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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창세기

주은총목사/ 창35장/ 헤브론-'하나님과 교제하는 땅'

by 주은총목사 2025. 4. 24.

https://youtu.be/oC0Rm71q9V8?si=vBi4l6pRUqjmMi0e

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창세기 35/ 헤브론-'하나님과 교제하는 땅'

 

어릴 적 살았던 동네에 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다시 찾는다는 건 익숙함과 새로움을 동시에 경험하는 일입니다.

 

야곱은 20년 전 자기 인생에 남겨진 흔적을 찾아갑니다. 하나님이 벧엘을 다시 찾아가라고 하셨기 때문입이죠. 야곱의 가슴 속에 남은 흔적은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머릿속으로 벧엘을 수도 없이 그려보았을 것입니다. 벧엘의 길바닥에서 잠을 자던 날은 자기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외롭고 불안하고 막막했던 인생의 밑바닥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곳에서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항상 뇌리에 맴돌았죠.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외삼촌 라반의 말도 안 되는 갑질을 견뎠습니다.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눈물과 함께 그리움을 삼켰죠.

 

야곱은 환난때에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이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해 자기가 잠잘 때 베개로 삼았던 돌을 세워 기름을 붓고 그곳을 벧엘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서원하였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糧食)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平安)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殿)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28:22)

 

그러나 야곱은 이 서원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20년 동안 하란에서 살 때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복을 누렸습니다.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떠났는데 이제는 어엿한 가장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는 삼촌과 어깨를 겨룰 수 있을만큼 성공했습니다. 가장 두려워하던 형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세상 일에 분주하기만 했습니다.

 

스테판 아터번이 쓴 <"사랑을 잃지 않고 일에서 성공하는 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읽으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하는 책이죠.

 

작가의 메시지는 진정한 성공은 어떤 것을 실패하거나 희생하고서 얻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진정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명과 돈, 그리고 인생의 의미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죠.

 

작가가 말하는 참다운 성공이란 직장에서도 잘해야 하지만, 가정에서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등한히 하고, 가정을 희생하고서 돈을 버는데만 성공했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는 거죠. 아내에게 무관심하고, 자녀들을 내팽개치고, 그저 자기 일에 중독되어서 일만 하는 사람은 인생의 성공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터번이 내린 성공에 대한 몇 가지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느 한 분야에서 승자가 되었다고 해서 인생 전체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기초가 올바르지 않으면 상층부에서 성공을 거둘지라도 하층부에서 일어나는 균열을 막지 못한다.

 

셋째, 성공만을 생각하는 사업가에게는 충분한 성공이 없다.

넷째, 인생의 우선 순위에 혼란이 오고 든든한 기초가 없을 때 공허감이 밀려온다.

다섯째, 성공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대가가 모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손실이 너무나 크다.

 

우리는 성공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올바른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상급으로 성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외면하며 세상따라 살던 중

교만 욕심 죄악으로 내 뜻대로 방황하다

넘어지고 쓰러져서 세상 사람 조롱할 때

주여 어디 계십니까 이 죄인 울고 있어요

사랑하는 자녀야 내 너를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까지 가시면류관 썼단다

 

탕자처럼 길을 잃고 절망 속에 헤매고

시기 질투 죄악으로 내 뜻대로 살아가다

찢어지고 병들어서 세상 사람 외면할 때

주여 어디 계십니까 이 죄인 찾고 있어요

사랑하는 자녀야 내 너를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까지 가시면류관 썼단다

 

가시밭길 죄악 길에 병든 몸 소중하다고

세상 부귀 좇아가다 나의 영혼 썩어갈 때

만신창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서

주님 어디 계십니까 이 죄인 만나주세요

사랑하는 자녀야 내 너를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까지 십자가에 달렸단다

 

사실 벧엘이라는 곳은 야곱의 인생에서 아주 밑바닥을 의미합니다. 그는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가진 것 하나 없이 홀로 도망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빈들에 쓰러져 잠들었고 바로 그곳이 벧엘이었죠. 바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단순한 하나의 장소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벧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무력하며 낮은 위치를 의미하는 곳이었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 야곱을 만나시고 놀라운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엄청난 약속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낮은 그 자리에서 가장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과 같은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 섬기는 것. 하나님을 교제하는 것'을 미리 보여주셨죠.

 

하지만 야곱은 벧엘로 돌아가기를 싫어하고 꺼려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벧엘 하면 생각나는 것이 옛날 고생했던 시절. 힘들었던 순간. 가장 낮아졌던 초라하고 쫓기던 때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죠. 벧엘로 가기를 꺼려하였습니다.

