 저주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축복을 더욱 큰 죄악을 범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죠. 이것은 비극입니다.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동시에 이것이 잘못되면 큰 죄악이 생길 우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인류의 범죄가 (3장) 한 남녀의 차원에서 시작하더니, (4장)형제의 차원과 특정 집단의 차원(4:23~24)으로 진척되다가, (6장) 결국은, 온 인류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노아의 홍수는 범죄가 온 인류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인류의 죄악이 극에 달했을 때, 내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홍수사건은 셋의 족보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우리가 전에, 가인의 후예와 셋의 후예에 대해 나눠서 압니다. 가인의 후손은 살인을 예찬한 라멕의 노래로 끝납니다. 셋의 후예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에노스의 노래로 끝납니다.
노아시대는 심히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창6:2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했음을 볼 수가 있죠.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늘의 천사들을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셋의 후손들을 의미하죠. 아벨의 거룩한 계대를 이어줘야 할 셋의 후손들도 가인의 무리와 연합하여 어떻게 부패해진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셋의 후예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았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그들도, 살아가면서 점점 죄를 짓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남자에게 있어서의 집은 어디일까요? 남자의 집은 바로, 아내입니다. 남자 여러분들 그렇지 않은가요? 남자의 집은 바로 아내입니다.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여자의 쭈쭈빵빵한 큰 젓가슴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가정을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품의 특징은 모든 것이 다 용납된다는 것이죠.
아플수록, 연약할수록, 그리고 단점까지도 더욱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이 어머니의 품인 것입니다. 남성들은 사랑으로 완벽하게 소통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오르면서 어머니의 상징인 여자의 큰 가슴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밖에서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하고 위대한 성취를 하고 사회에 기여를 한다 해도 집에 들어오면 품을 동경하는 것이죠. 그 품에서 안식하며 내일 다시 인생의 전쟁터로 나갈 힘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찾아오는 것은 그 안식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식을 어디서 찾을까? 바로 아내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남자에게 있어서 집은 바로 아내입니다. 집안에 들어왔을 때 아내가 없으면 남자들은 허전해하죠.
그런데, 셋의 후손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 고백자들’이란 뜻입니다. 즉 믿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셈의 자손들은 마땅히 그들 자신의 순결을 보존하며 배신을 하지 않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지켜나가지 않았던 것이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죠. 단지 눈으로만 보고 곧 외모만으로 사람을 택한 것입니다. 몸매좋고, 얼굴이 예쁜여자, 영적인 내면이 중요한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에 홀라당 빠져 버렸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청년들에게 중요한 귀감이 되는 성경본문입니다.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죠. 선택을 잘못하면 인생을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 자신의 타락한 욕정이 시키는 대로 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의 충고나 의논도 없이 “그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 결과는 악하게 드러났습니다.
에서도 선택을 잘못해서 평생을 두고 후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리엘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창 26:34∼35)라고 기록하고 있죠. 에서가 헷 족속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는 부모 마음에 근심이 됐습니다.
후에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떠납니다(27장). 이때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28:1)라고 합니다.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28:8)는 말도 이야기도 나옵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 아내들이 아버지한테 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모와 영적인 코드가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왜요? 처음부터 내면과 영적인 면을 본 것이 아니라, 육적인 모습과 외적인 아름다움을 보았기에 부모와는 삐거덕거리고 전혀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가나안 여인이 아닌 큰 아버지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삼습니다.
부모 된 자는 하나님 중심의 영역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야 하고 자녀들을 가르쳐야 하죠. 이삭은 에서와 이방여인의 결혼을 반대했어야 했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내 리브가를 택한 방법대로 에서의 신붓감을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이삭은 후에 그 사실을 깨닫고 야곱을 라반의 집으로 보냅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그 사랑 위에 서리
그 사랑 위에 서리
여자의 위력이 어떠한 지에 관한 예화가 있습니다. 선량한 인품을 지닌 부부가 어쩌다가 이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곧 재혼했지만 안타깝게도 악한 여인을 만나게 되어 그는 새 아내와 똑같이 악한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내도 곧 재혼을 했는데, 역시 악한 사나이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새 남편은 아내와 똑같이 선량한 사람이 되었죠. 암튼,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하고 아내도 아내 노릇을 바로 해야 남편을 성공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악한 여자로 가장 유명한 여자가 누구인가요? 또한 성경에서 가장 첩과 여자들을 1000명씩이나 둔 왕은 누구일까요? 바로 이세벨과 솔로몬입니다.
아합왕은 이방 여인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서 바알신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인해서 나라가 고난을 겪게 되고 국민이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고 그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나요? 여자 하나 잘못 들어옴으로 인해서 가정이 망하고 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솔로몬 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 역시 나이가 늙으니, 이방 마누라들을 따라갔습니다.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결혼에 실패한 왕들을 보면서, 우리의 자녀들이 가정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해야하는 지를 느끼게 됩니다.
