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총목사/ 요한복음6/ 하나님의 어린양
그림설명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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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총이야기
1권-주은총이야기-서막
2권-아달랴
3권-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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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있는순복음교회/ 주은총목사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30)
29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한복음 1:29-30)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잠시 쟁기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기도하는 농부 대신 밭을 갈아 줍니다. 이는 한 폭의 명화 속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 밭을 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갈면서 중간 중간 경건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쉴 새 없이 일만 합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이루어 놓은 삶의 질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경건의 시간은 하고 있던 일을 하나님 앞에서 점검받는 시간입니다. 경건의 시간은 하나님께 지혜를 얻는 시간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떠한 밭을 갈고 계십니까? 바쁘십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소홀히 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자신의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에 하나님과 만남을 가지세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시 쟁기를 내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편 32:6)
(29절)에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셨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그랬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튿날”이라는 말입니다.
(29)에도, “이튿날”
(35)에도, “또 이튿날”
(43)에도 “이튿날”
그러다, (2:1)에는 “사흘 되던 날”이라고 합니다.
왜 요한복음은, 이렇게 날짜를 세고 있을까요? 여기에 관하여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지금 (29절)에 나오는 “이튿날”은, 어떤 날인가요? 세례요한이, 자신을 시기하고, 질시하는, 그래서, 죽이려드는, 기득권자들의 위협과, 협박을 받은, 그 다음날을 말합니다.
(1장1절부터~28절까지)가, 말하자면, “첫째 날”에 속하는 날입니다.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 그냥, 말씀으로만 있지 않고, 그 말씀이, 몸을 입고,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이 발생합니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 참 빛이신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입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거하신다”는 말은, 원어로, “장막을 친다”는 뜻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그리스도는, 그냥 우리 가운데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막을 치듯이, 그래서, 그 장막으로 인해,
낮에는, /살인더위를 막아주고, 밤에는, /우리 몸을 얼게 하는, 찬 이슬을 막아주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고, /덮어주는, 그런 장막과 같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주님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빛을 증언하는 [세례요한]에 관해, 말씀을 펼쳐놓은 날이, 말하자면, ‘첫째날’입니다. 그 ‘첫째날’에, 저 유대 기득권자들은, [세례요한]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아지고, 세례요한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이단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조용기라는 목사가, 순복음교회를 세워서, 어찌나 잘나가던지, 기존 교회들이, 시기와 질투가 뒤섞이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말았던 시절이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유명하신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1970년초에 총신대학교로부터 교수로 초청을 받아서 귀국을 했는데 시간표만 짜고 북한에는 가본 적도 없는 그분을 충현교회 교인이니 이북파라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물러나고 또 충현교회에서도 여러 동료 목사들에게서 ‘박사면 최고냐’ 하는 모함을 받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바로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큰 위로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이 고난은 다 내게 <그릇준비>하라는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그분의 고백을 읽어 보았습니다.
세례요한당시에도, 똑 같았습니다. 세례요한이 하도 잘나가니, 그가 참 빛인 줄 알고, 그를 죽이고자, 찾아 온겁니다. 이 모든 일들이 있었던 날이, 말하자면, “첫째 날”입니다.
얼마나, 세례요한의 마음속이 복잡했겠습니까. 얼마나 심난하고, 힘이 들고, 기도가 나오고,
두려움이 몰려왔겠습니까.
그런 상태로, 밤잠을 설치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뜬 눈을 세우고, 그 이튿날을 맞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이튿날이, 지금 (29절)에서 말하는, “이튿날”인 것입니다.
그 ‘이튿날’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이튿날에,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이 처음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등장하실 때에, 어떻게 등장하십니까.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셨다”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처음으로 소개할 때, 어떻게 소개하는지 봐야 합니다. “나아오시는 예수님”으로 소개합니다.
