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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빌1/기쁨의 복음 (by 주은총목사와 함께 하는 영성산책)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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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있는순복음교회/ 주은총목사
빌립보서1/ 희락의 복음(1장 1절~2절)
할렐루야! 교회가 이사를 잘 하였습니다. 그동안, 기도하며 기다려 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감사를 올립니다.
교회가 지하에 있었지만, 제게는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에 있었거든요. 코로나 시기에 세상은 코로나와 기근으로 난리였고 하나님은 저를 어둡고 캄캄한 방주안에서 하늘을 향해 쉬지 않게 부르짖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어둡고 캄캄한 방주안에 나와서 송정역 4번출구에서 5분거리에 있는 2층으로 이사를 하게 하셨습니다.
2022년 10월 9일 오후 4시 주일오후에 <새성전 이사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꼭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빌립보서는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입니다. 성경은 어느 성경이든지 똑같이 중요하고 다 귀한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특별히 좋아하는 데는 좀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통해서 고난을 이기는 기쁨을 여기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고난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그 벅찬 감격과 기쁨이 이 서신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몸으로 이 편지를 썼죠. 그래서 빌립보서는 귀하고 특별합니다. 더욱이 바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있으며, 언제 사형 선고를 받을는지 모르는 막연한 위기의 시간에 있으면서 이 복음을 쓰고 있죠. 감옥에서 온 편지, 어느 정도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써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서의 별명은 '희락의 복음'입니다. 기쁨의 복음이죠.
당시의 감옥은 대부분이 지하에 있었습니다. 땅속인 까닭에 습기가 차고 추웠으며 햇빛이 들지 않아 냄새도 지독하였죠. 더군다나 죄수의 탈출을 방지코자 발에 착고까지 채웠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바울은 자족하는 삶의 자세로 일관하였습니다.(빌4:11)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18번이나 사용되고 있고 행16:25의 기사는 그들이 이 악조건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옥중에서도 찬양하는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는 모든 죄수들도 들으면서 이들에게 전도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나를 관제(灌祭)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2:17,18)“
바로 이 점이 빌립보서의 매력이죠. 즐겁게 잔치를 베풀면서 살고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옥에 갇혀 있는 그 답답하고 위험한 시간에도 기쁨으로 살아가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하니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가요?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 환경과 관계없는 역설적인(paradoxical) 기쁨을 지니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 전도인 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도 기뻐하면서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당신은 주위에서 고난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사람을 봤나요? 아, 저는 몇 번 보았습니다. 저런 환경속에서 기뻐할 수가 있다니? 완전 충격자체였죠.
1주의사랑비췰때에 기쁨오네 근심걱정물러가고 기쁨오네 기도하게 하시며 희미한것 물리쳐주의사랑비췰때 기쁨오네. 2주의사랑비췰때에 이세상은 아름답고활기차게 다변하네 화평중에 내영혼 영광스런 새생명다시 찾게되었네 그큰사랑. 3주의사랑비췰때에 이세상은 어둠슬픔중한짐이 다없겠네 우리들의 가는길 밝히비춰 주시며주의사랑비취네 그큰사랑. 4주의사랑비췰때에 그광채가 찬란하게우리둘러 비취겠네 세상모두 이기고 천국생활 할때도주의사랑비취네 그큰사랑. (후렴) 그 큰 사랑 내 맘 속에 충만하게 비칠 때에 찬송하네 그 큰 사랑 내 맘 속에 화평과 기쁨 주네 그 큰 사랑
빌립보서 1장 1절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바울은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합니다.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은 헬라어로 둘로스인데, 이는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팔고사고 하는 노예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노예는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 이런 기록이 있을 정도로 노예는 숫제 집에서 기르는 짐승쯤으로 취급당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노예의 수를 늘릴 욕심으로 동물을 서로 만나게 해서 새끼를 낳게 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대단히 민망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지금도 미국의 수준 낮은 흑인촌에 가면 한 여자에게 열 명 이상의 어린아이가 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흑인들에게는 노예를 사고 팔고 하던 시절의 패륜(悖倫)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노예에게 무슨 결혼식이고 윤리, 도덕이 있겠습니까.
