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당신은 최후에 웃는 사람!
본문: 창18:1~15
아브람은 75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의 말씀을 하신지 수 십년이 지나도록 큰 민족을 이루고 창대하기는커녕 자식조차 낫지를 못하는 우울하고 불행한 사람에 지나지가 않았습니다. 요즘이야, 자식이 없어도 딩크족이라고 부부끼리 재미있게 살지만, 예전의 우리나라도 자식을 낳지 못ᄒᆞ면 7거지악중에 하나에 속하여 그대로 쫓겨났죠
1) 七去之惡 :1)不順舅姑 : 시부모에게 순종치 않을 때. 2)無子 : 아들을 낳지 못할 때. 3)淫行 : 간통이나 음란하거나 도박등을 할 때. 4)嫉妬 : 시기하는 마음과 질투심이 강하여 화목을 파할 때. 5)惡疾 : 고질병이나 전염병이 있을 때. 6)口舌 : 입이 가벼워서 이간질이나 구설수가 많을 때. 7)盜竊 : 도적질이나 남의것을 탐할때.
그런데, 그 창세기 때의 인물인 아브람이 자식이 없으니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말이 많았을까요? 교회에 개척이 되어서 사람들이 안 모이는 것이 오래되면 얼마나 말이 많겠습니까? 다윗조차도 얼마나 사람들이 말이 많은 지 이렇게 말을 합니다.
1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시편 3:1-2)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가 있어서 아브람도, 다윗도 시작을 했지만 그 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신앙 생활이 힘들고 지치고 깔아 앉고 있습니다.
창세기 17장 17절에 보면, 아브람의 심중에도 전혀 다른 신앙이 자리하고 있죠. (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창17:17)
//말로는 아멘이지만, 믿음따로, 생각따로, 하나님 앞에서는 믿는다고 하였지만, 회의감이 가득하였죠. 말로는 할렐루야 하지만, 마음은 허탈하고 공허하였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12) “사라가 속으로 웃으며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사라가 웃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죠. 긍정적이고 좋은 웃음, 기뻐하는 웃음이 아닙니다. 오랜 실망의 삶으로 인해,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없게 된 데서 온, 쓰디 쓴 웃음, 헛웃음이죠. 희망과 소망의 상실에 따른, 불신이 저변에 깔린 웃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되어 있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 부부>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셨죠.
하지만 사라는 하나님의 비현실적인 말에 내심 비웃었습니다. 노쇠하여 생리도 끊어진지 오래되고. 갱년기로 인해 고생을 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상태였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의 벼랑 끝에 몰렸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 황혼이 깃들고 있을 때, 이들에게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기한이 이를 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자 사라가 비웃습니다.
이 웃음은 씁쓸하고 허탈해서 웃는 냉소일 것입니다. 냉소의 이면에는 좌절과 불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지만 좌절하는 신앙, 더는 소망이 없다는 신앙을 가진 자가 냉소합니다. 16장 2절에서 사라는 “하나님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부스러기 같은 존재, 희망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색하게, 그리고 서글프게 웃습니다. 약속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웃음이죠.
