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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산책

주은총목사/ 독을 제거하는 하는 사람

by 주은총목사 2023. 4. 4.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네이버 오디오로 들어보세요.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8845/clips/125

 

주은총목사/ 꿈이있는 순복음교회

독을 제거하는 하는 사람 (왕하 4 : 38 - 41)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끊이라 하매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야등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 외를 따서 옷자락에 채워 가지고 돌아와서 썰어 국 끊이는 솥에 넣되 저희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 지라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가로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해독이 없어지니라" (왕하 4 : 38 - 41)

 

왕하 4장에 보면, 엘리사는 후배 양성을 위하여 길갈이라는 곳에 선지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식사준비를 위해, 한 사람(선지 생도)이 국에 넣을 채소를 구하러 들로 나갔습니다. 그 사람은 독성인 식물을 먹는 것으로 착각한 채 얼씨구나 좋아하며 옷자락에 하나 가득 담아 옵니다. 그리고는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잘게 썰어서 국솥에다 넣습니다. 다 끓자 무리에게 한 사발씩 안깁니다. 엘리사의 말씀강해와 성령충만, 그리고 한끼 식사. 얼마나 흥겨웠을까요! 그런데 웬걸 먼저 먹어 본 사람이 크게 소리칩니다.

 

“선생님! 여기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모두들 깜짝 놀라 당황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가루를 가져다 솥에다 던져 넣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독이 깨끗이 사라졌고,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대로 다 먹었다면 몰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독소가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독사, 독나방, 독벌레, 독버섯, 독약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독보다도 더 무서운 독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죠.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사람의 잘못된 언어의 사용은 자신도 죽게 하고 남에게도 큰 피해를 입히게 합니다. 말의 독은 무섭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찌르고 죽이죠.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특히, 작은 공동체 안에서 무심코 내뱉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입니다.

 

“주홍글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 여인이 성직자와 사랑을 하다 잡혀서 공개적으로 재판을 당해 가슴에 간음(Adultery)을 뜻하는 "A"자를 인두로 그녀의 몸에 지졌죠.

 

평생을 몸에 새긴 주홍글씨가 사라지지 않는 창피함과 누추함과 굴욕감을 느끼며, 혹시나 누가 그 자국을 건드릴까 봐 늘 가슴 아파하며 누군가에게 비난받을까 걱정하며, 무심코 던진 돌 하나에도 상처받을까 두려워 떠는 이 여인.

 

마치 자신이 죄인이 된 느낌, 사회적으로 한참이나 뒤떨어져 낙오자가 되어, 냉대의 시선을 느끼며 주홍글씨를 평생 달고 살아가는 느낌은 참으로 가슴이 썩어 들어갈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10년이 지나든 20년이 지나든, 비난과 손가락질과 냉대의 시선에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적극적으로 그런 자신과 싸우지 않는 다면, 그런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아니하고, 자신을 무너뜨리고 늘 괴롭힐 것입니다.

 

잠언에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쟁이, 즉 소문내고 남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가는 곳에는 늘 다툼이 있고 이간질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익명으로 다는 악플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죠. 그 악플 때문에 사람들이 시달리고 몇몇은 그것을 이겨내지 못해 죽기까지 한다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쟁이들의 사소한 말이 결국 귀한 생명을 앗아갑니다.

 

남의 흉을 보는 것,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말쟁이들의 일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지금 자기가 맛있게 별미처럼 씹고 있는 사람이 자기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받고 괴로운 지 말입니다.

 

누가 이 사회에 퍼진 독을 제거할 것입니까? 행려자들의 눈물, 상처받은 청소년들의 가슴의 독은 누가 씻길 수 있을까요? 망국적인 지역감정, 뼈속까지 사무친 남북한의 증오의 독은 누가 뽑아 낼 수 있을까요?

 

지금껏 내가 한일이 주를 위한 일이었는지 지나간 세월 돌이켜 주님 앞에 아룁니다

이 한몸 주를 위하여 목숨 버린다 했으나 주의 영광 뒤로하고 나의 자랑 앞세웠으니

내가 가는 이길이 주를 위한 것보다 예수 이름을 파는 가롯 유다와 같습니다

 

한평생 주를 위하여 변함없이 살겠다던 베드로 같은 믿음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맘속엔 허영과 교만만 있고 주님지신 십자가는 짐이된다 벗었습니다

 

내가 가는 이길이 주를 위한 것보다 율법을 앞세우는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오늘도 복음을 들고 쉼없이 다녔지만 성령의 불 같은 인도 믿음 없이 전했습니다

육신의 곤고함 더하여 복음의 사명 약해지니 아버지여 연약한 종 어찌해야 하오리까

내가 가는 이길이 영광의 길이라면 바울과 같은 믿음을 내게도 허락 하소서

 

2. 라헬

 

야곱에게는 아내가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레아요 다른 사람은 라헬입니다. 레아과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둘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라헬이 일찍 죽고 맙니다. 누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있어 함께 부부의 정을 나누고 싶었던 라헬을 하나님은 일찍 데려가고 맙니다.