 

야곱은 세겜 성 근처 숙곳에서 땅도 사고 집도 짓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약속과 서원을 잊어버린 채 10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위험에서 지켜주시고 돌봐주심은 물론 자녀와 물질의 복을 주셔서 거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오게 하셨죠. 그러나 야곱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고 자기 힘으로 성공한 줄 알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기를 위해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한 우리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었죠.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 이기고 풍성함을 누리며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은혜에 대한 감격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요? 환난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했던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 있나요?

 

야곱은 세겜에서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성폭행 당하는 비극을 경험했고, 그에 격분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남자들을 다 쳐 죽이고 도시를 초토화시키는 더 큰 비극을 경험하죠.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죠.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35:1)

 

지금 야곱은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마음이 가장 가난했던 때로 돌아갑니다. 벧엘로 올라가죠. 삶에 주렁주렁 걸려 있던 복잡한 장신구들을 다 떼어버립니다.

 

야곱은 먼저 가족을 포함해 자신과 함께한 이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라고 촉구하죠. 밧단 아람을 떠나올 때 야곱의 아내 라헬은 아버지 신상인 드라빔을 훔쳐와 지니고 살았습니다. 세겜에 거주할 때도 아내와 아들, 자부와 손주가 이방 신상을 하나씩 들여왔습니다.

 

세겜의 문화에 젖어 든 것이죠. 그 문화가 어떤 것인가요? 성경은 탐심이 곧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보다 돈을 더 무섭게 생각하고, 얼마나 물질을 탐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은 세겜과 같은 곳입니다. 물질문명과 향락이 발달한 세상에 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마음에 우상이 들어찹니다. 얼마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문화가 퇴폐적인지. 눈을 어디다 둬야 할 지를 모릅니다. 여기저기 음란한 풍속들이 한 가득이었죠. 예수 믿지 않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했던 약속이나 감사를 잊을 때도 많습니다. 이것이 세겜의 생활입니다.

 

인간은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자신의 중심이 달라집니다. 자녀와 종이 입은 옷을 가만히 보니, 모양새가 벌써 세겜 사람이 다 됐습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35:2)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5:3)

 

오늘 우리도 벧엘로 올라가려면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에 생긴 이방신을 제해야 하죠. 생활습관이 잘못된 것을 고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바른 위치에 두어야 할 것은 바른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 최우선순위를 두는 것이죠. 나머지는 그 밑으로 들어가면, 정말 삶이 조화를 이룹니다. 벧엘에서 야곱을 참된 예배자로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야곱이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셨죠. 예배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우선순위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이것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바로 그것 바로 그 우상을 제거하십시오. 무엇이 나를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답답하게 만들고,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시게 만들었는지, 그 더러운 습관과 취미를 제해 버리고 벧엘로 올라가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불신자 가수의 마음을 뒤흔든 노래

가슴 절절한 회개의 찬송으로 나의 죄인 됨과 구원의 기쁨,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옴을 잘 표현하는 <나 주를 멀리 떠났다.이제 옵니다>라는 이 찬송은 윌리엄 커크패트릭(W. J. Kirkpatrick)이 캠프 집회에서 찬송을 인도하고 있던 1892년에 만들어집니다.

 

그 집회에서 독창자로 나선 청년은 비범한 음성을 가졌으나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았습니다. 커크패트릭은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되기를 바랐으나 도무지 진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회심에 대한 커크패트릭의 소원은 날로 더하여 하루는 새벽까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위해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 청년이 하루속히 죄를 깨닫고 다시 태어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날이 오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한 시가 떠올랐습니다. 그 시는 끝까지 이어질 정도로 그의 마음에 떠올랐는데, 하나님께서 독창자 청년에게 주시는 노래임을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에 곡을 붙여 늘 하던 대로 그날 저녁 독창자에게 부르라고 건네주었습니다.