내 상황을 보면 아무리 굳게 결심을 해도 결국엔 자조의 웃음을 짓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좌절 속에 냉소하는 자로 환한 웃음을 짓게 하는 분입니다. (21:5~6) 사라는 마침내 이삭을, 웃음을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을 웃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쓴웃음을, 당신의 공허한 미소를 진짜 웃음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
황혼인 줄 알았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삭을 낳아 양육하고,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드림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인생이 역전이 되었습니다. 진짜로, 행복한 웃음을 짓는 사람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맹세가,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과연, 어떻게 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성취가 되고, 불가능한 것이 가능케 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로 당신이 그러한 웃음의 주인공, 인생역전에 성공하여 최후에 웃는 주인공,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당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주인공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별빛 속에 빛나는 주님 바람 결에 말씀 하시네
하늘과 땅 다스리는 주 그 무엇일까
주의 탄생 축하하리라 그의 백성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주님 오셨네 그 무엇일까
주의 얼굴 대하기까지 주의 은혜 의심하였네
나를 보호하시는 주를 나 지금 알았네 내 곁에 계시면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
나의 곁에 계시는 주는 모든 것 되시네
아브라함은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장막을 쳤습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쉴려고 장막 문 앞에 앉았을 때에 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한눈에 봐도 뭔가가 달랐겠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알아보고, 보자마자 달려 나가서 맞이하지요. 그들 중에 둘은 천사였고 한분은 전에도 늘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오셔서 언약을 베풀어 주셨던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그들을 보고 아브라함은 서둘러 허리를 굽히고 말을 하였습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창18:3-5)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부름으로 철저한 섬김의 자세를 나타내죠. 물로 발을 씻는 것은, 그 지방의 환경과 생활풍속에 의한 것입니다. 그곳은(중동) 비가 집중적으로 많이 내리는 계절(우기)과 전혀 비가 오지 않는(건기) 두 계절로 나뉘어집니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는 땅이 항상 말라 있었고 먼지가 푸석푸석한 거리를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슬리퍼와 같은 종류의 신발을 신은 발은 항상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귀한 손님이 오면 제일 먼저 발을 물로 씻어 주는 것이 큰 대접이었습니다.
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먼 길을 여행했다면 몹시 지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쉴 것을 말한 것은 당연한 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발을 씻고 서늘한 그늘에서 쉬면서 떡을 먹음으로 지친 몸을 회복하여 상쾌한 마음으로 다시 여행을 계속하도록 하시라고 권하는 것은 나그네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하는 평소의 아브라함의 모습이기도 하죠.
조카 롯은 소돔에서 삽니다.(창19:1~2)과 오늘 본문 두 군데서, 아브라함과 롯의 비슷한 것을 발견합니다. 장막 문에 앉아 있는 아브라함과 성문 앞에 앉아 있는 롯, 아브라함과 롯은 둘다 똑같이 보자마자 일어나 달려가서 몸을 굽히고, 땅에 엎드리며, 들어와서 쉬었다 가라고 간청하죠. 아브라함과 롯이 하는 것이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다릅니다. 이 본문은 많은 목회자가 설교를 하여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이기도 하죠.
여호와의 사자 일행은 쾌히 아브라함의 호의를 받기로 허락하였고 아브라함은 서둘러서 사라에게 떡을 만들게 하고 종에게 가장 좋은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고운 밀가루 세 스아로 떡을 만들도록 하였는데(6절) 그 분량은 상당히 많은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정확한 것을 좋아하나요? 한 스아는 약8리터, 세 스아는 24리터정도, 세 사람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죠.
송아지를 잡는 것도 보통의 일은 아니었죠. 옛날에 사위가 장모집에 가면 씨암닭 한 마리를 잡아 준다고 했던가요? 아브라함은 요리를 하는 동안 직접 신선한 우유와 치즈를 가지고 와서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호의를 베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죠. 말씀을 한번 읽어 볼ᄁᆞ요?
6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창 18:6-8)
그러나, 롯은 어떻게 대접합니까? 신혼때의 당신은 사랑하는 남편에게 어떠한 밥상을 차려 드렸나요? 신혼이 지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밥상에 성의가 있고 건강을 생각하는 밥상인가요?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마음과 태도는 어떤가요? 롯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맛이 없고, 정성이 벗는 무교병하나를 달랑 드렸습니다.
(19:3)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무교병은 누룩이 없는 빵입니다. 급하게 준비하다보니, 누룩이 없어서, 빵같지도 않습니다. 아브라함에 비해, 너무 준비도 허술하고, 하나님의 사자에게 대하는 것이 형편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본문의 말씀은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라, 곧 흥할 자와, 곧 망할 자의 현재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을 축복을 하러 왔지만, 조카 롯에게는 멸망을 전하러 온 것이죠. 그들이 뭘 잘 대접해서 축복하고, 대접을 잘못해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그들에게 복과 저주가 정해져 있습니다만, 그들의 하는 짓을 보니, 왜 그렇게 복과 화가 갈리게 되었는지 알만하다는 것입니다.