“나아가다”라는 말은, [에르코마이]입니다. /“나아가다” /“다가가다” /“들어가다”가 [에르코마이]입니다. 마치,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이 뒤숭숭하고 심난한 세례요한의 마음속을 훤히 꿰뚫고 있기나 한 듯이,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향하여 나아오시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끊임없는, 불안과 갈등 가운데서, 여전히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에게, 묵묵히 나아오시고, 다가오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빛이 없어도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 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 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이 있으므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묾므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 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자기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 드리러 올라갈 때, 이삭에게 나무를 지우고 아브라함은 불을 가지고 높은 모리아 산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창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나님의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양’이란 뜻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는데 그 독생자 어린양을 하나님이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세상’이란 전세계를 가리킨 말입니다. 이 어린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전 세계 인류의 죄를 진 어린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린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의 역사는, ‘어린 양’을 기다리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어린 양을 찾는 일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의 종살이를 마치고, 애굽에서 대 탈출, [엑소더스]를 하고자 할 때, 그 출애굽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유월절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출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이 정월을 가나안에 살 동안에는 ‘아빕월’(가나안식)이라 불렀고, 포로기 이후에는 ‘니산월’(바벨론식) 이라 불렀다 |
(3)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10일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6) “이 달 14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출애굽기 12장 2-7절보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하였던 것이, 어린 양의 피였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양으로 역사를 시작하였고, 어린 양으로 구원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어린 양이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 말하면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아론의 후손이죠. 그러므로 제사장입니다. 누구보다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처음에는 성막에서, 다음에는 성전에서 매일 아침 제사를 드리고, 저녁에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침과 저녁에 제사를 드릴 때마다 어린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그 수를 평일의 배로 늘려서 아침에도 두 마리, 저녁에도 두 마리씩 어린양을 희생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왜 이렇게 어린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나요? 바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드렸습니다. 세례요한의 머릿속에는 이사야의 예언이 기억났을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며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장 7절)
세례요한은 누구보다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예수님보다 먼저 세상에 왔고 예수께서 나타나는 그 순간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소리를 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단순한 어린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어린 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지금 세례현장 한가운데로, /세례받는 인생들 안으로 나아오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 나아오시는 주님은, 그저 단순한 위로를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되, /우리 마음을 위로하시되, 근본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나아오시는 겁니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스스로, 자기를 죽여, 그 피값으로, 죄를 사하시는, 권능과 권세를 가지고, 인생들에게, 나아오고 계시는 겁니다.
(29)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보라, /나의 죄,/내 가정과 /이 사회와 /이 나라의 죄를 지고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를 보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 어린 양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하셨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 어린 양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하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우리의 허물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우리의 죄악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누리고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요? 인터넷에 빠져 있습니까? 현실에서 살지를 않고, 가상세계에서 빠져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습니까? 늘 핸드폰을 보지 않으면 불안한가요?
어떤 사람들은 늘 정치에 빠져 있고 권력을 보고 있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정치이야기만 나오면 그 쪽으로 눈이 돌아가죠.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쾌락,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것, 세상에서의 ‘편안함’만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면 지진이 나서 흔들거리듯이 나의 영혼이 공허하며 흔들거리기 시작합니다.
3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편 11:3)
사도 요한이 신령한 가운데 보니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옆에는 어린 양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각 나라 백성 방언 가운데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몸에는 흰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소리를 높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부릅니다.
사도 요한이 이들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장로 가운데 하나가 대답합니다. "이들은 여러 족속 여러 방언에서 왔지만 모두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계시록7:13-15)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이, (원어적으로) “장막을 친다”는 말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그리스도는, 그냥 우리 가운데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막을 치듯이, 그래서, 그 장막으로 인해, /그 뜨거운 햇볕과, /찬 이슬을 막아주고, 또한,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고, /덮어주는, 그런 장막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주님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장막을 치시듯이, 우리와 거하시는 어린 양. 그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요한계시록)에 정확하게 다시 등장하죠.
어떤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 한 분이 중병에 걸려서 자리에 누웠습니다. 마침 그때 담당 교역자가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그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7장 13-17절을 읽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니까 그 중하던 환자가 눈을 번쩍 뜨면서 "아, 목사님 그 절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시오." 라고 해서 그 구절을 다시 읽어 드렸다고 합니다.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데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말씀을 다 듣고 그가 하는 말이, "감사합니다. 내가 이제는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께 가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죄 많은 곳에, 두렵고 낙망한 곳에, 말없이, 묵묵히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고,/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나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는, 내 인생의 목자되신,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 보면, 어린 양의 손에 생명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우리의 이름이 녹명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야 그 책에 이름이 녹명됩니다. 요한계시록 15장 3절에는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큰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승리의 노래입니다.
아이삭 왓트의 그림가운데 소망이란 이름의 그림이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청년이 자살을 하려고 테임즈 강으로 가다가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어떤 소경이 비파를 켜고 있는데 모든 줄이 다 끊어지고 오직 한줄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의 줄 입니다. 인간은 모든 줄이 다 끊어져도 오직 소망의 한 줄만 붙어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직장도 없고 아내도 없고 재산도 없고, 집도 없고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없지만 자기에게는 자녀가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렇다. 내게도 하나는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살을 포기했다는 얘기입니다.
내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줄,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낙담하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지치고, 쓰러지는 나에게, 불꽃같은 눈동자로, 모든 것을 아시고, 내게 나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부디, 큰 환난에서 나오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 나의 눈을 열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는 그 보혈로 나의 죄를 깨끗게 하시고 나를 구속하신 십자가를 품게 하소서. 그리하여 세상을 이기고 큰 환난에서 빠져나와 승리의 찬송을 부르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요한계시록 5장 11절)
생명나무
1. 갈보리 언덕에 주님의 십자가 그 피로 내 죄를 깨끗하게 씻었네
아하 생명의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 나무라
2. 절망과 고통의 세상길 헤매일 때 예수님 품으로 나를 인도 하셨네
아하 생명의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 나무라
3. 지나온 인생길 부끄러움 뿐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감사만이 넘치네
아하 생명의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 나무라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 나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