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미디어 교회/ 주은총목사
창16/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본문: 창16:7~13
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창16: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창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창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창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하갈, 이 세 사람이 엮어가는 가정사에 대한 한 부분이죠. 평안하던 가정이 세 사람의 잘못된 결정으로 말미암아 복잡하고 뒤죽박죽으로 얽힌 복잡한 가정사가 되게 됩니다.
점점 나이가 먹어가도 자녀가 없자 사래의 마음은 조급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성급하게 행동하고 말죠. 자기 몸종 하갈을 이용해서 씨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몸종 하갈을 씨받이로 사용해서, 내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죠.
이 세상에 여자가 싫다는 남자 봤습니까? 예비군이 되면 치마만 둘러도 다 좋다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어 의로 여김을 받았던 아브라함조차, 뒤에서 사라가 조종하는 대로, 사라의 말대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잠자리를 같이 하였죠. 사라와 달리, 이국적으로 보이던 애굽에서 데리고 온 젊은 여인 하갈과 뜨거운 밤은 보냈습니다. 하갈은 아브람과 정욕적인 밤을 보낸 후, 그만 임신을 하게 되었죠. 그러자 하갈은 야릇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주인 사라는 아직까지 임신을 하지 못했지만 난 아브람의 씨를 임신했어.”
사람이란게 환경이 변하고 자신의 위상이 조금 바뀌면 자신을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여 오만해지고, 자만에 빠지기 쉽죠. 하갈은 노골적으로 대놓고 사라의 명령을 거역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임신이 벼슬이라도 된 듯이 아브라함의 모든 재산이 곧 태어날 자신의 자식 몫이라고 생각하며 멋대로 행동했죠.
아브라함은 두 여인의 갈등에 개입하여 그 문제를 풀어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는 우유부단합니다. 상처 입은 사래가 하갈에 대해서 계속해서 불평을 터뜨리자 난감해진 아브라함은 임신한 하갈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결국은 사래의 등살에 시달리다 못해 그는,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면 되지 않겠소.” 라고 말을 합니다.
당시의 관습법에 의하면 사래가 하갈에 대한 처분권을 갖고 있었죠. 사라는 아브라함의 ‘동의와 지지’를 얻자 그동안 당했던 멸시를 꾹 참고 있었던 서러움이 폭발을 하였습니다. 하갈의 머리채를 잡고 혼꾸녕을 내며 학대를 하기 시작한 것이죠. 하갈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여 광야의 술 길 샘 곁에 앉았습니다.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술” 길은, 블엘세바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죠. 하갈이 지금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죠. 술 길 옆에 샘이 있었습니다. 잠시 쉬고 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가, 그곳에서 하갈의 이름을 부르죠.
하갈을 뭐라고 부릅니까?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그럽니다. 그냥 “하갈아~!” 가 아닙니다. 하갈은 깜짝 놀랬을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보는 것도 놀랍지만,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더 놀랍죠.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너는 사래의 몸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질문하십니다. 참 단순한 문답입니다. 하갈은 ‘어디서 와서'라는 질문에는 답하고 있지만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합니다. 정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말합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이 말은 쉬운 말이 아닙니다. 다시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들어가서, 학대를 당하고 복종하라니 이게 웬말인가요? 너무 가혹하고 매정한 명령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명령을 내릴까요? //인정머리가 없어서 그럴까요?//종이라 사람취급 안해서 그럴까요? 그런게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명령을 내리는 이유는, 하갈에게 크신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이 복은, 반드시 아브라함과 함께 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야지요. 아무리 학대가 있고, 고통이 있는 곳이라도, 그곳이 하갈이 있어야 할 곳입니다. 사래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갈은 여러 측면에서 최초의 여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여인들중에, /처음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이름을 불러준 여인입니다./하나님의 축복을 약속받은 최초의 여인이죠. /태어날 아들에 대해,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최초의 여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갈은 사래에게 돌아가, 종으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돌아가면, 다시 사래의 학대가 시작될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길고 긴 방황의 늪을 지나 다시 주님 품에 안겼네
상한 나의 이몸 찢기어진 나의 마음 모두 가진 채로
나의 욕심 때문에 나의 헛된 꿈 때문에
그렇게 방황했던 나의 인생을 이제 주께 맡기려네.