 

청년은 모든 정성을 다해 힘 있게 그 찬송을 불렀는데, 순간 그의 마음은 주님 앞으로 점점 인도되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이제 주님 앞에 올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여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깨달아 주님께 기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음악교수였던 커크패트릭은 1838년 태어나 1921년 필라델피아에서 세상을 마칠 때까지 늘 찬송과 함께했습니다. 1921년 어느 날 밤, 밤이 늦었는데도 커크패트릭 교수가 서재에서 나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달려가 보니 남편은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커크패트릭은 서재 의자에 앉아 찬송가를 쓰다가 마지막 절을 마치지 못하고 연필을 손에 쥔 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한국어 찬송가 가사

1.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2. 그 귀한 세월 보내고 이제 옵니다

나 뉘우치는 눈물로 주여 옵니다

 

3. 나 죄에 매여 고달파 이제 옵니다

주 크신 사랑 받고자 주여 옵니다

 

4. 이 병든 맘을 고치려 이제 옵니다

큰 힘과 소망 바라고 주여 옵니다

 

5. 나 바랄 것이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날 위해 돌아가심만 믿고 옵니다

 

[후렴]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신령과 진정으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예배를 드리는 것. 하나님이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내 몸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야곱은 전제물을 붓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는 것이죠. 야곱은 어떤 사람이며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인가요? 야곱은 육의 사람, 땅의 사람이었다면 이스라엘은 영의 사람, 하늘의 사람이었습니다. 육의 사람 야곱이 영의 사람 이스라엘로 바뀌어지는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할 변화이죠.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9-10)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거죠. ‘야곱즉 남의 뒤꿈치를 잡는 사람, 비열한 사람, 속이는 사람, 사기꾼의 삶을 이제 살아서는 안 되고, ‘이스라엘즉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긴 사람, 특히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벧엘에서 제단을 쌓은 야곱에게 뭐라고 하시나요?

 

엘 샷다이즉 전능하신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복은 아브라함 때나 이삭 때나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 물론 창세기 122절의 축복과도 같은 거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1;22)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이름과 자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35:11-12)

 

19719, 영국에서 정주영 현대회장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갈색머리 신사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는 A&P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이었다. 정 회장은 롱바톰 회장에게 조선소를 지을 돈이 필요하다. 버클레이즈 은행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도움을 청하였죠.

 

그러나 롱바톰 회장은 현 상황에서 한국의 회사가 조선 사업을 한다면 누가 선박을 사줄 것이며, 돈을 갚을 능력과 잠재력을 누가 인정하겠느냐? 조선 사업을 한다는 것은 당신의 환상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정 회장은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죠.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짜리 지폐였습니다. 그는 당신네 영국의 조선역사가 1800년대부터라고 알고 있는데, 우리는 벌써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군을 물리쳤소.

 

다만 쇄국정책으로 인해 산업화가 늦어졌지만 우리는 조선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소.”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롱바톰 회장은 버클레이즈 은행에 추천서를 써 주어 차관도입에 숨통을 틔게 해주었고, 그것이 밑받침이 되어 현대조선소가 기공되었습니다. 정 회장이 롱바톰 회장의 냉대에 주눅이 들었더라면 그는 차관도입에 실패했을 것이고, ‘현대조선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롱바톰 회장은 그 후 정 회장의 첫 인상에 대해 그는 굉장히 강하고 담대한 인간이었고, 나는 거기에 매료되었기에 향후 사업 동반자로서의 자신감을 얻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담대함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담력입니다. 담력(膽力)이란 곧 마음의 힘이죠.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고 마음을 지키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인가요?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들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죠.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고’ (11:34-35)

 

그런데, 이렇게 담대해 질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격려입니다. 친구가 친구에게, 아내가 직장을 잃은 남편에게 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이죠.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님의 격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초인적인 힘이 나오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힘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1:3-5)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하셨죠. 그것이 무엇인가요? 눈물을 흘리고 감정이 폭발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버릴 것은 버리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끊을 것은 끊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이며, 진정한 부흥의 시작입니다. 야곱처럼 벧엘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재확신이 있으시기를.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말고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격려와 약속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을 너희에게 내안에서

사랑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축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 함이라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

예수 늘 함께 동행함으로

주의 은혜가 충만하리니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 함이라

 

나의 믿음이 연약해져도

미리 예비한 힘을 주시며

위태할 때도 안보하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 함이라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 함이라

 

능치 못한 것 주께 없으니

나의 일생을 주께 맡기면

나의 모든 짐 대신 지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 함이라

 

야곱은 사천년이라는 시간의 격차가 있는 오래 전 사람이면서도 마치 우리 이웃과도 같이 친근한 사람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도저히 같이 지낼 수 없는 몹쓸 사람처럼 보이고 또 어떤 때는 그가 바로 내 자신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묘한 사람입니다. 야곱을 만나며 야곱의 인생을 따라가 보면 결국 야곱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사람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시기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장자권만 얻으면 온 세상을 얻을 것 같은 마음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고 장자권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던 야곱의 봄. 장자권을 빼앗긴 에서와의 불화로 인해서 온 가족이 어려움에 처하고 그래서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가고, 거기서 보낸 야곱의 여름.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와서 우여곡절을 겪는 나이든 야곱, 야곱의 가을. 당신은 지금 어느 계절을 지나가고 있나요?