신명기 7장 3-4절에 보면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로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짝을 짓는 그것부터가 잘못되었는데 하나님은 이와 같은 결혼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며, 그 자녀들은 어느 쪽을 닮을 것인가를 보기 위해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악한 쪽을 닮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했죠.
그들은 남을 압박하고 폭력을 가하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장부들이었고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위대한 자가 악해질 때 죄악은 커지는 법입니다. 절대 권력이 절대 타락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산 자들의 땅에서 힘을, 횡포를 휘두르게 되었죠. 소외되고 힘이 없는 자를 무참하게 짓밟고, 다스리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커졌다는 것은 민족과 모든 지역에 죄가 범람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습니다. (창6:5)
하나님이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생령은 [네페쉬]입니다. 생령이란, 육체만 있는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어 넣어주신 영이 함께 하는, 영과 육이 공존하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흙의 먼지와 같은 하찮은 존재가, 왕 같은 존재인 [네페쉬]로서의 존재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생각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이 하나같이 악한 짐승만도 못한 자들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서 뭐라합니까?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이 자꾸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을 하니 하나님이 떠나시기로 작정을 합니다. 육욕적이며 음탕하고 타락한 그들을 보며 함께 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한결같이 여자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며 쾌락에 몸을 맡기니 성령이 함께 하기를 거부한 것이죠. 사람이 오랫동안 세상에 집착하여 성령에 반대하고 육체의 편을 들게 될 때, 성령은 마땅히 그 역사를 그만두고 더 이상 함께 하지 아니합니다.
(3)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나님이 물로 쓸어버린 것은 생령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다름없는 육체가 되버린 존재를 쓸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홍수 사건의 전말입니다.
사실, 노아홍수사건은, 실제로, 물로써 심판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창(7:18)에 보면,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넘치매)”
여기서 “창일하다,/ 넘치다”는 동사 [가발]은, 혼돈의 세력이 창조의 힘보다 우세하여 “싸워 이기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창조 이전의 혼돈의 상태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창(8: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에서 “물러가다”는 동사 [슈브]는, 단순히 물이 빠졌다는 의미보다는, 혼돈의 세력이 후퇴하여 제자리도 돌아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온갖 죄악과 악한 혼돈의 세력이 몰려왔으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이 물러나고,
이제 다시 새로운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땅으로의 새 창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 거룩한 밤
(6장 1절로 7절까지는,)
지금, 혼돈되고 흑암이 깊은 시대로 다시 후퇴해버린, 짐승과 다름없는 우리 인생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심판의 결심을 굳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8절에 이르러 대 반전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그러나”입니다.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모든 자들이 여호와의 은혜로부터 제외되었는데, 오직 한 사람, 노아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람의 간사함과 죄악성은 실로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시 혼돈의 세계로, 흑암의 세계로 되돌릴 정도로, 사람들의 간악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죠.
하나님이 “한탄했다”는 표현은 굉장히 인격적이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심중이나 하나님의 의중을 이 땅의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있겠습니까만, 지금 이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한탄했다”는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발등을 찍는 것입니다. 그래서 싹 쓸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러나”라고 하는 이 말. 이 말은, “한탄했다”는 표현이 인격적인 표현이다 못해, 절대자가 해서는 안 될, 다소 실망적인 언어라면, “그러나”라는 말은, 한탄했다는 다소 실망적인 의미를 불식시키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총이 담긴 새로운 창조에 대한 기대감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한 단어입니다.
아무리 육체가 되어 타락했을지라도, 노아만큼은 달랐습니다. 노아의 이름의 뜻은, “위로”입니다. 노아의 뜻은, “위로요 안식”입니다. 노아는 저와 당신에게도, 기독교 역사에도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여호와의 눈에 호의를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쉬운성경>에는, “하지만 노아는 여호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아가 어떻게 그처럼 의인이 되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었겠는가. 그 비결은 오직 하나, 히브리 기자는 그것을 가리켜 '노아의 믿음'이라 했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노아를 가리켜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죠.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세상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라라고 했죠.
물론 그들은 홍수의 징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홍수에 대한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었죠. 물론 홍수의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홍수의 경고를 그대로 믿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것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그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그의 희생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해 보세요. 물질의 희생, 시간의 희생, 노력의 희생만이 아니라 많은 수욕도 참았습니다. 믿음에는 희생이 따르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노아를 기억하셨습니다. (창8:1)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악했을 때 노아만은 홀로 자신의 고결함을 지켰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차다크]로서, 법률적 개념이 아닌 신학적이 개념, 즉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완전함”, [타밈]은, 흠이 없는 희생제물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제의적 용어이죠.