롯은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고 마음도 멀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충 대접하였죠. 첫사랑을 잃고 믿음도 변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약속의 말씀을 하실 때부터, 25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죠. 기대가 큰 만큼 지치고 실망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비록 자신의 기대과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지치고 실망으로 가득찼어도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첫 사랑을 잃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대접하고 모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깝고 친밀합니다.
저는 예전에 한 성도님이 생각이 납니다. 제가 젊을 때 좋아하는 악세사리가 있는데, 반지도 목걸이도 아닌, <귀걸이>입니다. 근데, 그분이 귀걸이를 10개나 사서 가져 온 것이었습니다. 원없이 가지고 써보면 ‘미련’이 없어진다고 하면서. 저는 그것을 보고 웃었습니다. 하나님도 웃었습니다. 나중에는 젊은 여자 대학생들에게 주었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한결같은 태도와 호의에 마음이 상쾌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부부를 축복하였죠.
내게 있는 향유 옥합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험한 산길 오르신 그 발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주님 다시 이 땅 위에 임하실 그때 주의 크신 사랑으로 날 받아주소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대를 잇는 진정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각은 계속 틀렸습니다. 처음에는 상속자를 [엘리에셀]로 간주하고 살았습니다. 다메섹에서 데려온 양자를 상속자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뀝니다. 내가 직접 낳은 아들이 상속자가 된다는 말씀을 듣고 바뀐거지요.
그래서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이 내 후손이 상속자가 될 것을 믿고 살아온 세월이 자그마치 13년입니다. 누가 뭐래도 [이스마엘]이 내 상속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는 달랐죠. 아브라함의 생각은 다 땡땡땡! 하나님의 생각과 틀렸죠. 하나님과 마음을, 궁합을 맞추지를 못하였습니다. 하갈이 아니라, 사래의 몸에서 나온 자식이 진정한 상속자이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죠.
아브라함은 생각하고 행하는 것 모든 것이 다 어떠했나요? 다 인간적인 생각뿐이었습니다. 인본주의로 가득했죠.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합하지를 못하였죠. 이에 반해, 하나님은 다윗에 관하여 무어라 말씀하시는 가요? “다윗과는 마음이 맞다. 코드가 맞다” 라고 하시죠. 하나님과 마음이 ‘짝짝쿵해서’ 마음이 잘 통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세의 아들 다윗을 만나 내 마음이 합한 사람이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리라
아브라함은 완성된 인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죠. 처음부터 아브람이 하나님의 마음이 맞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기근을 만난 아브라함은 부름 받은 소명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갔죠. 도망갔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잘못을 범했죠. 그리고 신본주의가 아닌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불완전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완전한 자” “하나님과 마음이 합 한자”로 성장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벽과 장애물을 마주하면 절망하고, 불안해집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고 시도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에 절망하고 불안한 현실에 휘둘립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점점 깨닫게 됩니다.
‘아, 내 방법대로,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안 되는구나.’ 그러면서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주관대로 살던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내 마음속에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죠.
처음에는 이것이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점점 내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게 되면 내 삶이 점점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그 일을 하시기 때문에 내 마음이 가볍고 기쁘죠.
하나님을 우리는 조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아브람이 자기 뜻과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돌아서서 하나님께 붙들릴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큰돈, 큰건물, 큰 축복, 큰 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당신과 하나님의 마음이 맞지가 않잖아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
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악하고 음란한 세대일수록 표적과 기사를 구합니다. 어디 문제를 잘 해결하는 영적 능력이 있는 기도원 목사가 없나? 영적 능력이 대단한 목회자가 있나? ‘여기 저기’ 싸 돌아 다니지 마십시오! 예수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휩쓸려 다니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축복을 많이 주신다고 기대를 크게 한 만큼 실망도 큽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니까요. 주님은 우리가 먼저 그분과 동행하기를 원하고 그분과 마음을 맞추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붙들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나님께 마음을 맞추어 가며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가는 아브라함이 드디어 나이가 99세 되던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완전하라” :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탐밈’인데, ‘완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함’ 혹은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이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맞추어 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열정과 순수함이 100% 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짝퉁 도금이 아닌 순수한 정금이 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나의 갈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순수함에서 완전하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하나님과 마음을 맞춘 ‘최선’이 된다는 것을 말하죠.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당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도르’는 ‘세대’를 의미하는데, 노아의 의인으로서 완전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됨을 보여주죠.
