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리차드 포스터
저자는 『기도』와 『돈, 섹스, 권력』으로 크리스천의 영성에 이미 독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미국 퍼시픽 대학교의 영성 신학교수이며, 르노바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르노바는 교회부흥을 위한 여러 사역들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단체이다. 그 밖의 저서로는 『리처드 포스터가 묵상한 신앙고전 52선』 『생수의 강』이 있으며, 『영적 훈련과 성장』 등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은 돈과 섹스와 권력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잘 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돈과 섹스와 권력이 오용되고 남용되어서 사람들을 지배하는 사례들과 돈과 섹스와 권력이 사람에게 지배되어 잘 선용되는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에 수도원 운동가들은 가난과 정절과 복종에의 서약을 통해 돈과 섹스와 권력의 배후에 있는 탐욕과 육욕과 오만이라는 악마들의 정체를 드러내어 그 음모를 폭로하고 그 세력을 무력화 시켰다고 하면, 청교도 운동가들은 근면과 성실과 질서에의 서약을 통해 사업과 결혼과 정치의 영역에서 세속적이라 여겨졌던 것들을 성스러운 영역으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돈에 관하여 창조적이고 대담하게 응답하는 새로운 서약이 필요하다. 우리는 불건전한 금욕주의와 맹목적인 부를 추구하는 현대적 광기를 거절한다. 우리는 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용하고, 돈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길에 순종하도록 한다.
성에 관하여 우리는 솔직하고도 정열적으로 응답하는 서약이 필요하다. 난잡한 성생활을 조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른 성생활을 긍정한다. 우리는 독신생활을 경시하지 않고, 결혼과 가정생활에 정성을 쏟는다.
권력에 관하여 우리는 창조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서약이 필요하다. 권력의 어두운 면을 탐닉하지 않고 좋은 면을 선용하며, 권위와 복종이 균형 잡힌 지도력으로 봉사한다.
▣ 차 례
제1부 돈
돈의 어두운 면 /돈의 밝은 면 /불의한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라 /단순한 삶에의 서약
제2부 섹스
영성과 성 /독신생활과 성 /결혼과 성 /정절에의 서약
제3부 권력
파괴적인 권력 /창조적인 권력 /능력의 사역 /섬김에의 서약
돈, 섹스, 권력
제1부 돈
돈의 어두운 면
성경 전체의 조망에 따르면 돈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의 두 흐름이 있다. 돈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위협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돈의 어두운 면을 본다. 한편 우리는 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오해를 하고 있다. 첫 번째는 부는 축복의 표시이고, 가난은 저주의 표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곡해는 개인적 평안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기복주의 종교가 만연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두 번째는 돈이라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중립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으로서 단순히 교환의 매개체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돈의 배후에는 인격적 속성을 가진 힘(권세)이 있는데 이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하면서 이 재물을 하나님과 경쟁하는 하나의 영적 인격적 존재로 묘사한다.
이 맘몬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적인 힘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자유와 능력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죄의식을 유발하기도 한다. 맘몬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전능성을 가지고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며,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보다 기필코 최고 우위를 차지하려고 한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종류의 악한 일도 서슴지 않고 하게 된다. 이처럼 돈에는 유혹적이고 악마적인 경향성의 어두운 면이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돈의 어두운 면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첫째, 우리는 돈이 많음과 적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을 잘 다루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이미 부유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돈에 대한 두려움과 좌절과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서로의 경험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도와주어야 한다. 다섯째, 돈이 영원히 내 것이라는 생각을 단념해야한다. 여섯째, 기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누어 주어야한다. 우리가 돈에 대하여 이렇게 대처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억누르는 악마적인 세력에 대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의 밝은 면
한편으로 돈은 하나님의 은총으로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향상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구약에서 아담과 하와, 아브라함, 이삭, 욥, 솔로몬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물질적인 축복들은 그들의 영적인 삶과 긴밀히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신약에서도 돈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증진시키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그들의 삶을 적절하게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물질의 공급은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만물은 인간의 삶을 축복하고 향상시키도록 주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것들이 우리 행위의 결과가 아니며, 우리가 애써 얻지 않았고,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구원을 값없이 은혜로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물은 다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소유자이고 우리는 그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여 내 돈을 얼마나 바치리이까?” 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당신의 돈을 얼마나 나를 위하여 보관하리이까?” 하고 묻게 될 것이다.
