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총목사/ 요5/ 세례요한의 증언
꿈이있는순복음교회/ 주은총목사
세례요한의 증언
요한복음 1:19~34
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29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증거했으나 세례 요한은 이미 오신 메시야를 증거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할 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과 하나님의 아들>증거했죠. 당신이 확실하게 아는, 당신이 체험한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당신은 예수님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증언을 할 수가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요 1:9)
본문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나 바울 서신보다도 ‘유대인’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70번 이상 나오죠.
‘유대인’은 원래 유대지파를 가리키고, 남과 북이 갈라졌을 때 남방 국민인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가리켜 ‘유대인’이라 통칭하였죠. 포로기 이후에는 이스라엘 전체를 유대인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이 낱말은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반 유대 시민을 가리키는 의미와 유대인의 집권자인 70인 공회원을 가리키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이라 나타나는 것은 대개 유대인 집권자들을 가리키죠. 즉 그들은 예수님의 대적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온 땅에 평화를 가져올 메시야를 대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의한 세상을 의로 다스릴 메시야가 오실 것을 대망하였습니다. 대통령을 속시원하게 바꾸기를 원했죠.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속국이요, 사회적으로는 너무나 살기가 힘든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파송된, 어떤 초자연적 인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 사회에는 걸핏하면 “내가 메시아야”라고 자칭 메시야가 나타나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곤 하였습니다.
산헤드린에는 거짓 예언자로 혐의를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조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죠. 세례 요한에게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의 설교를 들을 때,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무리가 세례요한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산헤드린이라는 곳을 기억하시나요? 성경 어디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까? 그 당시 산헤드린은 종교와 정치를 겸한 국회였죠. 산헤드린은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결의를 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세례 요한에게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산헤드린 국회의 회원 72명중에 그 중 대표 몇 명이 세례 요한에게 왔습니다. 왜 왔을까요?
첫째, 그들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감독 책임이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자 몇 명을 세례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고 공적으로 묻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정치적 소요를 근심하여서입니다.
정치적 소요를 근심하는 그들의 심정이 요한복음 11:48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시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게 될 것이고 그러면 혁명이 일어나게 되며 혁명이 일어나면 로마 사람들이 이 나라를 빼앗아 갈 것이니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의인인지 죄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사람을 죽여서 정치적 소요를 막겠다고 했죠.
셋째, 그들의 당연한 의무로써 진짜 메시야를 기다리는 생각으로 세례 요한에게 묻게 된 것 같습니다. 어딘가 좀 특별한 분이 나타나면 저 분이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세례 요한으로 말하면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었습니다(눅 1:5). 유대교에 있어서 제사장을 위한 유일한 자격은 혈통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아론의 자손이 아니고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자손이 제사장이 되는 일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볼 때 세례 요한은 사실상 제사장이었어야 할 터인데 왜 이런 비정상적(?)인 처신을 하고 있는지 (광야에서 살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마치,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지옥.’하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죠. 이것보다도 더 천만 배는 센 뭔가 비범하고 특별하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조차 “ 야,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심판을 피하라고 하더냐”하며 서슴없는 독설을 날렸죠. 대중들은 카타르시스를 제대로 느꼈습니다. 속이 시원하였죠.
그 당시 세례 요한의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 사실 여부를 알기 위해서 그들을 요한에게 보냈죠.
예수님의 시대는 문자 그대로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에게 와서 그가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일 먼저 "네가 메시야냐"고 묻습니다(요 1:19). 예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제사장 가야바도 네가 메시야냐고 물었고, 빌라도도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 죽일 것이고, 아니라고 하면 놓아 줄 심산이었습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욕구에 의한 심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거의가 다 그런 모양의 못된 인간성을 가지고 있죠.
그들은 세례요한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네가 누구냐?”