그 멀고 먼 근심의 계곡을 지나 이제 평안의 집에 왔네
그 아무도 내게 참된 평안 줄 수 없어 얼마나 괴로웠었는지
나의 욕심 때문에 나의 헛된 꿈 때문에
그렇게 방황했던 나의 인생을 이제 주께 맡기려네
이제 아버지의 집으로 이제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와 눈물 흘리며 엎디니 오 주여 나를 받으소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는 화가 있습니다.
(사31:1) “도움을 구하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그들은 말을 의로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애굽이 그런 곳입니다. 육체만 있는 곳입니다. 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입니다. 그 애굽에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하갈이었습니다. 하갈은 거기서 왔습니다.
애굽에서 사래를 따라, 출애굽 한 것이죠. 사망의 그늘에서 탈출해서, 생명이 있는 곳으로 들어온겁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신하들에게 궁궐을 어수선하게 했던 아브라함과 그 일행에 대해서 일체 책임을 추궁하지 못하게 하고, 이미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준 모든 것을 가지고 애굽을 떠나게 했죠. 그때 하갈은 고향 땅 애굽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가나안 땅으로 온 이후에 주인이신 아브람에게 특별한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훈련된 318명의 종들이 팔레스타인의 군주였던 그돌라오멜 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출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갈은 조마조마해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하갈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아브라함의 힘과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브람의 구별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꼈던 하갈은 드디어 바로, 오늘 통곡의 자리에서 아브람이 만났던 하나님을 하갈 자신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하갈은 자신이 임신하는 순간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며 여주인 사래와 힘겨루기를 하며 멸시하고 방자하게 날뛰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상황이 불리해졌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것이죠.
사라의 학대는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출산일이 다가오는데, 자칫 잘못하면 태아가 위험해질 것 같았습니다. 학대와 억압속에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하였습니다. 통곡의 자리는 고통스러운 자리입니다.
학대당하는 자리고, 괴롭힘을 당하는 자리입니다. 결국, 하갈은 사라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을 쳤죠. 바로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이 평상시 여호와의 천사와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을 익히 보았기 때문에, 금방 알아 보았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과 같이 미천한 사람에게 나타나리라고는 꿈도 꿔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사라에게 학대받아 도망쳐 나온 일에 대하여 자기 마음의 억울함과 자기가 당한 고통에 대해 아무도 이해해 줄 사람이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갈은 죽을 고비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고백하였습니다.
13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16:13)
오래전에,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일이 벌어졌죠. 우리나라 3대 신문중에 하나인 신문사가 있습니다. 그 신문사 사장의 아내가 서울 강서구의 경계인 가양대교에 있는면 한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당시 그 신문사 사장의 장모이자 시신을 발견 된 딸의 어머니는 이러한 편지를 남겼죠.
“0 서방, 자네와 우리 집과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네”라는 담담한 문장으로 시작한 이 편지에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0 사장이) 자식들을 시켜 자기 집 지하실에 설치한 사설 감옥에서 잔인하게 몇 달을 고문하다가, 가정을 지키며 나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내 딸을, 네 아이들과 사설 앰뷸런스 파견 용역 직원 여러 명에게 벗겨진 채, 온몸이 피멍 상처투성이로, 맨발로 꽁꽁 묶어 정신병원으로 보내다가 내 집에 내동댕이친 뒤 (딸은) 결국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음에 내몰렸다”는 편지였죠.
돈 때문에 남편과 자녀들로부터 지속적인 폭력과 학대를 받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고, 이 같은 내용은 딸이 죽으면서 마지막에 남긴 유서이죠. 혹시라도 있을 유서 조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유를 친인척들에게 여러 장 맡겼습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시작해 장모의 폭로 편지, 장모와 처형의 고소, 그리고 자식들의 맞고소까지. 돈으로 인해 고작 8개월 만에 보통 사람들이라면 평생에 걸쳐도 겪지 못할 일들을 연이어 겪었습니다.
“0일보 000님을 어떻게 이기겠어요.”하고 부인은 2016년 9월 차 안 블랙박스에 이 말을 남기고 한강에 스스로 몸을 던졌습니다.