주는 것은 우리의 헌신적 삶에 진정성과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자극제가 된다. 우리가 돈을 내어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이며,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해방시키는 것이고, 우리의 거짓된 안전을 풀어주는 것이다. 베푸는 것은 우리를 돈의 횡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며, 하나님이 우리로 무엇을 베풀기를 인도하실지 기대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발견해 가는 모험이 되게 해준다.
올바른 가르침과 훈련을 받은 신자들은 부패하지 않은 채 재산을 소유하며 그 소유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 돈은 우리가 훈련받은 영적 생활의 한계 안에서 적절히 사용하도록 주어졌고, 인류의 이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한편 예수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한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물질적인 삶을 영적인 삶과 연관시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여 살도록 가르친다. 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신뢰의 정신을 세우게 하고 믿음을 쌓아가게 한다. 이러한 신뢰와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을 기르도록 배움으로써 돈의 밝은 면을 찬양하게 된다.
불의한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라
돈은 때로는 약자를 못살게 굴고 억누르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돈은 다른 사람의 충성심과 위신과 명예를 사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부패시키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이렇게 돈이 잘못 사용되면 그 어느 것과도 필적할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돈을 정복하여 비경제적인 목적,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 힘은 실로 무한정하다.
예수는 보물을 땅에 보다는 하늘에 쌓아두라고 한다. 그것은 돈을 보다 위대한 일에,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악한 경향이 있는 돈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회로 전향시켜야 한다. 가난한 이웃을 돕거나 기근에 시달리는 지역을 돕거나 복음전파를 위해서나 똑똑한 학생을 위해 투자하라. 이렇게 돈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최선의 투자이다.
돈은 우리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제적인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돈이 결정하면 돈이 우리의 주인이고, 하나님이 결정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다. “돈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과 “기도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돈에 대한 성경적인 통찰력을 바탕으로, 심리적, 사회적, 기술적 측면에서 돈을 잘 관리해야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양식의 변화를 지지해 줄 사랑의 지원 공통체를 규합하여,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을 꽁꽁 묶어버리고, 관대함과 너그러움으로 우리의 돈이 선한 곳에 활용되도록 직접적, 구체적, 예방적 기도를 하여야한다. 우리는 돈을 우리 가치목록의 왕좌에서 끌어내고 돈과 물질에 대항하여 사람의 편에 서야 한다. 우리는 돈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
노동은 생명을 주는 창조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의 선한 본질과 필요성을 인정하며, 노동이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노동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노사관계에서 사용자는 노동자의 불안한 감정과 자신이 통제 받는다는 느낌을 이해하고, 근로자는 사용자의 소외감을 이해하며 기업전체의 유익에 관심을 가짐으로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단순한 삶에의 서약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단순한 삶의 서약으로 부름을 받았다.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은 분열되지 않는 마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하나의 목적을 가진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만족이 가득하며, 탐욕으로부터 자유를 맛보며, 매사에 단정함과 절제 가운데 산다.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필수적인 양식을 감사히 받으며, 돈을 남용하지 않고 선용하는 지혜가 있다. 이들은 돈에 대하여 관대하며 기꺼이 주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돈으로 할 수 있는 최상의 것 중 하나가 주어서 없애는 일이다. 주는 것은 물질이라는 우상을 정복하는 강력한 무기이며, 장사와 경쟁의 세계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주려면 관대하고도 적절히 주어야 하며, 기꺼이 즐겁게 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통제하거나 관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돈은 통제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돈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간과 마음과 몸을 내어주어야 한다. 뜻을 같이 하고 도와줄 사람을 구하여야 한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때를 위해 적절히 나누어주기 위해 유언장을 작성해 두어야 한다.
한편 우리는 자녀들이 단순한 삶을 살도록 그들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아이를 가르칠 때에는 모범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돈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점과 밝은 면이 많음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주는 용돈으로 그들이 십일조와 저축을 하게 하며, 돈을 현명하고 책임 있게 다루도록 적절한 통제와 자유를 주어야한다. 돈이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돈이 유용하고 필수적인 것이나 존경과 경외의 대상도, 경멸의 대상도 아님을 가르쳐야 한다.
제2부 섹스
영성과 성
인류는 Imago Dei(이마고 데이),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 우리 인간의 성, 곧 남성과 여성은 참된 인간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사랑을 나누는 능력인 성적인 특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성이 그들의 온 삶으로 연합되어 완전함이 있었기에 경쟁이나 우월 의식이나 개인주의나 부끄러움이 없이 상호 의존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타락한 이후에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인간성이 격하되고 관계성이 파괴되었다.
