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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시편

주은총목사/ 시편1/ 두 가지 길

by 주은총목사 2025. 2. 21.

https://youtu.be/BezrPsGdDNc?si=2IotV5qrdh8XDyD2

꿈이 있는 교회

주은총목사

 

시편1/ 두 가지 길

 

초등학교 시절은 또래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은 부모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중심으로 어울린다고 합니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아버지의 직업과 직위를 밝히자 하나 둘 친구들이 떠나가고 외톨이가 되었던 설움을 경험한 아이가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친구들이 모여서 우리 아버지는 사장이고 쟤네 아버지는 회장인데 니네 아버지는 뭐하시니?”라고 물으면 회사원이라고 대답하기가 창피했던 그 아이는 고민 끝에 기발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이 한마디면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엄연히 살아있는 아버지를 두고 돌아가셨다니, 통탄할 일이었습니다.

 

어린아이의 머리에서 나온 그 생각은 오늘날 사회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어제나 오늘이나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신것처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필요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편은 영혼의 모든 부분들의 해부학’(An anatomy of all the parts of the soul)입니다. 그 이유는 시편에 거울처럼 인간의 모든 지정의 요소들이 다 담겨있기 때문이죠. 시편에는 인생의 모든 사랑, 기쁨, 소망, 미움, 고통, 슬픔, 근심, 두려움 등이 다 표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믿음이 회복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찬양, 기도, 축제의 신앙 시 모음집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국가 형성기로부터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까지의 작품들이죠. 시편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과 약 800년의 역사적 기간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 원문에서 시편은 테힐림’(Tehillim)으로 불리죠. 이는 히브리어 동사 빛을 발하다, ‘환호하다’, ‘기뻐하다의 뜻을 가진 할랄’(hallal)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또한 라틴어 역본의 시편 명칭은 헬라어 역본의 시편 제목인 살모이’(Psalmoi)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뜻은 현악기에 맞추어 불리는 노래라는 의미이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시편 1편 정도는 암송하죠.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입니다. 건축물의 정문에 해당되죠. 시편 1편의 정문을 통해 시편이란 전체의 구조물에 입장하게 됩니다.

 

구약 성전을 구조물이라고 할 때, 시편 1편의 정문을 통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되죠. 성전에 들어간 성도들은 탄식, 찬양, 기도 등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부디 성전에 들어와 감사, 찬양, 간구, 탄식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하고 신령한 교제를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지음, 정현종 역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 먼저 길은 다른 날 걸어보리라! 생각했지요.

인생 길이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가지 않은 길'이라는 영시는 자연의 소박하고도 전원적 정서를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하면서, 누구나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보통사람들의 인생의 문제를 보다 시를 통해 관조할 수 있게끔 승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갈림길이 있다고 합니다.

 

이 영시는 어느 가을날 숲 속에서 두 갈래의 길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사람이 적게 다니는 길을 선택하였고 선택한 길을 가면서 다른 길은 훗날을 위하여 남겨 두었는데 자신이 선택한 길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시의 원제가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행로보다 가지 않았던 인생행로에 대해 미련을 두고 있는 사람의 아련한 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한꺼번에 모든 두 길을 갈 수 없는 어느 누군가의 인생의 고뇌와 인간적 한계가 보여지고, 잠자고 있던 인간의 내면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시편1편도 두 가지 길이 있죠. 하나는 의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인의 길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습니까?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1. 의인의 길

우리는 모두 복 받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의 복의 개념과 시편1편의 복의 개념이 다르죠.

세상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성공'하면 복이 있는 사람으로 보죠. 돈 많고 집 좋고 사회적인 지위가 좋고. 높은 빌딩을 가지고 부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공한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부자가 되려고 하죠.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 중에도 자신이 이러한 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이 잘못되어 있기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세상의 잘 사는 사람들을 복받았다고 생각하며 부러워하며 살아가죠.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요? 이러한 성공은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잠시간 기쁨을 줄지는 모르지만 곧 더 큰 허무함이 찾아오게 마련이죠. 병과 죽음 앞에 섰을 때 그 인생의 초라함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어느 날 TV에서 왕년에 잘 나갔던 사람들의 초라한 말년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지?'

 

오늘 시편 말씀은 참 중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누가 복 있는 사람인지, 복이 없는 사람인지를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편1:1)

 

히브리어 원문에 1절을 직역하면, “복되도다. 그 사람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에셰르”(esher)는 여기에서 행복이나 만족의 의미를 지닌 복으로 번역되어 있죠.

