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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총목사/ 팔복2/ 애통하는 자의 복

by 주은총목사 2025. 2. 6.

https://youtu.be/abkdnZFaQKE?si=fYmYo_hl3eZo0lcx

애통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 : 1 – 12

꿈이있는교회/ 주은총목사

 

많은 사람들은 즐겁고 유쾌한 것만이 행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마음의 슬픔과 고통을 잊으려고 하죠. 일의 고단함과 인간관계의 고통, 스트레스로 인한 좌절등 마음에 안 드는 분야를 잊으려고 술을 마시고 그 술이 깨면 또 허전하여지니 또 마시고 하다가 알콜중독자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아픔과 번민, 그리고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순간적으로 쾌락을 누리기 위하여서 마약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애인을 붙잡기도 하고, 향락을 쫓기도 하면서 이곳 저곳을 방황하지만, 결국은 마음은 더 병들고 육신도 망가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전도서7:4에 보면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잔치집에 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을 통하여서 마음이 좋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웃음도 있고 천국에 이르는 애통도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통쾌하여 웃는 웃음 속에는 지옥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요 죄를 짓고 애통하는 눈물은 침륜 속에서 천국의 길을 여는 것입니다.

 

본문에 애통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이별의 눈물이 아닙니다. 배신을 당하고 모욕과 치욕을 당하고 우는 눈물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질병, 고통, 사별, 물질의 손실, 자존심의 침해등 여러 가지 이유로 애통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애통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애통이죠.

 

즉 자신의 영적 파탄을 깨닫고 자신의 심령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악의 세력인 죄를 슬퍼하는 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깨어지는 체험을 하면서 비통해하며 슬피 우는 것입니다.

 

1.애통하는 자는 (자신에 대해서 깨어지는 체험)

1)원어 [penqevw](펜데오)애통하다.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다. 한탄하고 비통해 하다. 울부짖다.

 

[oiJpenqou'nte"](호이 팬둔테스) 애통하는 자

자신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의(義)가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엎드려 비는,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애통은, 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 앞에 우는 눈물입니다. ‘생명을 가져다주는 애통’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가져다 주는 애통은 오직 단 하나뿐입니다.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는 눈물’입니다.

오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베드로가, 심하게 통곡한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 밖으로 나가서 통곡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도, 나는 절대 안 떠난다고, 큰소리 쳐놓고, 막상 자신이 위험하게 되니까, 예수가 누군지 모른다고,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세 번씩이나 완강하게 부인하다가, 새벽닭이 우는소리를 듣고, 문득 깨닫는 것입니다.

 

“아차, 내가 실수했구나. 내가 죄졌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전에는 몰랐던, 자신을 문득 발견한 겁니다. 나의 어리석고, 나약하고, 허물 많고, 죄 많은 모습을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운겁니다.

 

제자 중에도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제자입니다.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고 /마음이 너무 아팠겠지요. 자신이 너무 싫고, 자신이 너무 밉고, 부끄러워서 울었을 겁니다.

 

그냥 조용히 눈물 흘릴 수 없었겠지요. 통곡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밖으로 나가 통곡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모습들은,

가만히 묵상해보면, 정말이지, 놀라운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살았지만, 그에게는 천국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 하실 때, 그렇게도 강조하셨던 말씀, /심령이 가난해야만 천국이 저희것이다./애통해야만 위로를 받게된다. 이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했지, 가슴으로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마지막에, 베드로에게, 그 말씀을 몸소 체험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절대 보지 못했던 내 모습을, 예수님과 떨어져보니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보니까, 자기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가를 깨닫는 것처럼, 예수님을 떠나보니까, 깨닫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교회 다닐 때는 깨닫지 못하던 것을, 왜, 예수를 떠나고, 집을 나가야만 깨닫게 될까요.

 

우리가, 때로는 실족하고, 때로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약하면 약한대로, 다 소중하고,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집을 나갔다고, 예수님을 떠났다고, 너무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발견했다면, 그때는 우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너무 부끄러우니까, 밖으로 뛰쳐나가서 울었습니다. 한심하고, 부끄러운 자기 본 모습을 깨닫게 됐다면, 울어야 하고, 울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의 고백

사랑하는 주님 내게 다가와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네가 나를 버리리라 하실 때 왜 그리 섭섭하던지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배반하지는 않겠다 했던 믿음 없는 나의 헛된 맹세 주님 마음 울렸었네

 

(후렴)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부인하고 돌아서서 한없이 울었네

 