예수는 성이 너무나도 선하고 고상하고 거룩한 것이어서 값싸게 취급될 수 없는 것임을 아셨다. 그래서 예수는 음욕을 정죄하신 것이다. 음욕은 관계성을 거부하고, 그릇된 성을 창출한다. 음욕은 상대방을 대상이나 물건과 같이 비인격적 존재로 바꾸어 버리고, 성을 창조시의 가치보다 못하게 값싸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은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사이의 계약관계에 비유한다. 그는 독신생활에 관해 호의적으로 대변할 뿐만 아니라, 결혼을 인정하고 상호간의 성적 이행을 권면한다. 그것은 영적인 삶이 우리의 성을 풍성하게 하며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의 성은 우리의 영성에 현세적인 완전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의 왜곡된 형태로는 첫째, 외설이 있다. 이것은 성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재미없고 진부한 것으로, 속된 것과 싸구려로 만들어 버림으로 현실과 괴리된 환상의 세계를 그려낸다. 둘째는 음욕으로서 이것은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나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끓어오르는 성적 초조감에 애태우며 지내는 상태이다. 음욕은 탈선이며 통제할 수 없는 뒤틀려 버린 성적 충동이다. 셋째는 가학적 변태성욕이나 피학대 음란증이다. 이것은 변질되어 강제추행이나 살인에까지 이르게 하기도 한다. 넷째는 남녀차별이다. 이것은 한편이 마음먹은 대로 지배하고 통제하며 소유하려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시각도 이러한 남녀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은 동성애가 하나님께서 애초에 정해주신 패턴의 왜곡이라는 점을 시종일관 보여준다.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우리는 기혼자가 혼외정사에 관하여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이 있듯이 동성애에 대하여 신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지침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생활에 대한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며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한계를 지나치게 되면 성은 파괴적이 된다.
독신생활과 성
성적인 결합은 육체적, 정서적, 정신적인 결합이다. 성관계는 삶을 연합시키는 행위로서 남녀의 인격적인 만남이고 영혼의 깊은 곳을 어루어 만지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혼외정사가 본질적인 범법행위이듯이 독신자의 성교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게 금지를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신자들은 인격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며, 정서적 성취를 맛보고, 자신들의 성적인 느낌을 스스로 통제함으로 자신을 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우리는 성감을 다스려야지 성감이 우리를 다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격노한 감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연합에 대한 의도 없이 맺어진 육체적 결합은 심령에 큰 상처를 입히는 행위이다. 50년간 선교사로 일했던 78세의 한 할머니는 밤낮으로 두려움에 떨었는데 상담을 해본 결과 16세 때 한 청년과의 사이에서 애정행각이 있었음을 생애 처음 시인하게 되었다. 60년 동안 할머니는 심령에 깊은 상처를 품고 살았던 것이다.
흥분된 감정이 어떤 사람을 취하고자 마음먹을 때, 즉 매혹이 음모로 바뀌는 순간, 성적인 흥분상태에서 영적 간음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음욕은 길들여지지 않는 소유하고자 하는 과도한 성적 열정이며 성적인 공상을 통해 경험하는 일상적인 성 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성적 환상을 음욕과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정죄하는 무력감에 빠지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수음은 그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경험이다. 수음은 수많은 청소년들의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성숙의 과정에서의 불균형을 보상하며 건전한 성적 활로를 열어주는 면도 있다. 하지만 성욕은 또한 통제될 필요가 있다.
수음을 통해 성적 환상에 빠지고 그것에 집착하여 강제로 빠져들게 되면 절망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수음행위에 사로잡히게 되면 될수록 더욱 우상화되는 것이다.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수음행위는 자신감과 자존감에 큰 상처를 주고 우리로 낙담하게 하므로 경계해야한다.
결혼하기 전에는 애정을 표현하려는 열정을 잘 통제해야 한다. 서로의 애정을 표현하는 다양한 행위들은 성교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 개방성을 지녀야 한다. 육체적인 친밀도가 상승하는 만큼 상호신뢰감을 높여 가는 것이 좋다.