 

여기서 말하는 복은 사람들이 흔히 추구하는 동양적, 물질적, 현상적 복과는 전혀 다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복은 에세르입니다. “에세르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곧 복>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떠나 버리시면 나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인생일 뿐입니다.

 

사울왕을 보십시오. 그가 왕좌에 앉아 있고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서 떠나 버리시니까 그 순간부터 그는 정신 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음이 병들고 정신이 병들어 마침내는 폐인이 되고 말죠.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좇지 아니한다.

복이 있는 사람은 세 가지를 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걷지도 않고 서지도 않고 앉지 않는다고 했죠. 즉 복된 사람은 가서는 안 될 길, 서서는 안 될 곳, 앉아서는 안 될 자리 등이 있습니다. 의인은 악인과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 소속 영역이 전혀 다르죠.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결단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주시죠.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119:24).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 인생의 최고의 상담자가 되시죠.

 

의인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죄인들(하타임)은 하나님의 표적을 빗 맞추는 사람들입니다. 죄인들의 길, 길은 방향을 말하죠. , 죄인이 행하는 관습, 삶의 방식을 일컫죠. 의인은 죄인이 서 있는 그 길을 알죠. 그래서 그 길에 결코 서지 않습니다. 의인은 죄인과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기에 외롭습니다. 찾는이가 적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

 

의인은 사람이 적게 다니는 길을 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죠. 왜냐하면, 그길이 바로 축복과 행복, 영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인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오만한 자”(레침)비웃다루츠에서 온 말로서 신앙을 비웃는 거만하고 부패한 자들을 의미하죠. 오만한 자는 교만하고 방자하여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일을 비웃고, 비판하고, 비평하기를 일삼는 자입니다

 

오만한 자는 교회 지도자, 타인에 대하여 비판하고 평가하고 폄하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에 악한 죄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을 섞는 자가 되기 쉽상이죠. 그러나 남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어내면서 노닥거리는 것은 자신이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오만한 자리이죠.

 

만약 어떤 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쁜 말을 할 때에 용감하게 이렇게 외치십시오! 당신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하고 부디, 그 오만한 자리에 앉지 말고 실례를 했습니다.”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십시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결코 벼랑이 아닙니다. 지옥을 향한 길은 밋밋한 내리막길이죠. 사람들은 그 길을 기분 좋게 걸어갑니다.”

 

때론,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무디어지죠. 점점, 열정이 식어지고 기도의 양이 줄어들고, 영혼에 생명을 걸어야 할 사람이 다른 일로 인해 바빠집니다. 여기서 죄의 점진성을 발견할 수 있죠. “걷다가, 따르다가, 앉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망가지고, 세상에 점점 관심이 있고, 돈이나 자아나 허영심등이 내 마음의 방을 하나 둘 차지한다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처음에는 소리 없이 들어오죠. 그러나 처음에 작게 들어온 죄가 나중에는 나를 다스리고, 나를 지배하고, 마침내 나를 끌고 다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완전히 배도하는 삶으로 마감하게 되죠.”

 

나의 갈망은 주께서 날 알듯

나도 주님을 온전히 아는 것

나의 갈망은 주 날 사랑하듯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 얼굴 보게 하소서

주 더욱 알게 하소서

 

주님의 눈에 비춰진 아름다움 보리

 

주 모든 것 주셨으니

주 형상 닮기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의인은 율법을 즐거워한다.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그의 기쁨은 여호와의 율법에 있죠. 시편 전반에 걸쳐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처음 다섯 권, 모세 5경의 "율법" 부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일컫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

 

오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요? 무엇이 우리를 감격하게 하는가요? 이것들이 바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죠. 부디,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돈을 좋아함같이, 주의 법을 즐거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들은 월급을 탈 때 즐거워합니다. 주식을 할 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모니터만 쳐다봅니다. 빨간 선이 올라갈 때 마다, 심장이 쫄깃쫄깃합니다. 그러나 파란선이 내려가면 어떻게 되나요? 그야말로, 죽을 맛입니다. 돈 버는 재미로 밤을 세우죠. 우리는 그와 같이 주의 법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시편119:14)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그는 세상의 죄악되고 허무한 가르침을 즐거워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인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좋아하죠. 말씀이 주는 즐거움이 얼마나 좋은지 꿀과 송이꿀보다도 더 답니다. 오죽하면, 모세의 뒤를 이어서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1:8)“

 

묵상”(하가)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읽는다는 뜻이죠.(1:8; 63:7; 73:13; 143:5: 33:18). 묵상의 대상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자신(63:6), 그분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77:12: 143:5)입니다.

