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Iw7LEc4W-Wk?si=8IOPI4rH9IIj6FGt
주은총목사/ 꿈이있는 교회
시편8편/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과테말라 고산지대에 사는 인디언들에게는 '걱정인형(Worry Doll)' 풍습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에게 1.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인형을 만들어 주죠. 아이는 잠들기 전에 그 인형에게 속상한 일을 말하고 베개 밑에 넣어둡니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의 걱정을 걱정인형이 가져갔다고 믿고 잠을 잡니다. 다음 날 아이는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죠.
사람들은 육체적인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다 모든 시간과 정력을 투자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는 나름대로 성취감을 얻고, 어떤 이는 좌절과 분노의 패배감으로 세상을 저주(詛呪)합니다. 삶의 평안을 모르고 살아가죠.
항상 조급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절망스러움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승패를 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는 새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이 세상에서 모든 승패를 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할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에게 1.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걱정을 가져가는 인형을 만들어 주듯, 예수님도 우리의 걱정을 가져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시편 3~7편은 탄원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부르짖는 기도인 반면, 시편8편은 즐거운 찬양의 노래입니다. 시편에서 등장하는 최초의 찬양시죠.
특히, 시편 6편, 7편, 8편을 연결해서 보면 다윗이 그에게 닥친 걱정과 갈등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시편6편에서 다윗은 갈등감정을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6:2)"
다윗은 뼈마디가 쑤실 정도로 심한 갈등감정을 경험합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지만 다윗은 그 갈등감정을 하나님께 가져가죠. 하나님께 ‘나를 고쳐주소서’하고 간구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다윗과 같은 갈등감정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죠.
그 다음 시편7편에서, 다윗은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7:17)"
다윗은 갈등감정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죠. 다윗의 갈등감정은 그렇게 극복됩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의 비결이었죠. 마침내, 시편 8편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깨어난 다윗의 아름다운 고백을 듣게 됩니다. 승리의 감정이 온 몸과 영혼, 환경 그리고 수 천년의 시간을 타고 흐르며 전율하죠.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기도를 통해서 다윗의 번뇌와 갈등의 감정은 승화되면서 세상은 아름답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보입니다. 세상은 그대로이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거죠. 내가 영적으로 강건해야 세상은 아름답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보입니다. 번뇌와 어두움을 다윗을 지배하지 못하고,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움도 가득합니다.
시편8편의 표제가 "다윗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깃딧’은 포도주나 올리브기름을 짜는 ‘틀’을 뜻하는 ‘가트’에서 나온 말이죠. [깃딤에 맞춘 노래]라는 말은 ‘포도주 틀을 밟는 동안에 부르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세 개의 시편 8, 81, 84편에는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포도주 틀을 밟는다’는 것은 포도를 수확해서 포도주를 담기 위해 포도주 틀에 올라가 밟는 것으로, 이것은 추수 때 행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즙을 얻기 위해 포도를 밟을 때는 온 가족이 함께 들어가서 맨발로 밟았습니다. 맨발로 밟은 것은 씨가 깨지면 포도주가 쓴맛이 나기 때문에 포도씨가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포도를 밟는 것은 씨족 공동체로 이뤄진 마을에서 축제 같은 행사였습니다. 포도를 밟는 틀 위로 큰 줄이 있었고, 포도를 밟는 사람들은 그 줄을 두 손으로 잡고 포도를 밟으면서 시편의 노래를 쩌렁쩌렁하게 불렀습니다. 그 노래가 바로, 시편 8편, 81편, 84편이었죠.
시편에 깃딧에 맞춘 노래는 모두 밝고 경쾌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휘자나 선창자를 의미하는 "영장"에 맞춘 노래이기 때문에 모든 청중들이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시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로 간주하시고 사명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포도를 밟으며 포도주를 만들어 내는 기쁨으로 함께 부르는 시편은 우리나라의 노동요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노랫소리는 옆 마을까지 들리고도 남을 정도였다고 하죠.