이 집에 여자 노예가 있으면 저 집의 남자 노예 좀 오라고 해서 하룻밤 자게 하여 아이를 갖게 합니다. 아이를 낳아 좀 클 만하면 똑같은 방법으로 또 아이를 낳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노예들의 숫자를 늘려 갔죠. 이것은 백인들이 저지른 무서운 죄입니다. 노예가 많아야 일꾼이 늘어나고, 그렇게 해서 생긴 노예들은 영원히 주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부른 데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은 그리스도의 절대 소유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니, 내 소유, 건강, 생명, 재능도 다 주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노예를 팔고 사고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피의 값을 치르고 나를 사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 팔려 온 영원한 노예다, 절대적 노예이다, 나는 예수님의 것이므로 아무런 선택의 자유도 없다 - 이런 뜻으로 한 말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함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 순종함을 뜻합니다. 노예에게는 생각도 자유 의지도 없습니다. 주인의 뜻이 노예의 뜻이고, 주인의 생각이 노예의 생각입니다. 판단조차도 하면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순종했다고 해서 칭찬 받는 법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눅 17:9)?" 칭찬도, 고맙다는 인사도 못 받는 것이 노예입니다. 혹시 주님의 일을 하고 나서 알아주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노예가 아닙니다.
미치려면(及) 미쳐라
사도행전 19장 21절에 보면 “이 일이 다 된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했습니다.
바울의 “로마도 보아야겠다”는 비전은 하늘로부터 받은 비전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을 가리켜 “그의 많은 학문이 저를 미치게 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 26:24)
어느 분야든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혹 어떤 일에 통달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광(狂)적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많은 위인들이 그저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도(道)를 넘는 열정과 꺾이지 않는 도전으로 그 분야의 개척자가 되었고, 선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적당주의나 유시무종(有始無終)의 성격으로는 인생의 진수(眞髓)를 맛볼 수 없습니다. 성공의 극치를 만끽할 수 없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그림을 위해 자신의 귀를 잘라냈습니다. 과연 그는 미쳤습니다.
그러나 후세는 그를 미술의 대가(大家)라고 칭합니다. 사도바울도 예수께 미쳤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핍박인 줄 모르고 뛰었고, 배고픔이나 헐벗음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죽음도 불사할 만큼 그는 예수께 미쳤던 것입니다.
미치려면(及) 미쳐야(狂)합니다. 곧 어느 경지에 이르려면 그 분야에 미쳐야 한다는 말입니이다. 뜻을 세웠으면 그 뜻으로 가슴이 불붙어 뛰어야 합니다. 불이 붙었는데 어찌 정상적인 궤도에서 안주할 수 있으며, 느긋한 사고로 태평세월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성공을 원합니다. 최고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미치기는 싫어합니다. 고로 누구나 성공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목적, 높은 이상, 참된 뜻을 향하여 미치십시오! 광분(狂奔)하라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달음질하라는 것입니다. 고지를 점령하고 난 후 호흡을 가다듬으십시오. 성공하고 싶습니까? 최고가 되기를 원합니까? 미치십시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그의 복음 전파의 열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22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고통과 시련이 뒤따르더라도 개의치 않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온 몸을 던질 준비를 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죄수의 몸으로 역경 중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어려운 상태를 개의치 않고 오직 주님이 주신 사명 완수만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매진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매듭을 짓는 사건이었습니다. 보이는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제국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세계를 변혁하고 있었던 기독교의 복음이 마주친 사건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홀과 왕관의 모습이고, 복음은 나약하고 천박한 쇠고랑을 찬 죄수의 모습으로 나타났죠. 그러나 역사는 홀이 쇠고랑 앞에, 왕관이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은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국가는 권력의 칼이 무기이죠. 국가는 칼로 죄를 억제하고, 교회는 복음으로 죄인을 구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과 성령이 무기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일을 할 때 국가적인 차원, 칼의 힘을 빌어서 쉽게 해 보겠다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고 홀의 방법을 쓰면 겉으로는 승리한 것 같지만 실상은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길로 사람들의 세력을 이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보기에 나약한 죄수의 쇠고랑으로 로마제국을 무릎 꿇게 한 것입니다.
