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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창45/ 내꿈 하나님의 꿈
창세기 37장에 와서야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죽고, 에서가 세일 산으로 떠나가고, 명실공히 야곱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가 상속자가 되고, 지배자가 되며, 진정한 의미의 야곱의 시대가 시작되었기에 오늘 본문 2절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글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야곱의 족보를 말하면서 요셉의 이야기가 나오죠.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요셉의 모든 행적을 야곱의 역사로 취급합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이룬 모든 역사 가운데 그의 아버지 야곱이 생존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50장까지에는 네 명의 족장이야기로 이루어졌지만 족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보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고백할 때에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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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인 37장부터 마지막 장인 50장까지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 되어 집니다. 야곱은 훈련받는 그리스도인을 요셉은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우리가 특히 더 사랑하고 존경하고, 닮고 싶고, 따르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단연코 요셉일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는 우리에게 아주 깊은 감동과 용기와 위로를 줍니다.
7남매를 쑥쑥 낳은 언니 레아와 달리 라헬은 14년 동안 임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태(胎)의 문을 여셔서 야곱의 12아들 중 11번째로 태어난 아들로 라헬에게서는 첫 아이죠. 하지만, 요셉의 어머니는 길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10대에 어머니를 잃고, 그것도 동생을 낳다가 어머니를 잃었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요? 그래서 요셉은 10대를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게 자라야 했습니다. 유아기와 소년기, 그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누구와도 상담 한 번 할 수 없는 고독한 환경 속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10대 소년 시절에 어머니를 잃어 고독하고 우울한 데다 다른 형제들로부터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면, 요즘의 웬만한 청소년들 같으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반항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나 게임에 심취해 자신을 고립시키면서 우울하게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희망 없는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며, 당연히 하찮은 인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탈선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가출 청소년이 아기를 출산하는 사례들이 있죠. 청소년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에 의하면 혼전 성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학생들의 대부분이 부모의 사랑 특히 아버지의 사랑에 굶주리고 목말라해 있다고 합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초등학교때 사춘기가 시작되죠. 사춘기는 여학생들에게는 가장 외로운 기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결핍을 이성간의 교제와 성관계로 채우려고 하다가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결핍을 이성간의 교제와 성관계로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 여인이 유명한 크리스찬 상담가 Norman Wright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14살 때 18살의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달쯤 사 귄후에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가져야한다고 말했죠.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와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어서 그녀와의 교제를 끊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4살의 소녀가 무엇을 생각하였을까요? 그녀는 한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죠. 그녀의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여야만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A학점을 받고 1등을 할 때, 그녀의 아버지는 좋아했죠. 바로, 그때 그녀를 사랑한다는 소년이 나타 났습니다. 그녀도 이 남자아이를 좋아했죠.
그녀는 그 소년의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하여 성관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다른 선택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14살 때 18살 소년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2년간 교제하다가 헤어졌죠.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교제하기 시작하다가 헤어지는 일을 지금도 되풀이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Norman wright 박사는 말합니다.
요셉 역시, 감당하기 어려운 나이에 시련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모든 보호의 손길이 떨어진 상태, 인간으로 볼 때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요셉이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이란 어떤 곳이었을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라는 표현은 수백 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게 될 때의 일이고, 요셉이 어렸을 때는 아닙니다.
오히려 요셉에게 있어서 “가나안”은 어두운 추억의 땅이요 비극의 땅이었습니다. 친어머니 라헬이 죽어 묻힌 슬픔의 땅이었고, 큰형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과 간통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누나 디나가 이방 민족들에게 겁탈당한 곳이었고 그로 인해 둘째 형과 셋째 형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주변 사람들과 반목하게 된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요셉이 자라났던 그 땅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상처와 아픔, 죽음과 슬픔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추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요셉은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결손가정에서 자라난 아이였으며 세 명의 계모 밑에서, 이복형제들의 무서운 분노 아래 자라난 아이였습니다. 아버지의 무분별한 처사 때문에 온 가족의 미움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났던 소위 “불행한 환경”의 아이였습니다. 두려움, 슬픔, 염려, 시기, 질투, 고난, 외로움 등을 느끼면서 어린 시절을 지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환경을 초월하는 인생을 살았죠. 환경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초월하며 사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단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고 멋있게 살았죠.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흠 없이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타락하고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부모와 헤어진 채 바벨론 이라는 이방 국가로 잡혀가 어린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훗날, 우상 앞에 굴복하지 않고 이방 왕의 권세 앞에 당당하게 서게 되었고, 80세가 넘은 노년에 이를 때 까지 청초한 신앙의 자태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는 위인이 되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이 그의 생애를 지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찬송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일평생 주만 바라면 너 어려울 때 힘주시고 언제나 지켜주시리 주 크신 사랑 믿는 자 그 반석위에 서리라
너 설레는 맘 가다듬고 희망 중 기다리면서 그 은혜로우신 주의 뜻과 사랑의 만족하여라 우리를 불러 주신 주 마음에 소원하신다
주 찬양하고 기도하며 네 본분 힘써 다하라 주 약속하신 모든 은혜 네게서 이뤄지리라 참되고 의지하는 자 주께서 기억하시리 참되고 의지하는 자 주께서 기억하시리
한 두 명의 자녀들을 키우는데도 부모의 가슴이 애가 타고 썩어 문들어 지는데. 12명의 많은 자녀들을 키우는 야곱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아, 그런데 그중에 좀 달라 보이는 아이가 하나 있었죠. 바로, 요셉입니다. 라헬의 첫 아들이라는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지만, 요셉은 다른 아들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라 보였습니다.