몇 분 동안이나 구조 요청 전화를 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여성의 비명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 절체절명의 시간, 세상은 한 개인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중학생 하나가 친구의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뒤에서 연필로 자꾸 찌르고, 때리고, 왕따를 시키고 부하처럼 거느리려 했기에 그는 공포와 아울러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할 방법이 없자 그 학생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카이스트 학생 한 사람은 경쟁에 시달리다가 삶의 무의미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효율성, 수월성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경쟁 속에 내몰리는 이들의 가슴을 열어보면 시퍼런 멍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 삶의 자리가 죽음의 벌판이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까? 우리 사회는 어느덧 이웃의 고통에 둔감한 곳이 되고 말았을까요?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주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세상 어딜가나 슬픔뿐이요 먹고자고 애써 일할뿐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여 나는 무엇하리까?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주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어둠속에 손펴 도움 바랄 때 돌연 빛이 나를 비추네
예수님이 서서 눈물흘리며 지체말고 오라하시네
싱글맘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어떤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뜰때마다 걱정거리가 떠올라요. 집안 일을 할 때도 경제적인 문제나 아이들의 건강과 학업에 대한 생각을 해요.”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그녀는 혼자서 아이들의 양육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힘들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족을 살피시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내가 두 직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힘주시고, 우리의 필요도 채워 주시고, 또 아이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매일 경험하게 해주시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잘 살고 높은 자리에 있으며 형통하고 복된 생활을 누리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축하도 해 주고 반갑게도 대해 주지만 일단 사업이 실패하거나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게 됩니다. 자녀도, 부부도,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렇게도 멀어지죠.
당신도 하갈처럼 길을 잃고 외로움 속에 고된 여정을 지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황무지 속에서도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감찰하신다는 기억하고 꼭 하나님을 만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갈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옆에 있는 샘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이러한 모습들이 연상이 됩니다. 광야에서 세상에서 사래와의 일로, 학대당하는 일로, 억압당하는 일로 술집에 들어가서 한잔을 하지 마시고 술 길옆에 있는 샘, 즉 성전으로 달려가서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부으십시오!
당신 역시, 살피시는 하나님, 곧 “엘 로이(El Roi)”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기가 막힌 이 현실을 보시고,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혼절하려는 나를 보시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어느날 괴로워서 눈물로써 아뢰일때
주님께서 나의맘 아시고 위로하여 주셨네
나를사랑 한다던 그말씀위로하여 용기주네
너슬퍼말라 언제나함께하고 무거운짐 대신지리
너 괴로워마라 너는내백성 두려마라
오 나의주 평화의주
내 피곤한맘 쉼을 얻으리
당신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란 이름중에 어떠한 이름이 더 좋습니까? 사실, 이스마엘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좋은 뜻인지 모릅니다. 이삭 목사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 선교사님도 있잖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과 동일한 약속이 하갈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사자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죠. 하갈의 고통을 보고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너의 고통을 들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창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고통받는 이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들으신다는 것은 그 일에 개입하여 그들의 한을 신원하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천사의 말은 계속됩니다.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대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12)
12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이게 위로의 말, 격려의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고통이 없는 평안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죠. 시간 여행자인 인간에게 ‘불안’은 실존의 조건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투명하고 불확정적인 것이 미래인 데, 어찌 불안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건강한 삶이란 시련과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뜻을 찾아가는 삶일 겁니다. 삶이 본디 어려운 거라고 생각하면 작은 고통에도 비명부터 지르거나 엄살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혹독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강인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생명에 위협을 가하거나 위축시키려 하는 온갖 힘들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전사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갈은 감동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엘 로이’, 즉 ‘보시는 하나님’이라 명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갈이 서있던 그 샘은 ‘브엘라해로이’ 즉 ‘나를 보시는 살아 계시는 분의 샘’이라는 이름을 짓습니다.
13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애굽 여인인 하갈은 인생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사라에게 도망쳤을 때, 그리고 이스마엘이 커서 이삭을 핍박하고 희롱하다가 내어 쫓겼났을 때 하갈은 그때도 미친 듯이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히 보게 하셔서 샘물을 보게 하셨죠. 그러자 하갈은 정신을 차리고 얼른 샘물에 가서 물을 가득 채워다가 이스마엘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죠.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 계셔서 이스마엘을 장성하게 하셨고 활 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한편 하갈은 애굽 땅에서 한 아리따운 여인을 데리고 와서 이스마엘의 아내가 되게 하였죠. 이렇게 하갈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고, 이스마엘이 아내를 맞이하는 장면을 끝으로 성경과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엘로힘의 하나님
톨스토이의 '참회록'에 보면 한 나그네가 광야를 지나가다 난데 없이 나타난 사자를 만납니다. 사자는 발톱을 세우고 커다란 입을 벌리고 한 입에 삼킬 듯한 기세로 나그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나그네는 죽을 힘을 다해 도망을 쳤습니다.