내가 주를 잃고 방황했듯 주도 나를 잃고 슬퍼했네 하지만 나의 눈물보다 주님의 눈물 더 뜨거웠네

 

멀리서 들리는 닭 울음소리 나의 영혼 잠깨웠네 잊어버렸던 지난 슬픈 고백 왜 그리 부끄러운지

 

이 세상 어디 숨을 곳 있나 닭울음소리 들릴 때마다 사랑하는 주님 나의 주님 모습 스치고 또 스쳐가네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부인하고 돌아서서 한없이 울었네

 

주님 오실 기약 어찌 잊고 맡긴 사명 모두 잊었던가 지금도 새벽닭 울 때면 참회의 눈물로 회개하네

 

전설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는 닭이 울 때마다 그의 평생 하나님께 새로운 다짐의 기도를 올렸고 성공적인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그는 예수님이 잡히신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평생에 잊을 수 없는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의 통곡, 마음이 상한 것은 평생을 주님의 능력 있는 제자로서 일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문득, 이런 말이 생각이 납니다.

 

"네가 맨 밑바닥에 내려갔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의 슬픔은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 빠졌을 때 하나님을 만난 사람, 실패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중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탕자인 둘째 아들은, 생면부지의 타향에서,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몰골을 들여다 봤을 것입니다. 집나가면 개고생입니다. 돈을 챙겨서, 집을 나올 때의 그 화려한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죠. 먹지 못해 수척해지고, 온갖 돼지 똥과 오물로 뒤범벅이 된, 더럽고 추접스런 자신의 모습.

 

구체적으로 다시 말한다면,

/내 얼굴은 /거만함과 교만함으로 잔뜩 굳어져 있고,

/내 몸뚱아리는, /의로움이 없는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정직하지 못한 손, /깨끗하지 못한 더러운 손.

 

/남을 칭찬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정죄만 하는 더러운 내 입술.

/탐욕과 정욕으로 굶주린 내 배.

/내 두 눈은 음흉함과, 음탕함으로 어두워져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나를 몰라볼 정도로, “죄인중에 괴수”가 되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영적인 파산상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도저히 아들이라고 아버지 앞에 나갈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기가 막힌 상황입니까? 이런 현실 앞에 애통하지 않으면, 통곡하지 않으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통곡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는 겁니다. 다윗이 눈물로 침상을 흥건히 적셨듯이, 애통하는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나서, 나단 선지자로부터 자신의 참상을 발견한 후에, 그 즉시, 침상이 눈물로 다 적시도록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고백한 말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32:1)

 

다윗의 눈물이 바로, 애통하는 자의 눈물입니다. 자신을 회개로 인도하는 눈물이고, 나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눈물”입니다.

 

어제까지는 내가 아들인줄 알고 살았지만, 오늘 내 모습을 보니까, 아들이라는 호칭이 너무 죄송스럽고, 너무 미안하더라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자식들을 다시 볼 면목이 없고, 아내 앞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여보, 진심으로 잘못했소. 나를 용서해 주시오”

“자녀들아, 이 애비를 용서해 다오!”

 

내가 비록 부모고, 자식이고, 집사이고, 목사이지만, 그런 호칭이 차라리 나를 부끄럽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는 고백이, 바로 이 둘째 아들 탕자의 고백입니다.

 

(눅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내가 집사라고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품꾼의 하나로 여기소서”

 

/“내가 목사라고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품꾼의 하나로 여기소서”

 

정말 아름답고, 멋진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은, 아무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못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았을 때만 가능한 고백입니다. 아무나 못하는 고백이지요. 자기의 뒷모습을 봤다면, 눈물을 흘려야 정상입니다. 베드로처럼, 자신의 민낯을 봐야만 통곡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었다면, 애통하는 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내어 뱉은 말씀이 아닙니다. 철저히 순서와 질서가 있는,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천국을 소유하고자 하느냐?”그렇다면, “가장 먼저, 너 자신을 돌아보아라” ‘심령의 가난함’이 팔복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먼저, 너 자신을 돌아보았다면”

“너는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울어라. 우는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돌아보았다면, 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통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울어야 순서고, 또 울어야 위로를 받습니다. 애통하고 우는 것은, 나의 한심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죄인이기 때문에 슬퍼하는 애통이며, 죄인임을 탄식하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탕자는, 자신의 처지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돼지우리에 주저앉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를 은 삼십냥에 팔아버린 가룟유다는 자신의 참담함을 인식했을 때, 그는 절망가운데 자신의 목을 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목을 매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차렸을 때,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했으며, 그 즉시 애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살다보면,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당신 왜 그래?” “왜 그렇게 우는데?” “당신 왜 그렇게 울어?”