포도밟기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포도밟기 하며 부른 노래가 워낙 쩌렁쩌렁하고 커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열국을 심판하는 소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8편은 전체 시편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찬양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윗이 먼저 노래했고, 후대 이스라엘 회중이 예배 중에 이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감탄사로 시작된 이 노래가 감탄사로 마칠까. 다윗이 보았던 아름다움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찬양8편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시편 8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의 시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광대한 우주 속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을 존귀하게 창조하셨는지를 깨달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죠.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하고 공해로 오염된 요즘은 도시의 밤하늘을 쳐다보아도 옛날처럼 별이 초롱초롱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공해 때문에 별이 잘 안 보이죠. 또한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은 핸드폰, 유튜브, 게임, 세상 문화 등에 빠져서 밤하늘을 쳐다 보는 일을 잊고 삽니다.
땅만을 쳐다보고 살면은 근심과 절망, 불안이 우리를 떠나지 않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정치만을 바라볼 때 눈살이 찌푸려지고 한숨과 탄식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생각은 좁아지고 짜증과 불만만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죠.
그러나 하늘을 쳐다보면 우리의 짧은 생애에 비하여 영원한 삶을 생각할 수 있고, 이 좁은 땅 대신 무한한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은 넓어지고, 불안은 사라지며, 뭔가 확 뚫리는 상쾌함과 하늘이 주는 감동을 맞이 하죠.
다윗은 밤 하늘에 쏟아질 것처럼 찬란하게 뿌려진 별들을 바라보며 거기서 위대한 하나님과 웅장한 우주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을 깨닫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8:1,3,4)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늘 기도의 자리를 지키시는 멋진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제 카톡과 전화번호에도 ‘멋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등록이 되어 있죠.
어쩌면 따님의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주셔서 그 일로 인하여 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곁에 머무는 축복을 받았는 지도 모릅니다. 그 분의 딸이 정신병원을 10여년동안 드나 들었는데. 성전만 왔다 갔다 하는 시간들이 갑갑하고 힘들었던지, 마실을 갔다가 길을 잃어 버렸죠.
버스를 탔는데 반대편으로 갔는가 봅니다. 밤 1시가 되어도 안 들어왔습니다. 딸에게 지나가는 행인에게 부탁해서. 마포지구대에서 기다리라고 했죠. 차를 가지고 있는 K목사님이 가셔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분이 딸의 일로 얼마나 많이 놀라셨을까요? 그분과 딸을 위로해 드리고 싶어서 그 다음 날이 ‘주일’임에도 불구하고 1시간 거리인 낙성대로 달려 갔습니다. 셋이서 ‘차돌된장 찌개’를 먹었습니다. 따님은 제가 어떤 말을 할까? 자신의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할까? 하며 불안해 하는 눈빛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따님에게 말했습니다. “많이 놀랬죠. 저도 그랬습니다. 예전에 공황장애를 앓아서 지하철을 타면 내리는 곳도 못 내려서 멍한 상태로 1시간도 더 거꾸로 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버스를 탔으니. 목적지와 다른 방향으로 갔으니 얼마나 더 놀랐겠어요?”
그 말에 그녀는 마음에 위로를 받았는지, 평안해 졌습니다.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영산수련원에서 1박 2일로 쉬고 오기도 했죠. 그날 그분과 낙성대 공원을 함께 산책을 하였습니다.
