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총목사/ 이전에 가보지 못한 길
(위의 그림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81살의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Gretina가 주은총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Gretina는 평생에 화가로써 살아오면서 자신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는데... 제가 화실에 들어 오는 순간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Gretina는 두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는 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하나는 이 작품으로써, 루시퍼의 영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주은총이
하나님의 기운에 점점 흘러 나와서 루시퍼(흑암의 세력)을 장악하는 그림입니다.
첫번째 작품(루시퍼의 영에 의해서 주은총이가 죽어가는 그림)은 영국에 사는 Gretina가 가지고 있고, 두번째 작품인 이 그림을 Gretina는 한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꿈이있는 미디어 교회/ 주은총
이전에 가보지 못한 길
수 3장(1-10)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다가 해방되어 40년간의 광야 생활 끝에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요단강만 건너면 되는 감격의 장면이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요단강가에 진을 치고 준비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싯딤에서부터 요단 강가까지 인도하기 위해서 아침일찍 일어났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모하였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수3:1)
여호수아는 이제 광야의 모든 고난을 벗어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요단 강가를 향하여 간다는 생각에 아침 일찍 들뜬 마음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요단 강가에 도착하는 대로 즉시 건너보내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유숙시켰습니다.
이는 아무리 빨리 약속의 땅을 밟고 싶다고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그의 신중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을 부르며 그의 얼굴을 구함으로써 시작하는 사람과 신문을 찾으며 이 세상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구하며 시작하는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주님의 영으로 후자는 세상의 영으로 채워지고 그 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 당신의 시선이 주님을 향할 때 하늘문이 열리고 빛들이 당신을 향하여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그 빛들은 당신을 감싸고 있으며 그 빛은 당신을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모든 좋은 곳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기도하지 않고 주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변화되지 않으며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후에야 그는 단순하고 좋은 길인 주를 의뢰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다시피, 한글로 번역된 신약성경에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로고스(Logos)’와 ‘레마(Rhema)’입니다. 두 단어 모두 ‘말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약간 개념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로고스는 일반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적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읽는 성경 말씀이 로고스이며, 설교를 통하여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성경을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전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로고스는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활동하며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영적인 양식이죠. 그러므로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규칙적으로 로고스를 접해서 신앙생활에 필요한 영적인 양식과 지식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레마는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레마는 로고스 중에서 지금 나에게 주관적으로 전달되는 특정한 말씀입니다. 레마는 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지시를 먼저 꼭 받아야 합니다.
때때로 닥쳐오는 인생의 어둠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회당장 야이로는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믿음으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갑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동안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지죠.
오랫동안 피를 질질 흘리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을 만지고도 깨끗함을 받죠. 그 장면을 목격한 야이로의 마음속엔 기대감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침 그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되죠. 붙들고 있던 희망의 빛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자식이 죽었다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극도의 두려움과 절망감에 휩싸여 공황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고치셨는데 내 딸은 왜….’라는 원망이 먼저 튀어나왔을지도 모르죠.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
야이로가 할 수 있는 일은 믿음으로 절망의 발을 힘겹게 들어 올려 예수님과 함께 집을 향해 걷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달리다굼’ 하시는 명령과 함께 그의 딸이 살아났을 때, 그는 분명 이전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을 인도하고 애썼던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과연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지 확인한 후에 일해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확신이 올 때 까지 하는 것이죠. 여호수아는 아무리 급해도 상세하게 계획하고 기도하며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그리고는 지시하였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그곳에 나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1.가까이 하지 말라.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백성에게 언약궤를 매기에 앞서 언약궤를 따르는 일에 대해서 소개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말씀을 가진 자와 2000규빗을 떨어져 있으라고 명령을 하죠. 언약궤와의 거리는 너무 가까이하지 말고 이천규빗이어야 하는데 이는 915m의 길이가 됩니다.
4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수3;4)
행진할 때 언약궤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은 언약궤의 신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생각 즉 세속인의 접근을 막고자 하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와 존경을 표시하고 경거망동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시면, 나의 아빠 이전에 주의 종으로 바라봐야 된다는 것이죠. 어머니가 주의 종이면 나의 엄마 이전에 주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침범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이 인정과 육에 하나가 되지 말라는 것이죠. 915m의 거리를 두라는 거죠.
여호수아는 자신이 서 있는 모든 것에 오로지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만이 흘러가기를 강하게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임재하시고 흘러가옵소서. 여호수아는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 4:1
‘비밀을 맡은 자’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하나님의 집의 모든 일을 맡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진 자이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철저하게 <신본주의>로 가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면서 성령과 동행해야 하죠. 무조건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위주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소멸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내가 신본주의를 버리고 인본주의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가 인간과 하나가 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이 자식과 하나가 되고 남편과 하나가 되고, 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서 성령은 점점 소멸하고 약해집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데, 점점 사람과 친해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리고 사람의 말과 썩여서 맛있는 <짬뽕>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누구입니까?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이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이 육신과 하나가 되니 성령은 점점 소멸되고 영혼은 힘을 잃고 황폐화 되어갑니다.