결혼과 성
일반적으로 결혼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는 낭만적인 사랑과 성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가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부르심과 소명이라는 문제이다. 결혼을 통하여 이웃과 신앙공동체 모두의 행복을 위하고,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장애가 되는지를 고려할 일이다. 또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그리스도의 제자직에 보다 충실할 수 있는가와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에 이바지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둘이 하나로 기능하는 실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낭만적 사랑은 언젠가 식기 마련이다. 결혼이라는 한 몸의 실재를 체험함으로 우리는 낭만적 사랑을 이겨낼 수 있다. 결혼서약은 타인과의 평생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에는 우리의 최고 수준의 노력이 요구된다.
결혼한 이에게 성은 감미로운 경험이요 축복된 은사이다. 서로의 관계를 향상시키고 만족을 주는 일은 무엇이든지 주 안에서 자유롭다. 그런데 성생활에 싫증을 느끼는 이유는 한 몸을 이루는 인격의 연합이라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도전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성적으로도 친밀해지는 것이다.
결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한 몸의 실재가 되게 하는 데 있으므로 나뉠 수 없다. 하지만 연약한 여성들이 악한 남성들로부터 보호받도록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다. 1세기 당시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기 아내를 내어버리는 남자는 그녀를 간음하게 하는 자라고 예수께서 질타하신 것은 쫓겨난 여인이 살아갈 수 있는 당시의 유일한 방법은 거리에서 몸을 파는 직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의 지속이 이혼보다 현저히 파괴적일 때에는 종지부를 찍어야 하지만 내어버려서는 안 된다. 적절한 재산 분배로 살 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는 예수의 말은 재혼을 반대하는 의미가 아니라 남녀간의 차별을 경계하는 말이다. 1세기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서 여성을 마치 가축을 사고 팔 듯이 하고,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는 남성들의 우월적 성차별의식과 파괴적 공격적 태도를 지적하신 것이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실 때에도 이혼에 관하여 사실만 진술하고 문자적으로는 아무 정죄도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혼에 관하여 그녀는 할 말이 없었고 다만 다섯 번이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재혼에 대하여 간음이라 하신 것은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그러한 모욕적인 태도를 두고 하신 말씀이며, 아내를 버리지 말고, 잘못되어 손상을 입은 결혼관계를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정절에의 서약
남녀노소, 기혼, 미혼을 막론하고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성관계에 있어서 정절의 삶에로 부름을 받았다. 정절은 우리의 소명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정절은 육체적 성관계를 결혼서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통로로만 가져야함을 의미한다. 정절은 서로의 행복과 성장에 대한 책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절은 상호성을 의미한다. 정절은 서로간의 완전한 정직을 의미한다. 정절은 영적인 삶을 위한 내면 세계를 함께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성은 여러 가지 다양한 국면을 지니고 있다. 성교는 그 중 하나인데, 그 의미가 영원하므로 미혼자들은 결혼하기 전까지 어떤 경우에도 참아야 한다. 성욕은 공기, 물, 음식과 같은 절대적 필요(Need)가 아니라 사람의 원하는 바(Want)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통제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부활하게 될 것으로 영원한 가치로 충만하다. 문란한 성생활은 한 몸의 원리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림으로 몸의 거룩한 면을 상하게 한다. 친밀하고 깊은 사랑의 관계가 성교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삶의 교제와 대화, 만지거나 안거나 쓰다듬어주는 접촉과 같은 의사소통만으로도 친밀함은 공고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정절은 계약이며 약속이다. 사랑과 충성과 신실함에 대한 맹세이다. 결혼한 이들에게 있어서 정절은 첫째, 일부일처제를 의미한다. 둘째, 사랑과 충성에 대한 평생의 맹세를 의미한다. 셋째, 그리스도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오는 상호복종을 의미한다. 넷째, 결혼의 약속 밖에 있는 성행위를 명백히 금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결혼서약 속에 내재하는 성적 자유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가 교회를 향한 끈질긴 사랑과 신실함에서 우리는 교회의 정절의 의미를 발견한다. 교회는 우선 기도와 영적인 방향 제시의 사역에 부름 받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할 임무가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의 성공과 그 강건함을 관장하기 위한 책임이 있다.
