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총목사/ 빌립보서14/ 나를 본 받으라
https://youtu.be/VXcAm5apvtk?si=-rfFSHIHRUoCKT1C
그림설명
표지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은총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교회/ 주은총목사
나를 본 받으라
본 문 : 빌 3:17-21
세상을 본받고 사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도박과 음란에 빠져 있고, 늘 술에 취해 있으며, 남에 등이나 사기를 치고 도둑질과 강도질을 일삼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할까요? 이런 삶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고 할 것입니다. “너는 나 같이 방탕하고 도박해라”고 권하는 아버지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오셨다”고 하여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였고, 바울을 웅변의 신 헐메스라고 신격화하여 숭배하려고 하였습니다(행 14:14). 그 때 바울은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17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3:17)
여기뿐이 아니고 고린도전서 11:1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바울은 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키가 작고, 대머리였으며, 못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했으니 머리를 깍고, 얼굴을 못생기게 하고 다니라는 말일까요?
사람을 자랑하지 않고, 예수를 자랑하는 모습. 예수를 위해 궁핍함과 고난을 피하지 않는 모습. 복음을 향한 열정을 가진 모습들을 본받으라는 것이죠. 바울의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본 받는자’란 말은 헬라어의 ‘미미메테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흉내 내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받으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자가 되라’는 말이죠.
예수님의 말,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고통 그리고 나아가서 예수님의 죽음까지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예전에, 영성이라는 말이 참 유행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영성이란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최고의 영성을 의미하죠.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데 십자가에서 하나가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말은 최고의 영성이며 닮은꼴을 의미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에서 최고의 영성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방하고 사는 것은 최고의 영적인 삶입니다.
존 뉴턴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찬송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사한 목사님입니다. 그는 11살 때 선장인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기 시작하여 영국왕실의 해군이 되었습니다. 20대에 노예무역에 가담하여 21살에 노예선 그레이하운드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도덕을 비웃고 종교를 조롱하며 살았는데 우연히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파도가 몰려와 9시간의 사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배 안에 물이 차서 배가 곧 뒤집히게 되자 뉴턴은 “주여,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성난 바다에서 살아남은 그가 영국으로 돌아와 지은 찬송이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입니다. 그는 후에 목사가 되어 설교자로 남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한 권의 책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게 하였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며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얼마나 귀중한 신앙의 삶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 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주 모습 내 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 내신 주님의 마음 본받음이라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날엔 뭇성도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 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바울은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 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쉬운성경)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 오면 누구와 놀았는지 어머니들은 금방 압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말씨나 제스추어나 요구 등이 아이들이 놀던 그 친구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우리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좋은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평생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그의 생각과 삶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지식을 버렸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 때문에 자신의 삶도 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나를 본받도록’ 하라고 편지를 쓰게 된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의 믿음과 삶을 본받지 않고, 그 삶과는 정반대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표현으로,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처럼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3:18)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에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이제 다시” 또 말한다고 합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앞서 여러 차례 권면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나를 본받도록 애쓰십시오.’ 하고 권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든 자기의 생각과 고집을 관철을 하였죠. 이에 바울 사도는 잘라 말합니다. 그들이 “결국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9)
지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원수가 누구일까요?
본문 19절에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의 특징이 대충 세 가지로 요약되어 있죠. 첫째는 배를 신으로 삼는 것이고, 둘째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는 것이고, 셋째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자기의 정욕과 육신의 안목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염려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육적인 것에 전적으로 묶여 육욕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신은 배요" "(빌3:19) "
이 말의 뜻은 지금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사는 목적이 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배를 위해서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도 다음이고, 하나님도 다음이고, 오직 관심은 먹고 즐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그 당시의 세상 풍조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문제가 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먹는 일로 소일했습니다. 맛집을 찾아다녔죠.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고 먹고 마시는 일로 즐기며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이 일이 더 심해져서 싫도록 먹고 약을 먹고 토해 내고 또 먹고 이것을 반복하였습니다.