중독이란 악한 기운, 악한 에너지가 그의 속에 들어온 것이며 그는 영이 약하여 그 에너지를 통제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다중독, 알콜중독, 도박중독, 섹스중독, 쇼핑중독, 게임중독등 중독의 증상은 다양합니다. 그의 속에 있는 악한 에너지는 계속 동일한 행동을 요구하며 배가 부를 때는 얌전합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면 그 영은 동일한 에너지의 공급을 요청하고 그 공급이 될 때까지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보다 강한 성령의 영을 받기까지는 그들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밥을 주지 않으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가 술을 마시고 다음에는 술이 그를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술을 마시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술을 마시지만 차츰 자기의 의지를 상실하고 술에 의하여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중독은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힘에 의해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자신은 정말 그것을 원치 않는데도 끌려가죠. 술을 마시면 차츰 사람의 의지가 소멸됩니다,
처음에 이성을 보든, 술을 마시든, 도박을 즐기든 그는 그것에 대하여 별로 빠지지 않습니다. 처음에 그는 그것에 대하여 신선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의 일상이 지루하고 스트레스가 많았기에 신선한 재미와 자극은 그를 꼬시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좋아하기 시작하죠. 이 좋아한다는 것은-
영혼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즉 생명을 여는 행위이죠. 좋아함으로 그는 그것을 그의 영혼 속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됩니다. 그후에는 이제 주인이 뒤바뀝니다.
이제 그의 속에 들어온 기운은 그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그의 영혼 속에는 하나의 집이 형성되었고 그는 그릇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몹시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실연의 고통처럼 마약의 금단증상처럼 일단 사람의 속에 들어온 것은 쉽게 나가지 않습니다. 귀신이 자기 집으로 삼았기 때문이죠.
그들의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그들은(악한 귀신들은) 영혼을 사로잡기 원합니다. 삼손과 싸워보았던 그들은 정공법으로는 결코 승산이 없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사탄은 여자를 사용하죠. 그들은 삼손도, 다윗도 일단 어떤 즐거움에 빠지게 되면 효과적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가정도 내팽겨치고 자녀도 ‘나 몰라라’하고 허탄한 만족을 위하여 인생을 탕진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적이 온 것은 인생을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왔죠.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여호수아는 새로운 땅, 미지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 가기 위해서 명령합니다.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지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힘과 위엄이 이스라엘 전체에 온전히 흘러가서 기필코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오려고 합니다.
바짝 붙지 말고 이천 규빗 즉, 915m의 거리를 두고 그것이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즉 언약궤와 거리를 두게 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말씀)에 대해서 경외심을 심어 주기 위함입니다.(출 3:45).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지 않고 농사에 빠져서 상추를 갔다주고 고추를 갔다주면 좋아할까요?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고 요리를 해서 음식배달이나 하면 기뻐할까요? 아니,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영이 흐르지 않고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이 ‘말씀과 기도의 자리’는 잃어버리고 어문짓을 하며 육신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떠나 계시고 영혼에는 힘이 없고 죽고만 싶죠. 영혼은 참 곤고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죠. 우리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재미도 모르고 사는 것은 너무나 시시한 삶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융통성이 있어야 강변하죠. 가장 육적인 것이 가장 영적인 거라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뭐 내가 술중독 섹스중독, 세상중독이라고 야... 이것아 너는 종교중독이야 종교중독!”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죽는 데도 말입니다.
진정한 중독은 주님께 대한 중독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시는 세상의 영에 굶주리지 않으며 결코 어떤 것에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악한 영들은 우리에게 예수가 아닌 즐거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산 삶에 지친 사람은 거기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음을 깨달았으며 이제 남은 삶은 온전히 주님의 음성만 듣고 거기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사람들과 만남을 끊고 하나님께 집중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봤자 험담이나 하고 판단이나 하게 되어 주님을 만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밤 늦게까지 성막을 떠나지 아니하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차츰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며 하나님의 지시에 그대로 순종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고 가나안으로 나아갔죠.