신체불능자라도 자기 배우자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 중환자도 서로의 고리가 더 단단해 지고 진정한 가치를 깨우치는 친밀한 애정의 표시인 부부생활이 필요하다. 노인들도 복지시설과 같은 곳에 부부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재혼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 정신지체자들도 성교육을 받아야하고 유전적인 경우에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불임시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들도 정상인 이상으로 사랑의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제3부 권력
파괴적인 권력
돈이 우리의 호주머니를 위협하고, 성이 우리의 침실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권력은 우리의 관계를 위협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권력의 죄를 범했다. 그들은 피조물로서 만족하지 않고 신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대화의 단절과 관계의 파괴이다.
이러한 파괴적인 권력이 오만과 짝을 이루게 될 때는 매우 위험하다. 삼손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나 자존심과 오만으로 가득 차 마침내 자신의 멸망을 자초했다. 오만은 우리로 옳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권력은 옳다고 여기는 그러한 환상을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목구멍에 강제로 쑤셔 넣으려고 한다.
권력의 이러한 파괴적인 경향을 사도 바울은 “정사와 권세들”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 권세들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의지와 일맥상통하도록 피조되었으나 반역한 영적 실재들이다. 이 권세들은 인간을 노예로 삼고자하며 멸망시키고자하는 신들이다(갈4:8-10). 이 권세들은 인간과 사회구조 뒤에서 힘을 공급하는 세력이며, 조직과 사회구조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한편 교회는 이러한 영적 세력들을 분별해야하는 책임이 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 분별의 은사를 주셨다. 나치하의 독일에서는 고백교회만이 히틀러의 지옥의 세력을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150년 전 남북전쟁 당시 존 울만은 인종차별주의와 압제라는 영적 세력을 분별하고 그것이 후손에게 엄청난 비극을 가져다 줄 것임을 예견하였다.
권세들은 오늘날 다음과 같은 모습들로 나타난다. 첫째는 재물(맘몬)로서 우리를 사로잡으려 한다. 둘째는 성으로서 사람들을 지배하려 한다, 셋째는 종교적 율법주의로서 하나님과는 정반대로 인도하려고 한다. 넷째는 기술문명으로서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인간성을 대치시킨다. 다섯째는 자기도취로서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중심적 삶을 갖게 한다. 여섯째는 군국주의로서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다. 일곱째는 절대적 회의주의로서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알 수도 없다는 사상을 퍼뜨린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권세들을 어떻게 몰아낼 수 있는가?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권세들을 멸하셨음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영 분별의 은사를 계발하여 권세를 멸하여야 한다. 셋째, 마음속의 귀신들과 정면으로 대적함으로 권세를 멸해야한다. 넷째, 우리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부터 포기함으로 이 권세를 타파한다. 다섯째, 우리는 이 세상의 권력의 무기들을 거부함으로써 권세를 타파한다. 여섯째, 전신갑주를 취함으로 권세를 깨뜨릴 수 있다.
창조적인 권력
창조적인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능력이다. 이것은 속박이 아닌 자유를,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강제가 아닌 변화를 가져다준다. 창조하는 권력은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준다. 창조적인 권력은 연약해 보이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신실함이며,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능력이다.
이러한 영적인 능력의 표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사람이 잘되도록 하며, 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랑이다. 둘째, 가르침을 잘 받으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꿀 수 있는 겸손이다. 셋째,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로 한계를 정할 줄 아는 것이다. 넷째, 난처함과 암흑과 절망이 아닌 초월하는 기쁨이다. 다섯째, 허세와 만용이 아니라 때론 힘이 없어 보이는 연약함이다. 여섯째, 아버지와 친밀한 협력을 배워 참된 능력을 깊이 알 수 있게 하는 복종이다. 일곱째, 귀신들린 자들과 어두운 세력에 포로된 자들이 얻게되는 자유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영적인 능력은 우리 일상 생활에서 생생하게 나타날 때 더욱 가치 있다. 개인에게서의 능력은 방종이 아니라 자제심을 증진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권세는 비굴이 아니라 확신시켜 주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결혼생활에서 권세는 고립감이 아니라 대화의 증진에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에서는 권세는 순응주의가 아니라 믿음을 불어 넣어주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학교에서의 권세는 성장을 촉진하는 데 사용되어야지 학생을 열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일터에서의 권세는 유능한 적성을 촉진하는데 사용되어야지 무능하고 부적합하다는 느낌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능력의 사역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능력의 사역에로의 부름을 받았다. 예수님의 사역은 어두움의 왕국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여러 이적들을 통해 영적인 권위와 능력이 나타남으로 확증되었다. 이러한 능력은 12제자와 70인과 다락방에 기도하던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즉 능력의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공통의 몫인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주어진 능력은 공식적인 권위가 없는 능력이었다. 그것은 마치 나라가 없는 권세, 지위가 없는 권력을 주신 것과 같다. 사도들은 학위나 직함이나 인간적인 권세는 없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온 능력(권세)이 있었으므로 번번이 무능한 세상의 공식적 권위들과 대결하여 거듭 이겼다.