우리들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통하여 우리들은 또 다른 단계로 올라설 수 있고, 그 단계에서 또 다시 온전해지려는 거룩한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이제는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가 되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여 가는 99살이 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동안은 막연하게 주신다고만 하면서 수 십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언제 이삭을 주시는 지 때와 시간을 딱 확정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0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에스겔 에덴
아브람은 99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격적 관계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어야 하죠. 아브람도 어린 사무엘도 듣는 하나님의 음성.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있나요? 당신은 쉬지 않고 기도를 하고 있나요?
“기도하는 입술은 죽으면 닫힐 수 있고, 기도를 느끼는 심장은 그 박동을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살아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자리 잡으며, 기도드리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습니다.
기도는 한 세대보다, 한 시대보다, 그리고 한 세상보다 더 오래도록 살아남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로 사람의 마음을, 우주를 움직이시며 기도할 때 천사들을 동원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에덴동산을 줄게. 양을 많이 줄게. 사람들이 가득차게 할 거야.” 라는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을 주셨어도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주시지 않는 다고 말씀하시죠.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하나님은 기도를 하지 않는 자에게는 에덴동산이 아니라 에덴동산 할아비라도 주시지를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호흡이요, 영적 충전을 가능케 하는 요소이죠.
35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 하리니
36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겔36:34-38)
황량하고 적막하게 무너진 곳을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며 그대로 방치하는데, 주께서는 다시 건축하시되 에덴동산같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황무지가 기경되며 무너진 곳을 건축하시되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가득 찰 축복을 주신다고 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이 축복을 위해서는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심령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과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함을 가르치기 위한 거룩한 의도입니다.
너희가 기도를 하면, 열국 중에 흩어진 이스라엘 자손을 불러 모으심이 마치 특별한 절기에 제사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으로 오는 양 떼같이 많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잃은 백성을 다시 회복시켜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가득 채운다고 하시죠.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죠.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고 했죠.(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은 하나님께 쉬지 않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실행하기 불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매일 방언으로 랄랄랄 만 하고 다니면 이건 미친놈이죠. 일도 노동도 기도거든요.
물론 개개인 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분량이 다 다릅니다. 기도를 나무에 비교하면 기도하는 것 자체가 남이 보지 못하는 <뿌리>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하면 어쩔 때는 지겹고 힘들고 웬지 부담스럽지 않나요? 뭔가 숙제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기도를 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애인, 사랑하는 내 신랑과 대화를 하는 것이기에 기도를 할 대면 마음이 생쾌해지고 가볍고 좋답니다.
날마다 나의 무거운 짐을 주께 맡긴 듯이 홀 가분하죠. 나의 마음에 빛이 뿌려지고 하늘의 기쁨이 넘칩답니다. 한 주를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기도생활이 있어야 하는 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죠. 1주일에 한번, 2-3번, 어떤 사람은 날마다. 각자의 사람에게 주신 자기 분량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 기도를 매일 3시간은 해야지 힘이 넘치는 사람이 있고, 모세처럼 중요한 문제 앞에서 40일 금식기도, 20일 금식기도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죠.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외적인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앙망하며, 성령 안에서 늘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에는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시간이나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유가 있든 없든, 마음이 강하든 연약하든, 환경이 편안하든 열악하든, 어려움이 있든 없든, 상관 없이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를 하면 사탄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 사로 잡히게 됩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를 다스립니다.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오직 주만이 나를 다스리네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오직 주만이 나를 다스리네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너희는 이 세상 풍속을 쫓지 말라”하셨는 데. 사탄은 온갖 사악한 사상과 관점, 온갖 사회 시류로, 우리를 파괴시키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통제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육적인 삶과 물질과 향락, 쾌락에 빠져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 힘이 없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마음은 점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죠.