 

라헬은 첫째 아들 요셉을 낳은 즉시 둘째 아들을 기다린 여인입니다. 무려 16년만에 둘째를 갖게 됐죠. 16년을 기도하며 기다리다 드디어 임신을 하였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평생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마땅히 자신의 권리처럼 여겨왔던 라헬은 자식을 낳으면서 그 자식으로 인해 자기 목숨을 잃게 되고 동시에 남편의 뜨거운 사랑과도 이별해야 했습니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낳게 되는 그 자식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즉 '슬픔의 아들'이라불렀습니다.

 

3. 계속 고난 중에 있는 야곱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길을 가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야곱은 벧엘의 하나님을 다시 고백 했을 때,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일이 순풍 풀려야 하는데, 계속해서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친딸이 세겜에서 강간을 당하고, 그로 인해 살인이 벌어지게 되고. 유모 드보라의 죽음, 장자 르우벤의 빌하(라헬의 여종)와의 통간, 아버지 이삭의 죽음(이삭보다 먼저 죽었을 어머니 리브가는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등 그의 말대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이 땅에 슬픔이 많습니다. "나는 슬픈 인생이다. 괴로운 인생이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다"라는 고백만 하면 인생은 진짜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각 속에 슬픔, 죄책감, 괴로움만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지나갑니다. 과거의 아픈 기억, 아픈 상처, 죄책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나의 모든 과거를 대신 지시기 위함이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야곱은 참으로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렇게 슬프고 힘든 일을 연거푸 계속해서 닥치는 데도 불구하고 야곱은 먼저 사랑하는 아내를 하나님의 오른손에 올려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인생을 맡기는 것, 이게 신앙이죠. 하나님의 오른손에 맡긴 인생이 된다면 슬픔에 오래 빠져 있거나 슬픔에 붙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죽어가면서 부른 “슬픔의 자식”이라는 베노니에 파묻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올려드렸습니다. 베냐민이라고 불렀죠.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신33:12)

 

성경은 라헬이 죽는데 혼이 떠난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때가 되면 ‘너 이제 그만 와라’하고 하나님께 불려 가는 것이죠. 죽음의 순간 죽음이 끝이 아니고 몸을 떠날 생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죠. 주인한테로 돌아가는 걸 영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생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그런 의미에서 날마다 죽음을 묵상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죽음을 깊이 묵상할수록 죽음에서 풀려나죠. 어느 순간 부르면 하던 것을 다 놓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게 신앙입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우리의 삶을 맡겨 놓는 것, 그 능력의 손길에 의지하고 위탁하는 것. 그게 신앙입니다.

 

슬픔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길을 가야 하죠.

 

아름다웠던 지난 추억들 사랑했었던 많은 친구들

멀고도 험한 고난의 길을 나 이제 말없이 주님을 위하여 떠나야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위해 당신이 바친 고귀한 희생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어떤 중년 여인이 미국에서 한국인으로서 한인교회를 더 이상 나가지를 않습니다. 교회를 안 나갈 수는 없고 해서, 그녀가 선택한 곳은 영어를 잘 알아 듣지는 모르지만 미국인 교회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자신을 향해서 ‘수군수군’거리지도 않고 눈치도 안보고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저는 울며 통곡하던 그녀의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의 갈등보다 더 괴로운 것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말입니다.”라며 처절하게 아파하면서 힘들어하던 그녀.

그녀는 40대 후반의 여성으로 남편의 인격 장애 문제와 도박, 폭언과 폭력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2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급기야는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남은 집 한 채 마져 빼앗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이렇게 살다가는 자신은 물론이고 자녀들마저 희생시킬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알리고 기도를 요청키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더 큰 화근이 되었습니다. 아픔을 공감하고 기도해 주기보다 사람들이 수군수군 거렸습니다.

 

결국 그녀는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닫아걸었습니다. 자녀들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이혼을 한 후에도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마치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공산주의 때, 소련에서 사람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사람과의 만남을 완전히 차단했더니, 21일이 지나 대부분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고문을 해도 사람을 만나면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죠. 하지만 공동체속에서 독이 들어왔습니다. 떠도는 수군거림, 거짓말과 부정, 오해와 판단의 말로 인해 당아새처럼 세속을 떠나 광야로 저 멀리 도망가고 싶습니다. 공동체가 점점 독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하고 결국은 와해가 되죠.