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세상 그 어떤 어려움 속에도
주 은혜로 나를 돌보시며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네
주 사랑이 나를 이끄시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주의 사랑 나를 붙드시며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네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능력이시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유대인의 질문에
“네가 누구냐?” “네가 그리스도냐?”하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자신의 신분을 밝혔죠. 그들은 또다시, “그러면 무엇이냐, 네가 엘리야냐?”고 물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메시야의 오심을 전하고 세상이 그를 영접하도록 준비하기 위하여 엘리야가 오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엘리야도 아니다. 그 선지자도 아니다”라고 대답했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나는 광야의 소리다”라고 대답했죠.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옛날 동방의 도로들은 평평하지도 않았고 자갈도 깔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밟아서 다져진 길이었습니다. 왕이 어느 지방엘 행차하게 될 때면, 혹은 정복자가 자기의 영토를 지나가려 할 때는 길을 다지고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하곤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소리는 한 인간의 소리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천둥번개와 함께 큰 나팔소리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조용한 인간의 목소리로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전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존경했고 어떤 이들은 그를 선지자로 혹은 메시야로 보기까지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게 되면 자기를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지나치게 굴욕을 당하거나 멸시를 받아도 자기를 잃게 되지만,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아도 자신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끝까지 나는 광야의 소리다, 그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 하겠다라고 자기 위치를 지켰습니다(요 1:27).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라는 말은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2천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그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있어 주인이 신을 신고 벗을 때마다 종들이 신들메를 풀었습니다.
랍비들의 교훈에 의하면 “그 스승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신들메를 푸는 일만을 제하고는 어떤 일이든지 노예가 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들메 푸는 일은 너무도 천한 일이어서 제자들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말은 “나는 오실 그분의 노예가 되기에도 합당치 못한 사람입니다”하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메시야인 줄로 잘못 알고 그를 따랐지만, 그는 자기 됨의 위치를 잃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주님의 신들메도 풀기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부족하다고 하였죠. "그 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정말, 훌륭한 세례 요한의 자세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보면 사역지가 없는 목회자들을 참 많이 봅니다. 그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자신은 목회자이기에 남 밑에서는 절대로 사역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꼭 자신이 목회를 해야 한다고 하죠. 그러면서 세월만 갑니다. 일흔이 넘어도 길이 열리지가 않죠. 글다가 방안에서 혼자서 예배를 드리다가 하늘나라로 갑니다.
제게는 잊을 수 없는 톡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박정선 집사님이 보내 주신 톡입니다. 이 분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제 낮에2시가 지나서 퇴원 수속밟고 은퇴 목사님께서 차를 가지고 와서 저희 집까지 데려다 주셨어요 고마운 분입니다.
처음엔 저를 휠체어를 타는 저를 보고 안쓰럽게 생각하시다가 교회오고 갈때 차량으로 몇번 태워 주셨는데 제가 미안해하고 다른 분도 태워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으시더니
그분이 우리교회 옆에 개척교회 목사님이셨는데 그분 교회는 교인수가 10명 정도 사역 하시다가
교회를 내려놓고 저희교회에 등록하셔서 차량봉사를 하신다고 합니다. 그분의 아내와 어머니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 가족이 되었어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 수술실에 있어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전혀들지가 않았어요 모든분께 감사드리고 강권적으로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기도 드립니다. 아멘
요한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을 아주 말살해 버린 사람의 본보기가 된 것이죠. 일흔 살이 넘어서도 목회자로서 살아간다고, 방안에서 홀로 기도하면서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흔 살이 훨씬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뻘 아들뻘 되는 목회자에게 자존심이 밟히고 싫은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교회를 살려내기 위해 묵묵하게 하나의 장작개비가 되어 불쏘시개로 드려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저의 영적인 어머니죠.
“하나님이여, 우리 자신은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기억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게 하옵소서.”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 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 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맨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 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 셨네
내 사랑 나의 십자가
오늘 요한의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29~31절)
1) 죄를 지신 어린 양(29절)
구약 시대에는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상번제에(민 28:1~4), 출애굽 직전 유월절 저녁에도(출 12:3) 어린 양은 속죄 제물의 대표적인 짐승이었으나, 이사야는 고난 받을 메시야를(사53:3) 어린 양으로 묘사했습니다.
구약의 희생 제물은 사람에 의해 준비되었으므로 한계가 있어 수없이 반복되었으나,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심으로 한 번으로 완전하게 속죄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히 9~10장). 세례 요한은 이것을 처음부터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말은 실로 놀라운 뜻이 들어 있는 말이죠. 요한은 계시록에도 29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귀중한 명칭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의 사랑, 희생, 수난, 그리고 승리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2) 나도 알지 못한 분(30~31절), 하나님의 아들
요한은 자기도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하면서 예수를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이스라엘 민중과 같이 예수를 메시야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아는 길은 성령의 역사밖에는 없습니다. 육신적인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어떤 사람도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 수 없습니다.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요 1:33-34)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함을 보았고.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므로(마 3:17; 막 1:11; 눅 3:22) 확신을 가지고 증언했습니다.