 

오늘 창세기 35장은 벧엘 사건에 이어 영적으로 아주 중요하고 의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3527절이죠. 같이 잃어 볼까요?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35:27)

 

이 본문에서 야곱이 헤브론으로 내려간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이 드는 가요? 또 야곱에 세겜에 자기 마음대로 가서 일을 벌리고 자판을 깔던 그 일들을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이 드는 가요? 아니면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이 평안해 지는 가요? 만약 마음이 평안해 진다면 당신은 성경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며 깊어진다는 싸인입니다.

 

창세기 3527절은 그곳이 기럇 아르바의 마므레이고 또 기럇아르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우거하던 곳이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죠. 이것은 헤브론이 어떤 곳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또 야곱의 선조들이 우거하던 곳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헤브론은 어떤 곳일까요? 헤브론이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강조하려고 할까요? '헤브론'은 고대 히브리어로( חֶבְרוֹן) ‘친교’ ‘연합’ ‘교제'라는 고유 명사입니다. , 헤브론의 의미 '하나님과 교제하는 땅' 주님과의 친교하고 연합하는 땅입니다.

 

지명으로서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지점과 해발 930m에 달하는 지점에 위치하는 고지대입니다. 지금 현재의 이곳은 아파트들이 들어서며 콘크리트 건물과 빌딩으로 가득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아름다움이 내포되어 있죠.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처음부터 계속해서 헤브론에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헤브론은 유랑생활을 하던 족장들의 삶의 종착지이며 정착지입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주하며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헤브론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또 마므레는 뜨겁다는 뜻이 있죠. 성경에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뜨겁게 교제하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뜨겁게 교제하는 곳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셨습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야곱이 정착한 곳은 바로 헤브론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뒤를 이어서 헤브론의 주인이 됩니다. 진정한 장자권을 얻었죠. 드디어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랬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땅' 주님과의 친교하고 연합하는 땅 인 헤브론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37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더니

 

헤브론을 소유하는 것. 자신의 재물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쓴 야곱이지만,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버린 채 벧엘로 떠나야 했고, 그리고 결국 그는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이가 들어가면 늙게 마련이고 그러면 기운이 쇠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가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헛된 일에 바쁩니다. 우리에게도 지금 인생의 가을과 겨울이 왔습니다. 죽음이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야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야곱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젊음을 보냈단 말인가?

부모와 배우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면서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헤어져서 살아야만 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지? 이 짧은 인생 무엇 때문에 서로에게 이렇게 지독한 상처를 주고 살아가야 하는 것 일까? 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야곱은 헤브론에서 진정한 헌신을 배웠습니다. 헛된 일에 분요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죽음을, 마지막을 생각하면서도 삶을 지혜롭게 마무리하는 법을 깨달았죠. 장자권이라는 것이 바로 헤브론을 소유하는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버지 이삭처럼 하나님과 교제하며 헛된 일에 힘쓰지 않고

진정 가치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 선조들의 신앙을 이어받는 것이 바로 장자권임을 알았습니다. 헤브론이 그의 소유였습니다. 야곱은 그가 추구하던 그 모든 것들이 아닌 장자권을 소유하는 것이 바로 헤브론을 소유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물이 넘치는 욕조에서 목욕하며 이 사실을 알았던 야곱은 외쳤습니다. 헤이 호!!!! 유레카!!!!!

 

성경에서 헤브론은 아브라함, 갈렙, 다윗과 함께 등장하는 지명입니다. 이 세 명의 인물에게 헤브론은 공통적으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 '주께서 주신 땅', '하나님과 교제하는 땅'입니다.

 

헤브론은 다윗, 갈렙, 아브라함이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야하는 땅이죠. 하나님의 마음을 앞서지 않고 따라가는 자, 믿음으로 순종하는 땅. 그 땅이 바로 헤브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삼하21절에서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말씀하셨죠.

 

사울이 죽은 다음에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되어서 수도로 정한 곳이 바로 헤브론입니다. 다윗은 왜 헤브론을 유다의 수도로 삼았을까요? 다윗의 마음이 확, 나의 마음속에도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주님, 나의 인생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땅'인 헤브론에 있게 하옵소서. 믿음의 선진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갈렙이 헤브론에서 죽었듯이 나의 삶도 주님과의 친교하고 연합하는 헤브론에서 헤브론에 매장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젼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젼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젼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 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