따라서 노아가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윤리적 의미의 완전함을 뜻하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흠 없고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신 것이죠.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려고 애썼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미래에 대해 더 당당하죠. 그에 비해 여자들은 미래가 애매하게 보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결국 ‘부엌과 침실’로 귀착될 거라는 걸 아는 것만 같습니다.
추석이 지났을 때 어느 여자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녀는 어른들이 참 좋아하는, ‘요즘 저런 며느리가 어디 있냐’는 소리를 들으며 ‘효부’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시집 밭에서 고구마 500개를 심은 적도 있습니다. 맏며느리의 도리를 잘 수행한다고 칭찬 듣지만 정작 그는 “이 세상에서 며느리는 시집 종이야!”를 외쳤습니다.
처음 인사 온 ‘아들의 여자’가 일복을 가져와 갈아입고 부엌에 들어가 능숙하게 일하더라며 자신이 야무진 며느리를 ‘얻었다’고 자랑하던 어느 시어머니가 생각이 납니다. 결혼 초기에 시집 밭에서 고구마 500개를 심은 그녀는 친구에게
“우리는 아침부터 차례상 차리느라 옷도 제대로 못 갖춰 입고 바빠 죽겠는데, 남자들은 느즈막하게 일어나 몸단장들 하더라.”
여성의 노동을 갈아 넣어 유지되는 전통... 제사, 어버이날, 생일 및 각종 경조사 등 굵직굵직한 날만 꼽아도 며느리 역할을 요구받는 날이 일 년에 한 두 번이 아니죠. 옛날 여자들은 얼굴도 모르는 조상을 위해서 열심히 밥을 지었습니다. 그 시절, 가장 어른으로 대접받는 여성은 바로 ‘아들의 엄마’입니다. 바로, ‘시어머니’죠.
결혼생활이 30년 이상 지난 여인의 얼굴 속에는 가부장제의 복잡함이 응축되어 담겨 있습니다. 남편에 대한 환멸로 가득하여 ‘능력 있으면 혼자 살아’라는 말을 젊은 여성들에게 하면서도, ‘아들의 여자’에게는 180도 다른 시선을 던지죠. ‘요즘 추세의 젊은 여자들’ 때문에 순진하고 성실한 내 아들이 얼마나 뼛골 빠지게 고생할까 걱정하죠.
그러나 어느 남자나 예외 없이 여자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왜요? 남자의 집은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집으로 들어오고 싶은 한 남자가 있습니다.
결혼해서 집사고 자녀 교육시키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앞만 보고 일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참자! 내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다 끝장이야! 자식들과 마누라를 위해서라도 참아야 하느니라!’ 하면서 돈 버는 기계로 자처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한눈을 팔았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었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광야를 돌다가 거의 다 끝나갈 즈음에 이방 여자들의 춤과 노래, 섹시한 몸매에 넘어지듯 그렇게 한순간에 넘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리려고 하니, 나이가 더해 가면서 자신이 너무나 멀리 와 있음을 통감하면서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죠.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내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일을 하면서 자녀들을 기른 일들을 추억합니다. 자신의 한 순간의 외도로 에덴동산과 아내, 가족, 경제적 파탄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가까운 이들에게 너무나 큰...쓰나미 같은 상처들 남겨 주었습니다. 돌이키기에는 늦은 것 같습니다.
가정이 그립습니다. 안식이 그립죠. 그때는 아내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정욕이 강한 때였습니다. 내 요구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혈기와 절제하지 않는 분노,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선교헌금도 하고, 나름대로 봉사를 하는 것이 기뻤습니다.
현대의 비극은 여인들이 품이 되기를 거절하는 데 있습니다. 여인의 가장 소중한 존재 이유는 넓은 품이 되어 주는 것이죠. 안식할 수 있는 풍성한 품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에게 저지른 혈기, 이기심, 분노, 외도, 폭력 등을 생각하니 도무지 받아 줄 수가 없습니다. 여인이 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그 순간에, 가정은 품이 없고 안식이 없는 곳이 되어 버리죠. 사랑받지 못한 남자들은 거리를 헤메게 되고 인생을 떠돌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울증과 심장질환을 앓게 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노아입니다. 당신은 위로이죠. 하나님과 후대의 사람들에게 “위로요 안식”입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여호와의 눈에 호의를 얻은, 여호와의 마음에 드는 노아입니다.
기도 : 하나님, 내가 좋아서, 내 눈에 보기 좋아서 배우자를 선택하지 말게 하시고 가정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택을 하게 하옵소서. 부모 된 자로써 자녀의 결혼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부모가 되게 하옵소서. 이 세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는 노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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