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룻기4/ 소망의 새 아침
룻기 2:1-7
꿈이있는순복음교회/ 주은총목사
역기능 가정속의 어린 시절의 요셉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우리가 특히 더 사랑하고 존경하고, 닮고 싶고, 따르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요셉일 것입니다. 요셉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지극히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문제와 함께 성장했던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이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이란 어떤 곳이었을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라는 표현은 수백 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게 될 때의 일이고, 요셉이 어렸을 때는 아닙니다.
오히려 요셉에게 있어서 “가나안”은 어두운 추억의 땅이요 비극의 땅이었습니다. 친어머니 라헬이 죽어 묻힌 슬픔의 땅이었고, 큰형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과 간통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누나 디나가 이방 민족들에게 겁탈당한 곳이었고 그로 인해 둘째 형과 셋째 형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주변 사람들과 반목하게 된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요셉이 자라났던 그 땅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상처와 아픔, 죽음과 슬픔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추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요셉은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문제라는 현실
요셉의 성장환경을 통해 얻는 것 중 하나는 “이 세상에 문제없는 가정, 교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문제가 가득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가정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가정을 “별난”가정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적인 가정의 샘플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안고 살아야 했던 여러 가지 가정적 문제들, 즉 아버지의 편애라는 빗나간 사랑, 형제들 간의 시기와 반목이라는 괴로운 체험, 그래서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분노하는 뼈아픈 현실 등,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 우리 가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떤가요? 남의 집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종류만 다를 뿐이지 가정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 교회가 크다는 이유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가 흐르고 사람이 많고 물질이 많아서 은연중에 시샘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은 훌륭하신데 그분들의 자녀들이 헌금으로 잘 사는 생활을 하는 등 교회의 여러 가지 단점들을 보고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단지, 큰 교회라는 이유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주의 종으로써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전도사이기도 하고 목사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 줄 알고, 가서 헌신하고 봉사해?”하면서 교회도 나가지도 않고 가정에서 아들과 단둘이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세월이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렇게 방에서 아들과 신앙생활을 하다가 가끔씩 지치고 그러면 밖에 있는 외부 교회에 몇 번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서 아들과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인터넷으로 여러 휼륭하신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듣는 귀는 커집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섬김과 봉사생활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던 거죠. 그러다 보니, 군대를 가도 아들이 교회를 나가는 줄 알았지만, 적응을 하지 못하고 교회를 나가지 않습니다. 가는데 마다 교회의 단점을 비난하며 평생을 떠돌다가 아들 역시 인생을 그렇게 마감을 합니다. 의외로 방에서 이렇게 둘이서 예배를 드린다며 자식을 자신의 것으로 이끄는 주의 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의외로 많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주고 사신 몸된 성전입니다. 눈과 손과 발, 각 지체들을 이루어 가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가정이라도 갈등이 있고 다툼이 있기 마련이며, 그에 따른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게 마련입니다. 야곱의 가정 역시 그랬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문제 없는 가정, 문제 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이제는, 인터넷으로만 예배를 드리지만 말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예배현장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전염병이 무서워서 모이기가 두려우면, 예배당에 혼자가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혼자 기도를 해도 되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어린양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보혈 덮으사
모든 족속 모든 방언 모든 백성 열방이 모든 영광 모든 존귀
모든 찬양 주께 드리세
1. 모든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 수많은 주 백성 모였네 주의 보혈과 그 사랑으로
친 백성 삼으셨네 주를 향한 감사와 찬양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네
다만 내 소리 높여 온 맘을 다해 찬양하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어린양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보혈 덮으사 모든 족속 모든 방언
모든 백성 열방이 모든 영광 모든 존귀 모든 찬양 주께 드리세
2. 어린양 피로 씻어진 우리들 은혜로 주 앞에 서있네
주 이름으로 자녀된 우리 겸손히 구하오니 주의 능력 우리게 베푸사
주를 더욱 알게 하소서 그때에 모든 나라 주 영광 보며 경배하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어린양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보혈 덮으사 모든 족속 모든 방언 모든 백성 열방이
모든 영광 모든 존귀 모든 찬양 주께 드리세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어린양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보혈 덮으사 모든 족속 모든 방언 모든 백성 열방이
모든 영광 모든 존귀 모든 찬양 주께 드리세
무릎 꿇고서 다함께 고백해 만유의 주님
(겔 3:4-10)
4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5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6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7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8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9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10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민족보다 더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퍅하여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치 않았으므로 마음이 완악해졌고 귀가 어두워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겔 선지자를 대적하며 반대하고 거역해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얼굴과 이마를 화석보다 굳고 금강석같이 해주어 그들을 이길 수 있게 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18-19에서는 예레미야를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적하는 자를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진리와 강한 신앙과 인격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거역에서 복종으로
나오미는 거역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녀와 남편은 모압에 내려감으로 하나님께 거역하였고 두 아들을 모압의 딸들과 결혼하도록 함으로써 거역하였습니다. 거역은 항상 우리를 고통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또한, 나오미는 과거에 집착하며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녀는 슬픔과 고통 속에 머물러 있기를 택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신을 동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 밖에 머물러 있으면서 괴로움과 반발심과 감사함이 없는 매우 곤고한 삶을 살았습니다.