32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을 넣어주신 거룩한 존재이죠. 그런데 마귀는 이 사실을 부인하게 만들고 육적인 존재로 살라고 유혹합니다.
하와는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으면서도 영안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영안이 닫히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고 사랑하는 남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생각이 집중되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죽게 만들었고, 자신도 죽었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선물도 잃어버렸습니다. 영안이 닫히면 어리석은 선택이 반복됩니다.
평강도, 지혜도 부족하고 게하시처럼 하나님의 군대를 보지 못하고 두려워하죠.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자신을 호위하는 천군을 보며 평강을 누립니다. 가난과 안 좋은 상황 가운데에서도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평강을 누릴 수 있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했는데, 처음에는 알지 못하다가 성령의 조명을 통해 감동을 받았기에 영안이 열려 확신을 가지고 증거하게 되었는데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영적 경험입니다.
미국 장로교의 목사이며 신학교 교수였던 찰스 피니 목사님은 (Charles G. Finney)자기의 성령세례를 체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성령의 강력한 세례를 받게 되었을 때, 성령은 나의 몸과 영혼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으로 내게 임하셨습니다. 그것은 꼭 온 몸이 전기에 감전되어 관통되는 듯한 느낌이었죠. 사실상 그것은 파도치는 듯한 곧 사랑이 막힘없이 나의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그 체험을 이것외에 다른 방법으로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나는 기쁨과 사랑에 충만하여 감격의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내 가슴속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스스로 용솟음쳐 나오는 대로 외쳤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의 어두웠던 영안이 다시 열려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당신의 마음과 영혼과 육신이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히고 성령충만으로 가득한 기름부음이 넘치기를 간절하게 소원합니다.
미국의 코스타 공동대표이며 신시내티 대학교에 전자공학과 교수인 안종혁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미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과학자며 교수님이신데 청년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또 복음증거자이기도 합니다.
아주 어렵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28살에 홀로 되었습니다. 그러니 참 그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방직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며 청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절망의 시기에 어머니가 늘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어라. 예수님을 잘 믿어.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평안하다. 예수님께 다 맡겨. 그러면 그가 일하신다.’라고 늘 권면을 하였습니다.
어머님의 권면과 기도를 힘입어서 그가 믿음으로 일어나죠.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 말씀 읽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을 읽을수록 눈물이 나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예수님께 맡기고 싶어졌습니다. 서서히 짐을 내려놓은 자의 평안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현실의 짐은 무거웠고, 아니 오히려 더 무거워졌습니다. 그러나 나의 짐은 물론이고 멍에까지 메고 앞장서시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 그 환난을 통과하고 또 미국에 가서 이 박사과정 중 ''Qualifying Exam''(박사자격시험)이라고 최후 관문을 통과하는 시험을 4번이나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에 그가 모든 과정을 잘 마치고 대학의 교수로까지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습니다.
“방직공장의 전기공이었던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 주립대학의 전자공학과 교수가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간섭하심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의지했더니 주님의 승리가 저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분하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게 되죠. 영안이 열리면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시간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분별력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안 좋은 말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사자의 이빨에서 안주거리를 삼으며 마구 씹어 되죠. “그 사람 어때? 아직도 그러고 있어? 거기는 절대로 사람들이 모이지가 않아. 교회가 안 돼! 그 사람의 인생은 절대로 열리지 않아!”
그런 사람들하고는 연락도 하지 마시고 끊어내십시오. 다윗이 결단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들에게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시 18:40) 당신에 대해서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기대에서 벗어나십시오. 무기력에서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을 반드시 여십니다.
43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4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시편 18:43-44)
주의 사자가 길이 없고 갇혀 있는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무기력과 좌절, 우울에서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집니다. 천사가 당신을 이끄로 첫째 파수와 둘째 파수를 지나 그동안에 그토록 열리지가 않았던 쇠문이 저절로 열립니다. 그리고 당신의 입에서 “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행12:11)
7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행 12:11)
부디,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나의 인생을 다시 살리신 그분을 증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요한처럼 영안이 열려서 당신의 삶 역시, 당신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를 발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나의 눈을 열어 당신을 보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도 하나님과 함께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게 하옵소서. 세례요한처럼 당신만을 나타내고 당신만을 증거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당신의 명예를 걸고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아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 그 이름 예수
나의 길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