물론 사람은 먹고 배가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자들은 자신들의 배를 하나님으로 여겼죠. 배란 인간 욕망의 전부를 말하는데 하나님 대신 욕망이 저들의 우상이 되어 있고 그들은 그 욕망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보다 배를 더 중시하고, 신앙보다 먹는 문제에 더 우선하고, 예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면 그것은 모두 배를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배의 신앙이죠.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육신의 소욕은 하나님을 거스르지만 성령의 소욕은 우리의 육신을 거스릅니다.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사명 너는 왜 잊어버렸나
나만 따르리라 하던 약속 너는 왜 잊어버렸나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십자가만 면류관만 바라보며 의의 길 간다더니
위로하기보다는 위로받고 사랑받기만 원하네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재물 왜 너의 배만 채우나
나를 위해 다시 바치리라 그 약속 잊어버렸나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십자가만 면류관만 바라보며 의의 길 간다더니
위로하기보다는 위로받고 사랑받기만 원하네
두 번째로, 십자가의 원수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늘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이 세상의 일만을 생각하는 세상적 가치관을 영광으로 삼습니다. 자식의 배우자로써 좋은 학벌과 내세울 만한 직업, 아파트 평수, 재정적인 능력을 영광으로 봅니다. 혹여나 의사 사위를 얻거나 검사 사위를 얻으면 엄청난 영광을 얻은 줄 압니다. 사람들에게 자랑하거나 내세울만하니까요. 자식은 부모의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자녀를 손아귀에 쥐려하지 말고 좀 놓아 주십시오. 부모의 잘못된 기대와 욕구 때문에 부모와 자식간의 의가 틀어질 대로 틀어져서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강’ ‘레테의 강’을 건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날은 이렇게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이 영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도들끼리 모여 앉아서 비싼 가구 자랑을 하고 명품을 자랑을 하고, 사치스런 호화로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집이 두 채, 세 채나 되는 것을 거침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자랑거리가 못 됩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바로 이번주에 있었던 뉴스입니다. 경기 성남시에서 생활고를 겪던 모녀가 극단 선택을 한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졌죠. 지난해 8월 '수원 세 모녀 비극' 이후 복지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정부와 일선 지자체가 노력했지만 이번에도 가슴 아픈 사고를 막지 못했습니다.
성남지역의 한 주택에서 10년 넘게 월세를 내며 거주하던 70대 어머니 A씨와 40대 딸 B씨가 숨진 채 발견이 됐습니다.
며칠 동안 인기척이 없고 전화도 받지 않자 이상함을 느낀 집주인이 방문해 쓰러져 있는 이들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집안에는 이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유서가 발견됐는데 "장사하면서 빚이 많아졌다" "폐를 끼쳐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는 글이 적혀 있었죠. "보증금 500만원으로 월세를 처리해 달라"는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의류 장사를 하는 B씨의 소득이 월 5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일정하지 않으면서 빚을 내 생활했는데 갈수록 늘어나는 빚을 갚지 못한데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습니다.
모녀는 기초생활수급자 바로 위 계층인 '차상위계층'이었지만 전기료 등 공과금이나 월세를 밀리지는 않아 복지사각지대 발굴 시스템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부검을 마친 모녀는 장례 없이 함께 안치됐습니다.
집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데 고통당하다가 자살해서 죽는 사람까지 나타나고 있는 판국인데 혼자서 집이 두 채 세 채씩 되면 부끄러워서 숨길 일이지 그것이 어째서 자랑거리가 될까요?
좁은 땅 덩어리에서 집이 있는데도... 동생 이름으로 아파트를 신청하고, 조카 이름으로 또 신청하고 그래서 당첨되어 집이 세 채 네 채 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째서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과거의 업적이나 학식, 부나 명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멸망받을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나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큰 자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혹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자랑을 두고 있지는 않은 지 나 자신을 되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 세 번째는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빌3:19)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신앙생활은 눈을 들어 하늘을 처다 보는 생활입니다. 뜻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내 육신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내 정신과 마음과 뜻은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 이것을 신앙 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신과 마음이 모두 세상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우리의 정신이나 뜻, 그리고 관심이 이 땅 위에만 집중되어 있으면 영적인 생활은 소멸되고 맙니다. 뜻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완전히 땅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속물이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는 말했습니다. "요새 교인들은 싸구려 예수를 믿으려 한다. 십자가 없는 예수, 편한 예수, 고통 없는 예수를 믿으려 한다." 라고 말을 합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거듭남을 얻지 못한 사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 사람,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거듭나게 되고 영혼이 새롭게 되고 영혼 자체가 이 땅에서도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로마서 8장 14절(“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에 나와 있듯이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령의 내주를 체험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다른 영혼의 구원에 관심이 있는가? 내 시간이 얼마나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해 바쳐지고 있는가? 내 에너지, 재능, 재물, 관심 등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몇 %나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해 향해 있는가? 쓰여지고 있는가?’