늘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 있으려고 몸부림치는 멋진 하나님의 친구. 그 분의 아픈 마음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일 준비도 내려놓고, 매주 나가는 토요전도도 내려놓고 달려왔죠. 넋이 나가고 지친 마음과 고단함을 함께 들어주고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먼 길을 달려오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8편에서 이런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어느 날 밤 다윗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하늘에서는 달과 수많은 별빛이 소낙비와 같이 그의 눈에 쏟아져 들어왔죠. 다윗은 그 순간 자신을 향하여 쏟아져 내려오는 관심과 애정 어린 주님의 눈빛과 마주쳤습니다.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그 많은 별들 가운데 하나님의 시선이 이곳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날 밤 자신의 인생을 주목하시고, 어린아이 돌보듯 늘 동행하시는 주님의 그 시선은 바로 아버지의 눈빛이었습니다. 그는 노래를 불렀죠.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지만 이 시편은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다윗은 오늘 우리의 안내자로서 하나님이 그저 우리를 바라만 보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죠. 그 날 다윗이 보았던 주님의 눈빛은 실제 죄악 된 이 세상의 어두움을 뚫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 되어주셨습니다. 가장 높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단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심지어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나를 살리시려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죠. 이 세상이 이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별 빛속에 빛나는 주님
별빛 속에 빛나는 주님 바람 결에 말씀 하시네
하늘과 땅 다스리는 주 그 무엇일까
주의 탄생 축하하리라 그의 백성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주님 오셨네 그 무엇일까
주의 얼굴 대하기까지 주의 은혜 의심하였네
나를 보호하시는 주를 나 지금 알았네 내 곁에 계시면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
나의 곁에 계시는 주는 모든 것 되시네
다윗은 시편 8편 2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8:2)
다윗이 이 말을 한 것은 그 마음이 교만하여 눈이 가려져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지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찬양한다는 뜻이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보지 못하고 대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고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실 때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어린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찬양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읽은 이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예수님은 다윗의 오늘 시편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마21:15-16).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대신하여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을 통해서도 찬양하게 하시며, 대적들을 잠잠케 하셨죠.
인간은 본질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교만해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죠. 그러나 정말 인간이 그 앞에 서면 자기 스스로를 겸허하게 생각하고 작게 생각하는 경우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은 자연 앞에 설 때 자신을 작다고 여깁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미국에 있는 오렌지 카운티에 어학 연수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연수과정을 마치고 미국 서부여행을 갔죠. 그랜드 캐넌에 갔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정말 기가 막히게 그 광활한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펼쳐지자 탄성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사가 술술 흘러 나왔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이 곡은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러시아 등지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적이 있는 스튜어트 하인 목사가 1절부터 3절까지는 보베르그가 쓴 노랫말을 영어로 개작하였고 4절은 자신이 작시하여 덧붙인 곡이라고 하죠.
하인 목사가 이 가사를 쓸 때, 그냥 막연한 영감으로 쓴 것이 아니라 1절부터 4절까지 각각 다른 지역에서 만난 아주 절박한 실존적 상황에서 썼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1절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는 그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바디아 산골 마을에서 엄청난 뇌우를 만나 하룻밤을 피신하고 있을 때 지은 것이고,
2절은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은 루마니아의 부코비아 산악지대를 방문하였을 때 숲속에서 한 무리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듣고 쓴 것이라고 합니다.
4절 "내 주 예수 세상에 다시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는 부분은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피난 온 폴란드인들이 "우리는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였을 때 영감을 얻어 썼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 서면 작아지고 겸손해 집니다. 위대한 자연과 인간의 고난이 있는 실존적 상황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기대감으로 승화시키는 영혼의 찬양이 흘러 나옵니다.
둘째로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작아지고 겸손해집니다. 제 아무리 세상을 호령하는 군왕이라도 죽음이 찾아오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인간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어느 황제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보면 황제가 죽음의 선고를 받는 순간에 그 황제의 위엄도, 그 호령도, 그 품위도 온데 간데 없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죠. 인간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작다고 여기게 됩니다.