 

그럴 때 엘리사는 가루를 뿌려 독을 제거 했죠.

 

레위기 2장 1절은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레위기 2장에는 ‘고운 가루’라는 말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소제의 재료는 고운 가루입니다. 고운 가루는, 밀이 껍질이 벗겨지고 알갱이가 다 부서져서 자신의 형체를 전부 잃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도는 자신의 주관이나 성품, 의지나 경험 등이 부숴지고 깨어져서 고운가루가 되어야 하죠.

 

자신에 대한 억울함과 판단, 부당함에 어떠한 항변이나 변명의 소리도 안하고 그냥 부숴지면서 고운 가루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공동체는 잠잠하면서 말들이 퍼져 나가지가 않고 들쑤셔지지가 않고 조용히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한마디 하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아프고 피멍이 들고 관절이 쑤시고 그러면서도 교회를 살리기 위해 고운 가루가 된 당신. 평생 잊지 못해요. 당신의 헌신과 섬김, 그리고 죽도록 수고해서 교회 월세를 내고 살리는 당신의 몸부림.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처럼 나 또한 그러한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사해요.

 

인생의 길을 걸으며 끊임없이 쏟아지는 환난과 건강과 돈에 여유가 없습니다. 마음이 복잡하죠. 그러한데다가 영적으로 죽어가는 또 다른 라헬들로 인하여 슬픔의 소리를 계속해서 들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공동체가 와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상황이 아닌 베냐민으로 하나님의 오른손의 능력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보기드문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내게 허락하신 시련을 통해 나의 믿음 더욱 강하게 자라나고

험한 산과 골짜기 지나는 동안 주께 더 가까이 나를 이끄시네

내가 겪는 시험이 어렵고 힘겨워도 내 주님 보다 크지 않네

내 앞에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주가 나로 바다 위 걷게 하리

나는 믿네 주의 능력으로 내 삶 새롭게 되리

 

나는 믿네 주의 능력으로 담대히 나아가리라

주와 함께 싸워 승리 하리라 날마다 믿음으로 나 살아가리

 

사도바울을 가리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단이요, 소요케 하는자요, 전염병 같은 자”라 하면서 사도 바울을 보고 함부로 판단하고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했지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판단하는 그 말을 듣고 중심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매우 작은 일’로 여겼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고전 4:3)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하여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판단 받는 것이 문제이지 사람의 판단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특히 주의 종은 “부르신 소명”에 대한 자기 소신이 분명하고 자기중심이 견고해야 합니다. 절대로 귀가 얇고 중심이 약해서 사람들로부터 무슨 소리를 듣고 중심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주의 종은 사람들의 말을 다 들으면 주님의 일을 제대로 잘 하지 못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소신껏 주의 길을 하십시오.

 

사람의 판단을 다 옳은 것 같으나 옳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심판장 되시는 우리 주님의 판단은 한 치의 잘못도 없이 정확한 판단이 될 것입니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4:4-5)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판단과 비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판단 내지 비판에 얼마나 많이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울고, 속상해 하고, 싸우고, 분을 내고, 욕을 하고, 또 높은 담을 쌓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비판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비판을 “매우 작은 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을 향한 ‘비난과 비판’을 ‘매우 작은 일’이라 여길 때 썬다싱의 말도 함께 생각이 납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귀는 닫고 앞만 보고 달려라!”

 

“주여, 도와주소서. 나는 연약합니다. 나의 마음 약함과 여림을 붙잡아 주시고, 담대함을 주시어서 나도 다른 사람의 말들을 초월하여 살게 하소서. 공동체가 와해가 되는 슬픔의 상황가운데서도 엘리사처럼 죽음의 독을 제거하는 가루가 있게 하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연거푸 계속되는 슬픔의 상황에서도 베냐민의 고백을 올려 드렸던 그런 야곱과 같은 멋진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3월 6일 사순절 11일

요즘, 교회에서 계속해서 있으므로 인하여 원고를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늘 영성산책 원고는 새벽 1시 30분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컴퓨터 전원이 나가서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작성을 하였습니다. 밤을 홀딱 새고, 새벽 시간에 녹음을 하였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심령에 은혜가 흘러가기를 기도합니다.

 

어느 날 다가온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어요

뜨거운 사랑을 느꼈지만 부를 수 없었어요

어느 날 다가온 주님의 모습을 쳐다 볼 수 없었어요

따뜻한 사랑을 느꼈지만 바라보지 못했어요

이루지 못할 작은 가슴 주님의 사랑은 너무 커요

부서지고 낮아져도 주님 앞에 설 수 없었어요

오늘도 찾아온 주님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부를 수록 다정한 주님 모습 가만히 안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