 

의인은 주야로 주의 거룩한 말씀을 묵상합니다. 날마다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죠.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삶이 비추어 보죠. 자신이 걸어온 삶, 걸어갈 삶에 대한 주님의 뜻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결단하고 다짐하고 행동에 옮기죠.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이끌고 종교 전쟁을 일으켰던 그 유명한 크롬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전쟁터에서도 주머니에 조그만 성경책을 넣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읽고 묵상하였습니다. 틈틈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를 했죠.

 

그러던 중, 한번은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기절을 했습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성경책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구한 것이죠. 그때 그순간 그는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의 생명을 구했고, 내 영혼의 생명까지도 구하셨다.”

 

전쟁터에서도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에 의지해서 도움을 구하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을까요? 그곳이 비록 전쟁터이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늘이 주는 평안이 있고, 용기가 있었습니다.

 

말씀 묵상은 동양 명상과 전혀 다릅니다.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죠. 명상은 위험한 종교적 심리적 행위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죠. 왜냐하면, 공허한 마음은 속임수나 악마의 영에 대하여 자신을 공개적으로 열어놓기 때문입니다. 그 비우는 마음에 미혹의 영과 잡다한 생각들이 침투하기 쉽죠.

 

그러나 기독교 묵상에서 목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고 그 의미를 살펴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주님께 다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 교통과 교제가 이루어지죠.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최고의 행복, 최고의 축복, 최고로 형통한 삶은 무엇일까요? 너무나 행복할 것 같은 연예인들. <장동건, 고소영> <비와 김태희> 같은 연예인이 떠오르나요? 그 사람은 좋은 아내에 강남에 수백억짜리 빌딩이 있으니, “무척 행복할거야?”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많은,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여건이 아닌 어떤 다른 여건,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행복(?)이 내게로 다가와 주기를 바라며 기다립니다. 정치적 안정, 물질적 풍요, 건물주가 되는 것, 사업의 성공, 건강, 장수, 혹은 명예, 지위 등을 행복이라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내 앞에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죠.

 

사람이 인생을 살다보면 자기가 원했던 일이 잘 풀려나가는 소위 형통의 길을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계획했던 일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불통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체, 형통이 무엇일까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겐 계속 물이 공급되죠.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마치 그런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의인이 하는 모든 일은 형통하게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 안에서의 형통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형통이란 우주만물을 지으신 이의 뜻대로 운영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잘 먹고 잘 사는 것, 뭐든 내 뜻대로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이 하나님 뜻과 같을 때, 그것이 의인의 길, 복있는 자의 길, 형통한 길이라고 합니다.

 

날씨에 따라 계절을 따라 말랐다 좋아졌다 하지 않습니다. 늘 푸르름을 유지하며 생명력이 있죠. 왜요? 시냇가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심할 만한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낙심하게 할만한 고난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죠. 그러나 그 무엇도 그 심령 깊숙한 곳에서 솟아올라오는 하늘의 기쁨과 감사를 빼앗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죠.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7-9) 왜요? 하나님이 그 안에 무한한 생명력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늘 햇빛뿐이면 사막을 이룬다"는 말이 있죠. 인생이란 길을 걷다보면 비도 맞고, 소나기도 오고 번개도 천둥도 치고 눈도 내립니다. 햇빛이 쨍쨍한 아름다운 날도, 구름이 낀 날도 있지만, 복 있는 사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하죠.

 

어떤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일까요? 병아리가 물을 먹고 하늘을 한번 쳐다보는 것처럼, 막연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부동자세로 있으면서 복된 세상이 짜자자하고 내 앞에 열려지기를 바라는 망상. 그것은 망상이죠. 이제 그런 망상은 더 이상하지 마세요.

 

복이 있는 사람은 환경과 여건에 관계없이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졌다고 좋아하고. 고독하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건강하면 일을 할 수 있다고, 병이 들면 기도할 수 있다고 감사합니다. 하는 일이 순탄하면...형통케 하여 주심을 감사하고, 역경에 처하면 자신을 단련시키고 정화시켜 주셔서 감사가 충만하죠.

 

복음의 길이 열리면 하나님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좋고, 복음의 문이 닫히고 본격적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준비할 시간이 더 주어져서 좋고. 복음으로 힘든 일을 당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니 좋지 않은 가요? 이제는 망상을 버리고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세요.

 

주님,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형통의 개념이 아닌, 하나님안에서의 형통의 개념으로 의식의 변화가 있게 하옵소서. 시냇가에 심기어진 나무가 되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