룻은 괴로움과 분노의 감정에 쉽게 빠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과 시아주버니를 잃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동서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했고 과부였고 타국인이었습니다. 이처럼 괴로움을 갖기에 합당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처럼 괴로움 가운데 자신을 던져버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고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여성의 100가지 이름을 편집한 엘스톤 스미스라는 사람은 현재 미국에서 150만명의 여성이 룻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합니다. 일곱 번째로 많은 이름이 룻이라는 것입니다.
‘룻’이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나는 룻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소녀, 매력을 지닌 여성, 지극한 효성을 지닌 며느리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룻의 이야기는 어떤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과거의 이야기를 해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재입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이 룻처럼 어렵지만, 룻처럼 살면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고 계시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룻은 과연 어떻게 행동을 하였길래, 하나님이 인정하셨을까요?
거역함으로 괴로움에 처해 있었던 나오미와는 대조적으로 헌신을 하였던 룻은 어떠하였을가요?
아마도 룻은 나오미와 함께 주저앉아 '여기 어머니와 함께 앉아 불평이나 털어놓는게 낫겠소? '하고 말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룻은 고통가운데,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러 나갔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12절)
룻이 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희망을 품고 돌아왔죠. 이곳에 오면 무엇인가 길이 보일 것 같았는데, 오히려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이런 때 룻은
“어머니, 여기서도 우리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어머니, 나로 다시 모압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아니면 어머니, 같이 가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이 변함없는 룻의 효심, 변함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룻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로 갚아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룻의 삶의 자세는 매우 훌륭하고 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차 위대한 일을 이룰 사람의 첫 동작이었습니다. 룻은 이삭을 줍는 위치에서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지위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고 말했습니다.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룻은 이삭을 줍는 것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를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 틈에서 가장 비천한 일을 하는 것을 조금도 마음 상해 있지를 않았습니다. 룻의 행복의 기준은 잘 사는 데 있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백성 안에서 같이 사는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돈 많은 사람과 재혼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 그것이 그녀의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우상을 떠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 이것 하나로 행복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춤추리 성령의 능력으로 따라가리
주님의 빛 가운데 걸어가리
주님의 마음으로 춤추리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리
주님 약속의 말씀 신뢰하리
다시 오실 주님 나 바라보리 주님의 마음으로 춤추리
주는 생명의 근원 하늘과 땅의 주님
주안에 넘치는 기쁨 주님의 아이 되어 기쁨의 춤추리
주님의 영광을 위한 기쁨 주님의 마음으로
나 춤추리 성령의 능력으로 따라가리
주님의 빛 가운데 걸어가리 주님의 마음으로 춤추리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리 주님 약속의 말씀 신뢰하리
다시 오실 주님 나 바라보리 주님의 마음으로 춤추리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위한 사랑 순종으로 주께 드려
나의 모든 힘 다해 주님께 경배하리
나의 모든 것 다 드려 찬양 주님의 마음으로 나 춤추리
성령의 능력으로 따라가리 주님의 빛 가운데 걸어가리
주님의 마음으로 춤추리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리
주님 약속의 말씀 신뢰하리 다시 오실 주님 나 바라보리
주님의 마음으로 춤추리 주님의 마음으로 나 춤추리
성령의 능력으로 따라가리 주님의 빛 가운데 걸어가리
주님의 마음으로 춤추리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리 주님 약속의 말씀 신뢰하리
다시 오실 주님 나 바라보리 주님의 마음으로 춤추리
은혜를 사모한 룻!