순례자의 길
광야같은 세상에 곤한 내 여정은 가나안을 향하여 걸어가는 인생길 구름 불기둥 따라 지친나의 영혼이 가나안을 향하는 나는 곧 순례자 순례자의 길이 비록 험할지라도 본향을 향하는 소망의 길이라네 세상의지 버리고 세상향락 버리고 전능하신 여호와 주만 보고 가리라 나의 일생 살 동안 믿음 잃지 않고서 천국 문을 향하는 나는 곧 순례자 나는 곧 순례자 나는 곧 순례자
2)법궤의 권위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더 돈이 있고 힘이 있으니까 그 가난한 개척교회와 목사님은 불쌍하니까 내가 도와 주지 않으면 안 돼.” 어떤 분은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에게 팁을 던져 주듯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돈 얼마라도 백만원이라도 보내야지”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한 것처럼 생각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싫어하시고 오히려 내쳐버립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네가 하는 것 같니? 나의 종과 교회는 내가 지킨다. 성령이 이끌어가는 거야. 근데, 네가 한다고 생각을 하냐? 그럼 여기까지다. 그만해라.”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들리면, 저는 그 사람에게 ‘헌금을 하지 마세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섬기는 것이요, 하나님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자식을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요, 남편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요. 다만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법궤를 앞세우고 법궤와의 거리를 두면서도 비무장시킨 것은 법궤의 권위를 보여 준 것입니다. 법궤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으므로 무장 군인들에 의해 경호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도리어 법궤가 그들을 보호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무장된 군인들을 앞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무장의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반 마일이나 뒤에 군사들이 따라오게 한 것은 전쟁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먼저 하나님을 앞세우고 우리는 하나님을 따를 뿐이라는 하나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행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지도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법궤를 멘다는 것은 먼저 위험을 당할 수도 있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없이는 법궤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존귀와 보호의 법궤
법궤를 메는 제사장의 모습은 하나님의 존귀와 보호하심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귀하게 대할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히 여기십니다. 말씀을 존귀히 여기면 말씀에 능력이 나타나며 예배를 존귀히 여기면 은혜 충만함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법궤를 존귀히 여겨 제사장이 메고갈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며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자들이 됩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를 때와 여호수아가 요단을 가를 때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홍해사건과 요단 사건의 차이점은 백성의 참여에 관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강하고 급한 바람으로 가를 때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바라보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단 강을 가를 때는 백성의 대표인 제사장이 직접 언약궤를 메고 요단의 기적에 앞장 서서 참여하였습니다.
즉, 홍해 사건 때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막 빠져 나와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성숙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요단 사건 때에는 이미 이스라엘이 사십년간 광야에서 믿음의 훈련을 받은 후였기 때문에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정도로 장성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도 어린 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믿음을 가졌다면 하나님께 바라기만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앞장서서 참여함으로 축복받는 그리스도인 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우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소리 높여서 소리 높여서 주를 찬양합니다 소리 높여서 소리 높여서 주를 찬양 합니다 우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춤을 추며 찬양합니다 우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춤을 추며 찬양합니다 춤을 추면서 춤을 추면서 주를 찬양합니다 춤을 추면서 춤을 추면서 주를 찬양합니다 찬양합니다 찬양합니다 주를 찬양합니다 찬양합니다 찬양합니다 주를 찬양합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시기는 눈이 녹아 내려 요단 강물이 넘쳐 흐르는 봄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널 때는 가장 건너기 힘든 시기였던 것입니다.
마치 거대한 폭풍우와 비바람이 몰아쳐서 물이 집집마다 넘쳐나는 것처럼 나의 삶의 모든 것에 물이 넘쳤습니다. 사업은 사업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거센 물이 얼마나 흘러 넘쳐 흐르는지 도무지 살 수가 없고 숨조차 쉴 수가 업습니다. 공황장애가 온 것처럼 가슴과 숨이 턱하니 막힙니다. 근심 한보따리이죠. 아니 다섯보따리인가요? 요나는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욘2:3)
5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욘2:5)
6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욘 2:6)
내 인생의 광야에서 앞으로 전진도 할 수도 없고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능력으로 요단의 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스스로 연약하다고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죠. 나는 비록 약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권세가 요단을 넘쳐 흐르는 강물처럼 거세게 그리스도인들을 삼키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능히 그것을 깨뜨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요단강을 건너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요구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초월성과 존엄성을 가지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스스로 성결케 하라’는 것을 요구하였죠. 히브리어로 성결은 ‘분리’, ‘구별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도 마땅히 성결해야 한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끊으시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스스로 성결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도 요단강을 끊으셨던 그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필요한가요? 전심으로 통회하고 회개함으로 우리의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속하지 말고 오직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렇다면 이전의 가보지 못한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향해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길은 사람의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서도 아니고 강한 군사력에 의해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백성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놀랍고도 위대한 일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남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남이 알지 못하는 일을 알려 주셨죠. 또한 성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이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4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주님, 철저하게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시어 세상과 짝하며 사람의 것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결이 있게 하시어 이전에 가보지 못한 하나님의 기이함으로 길을 열어 주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적용
1) 우리는 어려운 시험을 만났을 때 나의 생각을 앞세우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2)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신데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생활은 과연 거룩한가?
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제사보다 나은 것이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간주)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아멘~
온 땅이여 주를 찬양 날마다 주를 찬양하세 주의 기사와 주의 영광 온 땅에 널리 알려졌네 위대하신 주 그의 힘과 위엄을 기뻐하라 주의 다스리심을 온 땅이여 주를 찬양 날마다 주를 찬양하세 주의 기사와 주의 영광 온 땅에 널리 알려졌네 위대하신 주 그의 힘과 위엄을 기뻐하라 주의 다스리심을 온 땅이여 주를 찬양 날마다 주를 찬양하세 주의 기사와 주의 영광 온 땅에 널리 알려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