1.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이 풍랑에 배저어 항해하는주 예수님 이 배의 사공이라 2. 큰 풍랑이 이 배를 위협하며저 깊은물 입벌려 달려드나이 바다에 노저어 항해하는주 예수님 이 배의 사공이라 3. 큰 소리로 물결을 명하시면이 바다는 고요히 잠자리라저 동녘에 환하게 밝아올 때나 주함께 이 바다 건너가리 후)나 두렴없네 두렴없도다주 예수님 늘깨어 계시도다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빌립보교회가 세워지게 된 과정을 살펴봅시다. 주후 52년경, 제 2차선교여행 때의 어느 날 밤, 사도 바울은 환상을 봅니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우라(행16:9)"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소아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배를 타고 유럽으로 옮겨가죠. 그것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수출되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빌립보는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의 복음화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그러니까 동에서 서로 복음이 파급되는 역사의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빌립보는 당시에 로마의 퇴역장교들이 이주해서 사는 로마 식민도시로써 로마의 축소판과도 같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정치적 분위기를 십분 활용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 사람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런 중에 특별히 세 사람이 눈에 띄는데 루디아는 아세아 사람이고, 점하는 여종은 헬라인이고, 간수는 로마인이었습니다. 루디아는 부유한 상인이고, 소녀는 노예로 점을 쳤고, 간수는 로마 정부의 하급 관리였습니다. 이 세 사람은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를 반영하는 기독교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는 낯선 도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들린 여자아이 하나를 고쳐 준 것 때문에 애매하게 감옥에 갇힙니다. 아무 죄도 없이, 다만 그 여자아이를 고쳐 주었다는 한 가지 일로 매도 많이 맞았죠. 그럴 때에 바울은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벼락을 맞고 지옥에 떨어졌어야 할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는 순교하여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랴.' 그는 순교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약속된 하늘나라에 가게 된 것을 감사하며, 거룩한 성도의 반열에 참여하게 된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를 향하여 기뻐하라 할 때의 그 기쁨은... 신혼여행의 기쁨, 재물을 얻는 기쁨, 출세하는 기쁨 따위의 세상적인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죄악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는 권능이죠.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속에서 큰 지진이 발생하여 옥문들이 열리고 착고들은 저절로 풀리는 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놀란 간수는 이 일로 인하여 모든 죄수들이 도망갔을 것이라고 여거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였죠. 당시의 법은 간수가 죄수를 놓치는 경우 간수 자신이 그 죄수를 대신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끌려가서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살을 택하고자 한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간수를 회개시켜 그리스도를 영접케 하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간수의 온 가족이 세례받고 주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이 무엇일까요? 첫째, 주후 63~64년에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위로금을 모아서 바울에게 보냅니다.
그래서 4장 18절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라 했고, 15절에는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따뜻한 사랑이 고마웠고, 이제 그에 대한 감사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두 번째 이유는 빌립보교회의 현직(現職) 목사였던 에바브로디도와 관련됩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보살피기 위해 로마에 온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동안 봉사하다가 그만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고열과 고통으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위로하러 온 사람이 병을 얻었으니 바울의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겠습니까? 일이 잘못되어 에바브로디도가 죽기라도 한다면 빌립보교회에 얼마나 미안한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은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본인도 자신이 죽는 것은 괜찮으나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에바브로디도를 낫게 해주십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건강을 회복하자 바울은 좀더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냅니다. 한시바삐 그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을 걱정에서 해방시켜 주고자한 것입니다.
이 때에 써 보낸 서신이 이 빌립보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착하고 귀한 종이라고 칭찬하는 동시에, 기쁨으로 빌립보교회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표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쓰게 된 동기로서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그 교회의 화목이었습니다. 당시 빌립보교회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질투죠. 빌립보교회에 두 여성 지도자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었는데, 두 여인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바울은 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한 마음을 품으라" "하늘나라에 가서 생명의 기업을 같이 누리게 될 터이니 싸우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또 1절에서 바울이 이 편지의 수신인(受信人)들은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말은 히브리어로는 카도쉬(kadosh)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그분을 모시는 거룩한 무리가 성도죠.
그런데 이 '거룩'이라는 말은'…으로부터 떠난다,' 곧 '…으로부터 구별된다'는 듯입니다.