또 온라인 게임이나 동영상 사이트, 각종 중독 등으로 절제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시간을 빼앗기도록 유혹하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완전히 사로잡아 하나님의 말씀을 보거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등 하나님 앞에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성품이 바뀝니다. 사람이 변하죠.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이익을 도모하고, 교활하고 간사하며, 음란하고 악독한 성품으로 가득 차게 되죠. 기도하는 성전이... 기도하는 사람이 강도의 굴혈로 변하고 말죠.
한마디로 본성의 지배를 받아 사람다운 모습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의 영 안에서 하나님이 사라지면 다른 것이 들어올 빈자리가 생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탄이 틈을 타죠. 온갖 귀신들과 잡것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사탄은 바로 당황하여 황급히 도망가죠.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사탄은 육적인 삶을 위해서만 바쁘게 지내게 하며, 공허하고 지친 날들을 살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부르짖지도 않는다면 사탄의 간계를 꿰뚫어 보지 못해 쉽게 사탄에게 끌려가 하나님의 구원을 잃게 되죠.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께 예배할 시간도 없이 돈의 노예로 전락하게 합니다.
사탄은 돈을 쓰도록 유혹하고 또 돈을 벌기 위해 죽어라 일하게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하는 거죠.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음에도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부유한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동시에 두 개의 일을 하게 되었고, 바쁘다 보니 말씀을 보거나 예배할 시간도 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기진맥진한 자매는 병이 나 고통스럽게 살게 됐죠. 그 자매는 자신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솔직한 생각과 어려움을 하나님께 털어놓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과 깨우침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구하고 기도드리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6~37)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며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최상의 물질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해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나머지 시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만나야지, 가장 의미 있다는 것도. 그녀는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였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때론 어려움에 부딪치고 좌절과 실패를 겪게 되면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에 빠져 하나님을 따를 믿음을 잃고, 마음과 생각이 흐려져 오랫동안 생명이 조금도 자라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서 잘못된 내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정상적인 상태에서 살면서 어그러진 관계들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당신의 한숨은 여호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울음은, 당신의 눈물의 통곡은 하나님의 마음에 머무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마19:26).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구하십시오.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담대하게 구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히 4:16).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더 넘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엡 3:20).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람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맞추어 가지를 못 하였죠. 하나님은 그런 그들 부부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내버려 두셨죠. 그들은 점점 지쳐 갔고 무기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25년이란 세월동안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점점 하나님의 마음과 맞추어 갔죠. 그는 25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어도 하나님을 향한 대접과 경외함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대접하였죠.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하며 그들 부부에게 웃음을 주셨습니다.
사라자신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살아 있었기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습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죠.(히11:11-12)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18:5-6)
주님, 나도 롯처럼 첫사랑을 잃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하나님을 대충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지치고 힘들어도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계속해서 살아 있게 하옵소서.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묵묵하게 걸어 가게 하소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최선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맞추어 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게 하시어 미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잉태할 힘을 얻은 사라처럼 이삭을 웃음을 얻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새노래로 주를 찬양 온 땅이여 주 찬양하라
새노래로 주를 찬양 온 땅이여 주 찬양하라(X2)
위대하신 주 이름 찬양해
위대하신 주 이름 찬양해
'영성산책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은총목사/ 창세기20/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0) | 2024.04.22 |
---|---|
주은총목사/ 창세기 19/ 드디어 하나님의 친구가 된 아브라함 (0) | 2024.04.21 |
주은총목사의 창세기17/ 아둘람굴 그리고 (0) | 2024.04.19 |
주은총목사의 창세기16/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0) | 2024.04.17 |
주은총목사/ 창세기15/ 기다림에 지친 사람 (0) | 2024.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