차별대우가 심한 유대나라에서 이방인 여자로서 그 냉담한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젊은 여자가 폐지를 줍고, 이삭을 줍고 그럴 적에, 얼마나 자존심을 상할까요? 그렇지만 룻은 자기의 자아를 다 포기하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밭에 가서 이삭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젊은 여자가 가장 비천하고 무시당하는 이삭을 줍는 자리에 내려 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룻에게는 말씀에 의지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기록된 규례대로 룻은 그 땅의 가난한 객으로서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9-10)
모세의 율법은 분명 가난한 자의 생계를 위해서 추수 후에 이삭을 줍는 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추수할 때 모퉁이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그대로 놓아두어야 하죠.
그래서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하나님의 보호법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에 사사 시대에는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갔기 때문에 추수 후에 모든 것을 다 거두어서 이삭을 줍지를 못하였습니다.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이 율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주인의 냉대와 멸시를 받았던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어려운 때에 이방 여자가 이삭을 줍는 것은 참 어렵고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음과 자신이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을 때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분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일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호의라는 뜻입니다.
아무런 받을 자격이나 한 일 없는 룻이 구한 것이 은혜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위치와 입장과 처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물리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됩니다.
룻은 어떤 처지였을까요? 룻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리고 유대까지 따라온 룻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방여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 때였습니다. 또한, 그녀가 처한 입장은 먹을 만한 양식도, 어떤 사람이 도와주겠다는 말도 없는 때입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막막한 때입니다. 지극한 효성의 마음으로 어머니를 따라서 유대 땅으로 왔지만, 그녀에게 생존의 수단과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룻은 간절하게 은혜를 사모하였습니다. 룻은 자신의 열심이나 노력으로는 이삭을 줍지 못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나로 하여금 사람을 만나게 해야 내가 이삭을 주울 수가 있다’고 은혜를 사모하였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룻2:2)
자신을 쳐서 순종하는 룻
룻기 2장 2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룻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집의 가장이었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가서 자신을 복종시키며 밭에 나갈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였습니다. 거역은 항상 파멸과 눈물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순종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첩경이 됩니다. 룻은 또한 추수하는 자들에게도 순종하였습니다.
밭에 나갔을 때 그녀는 매우 예의 바르고 겸손하게 추수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7절). 그 밭의 추수 책임자는 그녀에게 그렇게 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부드럽고 예의가 바른 태도로 행동하였습니다.
룻은 나오미와 추수하는 책임자와 보아스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녀가 보아스를 만났을 때 그는 그녀에게 '내 딸아'(2 ' 8)라고 말했읍니다. 그는 매우 친절했습니다.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룻은 그가 누구이며 또한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나오미를 통해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러나 그녀는 그가 책임자임을 알고 그에게 복종하였습니다.
룻이 하나님과 시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함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녀를 위해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룻을 인도하여 그녀와 나오미가 먹을 것을 충분하게 얻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녀는 보아스에게 속한 얼마 안 되는 땅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3절)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서 보아스의 밭에 갔을 때 당시에 룻은 그 밭이 보아스의 밭인줄을 몰랐습니다. 또 이 밭이 보아스의 밭이 되고 그것 때문에 훗날 결혼을 하여 가난하고 비천한 여자가 당시에 가장 명예롭고 유력한 남편의 아내가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베는 자를 따라갔는데 우연히 그 밭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룻의 입장에는 우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룻을 인도한 하나님의 섭리이죠.
하나님께서는 룻을 향하신 섭리속에 인도를 하셨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필연만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이나 사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룻은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했고,(1-4) 하나님의 인도하신 손길을 의지했습니다(1-2).
룻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필연이었습니다. 룻의 배후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룻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인 보아스」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죠. 보아스는 룻에게 나타난 구세주였습니다. 보아스의 혈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됩니다.
룻이 이렇게 인생에서 있을 수가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녀는 심히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늙은 나오미를 생각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나오미, 당신에게 붙여주신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개척교회는 당신의 인생의 커다란 축복입니다.
주님, 내 자아가 이끄는 대로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환경을 초월하는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내게 붙여 주신 교회를, 내게 붙여 주신 나오미를 생각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소서. 평생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온전히 흘러가게 하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네
오직 예수 뿐이네 -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하나님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대로 나가라.
-머리를 동여매고 누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도하라. 나가라. 소망의 새 아침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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