셋째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작아집니다. 자연과 죽음과 하나님, 이 세 존재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고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장엄한 자연을 마주하고, 그 자연을 만드신 더 위대하신 하나님과 마주하고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가 얼마나 편차가 심하며 하나님의 스케일과 인간의 능력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찬양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그는 하나님이 지으신 광활한 우주를 밤에 바라보면서 감탄합니다(3절).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무의미성을 발견하죠.(4절). 유한(有限, Finitum)이 무한(無限, Infinitum)앞에 서게 된 셈이고, 순간적인 것(The transient)이 영원한 것(The eternal)앞에 서는 셈이고, 영속적인 슬픔과 염려 속에 살아서 끝내는 재로 변할 인간이 평화와 굳건함, 굳센 하나님의 질서 앞에 서서 다윗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죠.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심각하게 인식합니다. ‘사람’으로 번역된 ‘에노쉬’는 나약하고 덧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허약한 인간을 가리키죠.(시 9:20; 90:3; 103:15). 이미 우리가 창세기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또한 ‘인자’로 번역된 ‘벤-아담’은 어원상 땅의 자식으로, 흙으로 빚어져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허무한 인간을 말하죠.(창 2:7; 3:19). 결국, 인간은 허약성(에노쉬)과 허무성(벤-아담)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무의미한 인간을 늘 ‘생각하시며’(자카르), 항상 ‘돌보신다’(파카드). ‘자카르’는 하나님이 인간을 마음에 두고 계심을 말하고, ‘파카드’는 하나님의 따뜻한 심방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하찮은 인간을 늘 기억하고 항상 돌보시죠.
다윗은 자연의 웅장함과 신비를 보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무기력한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자연을 보았을 때는 다른 결론에 도달한 사실을 볼 수 있죠. 대개 다른 종교는 자연을 숭배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데 비해 다윗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었죠. 그의 통찰력이 엄청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편8:4-5)
고대 근동의 인간창조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노동하지 않는 신들의 노동을 대신하고 그들을 시중들기 위해 신들의 노예로 창조됐습니다. 식모요, 파출부요, 대리운전자요, 허드렛 일을 하는 신들의 노예로 창조되었다고 하죠. 그러나 성경의 인간은 하나님과 거의 동급(BeinaheꠓGott)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창조되었습니다(창 1:26~27). ‘영화’(카보드)와 ‘존귀’(하다르)는 왕에게 속한 것이죠(시 21:5). 인간은 왕과 같은 존엄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도록 위임하셨죠.(6절).
그렇다면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자연의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삶과 가정을 책임지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편8:6-8)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적인 무의미성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인간의 본질에 근접하죠. 인간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연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보는 자입니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자연히 죽습니다. 자연이 살아야 인간도 살죠.
사람은 땅(소와 양과 들짐승)과 하늘(공중의 새)과 바다(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됩니다(7~8절). 이러한 다스림은 착취가 아니죠. 이는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사랑과 보살핌의 의미를 담은 돌봄입니다.
오늘날 자연환경은 인간들의 죄와 이기심과 탐심으로 인하여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불어 같이 살라고 하신 동물과 식물들이 하나씩 멸종되어가고 있죠. 땅과 바다, 하천과 지하수와 대기는 갈수록 화학물질과 중금속으로 오염되어가고 있습니다. 아, 심각합니다. 가까운 데서도 오염의 정도를 실감하죠. 서울 시내 곳곳에서 여자든 남자듯 가리지 않고 여기 저기서 담배를 피워댑니다. 매일 성전으로 오는 저도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공기가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 모든 생물체가 고통스러워 신음하고 있죠.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의 말씀대로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 동물과 식물, 어족들을 인자와 긍휼과 친절과 은혜로 대해줄 것을 피조물들은 고대한다는 것이죠.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 솜씨와 인간을 귀중히 여기신 은총을 찬양했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저 하늘과, 주께서 매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까지 생각해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돌보아 주십니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시편 8편의 1절과 9절은 같은 선언으로 시작하고 끝나는데 이를 수미상관법이라 합니다. 반복을 통해 뜻을 강조하고 처음과 끝의 운율과 균형을 이루어 감동을 더하는 표현 기법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절)
주님,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되찾게 하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1:17-23)
내 아버지 그 품안에서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주 손길로 내 삶을 안으시니
그 평강이 나를 덮습니다
나 비록 넘어지며 흔들리지만
주 내 안에 거하며 나를 붙드시니
내 생각을 주께로 돌리고
주시는 평강의 옷을 입습니다
주 약속 안에서 내 영혼 평안해
내 뜻보다 크신 주님의 계획 나 신뢰해
두려움 다 내려놓고 주님만 의지해
주 안에서 내 영혼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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