우리는 환경이 어려우면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가 이상적인 부모가 아닐 때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격이 비뚤어지고 말도 곱게 하지 않고, 혈기를 부리고 반항하는 문제아의 성품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환경과 상관이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야곱의 12자녀중 장자의 권한이 누구에게 있나요? 라고 물으면 ‘유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헤브론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야곱은, 12자녀중에 바로 요셉이 자신의 장자임을 알아챈 것이죠.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장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며 ‘채색옷’을 입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채색옷’을 단지 색동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에 본문의 의미가 분명히 살아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채색 옷은 여러 색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소매가 길고 술이 달린 외투/겉옷으로 보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당시 이 옷은 일하는 일꾼들이 입은 옷이 아니라 지도자층에서 입었던 옷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요셉을 어떻게 인정을 한 건가요? 맞습니다. 야곱은 그의 가문에 장자권을 지닌 사람으로 ‘요셉’을 인정하였습니다.
다같이 역대상 5장 1-2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습니다.
(대상 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요셉은 17살의 나이에, 아버지 야곱에게 '케토넷 파심'이란 채색옷을 받아 입게 되었죠. 당시에 왕족처럼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만 입을 법한 옷입니다. 유목 민족들에게는 가문 후계자로 임명할 때 입히는 옷입니다. /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편애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자권에 대한 인정의 차원이었던 것이죠.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믿음으로 야곱은 요셉의 각 아들들에 대해서 축복하고’ 기록합니다. 야곱이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요셉이 장자임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사님들은 이렇게 설교를 하지를 않죠.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죠.
“야곱은 요셉을 다른 자녀들보다도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지어 입히는 등 편애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더 사랑했던 이유는 그가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꿈을 꾼 요셉은 그것을 가족들에게 모두 말했습니다. 눈치가 없는 행동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제들에게 질투의 대상인데 자신이 형들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고 하니 그 형들이 심사가 얼마나 뒤틀렸겠습니까?”
요셉이 미움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고자질 때문에 또는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미움을 당했을까요? 아닙니다. 아버지 야곱이 장자로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인정을 할 정도로 형제들과 세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어느 정도로 미움을 받았나요? 요셉에 대한 미움이 어떻게 표현이 되어 있나요? 창세기 37장 4절 하반 절을 볼까요?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개역개정 창37장 4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개역 한글 창37장 4절)
이 번역 역시 좋은 번역은 아니죠. 사실은 요셉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번역이 더 좋습니다. 형들의 미움이 얼마나 대단한지 집에 사는 동생을 보고 인사조차 하지 않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아는 체도 하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죠. 우리도 부모님과 사이가 안 좋거나, 형제 자매와 사이가 안 좋을 때 어떻게 하나요? 문을 걸어 잠그거나 아는 척도 않고 인사도 안하죠. 그냥 투명인간처럼 무시해 버립니다.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것이죠.
이런 요셉의 삶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과 동화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인하여 미움을 받는다고 하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
세상은 화려함으로 우리를 유혹 합니다. 자신을 닮기만 하면 이 모든 화려한 것을 다 주겠노라고 말하죠. 때로는 세상의 두려움으로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백합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16-18)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세상의 영광을 꿈꾸며 살아 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꿈꾸며 살아가죠. 그러니 자연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고 미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처럼 자신을 지키려 애쓰다가 미움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 때문에 미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렇게 시작된 미움은 요셉이 가는 곳곳마다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복음성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요셉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야기한 것 때문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고 결국에는 애굽으로 팔려 가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창세기 37:5-7)
저는 이 꿈 이야기를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우리가 이 꿈 이야기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이 있죠. 그것은, 이 사람들의 직업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농사를 짓는 농부가 아닙니다. 그들의 직업은 양을 치는 목축업자들이죠.
양치기들에게, 목축업자에게, 밭에 볏단이 왠 말인가요? 차라리, 그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시려면, 형님들이 치던 양들이, 요셉의 양에게 절을 했다거나, 열 한마리 양들이, 요셉의 양 한 마리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목축업자와 상관도 없는 볏단의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대체 뭘까요?