너무 멀리 왔나요 - 포스 (Pos)
너무 멀리 왔나요 주님께 돌아가기엔
사랑의 주님 그 품을 떠나
내 영혼 잃어버린 지금
너무 늦은 건가요 내 영혼 회복 하기엔
수 많은 죄악 속에 갇혀서
주님을 잃어버린 지금
하지만 내 영혼 주님 기다려요
변함 없는 주님의 사랑을
내 모습 이대로 주께 돌아가요
나의 손을 잡아 주소서
다시 주님의 얼굴 내 영혼 볼 수 있도록
나를 구원 하소서
다시 주의 임재 가운데 내 영혼 살 수 있도록
하지만 내 영혼 주님 기다려요
변함 없는 주님의 사랑을
내 모습 이대로 주께 돌아가요
나의 손을 잡아 주소서
다시 주님의 얼굴 내 영혼 볼 수 있도록
나를 구원 하소서...
“나와 같이 나를 본 받으라”하고 말을 할 정도로 바울의 삶이 항상 모범적인 삶을 살았을까요? 애석하게도 바울이 사울일 때에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술만 먹으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사가 심하고 폭언을 하고 물건을 부숴댑니다. 그럴 경우,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은 벌써부터 “아, 우리 주인아저씨가 술을 한잔 거하게 드셨구나.”하고 먼저 술 냄새를 알아보고는 침대 밑으로 도망을 갑니다. 애완견이 먼저 알아보고 거기서 벌벌 떨고 있는거에요.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김익두 목사님은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평양의 깡패이었던 그는 장날이면 장에 오는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서낭당에 빌었다고도 합니다.
바울 역시, 모든 사람들이 만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같은 공포의 대상이 어떻게 바울 같은 기쁨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맡겨놓고 미워하는 마음도 내려놓으세요. 우리는 사랑하면서 닮아가야 합니다. 어떤 나이가 지긋한 목사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아버지가 첩을 들였다고 아버지를 그렇게 욕하더니 자기도 나이 들면서 첩을 들였습니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닮아가는데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쫓아가면서 하늘의 기쁨과 성령의 기름부음이 넘치도록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물질적이든 또는 그 밖의 무엇이든 간에 욕망이 생길 때 그것에 응답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욕망이란 죄는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제어되고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죄와 멀어지고 하늘나라와 가까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선 세상에서의 실패를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실패를 저주스럽게 생각한다는 뜻이죠. 일종의 <승리주의>입니다. 바울의 인생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패했습니다. 고생이 억수록 심했죠. 더군다나 당시 주류 기독교로부터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 그 어떠한 것도 사도 바울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속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기뻐야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기쁨이 없으면 항상 다른 사람에게 기쁨 대신 슬픔을 줍니다. 고통과 근심을 주죠.
바울은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를 닮으라는 뜻입니다.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성경에는 나오미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을 다 잃었을 때 며느리들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하였습니다.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습니다. 후에 룻이 베들레헴 들에서 일하다가 보아스를 만나 재혼할 때에 시어머니가 오히려 서둘러 그들을 합하게 해 줍니다. 나오미는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많은 시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이 기쁨입니다. 영어는 anointed oil of joy 즉 기쁨의 기름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며느리를 편하게 해주는 시어머니가 기쁨의 사람입니다.
로마서 12:15에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슬퍼하고, 아프고, 걱정하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서로 기쁘게 해주고,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먼저, 당신 자신이 하늘의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기쁨의 기름부음이 마음껏 흘러 가십시오. 그래서 그 기쁨으로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사야 62:4에는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고 합니다.
‘헵시바’란 ‘내 기쁨이 그 나라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헵시바는 히스기야 왕의 아내이며 므낫세 왕의 어머니였습니다. 항상 기쁨을 가진 여인, 바로 당신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게 멸망이 예비되어 있음을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 멸망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파멸을 뜻하는 궁극적 운명을 말합니다. 나그네 길에서 감각적인 쾌락만을 위해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고 산다 하여도 그것은 제한적인 기간일 뿐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영원한 멸망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자주 여러분에게 말한 바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지금 다시 울면서 말하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말은 멸망이고, 그들의 신은 그들의 배이며,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수치로 그들의 마음은 세상 것들에 있습니다.
주님, 나의 마음이 늘 하늘에 있게 하시어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게 하옵소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말게 하옵소서. 십자가가 나의 자랑이 되게 하옵소서. 내게 성령과 기쁨의 기름이 부어 흘러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아멘
세상이 당신을 모른다 하여도 주님은 그 이름 마음에 새겼네 세상이 주 이름 모른다 하기에 오늘도 그 이름 열방에 새기리 땅의 모든 끝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잃어버린 영혼들 향한 아버지의 꿈 당신의 삶을 통해 이뤄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