하나님은 이러한 능력의 사역에 동참하려는 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준비를 베풀어주신다. 모세는 애굽에서 사람을 죽였을 때 자신의 인간적인 힘을 사용하여 세상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적 능력이 아니라 파괴적 능력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신뢰하는 법을 알게 되도록 40년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침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의 모세는 거친 권력을 휘두르는 자기만족의 교만한 모습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된다.
우리는 삶의 후미진 구석에서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며, 명성을 얻지 못하는 섬김의 영역에서 순종의 참된 의미를 찾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참으로 드러나지 않는 작고 사소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친밀해 질 수 있다. 이러한 발견과 친밀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데 본질적인 요체이다. 작고 일상적인 것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희귀하고 탁월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능력의 모형을 보는 것과 실제 우리 삶 속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어떻게 고상한 말장난에서 일상적인 실천으로 이행할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사탄과 우리의 육체와 싸워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야한다, 정치의 장인 국가에도 생명을 주는 성령의 능력의 사역이 필요하다.
섬김에의 서약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권력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여 주셨다. 그분의 나라에서는 낮은 것이 높은 것이며, 아래가 위이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이며, 섬기는 것이 권력이다. 섬김이란 현대사회의 힘의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되는 참된 권력에 긍정하는 것이다. 섬김은 영적 세력들을 분별하고, 그들과 대항하여 싸워서 멸하는 것이다. 섬김은 순종하는 것이고, 같은 마음을 품어주는 것이다.
개인을 위한 섬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 끊임없이 우리의 안건, 의견, 술수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가장 친근하고도 고통스런 순종의 모델이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친밀함이 흘러 넘치는 순종이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빠진 섬김은 영적인 스타의 지위로 타락하며 자신을 자랑하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남을 섬김으로써 교묘히 남을 지배하게 되는 사탄의 세력으로 바뀌게 된다
가정에서 섬김은 반드시 상호적이어야 하고 주고받는 것이어야 한다. 부모된 자들은 자녀들에게 목적 있는 지도를 베풀어주고,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갖고 그들을 훈련시킴으로 그들을 섬긴다. 그들이 자기관리능력을 키우도록 해주며, 그들이 언제든지 무슨 말이나 부모에게 나눌 수 있도록 섬긴다, 그리고 부모들의 영적인 삶을 자녀에게 소개해 줌으로서 섬긴다. 한편 아이들은 부모를 순종함으로 섬기며, 존경함으로 섬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파괴적인 요구를 온유하게 거절함으로 부모를 섬긴다. 그리고 부모자식간의 의존관계가 뒤바뀔 때 자식들은 부모를 보살핌으로 섬긴다.
교회에서의 섬김에는 종된 마음을 가진 권위 있는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이들의 관심은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데 있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들은 어떻게 사람들을 섬기는가? 첫째, 기도하는 방법을 익힘으로 섬긴다. 둘째, 사람들의 내면에 이정표를 새겨줌으로 섬긴다. 셋째, 사람들을 위하여 영들을 분별함으로 섬긴다. 넷째, 같은 마음을 품은 지도력으로 사람들을 섬긴다. 다섯째, 관조적 비평가들이 됨으로써 사람들을 섬긴다. 여섯째, 자신 스스로를 어떤 권위아래 삶으로서 사람들을 섬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어떻게 섬기는가? 첫째, 기꺼운 순종으로 섬긴다. 둘째, 건설적 비판을 통해서 섬긴다. 셋째, 기도의 사역을 통하여 그들을 섬긴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섬길 것인가?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평범한 예절로 대해주며, 그들의 명성을 지켜주며, 단순하고 친절한 행위와 솔직함과 진실과 신뢰성과 같은 우리의 온전한 삶으로 섬긴다. 우리는 그들을 인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기회가 올 때에는 기꺼이 자신을 던져 그들을 인도함으로 섬긴다.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의미 있는 일거리를 제공하고, 노동자는 사용자들에게 정직한 노동을 제공함으로 그들을 섬긴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오용, 악용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함으로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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