하나님이 주신 이 예언의 꿈이 현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재 여기서도 아니고, 현재의 환경으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굽, 이집트는, 나일강이 있습니다. 이 나일강이, 해마다 범람하면서, 비옥한 토지를 만들죠. 애굽은, 이 비옥한 토지 위에다, 농사를 짓는 일을 하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요셉의 형들이 이 애굽이라는 나라, 농업에 종사하는 애굽이라는 나라에 와서, 거기서 요셉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요셉에게 절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떠올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은 지금 당장, 현재의 나의 환경에 얽혀 있는 나의 생각과 뜻대로가 아니고, 현재 나의 물질과, 현재의 나의 고착된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형들이 절을 하는 사건은, 지금 이곳에서, 양치기하면서, 이루어지는 사건이 절대 아닙니다. 이들이 전혀 상상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먼 나라, 애굽에서 이루어지는, /먼 훗날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과 지혜로,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들의 반응이 어떤가요?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아버지께)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창세기 37:18-20)
요셉이 꾼 꿈,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앞으로 장차 어떻게 되어 돌아가는지, 한번 보자는 거죠. 동생은 이제 꼼짝없이 죽을 텐데, 죽을 자에게, 과연 그 말씀이 이루어질까?? 아주 철저한 불신앙의 마음으로, 아주 사악한 마음으로, 한번 지켜보겠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꿈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계시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무서운 말입니다.
그러다가, 형제들은 계획을 더 악하게 수정합니다.
“가만있자, 이러면 우리가 살인자가 되니까, 그럴 필요 뭐있겠냐? 돈 받고, 노예로 팔아버리자. 살인죄도 면하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로구나!!“
그래서, 지나가는 상인들한테,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결국 고생고생하다 비참하게 죽게 될, 사지로 동생을 내 모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지가 어디입니까? 농업으로 유명한 애굽입니다. 밭에 볏단이 즐비한 애굽이, 바로 그 사지입니다.
십자가의 길
1.한 걸음, 또 한 걸음 무거운 발길 옮길 때
저들 모두 큰 소리로 소리치며 뒤따랐네
지치어 쓰러질 때 살을 찢는 채찍 소리
고난의 십자가를 누굴 위해지셨나요?
주님의 무거운 걸음 내가 어찌 알리요
주님의 무거운 발길 내가 어찌 알리요
2.한 마디, 또 한 마디 용서의 기도 드릴 때
저들 모두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네
골고다 언덕 위에 살을 찢는 망치 소리
쓰리고 아픈 고통 누굴 위해 참았나요?
주님의 용서의 기도 내가 어찌 알리요
주님의 용서의 눈물 내가 어찌 알리요
3.한 방울 또 한 방울 뜨거운 눈물 흘릴 때
저들 모두 큰 소리로 희롱하며 비웃었네
옆구리 창에 찔려 흘러내린 저 붉은 피
죽음의 골고다를 누굴 위해 가셨나요?
주님의 뜨거운 눈물 내가 어찌 알리요
주님의 뜨거운 눈물 내가 어찌 알리요
그러나 요셉은 이스마엘의 상인에 의해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갔으나 세월을 허송하지 않았죠.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였죠. 내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인류 역사상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살았던 사람들은 이름 없는 곳에서 살며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그곳을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처지를 최대한의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그는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거기서 꽃을 피웠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어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죠. 그는 모든 역경을 참고 인내했습니다. 마침내 거기서도 그는 꽃을 피웠습니다.
내가 어떤 처지, 어떤 상황, 어떤 형편, 어떤 장소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의 위치에 놓으신 것이 실수가 아니라는 깊은 신앙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한 뜻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에 나를 놓아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십시오! 반드시 아름다운 꽃들로 만발할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이 보통 꿈(Dream)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담긴 꿈(Vision)임을 알았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계시이요, 소망임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가슴에 간직하죠. 『꿈을 쫓아 한 평생 살아간 요셉』 그 역시, 인생의 마지막 길인 죽음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불러 놓고 남기는 유언이 역시 꿈이죠. “나는 죽으나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반드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정녕 이 민족을 인도해 가신다”라는 꿈(Vision)을 남깁니다. 그 꿈은 나 요셉의 꿈만이 아니라 너희들의 꿈이라고 일러주면서,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오면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하죠. 자신이 죽어서 해골이 되어서라도 꿈을 이루겠다는 요셉의 멋진 이 면이 오늘 당신과 나의 결단의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한 평생에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쫓아 가게 하소서. "나는 죽으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니 그가 정녕 이루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주옵소서. 나를 서게 하신 이 자리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사람들이 나의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돌봄을 보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젼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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