생각도 구별되고, 음식도 구별되고, 목적도 구별되고, 의복도 구별되고, 운명도 구별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운명, 구별된 생각, 구별된 사상, 구별된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에 사는 성도'란 그리스도 편으로, 하나님 편으로 구별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일본의 저명한 교육자이자 사회사업가였던 도모다까 시모지는 한때 사형수였습니다. 사형수이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곳은 북해도 탄광촌이었습니다. 당시 혹독한 환경의 북해도 탄광으로 일하러 가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사형수들에게 그곳 탄광에서 일을 하도록 시켰고,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만큼은 사형집형을 연기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수천 명의 사형수들이 북해도 탄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시모지는 그곳에서도 악질로 통했습니다. 이 사형수 촌에도 토요일이면 면회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모지에게는 면회 오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숙소에 누워 있는 시모지에게 누가 면회를 왔다는 전갈이 왔다. 찾아온 사람이 누군지 의아해하며 면회실에 들어선 시모지의 눈에 들어온 호호백발의 노인은 몹시 굽은 허리 때문에 지팡이를 기대지 않고는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그의 집은 북해도에서는 3천 리나 떨어져 있는 일본 최남단의 작은 섬이었습니다.
그곳에 혈육이라곤 팔순 노령의 어머니 한 분뿐이었습니다. 마땅한 교통편이 없었던 시절이라 시모지는 늙은 어머니가 자신을 보기 위해 그곳까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노모가 아들을 보기 위해 그곳 북해도까지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악질 시모지는 무엇 하러 이곳까지 찾아 왔느냐고 고함치며 늙은 어머니를 타박했습니다. 그런 무정한 아들에게 노모는 말없이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래, 곧 돌아가마. 그러니 이것이나 받으렴.”
숙소로 돌아온 시모지가 보따리를 풀어보니 그 안에는 성경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사이 어머니가 예수쟁이가 된 모양이군.’
시모지는 쓴웃음을 지으며 성경책 보따리를 한쪽으로 밀어 놓았습니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그 새 성경책은 동료들의 담배말이 종이로 많이 뜯겨 나갔습니다. 그것을 보는 시모지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가져다준 책인데, 이런 식으로 버려서는 안 되지 않아!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어머니가 그 먼 곳에서 이곳가지 들고 온 거지? 한번 읽어나 볼까?’
그때부터 시모지는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성경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자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리듯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품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서든 틈만 나면 꺼내 읽곤 했습니다. 휴식시간에도 읽고, 점심시간에도 읽고, 숙소에서도 읽고, 심지어는 탄광 속에서도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탄을 캐다가 잠시 쉬면서 성경을 읽기 위해 옆 갱도에 가 있던 시모지의 귀에 요란한 폭발음이 들려왔습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그 속에서 일하고 있던 갱도가 무너져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37명의 동료 모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모지는 동료의 시신을 붙들고 울부짖으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시모지는 모범수로 출소하여 평생 동안 청소년을 위한 사회사업에 헌신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훌륭한 모범은 보여 주었습니다. 77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그는 중,고등학교 6개와 고아원 6개를 세웠으며, 일본교육자 대상, 사회사업 대상을 받았습니다.
빌립보서에는 바울의 인생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하려고 애쓴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빌1:20) 이는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매우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푯대를 향한 삶(빌3:14),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죽음(빌3:10), 하늘 상을 향하여 좇아가는 삶(빌3:14) 등의 표현들은 곧 바울 자신의 인생철학이었습니다. 당신의 철학은 과연 무엇인가요?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1장 2절 다 같이 읽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로 말미암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 여기서의 은혜는 하나님의 죄인들에 대한 구속의 은혜와 은사로 주시는 모든 것을 포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죄인들에게 평강을 가져다 줍니다. 여기서의 평강은 히브리어의 샬롬인데 전쟁과 싸움에 반대되는 의미의 평강이 아니고 죄와 반대되는 의미의 평강으로 영적인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평강이 없어진 죄인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으면 먼저 화목되어 평강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평강이 있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평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죄로 인한 모든 단절이 없어져 화목하게 되고 부조화가 조화로 변화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영육간이 잘되고 형통하며 행복한 삶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ㅣ
이 모든 평강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은혜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 평강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고난과 번민이 많은 환경가운데서도 기뻐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1.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복음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2.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복음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후렴: 한량없는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주님의 그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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