아무리 물어보고, 말려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의(義)가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엎드려 비는,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합니다. “여보, 잘못했어. 나를 용서해 주고 한 번만 받아줘.” “얘들아,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느날 문득, 정신 차리고,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다윗은, 자신의 침대가 눈물로 다 적시도록 울었다고 했습니다.

 

누가 있어도, 누가 봐도, 자꾸 눈물이 흐릅니다. 옆사람 눈치 보여서, 뭐라 그럴까봐, 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있다면,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의 눈물이 바로 이러한 눈물입니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주님앞에 와 나를 맡겼네 진정 기쁜날 이었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잿빛 생활에 지쳤음을 세상 쾌락을 찾아 왔으나 고통 뿐이었다네 삶은 의미없고 안식 없었네 그러나 이제는 달라 새삶이 내게 임했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이젠 더 피하지 않으리 그가 내게와 나를 구했네 진정 기쁜날 이었네

 

애통하는 자의 눈물을 보면서, 이 눈물은 사랑의 눈물과 많이 닮았다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왜요. 그 성안에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아팠습니다.

 

어떤 부부의사의 간증입니다. 이 의사부부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에서 의사로 잘나가던 시절이었는데, 아내는 믿고, 남편은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얼핏 하면,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들을 모셔와서, 남편 안수기도 해준다고, 머리에 손 얹어놓고, 얼마나 기도하고 그러는지, 기도할 때, 가지런한 머리를 다 헝클어 놓지를 않나,

 

또 꿇어앉혀놓고, 위에서 얼마나 내리 누르는지, 때로는 수치스럽기도 하고, 침도 튀기고, 정말 이 남편은 그런 것이 너무 싫었답니다.

 

그러나 아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려니, 생각하고, 그 모든 것을 꾹 참았지만, 정말 어떤 기도도 마음에 와 닿는 기도가 없었답니다. 어떤 기도도, 감동을 주지 못했고, 어떤 기도도, 신앙의 길로 이끌지 못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왔더랍니다. 그런데, 이 한경직 목사님은, 머리에 손을 얹더니, 아무 소리를 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울고 있더라는 겁니다.

 

한경직 목사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시는데, 이 남편 의사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엉엉 울고 말았답니다.

 

그 길로, 남편의사는 신앙인이 되었고, 나중에 장로까지 되고, 교회에서 많은 선하고 아름다운 본이 되는 사람으로 장성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 사람들의 간증입니다.

 

사랑의 눈물은, 그 어떤 말보다 깊은 감동을 줍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우는 눈물은, 나를 울게 만듭니다. 당신의 부부관계가 그렇게 회복되시기를 간절하게 축복합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아내의 눈물에, 내 자신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해 아내와 자식들이 이렇게 고생을 했구나.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아내의 눈물. 이 눈물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일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

 

때로는, 우리는 상한 마음과 슬픔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인간 생활의 터닝 포인트가 됩니다. 아랍 속담에 이런 말이 있죠. '항상 햇빛만 나면 사막을 이룬다' 땅에는 가끔 비도 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애통하는 눈물은 축복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의 복이 있습니다. 위로는 [parάkλησις](파라클레시스)인데 이는 [하나님(성령)께서 곁에서 돕는다]라는 의미이다. 슬플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권고하고 격려한다는 의미이죠.

 

고후 1장 3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 1장 4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애통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애통은 죄를 버릴 뿐만 아니라 죄의 지배와 유혹을 떨쳐버리고 위로자 보혜사 성령의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십자가 밑에 자신이 깨어지고 주님의 손길로 새롭게 지으심을 받기를 간청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자신의 영적 파탄을 깨닫고 자신의 심령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악의 세력인 죄에 관하여 애통하게 하옵소서. 죄를 완전히 버릴 뿐만 아니라 죄의 지배와 유혹을 떨쳐버리고 부부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가정이 회복되고 직장이 화합이 되고, 교회가 애통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위로자 보혜사 성령의 보호를 받게 하여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아멘.

 

아름다웠던 지난 추억들 사랑했었던 많은 친구들 멀고도 험한 고난의 길을 나이제 말없이 주님을 위하여 떠나야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 위해 당신이 바친 고귀한 희생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지난 유월절 저녁 성찬때 주님과함께 마시던 찻잔 그일이 문득 생각이 나며 어느내 내 뺨에 쭈르르 눈물만이 흐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위해 당신이 바친 고귀한 희생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새벽닭 울때 난 외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 위해 당신이바친 고귀한 희생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