마침 마른 우물을 하나 발견하고, 무섭고 두렵지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뛰어 내렸습니다. 한참을 떨어지다 다행히 한 가냘픈 나뭇가지에 ‘덜컥!’ 걸렸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뭇가지에 겨우 매달린 채,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이번에는, 수많은 독사들이 우물바닥에 뒤엉켜서 우글거렸습니다.
독사들이 머리를 쳐들고서 시뻘건 두 혀를 널름거리며 ‘쉿 쉿’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혼비백산하여 다시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사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입에 침을 흘리며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으르렁 으르렁’대는 것이었습니다. 나그네는 올라갈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주위를 살펴보니까 나무의 잎사귀에 벌들이 꿀을 쳐놓았습니다. 그 지경에 처했음에도 나그네는 혀를 내밀어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꿀이 달고 맛있었는지 나그네는, 자기가 처한 위기의 상황도 잊고 연신 ‘아이고, 참 맛있구나!’하며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매달린 손에 힘이 차츰 차츰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슨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우물 벽의 돌담 사이로 검은 쥐와 흰쥐가 교대로 연신 드나들면서 나그네가 의지하고 매달려있는 가냘픈 나뭇가지의 밑동을 갉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여기 검은 쥐 흰쥐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는 밤과 낮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한정된 년수에 밤과 낮, 검은 쥐 흰쥐, 드나들 듯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리면, 마침내 매달렸던 가지는 부러지고 인생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 기막힌 사연이 인생의 현주소입니다.
바로, 이번 주에 황숙녀 강도사님께서 17년간 섬겨오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황숙녀 강도사님과 사모님과 성도들이 담임 목사님의 유해를 뿌리려고 여기 저기 가보다가는 결국은 고향인 제주도의 이기풍 목사님 기념관이 있는 곳에 뿌렸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인생은 하숙생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영혼은 하나님께 가고 나의 육체만 남으면 내 유해를 들고 ‘용문산 기도원’이 있는 기도자리였던 높은 <00봉>이 있어. 백두대간을 오르는 길이지. 국수봉이라는 곳에 이르면 옛날 전쟁중에 헬기가 착륙하던 곳이 있어. 바로 그 <00봉>에 내 유해를 뿌려줘.
가수 최희준씨가 부른 노래 제목이 하숙생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아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맞는 말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고, 인생은, 잠시 있다가는 하숙생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는 말과 같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은 저와 당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던지시는 하나님의 기가막힌 질문이죠.
“너는 누구며,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냐?” 라고 하는, 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요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얼마나 분명한 대답인가요? 시작도 하나님, 종착점도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나그네 길이고,
말하자면, 하숙생입니다. 이곳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비록 이 땅에 나그네로, 하숙생으로 살지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하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하는, 하갈에게 하신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기도
주님, 주님은 말씀하셨잖아요.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피로 값 주고 당신의 소유물로 사신 우리를 절대로 빼앗아 갈 자가 없다‘
인생에서 죽음과 자살밖에 남아 있지 않은 하갈을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세상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을 잡으셨던 것처럼. 죽음에서 절망에서, 영혼의 허덕임에서, 소망은 없고 해골만 남은 곳에서 살려 주옵소서.
하갈에게 들려준 그 약속의 음성을 나에게도 들려주옵소서. 주님, 나의 고통을 들으시고 응어리지고 피멍든 한을 풀어 주옵소서. 주님의 빛을 받아서 환해져서 씩씩하게 그 길을 걸어갔던 하갈처럼. 나를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최희준의 하숙생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이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간주중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영성산책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은총목사/ 창세기 18/ 당신은 최후에 웃는 사람! (0) | 2024.04.21 |
---|---|
주은총목사의 창세기17/ 아둘람굴 그리고 (0) | 2024.04.19 |
주은총목사/ 창세기15/ 기다림에 지친 사람 (0) | 2024.04.15 |
주은총목사/ 창세기14/ 기다림과 믿음이란? (0) | 2024.04.14 |
주은총목사/ 창세기 13장 아브람과 롯의 선택 (0) | 2024.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